본 정보는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해당 항목을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
넝 사멧 : 캄보디아 내전기의 주요 난민캠프
Nong Samet Refugee Camp
'넝 사멧 난민캠프'(Nong Samet Refugee Camp)는 '007'이나 '리티센'(Rithisen 혹은 Rithysen)이란 명칭으로도 불린 캄보디아 내전기의 난민촌이다. 이 캠프는 태국-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태국 영내에 있었고, 손 산(Son Sann)이 이끈 반공 공화파 반군인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 혹은 KPNLAF)의 배후기지로 사용되다가, 1984년 말에 베트남 군대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1. 넝사멧 난민촌의 설치
1978년 12월,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즈 (Khmer Rouge) 정권을 축출하자, 난민들이 태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주1) 이후 1979년 5월경, 태국의 마을인 반 넝사멧(Ban Nong Samet) 근처에 캄보디아 난민들의 정착지가 생겨났다. 그리고 동년 10월 11일에 이들에 대한 최초의 식량 지원 물자가 당도했다.(주2)
'넝사멧 난민캠프'는 원래 '쫌롬 트머이'(Chumrum Thmei: 신 캠프)라고 불렸다. 그것은 인근에 있던 막문(Mak Mun) 난민캠프와 구분을 하기 위한 것으로서, '막문 캠프'는 '쫌롬 짜'(Chumrum Chas: 구 캠프)로 불렸다.
이후 '넝사멧 난민캠프'가 "수 많은 음모들"(주3)에 관여되면서, 그 명칭이 다시금 '007'로 불리게 되었다. 1980년 8월에는 '리티센'이란 명칭으로 바뀌었다. 리티센은 크메르 전통 설화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리티센은 식인 여성 도깨비의 음모로 인해 형제자매들이 잡혀먹힌 후 생존하여, 도깨비의 딸을 속이는 인물이다.(주4)
2. 캄보디아 군벌의 지배
'넝사멧 난민캠프'는 원래 태국 국경 바로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막문(Mak Mun)에서는 북동쪽으로 약 1 km 떨어져 있었고, 넝찬(Nong Chan)에서도 북동쪽으로 2 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 3곳의 난민캠프들은 거의 설치와 동시에 자율권을 갖고 있던 군벌들(warlords)의 지배를 받았다. 군벌들은 훈련도 별로 받지 못한 채 영세한 무기로 무장한 게릴라 수백 명 씩을 거느린 상태에서, 상업적 활동을 통제하고 민간인들에게 공급되는 식량의 분배를 관리했다.(주2)
'넝사멧 난민캠프'의 첫번째 지도자는 롱 리티아(Long Rithia)였다. 그는 크메르루주에 의해 몰락한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1970~1975)의 군대인 '크메르 국군'(FANK) 제7사단 소속 보병 대위 출신으로,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병력 수백 명을 데리고 있었다. 롱 리티아는 1979년 10월 5일에 '앙코르 민족해방운동'(Angkor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일명-크메르 앙코르[크마에 엉꼬, Khmer Angkor])을 결성했다.(주5) |
Nong Samet Chumrum Thmei Rithysen or Rithisen |
— 난민캠프 — |
|
별칭 : 007 |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8214C4F547E5E15)
(지도) 넝사멧 난민캠프의 위치. |
|
설치 국가 |
태국 |
설치 시기 |
1979년 5월 |
태국 정부의 명령에 다른 첫번재 이전 |
1980년 5월 |
UNBRO와 태국 정부의 합의에 다른 이전 |
1983년 1월
1984년 12월 |
행정체계 |
• 유형 |
게릴라조직
- Khmer Angkor
- KPNLF |
• 군 지휘관 |
Long Rithia (1979년 5월~12월) |
• 군 지휘관 |
In-Sakhan (1979년 12월~1980년 7월) |
• 군 지휘관 |
Om Luot (1980년 7월~1982년 12월) |
• 민간인 지도자 |
Thou Thon (1980~1993) |
면적 |
• 총 면적 |
2.1 km2 |
인구 (1984년 1월) |
• 총 인구 |
45,000 ~ 70,000명 |
• 인구밀도 |
27,000명/km2 | |
1979년 12월, 또 다른 전직 FANK 장교 출신인 인 사칸(In-Sakhan)이 넝사멧의 지도자라고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크메르루주 정권이 들어선 1975년부터 국경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인 사칸은 난민촌의 민간인 인구 규모가 자신의 권력기반이 될 것임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따라서 그는 국경 시장 활성화를 장려했고, 밀수업자들은 이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여 재화 부족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캄보디아 영내로 들여갔다.(주6) 넝사멧 시장은 순식간에 수천 명의 상인들과 암거래상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재화와 현금 수송을 위해 경호원이나 가이드들이 필요해졌고, 이 지역은 거의 치외법권 지대에 가깝게 되었다. 국경에서는 종종 금이나 보석들이 현금을 대체하기도 했다. 인 사칸 휘하의 병력은 종종 호송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인 사칸은 최초에 '국제 적십자사'(ICRC)에 보고를 했다. 이에 대해 ICRC는 1979년 12월까지 최소 20만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이 난민촌에 18만명 분량의 식량과 물을 제공했다. 하지만 원조 활동가들이 이 군벌이 많은 식량을 빼돌려 사재기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지원은 중단됐다.(주7) 이 무렵의 국경 상황은 너무 혼돈스러워 적절한 상황조사도 불가능했고, 인 사칸의 권력에 도전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38B1474F547F3526)
|
(사진: Cameron Macauley) 1984년 5월에 촬영한 넝사멧 난민촌의 '제2구역'(section 2) 근처 도로의 모습.
☞ "확대사진 바로가기" |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E6E4D4F5480FF24)
|
(사진: Cameron Macauley) 1984년 5월에 촬영한 넝사멧 난민촌의 시장 모습. ☞ "확대사진 바로가기" |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1CC504F5484551F)
|
(사진: Cameron Macauley) 1984년 5월에 촬영한 넝사멧 난민촌의 주택들 모습. |
3. 인접한 난민촌들과의 경쟁관계
'넝사멧 난민캠프'가 이웃한 '넝찬 난민캠프' 및 '막문 난민캠프'와 경쟁관계로 돌입하면서, 종종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인 사칸도 몰락한 크메르루주 반군들과 싸워야만 했다. 크메르루주는 1980년 1월 4일에 프놈 찻(Phnom Chat) 근처에서 '넝사멧 난민캠프'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주8) 넝사멧의 인구는 소개됐지만, 난민들은 곧 돌아왔다.
ICRC와 유니세프(UNICEF)는 1980년 1월 말부터 대략 6만명 정도로 추산되던 넝사멧의 난민들에게 인 사칸을 통하지 않고 식량을 직접 배급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군벌인 인 사멧의 협조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곧 입증됐다.(주9) 더욱이 많은 수의 넝사멧 주민들이 식량을 얻기 위해 이웃한 '넝찬 난민캠프'로 가지 않으면 안 됐다. 왜냐하면 인 사멧의 병력이 그들이 배급받은 식량을 몰수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구호기구들은 1980년 2월 말에 넝사멧에 대한 식량 배급을 모두 중단했다. 2주 후에 UNICEF는 영양실태 조사에 나서, 이 난민촌 사람들 사이에 영양실조와 발육부진, 굶주림이 만연되어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주7) ICRC는 캠프 안의 잠겨진 창고에 직접 배급을 하기로 결정했고, 모든 정파의 지도자들이 쌀을 주민들에게 분배하도록 허용키로 했다. 이에 따라 캠프 내 "오두막에 관한 인구조사"가 거칠게 시도됐다. 하지만, 3월 말에 '막문 난민캠프'에 공격이 가해지면서, 그곳에 있던 난민 수천 명이 '넝사멧 난민캠프'로 피난오면서 이 조사는 효용을 잃게 됐다.
공격 이틀 후, 이번에는 '막문 난민캠프'를 장악하고 있던 군벌인 완 사렌(Van Saren)이 '넝사멧 난민캠프'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 이에 대한 반격과정에서 완 사렌이 3월 22일 사살됐다. 아마도 그의 사살은 태국 정부군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국 정부는 난민촌의 인구를 집중시키기 위해 4월 11일에 '막문 난민캠프'를 폐쇄했다. 하지만 그곳의 인구는 벌써 넝찬과 넝사멧으로 이주해 있었다.(주10)
1980년 5월 넝사멧 난민촌은 고대유적인 '스독 꺽 톰'(Sdok Kok Thom, สด๊กก๊อกธม) 사원 인근으로 이전됐다. 이곳은 배수 시설도 안 되어 있고, 과거의 갈등기에 설치된 지뢰밭도 남아 있는 곳이었다.(주11)
![](https://t1.daumcdn.net/cfile/cafe/1751C9474F54822B0B)
|
(지도제공: Cameron Macauley) 1984년에 도로를 중심으로 배치된 여러 난민촌들의 위치. '미국 난민위원회'(ARC)가 구호요원들에게 배포했던 것이다. |
![](https://t1.daumcdn.net/cfile/cafe/141C054C4F54833A2C)
|
(지도제공: Cameron Macauley) 1984년의 넝사멧 난민촌 내 구역배치. '미국 난민위원회'(ARC)가 구호요원들에게 배포했던 것이다. |
4. KPNLAF로의 통합
1980년 7월 12일, 과거 인 사칸의 측근이었던 웅 짠 돈(Ung Chan Don)이 넝사멧 난민캠프를 공격하여, 인 사칸을 아란냐쁘라텟(Aranyaprathet, 알란)으로 밀어냈다. 결국 인 사칸은 아란냐쁘라텟에서 "고요한 일요일 저녁에 '태국 육군' 제3 보병대대에 출두해 자수 "했다.(주12) 인 사칸은 후에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이 이끌던 반군인 '시하누크 민족군대'(Armee Nationale Sihanoukiste: ANS)에 합류했다.(주13)
![](https://t1.daumcdn.net/cfile/cafe/19076A354F54864810)
(사진) 스독 꺽 톰 사원 유적의 모습.
인 사칸을 대체한 것은 옴 루옷(Om Luot)으로, 그는 따 루옷(Ta Luot)이나 시엠 삼 온(Siem Sam On) 등의 별명으로도 불리던 인물이다.(주14) 그리고 토우 톤(Thou Thon)이 민간인 행정관으로서 그와 함께 했다. 옴 루옷은 1979년 2월에 손 산이 이끌던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디엔 델(Dien Del) 장군과 삭 숫사칸(Sak Sutsakhan) 장군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결국 옴 루옷은 1982년 10월 11일에 살해당하고 만다.(주15) 이 사건 이후 토우 톤이 넝사멧 난민캠프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다. 이후 넝사멧 캠프는 KPNLF의 주요한 병력 채용 장소로 변했다.(주16)
4.1 토우 톤의 지도력
대부분의 국경지역 난민촌 인구가 군벌들의 통제 하에 있는 상황에서, 토우 톤은 강력하면서도 사려깊은 민간인 지도자의 모델이 되었다. 1980년부터 토우 톤을 알게 된 린다 매이슨(Linda Mason)과 로저 브라운(Roger Brown)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넝사멧 난민촌의 크메르인 난민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다. 그는 도로를 닦고, 하수도를 파고, 청소를 하는 등 난민촌을 조직했다. 또한 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던 절도도 상당한 수준에서 감소시켰다. 그는 효가적인 배급 시스템을 구축하여 모든 사람들이 쌀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중략) 그는 일벌레였다. (중략) 급식소를 만들 때, 그는 단순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지시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붕 위로 올라가서 초가지붕을 이을 격자형 대들보에 못을 박기도 했다. 하수도를 팔 때면, 그는 직접 곡괭이를 들었다."(주17) |
토우 톤의 형제인 토우 팁(Thou Thip) 대령은 1978년 파리에서 KPNLF가 창설될 당시, 손 산 전 총리나 디엔 델 장군과 더불어 공동 발기인이기도 했다. 토우 톤은 뉴질랜드에도 형제 1명과 누이 1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형제들의 지원을 거부했다. 토우 팁 대령과 달리, 토우 톤은 손 산과는 미온적인 관계만 유지했다.(주18)
1983년 넝사멧 난민촌이 산적들의 야간 공격을 받았을 때, 이 지역의 경찰활동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도적들은 자신들이 넝사멧 시장을 턴 이야기에 대해 허풍을 떨었다. 결국 시장에서 백주대낮에 뻔뻔스런 폭력행위가 발생한 직후, 스스로 산적 일당이라 자처하던 3명의 사내들은 붙잡혔고, 이들은 참수를 당해 그 목이 난민촌의 한 귀퉁이에 내걸렸다. 이 사건 이후 난민촌에서 도적들은 상당 수준 사라져버렸다. 토우 톤은 질서유지를 위해 자신이 즉결심판도 마다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일은 난민촌 주민들에게 도적들이 어떻게 될 것임을 보이는 동시에, 질서유지에 유선권을 부여하여 실천할 수 있음을 보인 것이다.(주19)
토우 톤은 '넝사멧 난민캠프'가 1985년 '사이트 투 난민캠프'(Site Two Refugee Camp)로 통합된 뒤에도 넝사멧의 행정관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4.2. 1983년의 캠프 이전
1983년 1월, 넝사멧 난민캠프 전체가 또 다시 이전을 했다. 이번에 이전한 곳은 반 넝사멧 마을의 바로 동쪽 인근으로 약간 더 고지대였는데, 이곳은 캄보디아-태국 국경지역 중 캄보디아 영토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이러한 난민촌 이전은 태국이 자국 영토 내에서 반공 게릴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다는 비난으로 인한 것으로서, 이러한 공격이 이미 정치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던 와중이었다.(주20)
5. 넝사멧 난민캠프의 인구
윌리암 쇼크로스(William Shawcross)가 신뢰했던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1979년 넝사멧 난민캠프의 공식적인 인구는 10만명이 넘었다.(주21) 하지만 린다 매이슨과 로저 브라운은 48,000명(주22) 내지 6만명(주23) 사이에서 수시로 변화했을 것으로 보았다.
'미국 난민위원회'(American Refugee Committee: ARC)의 1983년 발행 연례보고서는 "4만5천명에서 7만명 사이"로 추정했는데, 이러한 수치는 식량배급 통계, 예방접종 자료, 출생률과 사망률 계산을 고려한 것이었다.(주24) 하지만 이 추정치는 KPNLF 반군의 병력들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들은 구호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포함한다면 8천명 정도가 불어날 수도 있었다.
5.1. NW82의 베트남 난민들
1981년 12월 18일 현재, 넝사멧에는 700명 가량의 베트남 난민들이 있었다. 이들은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를 거쳐 태국으로 들어온 "육로 난민들"(land refugees)을 위한 특별 캠프에서 이송되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근처에 있던 'NW9 난민캠프'에서 이송되어 온 사람들로서, 이들은 넝사멧 난민촌 내에 'NW82'라 불리는 별도의 구역에 거주했다. 'NW82'는 습지대에 집을 짓기 위해 목재를 이용하여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에 '플랫폼'(the platform)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2년 9월 무렵, 이곳의 베트남 난민 수는 1,800명이 넘었고,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조밀하게 몰려 살았다.
태국 정부는 최초에 외국의 대사관들이 이 난민들을 인터뷰하러 오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ICRC가 지속적인 요청을 하면서 이러한 정책은 변했다. 현재의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IOM)의 전신인 '이주를 위한 정부간 위원회'(Intergovernmental Committee for Migration: ICM)는 NW82에 거주하던 베트남 난민 1,804명에 대한 예비적인 조사를 했고, 15개 국가와 공조하여 이들에 대한 재이주 정착지 제공을 위해 노력했다. 1983년 1월 28일, 이러한 작업의 첫번째 절차가 완료되어 1,713명의 난민들이 재정착 허가를 받았다. 미국은 이들 중 약 60%를 받아들였다.(주25)
1983년 2월 9일 NW82는 폐쇄됐고, 남아 있던 베트남 난민 122명은 재정착 허가를 받지 못한 채 '카오 이댕 대기센터'(Khao-I-Dang Holding Center: KID)로 임시로 보내졌다.
6. 넝사멧 난민캠프 내의 서비스
이 난민촌의 식량배급은 1980년에 구호기구들에 의해 해결됐다. 넝사멧 난민캠프는 그 조직이나 보건의료 체계의 질적인 측면에서 다른 난민촌들의 모델이 되었다. 여전히 장기적인 치료에는 불안정하다는 주장이 있긴 했지만, 이곳에는 결핵 치료 프로그램도 운영됐다.(주26)
'미국 난민위원회'(ARC)는 소아과와 산부인과를 위한 100병상 규모의 입원실과 외과 수술실, 그리고 외래환자들을 위한 진료소 2곳을 운영했다. 이 병원에는 150명의 크메르인 직원들이 고용되어 의료진, 산파, 약사, 간호사 등으로 일했다. 또한 ARC는 전통의학 진료소도 운영했다.(주27)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도 '유엔 국경구호기구'(UNBRO)의 감독 하에 식량과 물 일부를 제공했다. 또한 캠프 내 여러 곳에 간이 수도로 활용될 관정들을 파기도 했다.
여타 서비스들은 수년 동안 불규칙하게 제공됐다. 하지만 1983년 9월부터 '가톨릭 구제회'(Catholic Relief Services: CRS)가 보조적인 식량을 제공했고, 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인 '월드 컨선'(World Concern)이 위생시설과 모자보건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핸디캡 인터네셔날'(Handicap International)은 재활치료 서비스를, UNBRO는 질서유지에 관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CRS는 이동 치과 의료팀을 운용했고, '일본 국제자원봉사자 센터'(Japan International Volunteer Center: JVC)는 일주일 단위로 엑스레이 촬영 서비스를 제공했다.(주28)
6.1. 구호요원들의 개인적 회고
넝사멧 난민캠프에서 활동했던 구호요원 몇 사람은 자신들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이스 브래일(Louis Braile)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넝사멧 난민캠프'와 '카오 이댕 대기센터'(KID)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있었다. 아마도 넝사멧은 황야의 분위기에서 생겨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 유적이 현존하게 된 것과도 같았다. 이 난민들은 KID의 거주민들과는 달리, 고국을 떠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주29) |
ARC의 진료소장이었던 스티븐 마일스(Steven H. Miles)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종말 시점에서 구호활동은 현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좌절감이 팽배해 있었다. 전쟁은 확실했다. 가장 취약하다는 차원에서, 두려움이 곧 편재하는 감정이었다. 1983년 내가 넝사멧에서 경험한 일은 압도적이고도 엄청나게 슬픈 것이었다."(주30) |
'방콕주재 미국대사관' 직원이었던 로버트 포터(Robert C. Porter Jr.)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넝사멧에 있었던 크메르인들의 난민촌은 (중략) 내게는 항시 이국적인 열정과 흥분을 주는 곳이었다. (중략) 키가 큰 나무 숲이 그늘을 만들어주며 환영했다. 앙코르 제국 시대 양식의 불교사원 석조 유적은 더욱 더 크메르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초창기의 군벌 지도부가 더욱 부패하고 파괴적이며 야비해질 수록, 난민촌은 이상하리만치 조직화되고 타이트하게 운영되었다. (중략) 그곳은 흥미로운 인구와 생동감 있는 시장을 갖고 있었다. 1979~1980년 사이의 한 시점에, 그곳은 지구 상에서 가장 인구가 북적이는 캄보디아 도시였다. 그것은 다시 부활하는 중이었지만 아직은 소규모였던 프놈펜 을 능가하는 것이었다."(주31) |
![](https://t1.daumcdn.net/cfile/cafe/19171F494F5485052E)
|
(사진: Cameron Macauley) 1984년 5월 1일에 촬영한 넝사멧 난민촌의 ARC 외래진료소 모습. |
7. 베트남 군대의 1984년 건기 대공세
1984년 4월, 베트남 군대는 'K5 지뢰 벨트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주32) 넝사멧의 북동쪽에 위치했던 '엄삘 캠프'(Ampil Camp: '반상애'[Ban Sangae]로도 불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KPNLF 반군의 사수는 확고했고, 전력 강화를 하면서 베트남 군에게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토록 했다. 베트남 군은 이 캠프 주변 산비탈에 200명 정도의 전사자 시신을 방치하기까지 했다.(주33)
하지만 이 전투로 인해 '엄삘 난민캠프'는 파괴됐고, KPNLF는 사령부를 옮겨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베트남 군은 11월 21일에 '넝찬 난민캠프'도 공격하여, 11월 23일에는 이미 파괴되고 불타버린 이 난민촌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우발적인 전투들이 계속되다, KPNLF는 11월 30일에 '사이트 식스'(Site 6)라고도 불린 '쁘레이 짠'(Prey Chan)으로 퇴각했다.
베트남 군대는 1984년 크리스마스에 넝사멧 난민캠프를 공격하여 파괴했다. 이 난민촌의 '제2 구역'(section 2) 인근에서 'TB 진료소'(TB Clinic)를 경비 중이던 솟 소우(Soth Sour)에 따르면, 새벽 5시25분경에 포격이 시작됐다고 한다.(주34) KPNLF는 이후 일주일 동안 이 난민촌을 사수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포기해야만 했다. 초기에는 100명 정도의 민간인들이 사망했다고 보도됐다. 하지만 나중에 반군 55명과 민간인 63명이 사망했다고 정정되었다.(주35)
케네스 칸보이(Kenneth Conboy)는 베트남 군대가 연초에 있었던 '엄삘 캠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길 갈망했던 것으로 추정했다.(주36) 그에 따라 베트남 군은 제9사단 전체를 동원한 데 이어, 추가로 4천명 이상의 병력과 화포 18문, T-54 전차 및 장갑차 27대를 동원했다는 것이다.(주37)
디엔 델 장군 같이 KPNLF 출신의 유명 군인들은 12월 27일의 넝사멧 전투에서 베트남 군대가 초록색의 가스를 사용했다고 한다.(주38) 이 가스는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강력한 전투용 가스"로서,(주39) 피해자를 어리벙벙하게 만들었고,(주40)(주41) 입에 거품을 물면서 구역질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주42)
8. 사이트 투 난민캠프로의 재이주
베트남의 공격이 시작된지 하루 후, 넝사멧 인구 6만명이 '레드 힐'(Red Hill) 대피소로 피신하고,(주43) 이후 1985년 1월 20~22일 사이에 버스를 타고 '사이트 세븐'(Site 7)이라 불린 '방뿌'(Bang Poo: 게 마을) 난민캠프로 이동했다. 이곳은 '카오 이댕 대기센터'(KID) 인근에 신설된 난민촌이었다.(주44) 이 인구들은 9월 29일에 따프라야(Ta Phraya) 군에 위치한 '사이트 투 난민캠프'로 다시금 이주했다. 넝사멧 출신 난민들은 '사이트 투'에서 별도의 구역을 배정받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서비스 지원방식이나 행정체계도 변하지 않았다.(주45)
* 각 주
(주1) Mason, Linda and Brown, Roger, Rice, Rivalry and Politics: Managing Cambodian Relief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3), pp.12-15. (주2) Mason and Brown, 앞의 책, p.66.
(주3) Stone, S. C. S. and McGowan J. E., Wrapped in the Wind's Shawl: Refugees of Southeast Asia and the Western World (San Rafael, California: Presidio Press, 1980), p.21.
(주4) Carney, Timothy M. Kampuchea, Balance of Survival (Bangkok: Distributed in Asia by DD Books, 1981), p.56.
(주5) Burgess, John, "Largest 'City' of Cambodians Shelters Refugees, Rebels", The Washington Post, 1979-11-4, p.A15.
(주6) Burgess, John, "Cambodian Trade Sparks Boom at Thai Border", The Washington Post, 1979-8-17, p.A19.
(주7) UNICEF Monitoring Report, 1980-3-6.
(주8) Durant, Thomas S., "Attack on 007 (Nong Samet), January 4, 1980", Years of Horror, Days of Hope, B.S. Levy and D.C. Susott, eds., 1986, pp.137-140.
(주9) Mason and Brown, 앞의 책, p.68.
(주10) UNICEF Monitoring Report, 1980-3-6, p.57.
(주11) Blagden, P., "The Sdok Kok Thom Integrated Demining Project", Journal of Mine Action, Issue 8.1, 2004년 7월, p.54. Mason and Brown, 앞의 책, p.71 역시 이 점을 언급한다.
(주12) Stone and McGowan, 앞의 책, p.22.
(주13) Corfield J. J. "A History of the Cambodian Non-Communist Resistance, 1975-1983." Clayton, Vic., Australia: Centre of Southeast Asian Studies, Monash University, 1991, p.12.
(주14) Bekaert, J., "Kampuchea: The Year of the Nationalists?", Southeast Asian Affairs,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Singapore (1983), p.169.
(주15) Bekaert, 앞의 논문, 1983, p.169.
(주16) Radu M, Arnold A. The New Insurgencies: Anticommunist Guerrillas in the Third World (New Brunswick, N.J.: Transaction Publishers, 1990), p.31.
(주17) Mason and Brown, 앞의 책, P.190.
(주18) Crossette B., "After the killing fields: Cambodia's forgotten refugees", New York Times Magazine, 1988, Vol.26, pp.17-68.
(주19) French L. C., Enduring Holocaust, Surviving History: Displaced Cambodians on the Thai-Camobodian Border, 1989-1991, Harvard University, 1994, pp.176-177.
(주20) Robinson C., Terms of refuge: the Indochinese exodus & the international response (London ; New York, New York: Zed Books, Distributed in the USA exclusively by St. Martin's Press, 1998), p. 75.
(주21) Shawcross W. The Quality of Mercy: Cambodia, Holocaust, and Modern Conscience (New York: Simon and Schuster, 1984), p.241.
(주22) Mason and Brown, 앞의 책, p.89.
(주23) Mason and Brown, 앞의 책, p.71.
(주24) Mastro, T., "Nong Samet 1983 Annual Report," American Refugee Committee, Minneapolis, 1984, p.1.
(주25) "Problems In Processing Vietnamese Refugees From The Dong Rek Camp Cambodia", US General Accounting Office, GAOINSIAD-85-132, 1986-8-16, p.22.
(주26) Miles SH, Maat RB, "A Successful Supervised Outpatient Short-course Tuberculosis Treatment Program in an Open Refugee Camp on the Thai-Cambodian Border", Am Rev Respir Dis 1984, Vol.130(5), pp.827-830.
(주27) ARC 1983 Annual Report, pp.4-8.
(주28) Committee for the Coordination of Displaced Persons in Thailand, The CCSDPT handbook: Refugee Services in Thailand (Bangkok: Craftsman Press, 1983), p.49.
(주29) Braile, L. E. (2005), We shared the peeled orange: the letters of "Papa Louis" from the Thai-Cambodian Border Refugee Camps, 1981-1993, Saint Paul, Syren Book Co. 2005, p.25.
(주30) Miles, S.H., Samet Field Evaluation (American Refugee Committee, internal document, Minneapolis MN, 1983), p.2.
(주31) Porter, R. C., "A Perspective on the Start of the Relief Operation", Levy and Susott, 앞의 책, pp.19-20.
(주32) Slocomb M., "The K5 Gamble: National Defence and Nation Building under the 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01, Vol.32(02), pp.195-210.
(주33) Conboy KJ, Bowra K., The NVA and Viet Cong (London: Osprey, 1991), p.29.
(주34) Maat R. B., "The Major Disruption at Samet, Christmas, 1984", Occasional Paper No. 1. Washington, D.C.: Jesuit Refugee Service, 1985.
(주35) "Southeast Asia dry-Season Rite", Time, 1985-1-7.
(주36) Conboy, 앞의 책, p.29.
(주37) "In Cambodia the Resistance Goes On," Letter to the Editor by Sichan Siv, The New York Times, 1985-1-18.
(주38) "Cambodian Rebels Await Major Push by Viet Troops", LA Times, 1985-1-7, p.10.
(주39) "A Rebel Camp In Cambodia Awaits Attack", New York Times, 1985-1-6, p.1.
(주40) "Cambodian Rebels Reported Under Heavy Viet Shelling", LA Times, 1985-1-4, p.13.
(주41) "KPNLF says Vietnamese Using Suffocant Gas", Bangkok World, 1985-1-4, p.1.
(주42) "Ampil's State of Siege", Newsweek, 1985-1-14.
(주43) Brown, Maribeth, "One by One: Extracts from a Diary at the Border", Voices, Stories, Hopes: Cambodia and Thailand: Refugees and Volunteers, p.56. Jesuit Refugee Service, 1993.
(주44) Maat, 앞의 책, p.7.
(주45) French, Lindsey Cole, "Enduring Holocaust, Surviving History: Displaced Cambodians on the Thai-Cambodian Border, 1989-1991", Harvard University, 1994. |
* 더 읽어볼만한 자료들
- Levy, B. S. and D. C. Susott (1987), Years of horror, days of hope: responding to the Cambodian refugee crisis, Millwood, N.Y., Associated Faculty Press. ISBN 978-0804693967
- Braile, L. E. (2005), We Shared the Peeled Orange: The Letters of "Papa Louis" from the Thai-Cambodian Border Refugee Camps, 1981-1993, Saint Paul, Syren Book Co.
- Allegra, D. T., Nieburg, P. and Grabe, M. (eds.), Emergency Refugee Health Care: A Chronicle of the Khmer Refugee Assistance Operation, 1979-1980, Atlanta, Ga.: Centers for Disease Control, 1984.
- Robinson C., Terms of Refuge: the Indochinese Exodus & the International Response, London ; New York, New York: Zed Books; Distributed in the USA by St. Martin's Press, 1998.
- Burgess, John, Stories in Stone : The Sdok Kok Thom Inscription & the Enigma of Khmer History, Riverbooks 2010. |
|
첫댓글 오늘 날의 뽀이뻿 국경관문보다 약간(10 km 이내로 보임) 더 동쪽 지역으로 보이네요..
난민촌 내의 정치 역시 만만치 않군요,..
한편의 역사드라마를 본 듯합니다.
그리고 태국 영내에 있었던 난민촌을 베트남
군대가 공격할 때 태국과 베트남 간 외교 갈등이
있었겠네요.
아...
외교갈등 정도가 아니죠,..
저 당시는 냉전체제이기 때문에,
태국 역시 상당한 군사력을 국경으로 배치해서
대처를 했죠..
더구나 당시에 베트남이 라오스로도 진격했기 때문에..
태국은 캄보디아-라오스 국경 전체에 상당한 군사력을 출동시켜 작전을 전개했죠..
각종 특수부대나 정보부대들은 물론이고
최정예 기갑부대들도 다 국경으로 갔던 시대죠..
다만 직접 전투는 가능한 한
캄보디아인 반군들(KPNLF, 시하누크 군대, 크메르루주 몰락 반군)에게 맡겨놓고
직접적인 충돌만 피하는 정도였죠
상당한 위기감에 휩싸였던 시절입니다
마하 와치라롱꼰 왕세자도
저 시대에 전투기 몰고 전설 쓴거 아닙니까 ^ ^
가뜩이나 1975년에 크메르루주의 승리로 공산화가 됐고..
1979년에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진격하면서..
25만명(캄보디아만) 이상의 병력이 라오스, 캄보디아로 들어가니..
태국은 이러다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던 시절이죠..
라오스에서의 비밀전쟁 같은 데서
태국은 공작원들을 파견해서 활약했는데..
그 중 유명한 사람이 바로 2010년 레드셔츠 시위 때
저격당해 사망한 세댕 장군이었죠..
하여간 이번 난민촌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빼먹었던 캄보디아 내지는 인도차이나 역사의 구멍들을 메우는 작업을 해보도록 합니다..
의외로 얻는 게 많네요.. ^ ^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고 있던 시점에서 태국 영토를 공격
받았는 데도 이 글에서 태국 군대의 움직임이
전혀 언급이 안돼서 거론해 밨습니다.
당시에 태국과 베트남은 사실 상 전쟁 상태에 있었습니다.
베트남 군이 태국 영토로 진입하는 일도 있어서..
그 경우에 소소한 전투도 있었던듯 합니다.
하지만, 외교적으로는
양국 모두 끝까지 공식적으로 상호 선전포고를 안 하려고 애를 썼고..
결국 선전포고는 없었죠..
양국 모두 외교적으로는 엄청나게들 자제한 거라고 봐야죠..
<왕립 태국군의 개요와 역사>
이 게시물 검색하셔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어지되었든 현존하는 지구 상의 군대들 중에
태국 군 만큼 실전 경험이 풍부한 군대도 없을듯 합니다..
20세기 내내...
그리고 태국 남부 문제나 캄보디아 영토 분쟁 등
지금까지 거의 쉬지않고
어디선가 실전을 벌이고 있는 군대죠..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면, 태국 군은 무시무시한 군대인 셈이죠..
어쩌면 전투의 연속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미군보다 더 한 군대인듯도 해요..
그래서 국내 정치적으로는 이 막강한 군부가 문제이기도 합니다만...
어찌되었든 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워낙에 동남아시아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뚤려 있어서 말이죠..
동서남북 중에 어디 한곳은
언제나 안보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구조가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그래서 실은 군부의 주장대로
현재의 병력 25만~30만명 보다도..
한 10만명 정도는 증강해야 되는 게 맞을듯은 한데..
그랬다가는 태국 정치는 아마 더 난장판 될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