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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베트남의 역사를 연대기 순으로 그리고 주요 역사적 사건 순으로 정리한 베트남 역사서이다.
베트남과 우리나라는 전통시대에 중국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던 까닭에 역사, 사회, 문화 등에서 유사한 점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습속 등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 영향을 깊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충효사상, 친경의식, 사농공상, 과거제도, 관혼상제, 풍수지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24절기와 24명절, 십간십이지, 가부장제, 칠거지약, 삼종지덕, 남존여비, 고부갈등 등은 양국의 문화가 비슷함을 나타내는 절정의 요인들이다.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개방정책을 표방한 베트남은 지금까지 꾸준하게 그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과거 베트남전쟁의 한국군 참전으로 비롯된 베트남인들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19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다양화ㆍ다방화의 외교정책기조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이면에는 “과거를 접고 미래를 지향한다”라는 베트남인들의 생활철학이 적잖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한-베트남 관계가 날로 증대되는 이때에 아무쪼록 이 책이 베트남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생뿐 아니라 베트남 관련 기업과 정부 부처 실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머리말
베트남 역사는 흐름이나 내용에서 우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양국이 중국에 접해있으면서 공히 중국과 오랫동안 깊은 교류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국은 역사 외에도 문화, 사회면에서도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양국의 수장을 포함하여 누구든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될 경우 젓가락 문화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서로가 닮은 점이 많다”라는 말로써 대화의 물꼬를 튼다. 물론 여기에는 잘해보자는 수사적 의미도 없잖아 있겠지만, 실제로 깊이 들어가면 양국은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
그중에서도 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습속 등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국의 유교와 도교 영향을 깊이 받았다. 대표적으로 충효사상, 친경의식, 사농공상, 과거제도, 관혼상제, 풍수지리 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24절기와 24명절, 십간십이지, 가부장제, 칠거지약, 삼종지덕, 남존여비, 고부갈등 등은 양국의 문화가 비슷함을 나타내는 절정의 요인들이다.
물론 이것들이 시간과 환경 속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었다. 즉, 혼인에서 우리의 육례에 비하여 베트남은 오례 혹은 삼례로, 십간십이지 중 우리의 토끼띠 ㆍ황소띠ㆍ양띠 대신에 베트남은 고양이띠 ㆍ물소띠 ㆍ염소띠로, 중추절이 수확에 대한 하늘과 조상에 감사하는 명절 대신에 어린이 명절 등의 형태다. 물론 베트남의 중추절도 하늘과 조상에 감사하는 의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통시대의 것들을 흔히 봉건시대의 산물로 폄하하면서도 강제함이 없이 그냥 젖어 살던 시절에 베트남인들은 사회주의혁명을 통하여 이에 대한 일대 변화를 주었다. 이를 간과하고 혹자는 전통시대부터 베트남은 우리의 문화와 심지어는 중국의 문화와 많은 차이가 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베트남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용어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베트남은 중국의 용어만 수용했다는 꼴이 된다. 이런 식이라면 북한의 문화는 우리와 많이 다르다라는 주장도 나올 듯하다. 지방의 특산물에 따라서 김치의 양념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긴긴 겨울에 야채 및 단백질 섭취를 위하여 소금에 절여서 젓갈과 고춧가루 등을 섞어 만든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지 않은가. 바로 그 때문에 김치문화라고 하는 것이다.
전통시대 양국 사행들의 동시적 중국 방문의 경우 그들 간 만남도 있었다. 당시에는 양국이 공히 한자를 공식문자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는 한자를 이용한 필담이 가능했다. 16세기 조선 사신 이수광과 베트남 사신 풍칵 코안이 연경에서 서로 만나 시로 필담을 주고받은 일이 대표적 일례다.
양국의 관계사에서 베트남의 황자(皇子)가 우리 고려에 건너왔다는 내용이나 한국군 이 베트남전쟁(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에 참전했다는 내용들은 백미를 차지한다. 국내의 화산이씨(花山李氏) 족보에 의하면, 베트남 최초의 장기왕조였던 리왕조(Ly,1009-1225)가 쩐왕조(1226-1400)에 망하던 과정에 리왕조의 황자 리롱 뜨엉(李龍祥)이 화를 면하려 뱃길로 망명길에 올랐다가 고려의 강화도에 표류했고, 고려의 고종은 몽골항전에 공을 세운바 있던 그에게 화산이씨 성을 사성(賜姓)했다고 한다. 최근에는 고려 무신정권에 집권한 이의민(본관: 정선)이 베트남 리왕조 후손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막(莫)씨도 14세기 초에 고려를 방문한 베트남인 막딩찌(莫挺之)의 자손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아무튼 리롱 뜨엉 사건은 지금까지 밝혀진 최초의 한국과 베트남 관계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 한국사에서 베트남은 가장 많은 한국인이 경제적ㆍ군사적 목적성을 띠고 진출했던 나라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던 “O베트남전쟁 특수”O도 바로 당시에 나왔던 말이다. 부끄러운 지난 역사이지만, 한국이 참전을 통하여 경제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64년 9월부터 8년 6개월 동안 한국군 연인원 32만명이 참전한 결과 총 50억 달러에 달하는 직ㆍ간접 경제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그 결과, 1964년 103달러(북한 153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도 1973년 396달러(북한 348달러)로 뜀박질 할 수 있었다. 베트남 개방 이후 한국인들 사이에 통용하는 “베트남특수”O도 “O베트남전쟁 특수”O와 무관치 않다. 전후(前後) 모두가 경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1986년 12월 제6차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개방정책을 표방한 베트남은 지금까지 꾸준하게 그 정책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과거 베트남전쟁의 한국군 참전으로 비롯된 베트남인들이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1992년 12월 22일 베트남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다양화ㆍ다방화의 외교정책기조가 크게 작용했겠지만, 이면에는 “과거를 접고 미래를 지향한다”O라는 베트남인들의 생활철학이 적잖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투쟁사라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 특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역사는 우리에게 없는 침략사가 있다. 베트남 고대사의 전체는 중국의 식민지시대이다. 독립한 이후에도 수차례 계속되었던 중국의 침략을 받아 재식민지가 되었던 때도 있었다. 전통시대의 침략사 중 몽골의 3차례 침략을 저지한 사건은 해상을 통한 몽골의 세계정복의 야욕을 무위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남방진출의 출발점에 있었던 베트남을 몽골이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3차 베트남 침략을 위해 몽골의 3차 일본침략이 중지되고 베트남 침략 실패 이후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던 점을 고려할 때 베트남의 몽골저지는 일본의 안전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에는 진출한 서구인들로 인하여 베트남은 전혀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중국이 베트남 역사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제는 제국주의 프랑스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베트남의 전체 근대사는 프랑스의 식민지시대가 되기도 했다. 반제ㆍ반봉의 이론을 도입하여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고 북ㆍ남통일을 이룩하며 그 후 통일된 베트남을 끌어가고 있는 베트남 공산당의 설립도 바로 이 시기이다. 한편, 대불항전 말기에는 도미노이론을 내세워 미국이 참전하면서 베트남 역사의 흐름은 미국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을 비롯한 원근 국가의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보존하고 혹은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는 가운데서 지난한 투쟁의 역사가 되었다.
투쟁의 역사 외에도 베트남은 자신들의 주변 국가들을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하였다. 하띵과 빙 투언 영역에서 짬빠(Champa, 占婆) 문화를 누리고 있었던 찌엠 타잉(Chiem Thanh, 占城) 왕국을 병합시킨 것이나 빙 투언 이남 전역을 캄보디아로부터 획득한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베트남의 영토가 에스(S)자 형태로 길게 늘어지게 된 것은 침략사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관계가 좋지 않은 점이나 베트남이 54개의 다종족ㆍ다문화 특징을 갖게 된 점도 침략사의 산물이다.
외전 외에도 장구한 역사에서 베트남은 크고 작은 내전 또한 많았다. 그중 후레왕조(Le,黎) 하의 북부의 찡(鄭)주와 남부의 응우옌( 阮)주 간 치열한 장기 내전에 이어 떠이 썬(西山)과 응우옌 주 간 내전을 들 수 있다. 이 같이 유사한 지역 혹은 민족의 분단과 대립의 역사는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박끼(北圻)ㆍ쭝끼(中圻) ㆍ남끼(南圻) 형태 외에도 1945년의 8월혁명과 1954년의 제네바협정 이후 각각 북위 16도선과 17도선으로 나뉜 형태로 지속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베트남이 심각하게 안고 있는 북ㆍ남 간 지역 갈등의 출발은 1975년의 통일 이전, 즉 북ㆍ남간 이념이 대립했던 시기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진사(南進史)라고도 말해지는 침략사가 서쪽으로 진행되지 못했던 것은 남북으로 길게 뻗혀 있는 쯔엉 썬(長山) 산맥 때문이었다. 따라서 “O이웃한 국가끼리 사이가 좋은 적 없다”÷는 역사의 경험이 베트남과 라오스 간에 적용되지 않은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베트남 역사를 강의하면서 학생들로부터 듣는 것은 “베트남 역사가 너무 어려워요”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대답은 의외다. 무엇보다 우리말로 독음되어있으면서 전혀 익숙지 않은 수많은 인명이나 지명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용의 흐름이나 주제를 놓치는 까닭이란다. 게다가 크고 작은 사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긴 수천 년의 역사를 갖는 나라인지라 어찌 간단할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나무를 이루는 잔가지들 때문에 나무뿐만 아니라 숲을 보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하긴 국내의 베트남 관련 자료들의 인명이나 지명의 우리말 표기가 제각각이다. 로마자 표기인 베트남어의 모음 중에는 변형된 것이 많다. 따라서 이를 무시한 한국어 표기는 참으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몇 년 전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특수어에 대한 외래어표기법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 완전한 것도 아니며 더구나 제대로 통용되고 있지도 않은 까닭에 베트남의 인명이나 지명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본서에서는 처음 나오는 인명이나 지명을 우리말로 표기하고 괄호안의 현지어로 표기하는 한편, 자주 언급되는 것들은 한자까지 표기하였다. 이것들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최대한 외래어 표기법과 베트남 북부발음에 맞추었다. 그리고 베트남어가 우리말처럼 단음절어임을 감안하여 단음절과 단음절은 붙여 표기하고 이 ㆍ삼중모음으로 단음절 표기가 어려운 것은 띄어 표기했다.
이 책은 2000년에 출간했던 「베트남의 역사」를 지난 10년 간 국내의 대학에서 베트남 역사 강의와 연구를 토대로 대폭 수정 및 보완한 형태로 새로 출간되었다. 본서를 집필함에 있어서 필자 개인의 견해 외에도 국내외의 선학제현들의 탁월하고 다양한 연구 업적을 섭렵 ㆍ종합하여 반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이외에도 다양한 참고문헌을 주 없이 인용하였는바, 이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이 개설서를 냄에 있어서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하노이 사범대학교 팜 꾸옥 쓰 교수, 하노이 국가대학교 인문사회대 응우옌 찌 호아ㆍ응우옌 반푹 ㆍ응우옌 반 히엡 교수, 호찌밍시 사범대 브이 마잉 훙 교수 등이 화보 수집에 많은 시간을 내주셨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학생들은 원고 수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이 책의 출판을 기꺼이 허락해 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에도 고마움을 표한다. 기존의 내용들을 수정ㆍ보완하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시켰으나 그래도 미흡한 부분은 독자들의 비평과 충고를 수렴하여 차후에 보완할 예정이다.
2010년 2월
송 정 남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저자 송정남 (宋正男)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하노이국가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사학과에서 역사학 박사학위(1996)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 '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토지제도' 등이, 공저로는 '베트남', '동남아의 종교와 국가' 등이, 논문으로는 '19세기 초 베트남 남부의 토지제도', '프랑스 식민지하의 남베트남 토지제도', '베트남 딩에 관한 연구', '베트남 토지개혁에 관한 연구' 등이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목차
서언 __ I
제1장 국토와 민족 __ 1
I. 국토 __ 1
II. 민족 __ 4
1. 민족 구성 __ 4
2. 민족 기원 __ 7
3. 민족 특징 __ 10
제2장 베트남 역사의 기원 __ 15
I. 반랑 __ 15
1. 국가 설립 기원 __ 15
2. 사회 __ 18
3. 경제 __ 19
II. 어우 락 __ 22
1. 국가 설립 기원 __ 22
2. 정치와 사회 __ 24
3. 경제와 문화 __ 26
4. 대외관계 __ 27
제3장 북속시대와 베트남인의 저항 __ 30
I. 남월 __ 30
II. 한의 베트남 지배 __ 34
III. 저항의 서막 __ 36
1. 하이 바쯩 반란 __ 36
2. 마원의 제도정비 __ 39
IV. 후한의 분열과 베트남 __ 40
V. 임읍 __ 46
VI. 남조시대의 베트남 __ 49
1. 리본의 반란 __ 51
2. 경제 __ 55
3. 사회 변화 __ 58
4. 문화 __ 59
VII. 수·당·오대십국시대의 베트남__ 61
1. 당의 통치제도 __ 62
2. 농업과 상공업 __ 64
3. 당의 착취와 사회분화 __ 66
4. 귀족문화의 융성 __ 67
5. 주변국의 침략 __ 69
6. 자주독립 __ 72
제4장 베트남의 전제왕권시대 __ 81
I. 응오 왕조 __ 81
1. 국가 정비 __ 81
2. 십이사군의 난 __ 82
II. 딩왕조 __ 85
1. 국가 정비 __ 85
2. 딩왕조의 멸망 __ 89
III. 전레왕조 __ 90
1. 송의 침략 __ 90
2. 점성의 침략 __ 91
3. 왕권의 강화 __ 92
4. 전레왕조의 멸망 __ 95
IV. 리왕조 __ 97
1. 통치구조의 확립 __ 97
2. 내란의 수습 __ 112
3. 대외관계 __ 114
4. 리왕조의 멸망 __ 119
V. 쩐왕조 __ 123
1. 왕조의 공고화 __ 123
2. 전왕조의 산업발전 __ 132
3. 몽골항쟁 __ 134
4. 민족문화의 발전 __ 143
5. 애뢰와 점성의 침략 __ 146
6. 쩐왕조의 쇠퇴와 호뀌리의 등장__ 147
7. 호뀌리의 개혁정책 __ 149
VI. 호왕조 __ 159
1. 왕조의 성립 __ 159
2. 명과의 관계 __ 160
3. 명의 침략과 호왕조의 멸망 __ 161
VII. 명의 지배와 다이 응우의 저항__ 164
1. 쩐왕조 회복운동 __ 164
2. 명의 다이 응우 지배 __ 166
3. 레 러이의 저항과 독립 __ 169
VIII. 후레왕조 __ 175
1. 왕조의 창업과 통치제도의 확립__ 175
2. 산업발전 __ 182
3. 대외관계 __ 186
4. 문화발전 __ 189
5. 후레왕조의 쇠퇴 __ 198
IX. 남북조시대 __ 200
1. 북조의 정책 __ 300
2. 복려운동 __ 203
3. 남북조 대립 __ 205
4. 남조와 명과의 관계 __ 207
5. 막씨의 멸망 __ 208
X. 남북분열 __ 209
1. 분열의 전개 __ 210
2. 남북전쟁 __ 212
3. 찡주의 역사(役事) __ 213
4. 응우옌 주의 역사 __ 224
5. 서구의 다이 비엣 진출 __ 239
6. 종교 __ 247
7. 문학과 예술 __ 249
8. 찡주의 쇠퇴 __ 253
9. 응우옌 주의 쇠퇴 __ 254
10. 떠이 썬 반란 __ 255
11. 후레왕조의 멸망 __ 261
XI. 떠이 썬 왕조 __ 263
1. 대외정책 __ 263
2. 통치조직 __ 266
3. 경제 __ 268
4. 교육과 문화 __ 269
5. 떠이 썬 왕조의 멸망 __ 271
6. 응우옌 주의 통일 과정 __ 273
XII. 응우옌 왕조 __ 279
1. 통치제도 __ 279
2. 경제정책 __ 289
3. 문화발전 __ 299
4. 반란수습 __ 305
5. 대외정책 __ 311
6. 프랑스의 침략 __ 320
7. 부국강병론 __ 325
8. 프랑스의 베트남 병합 __ 330
제5장 프랑스의 식민지시대 __ 344
I.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정책 __ 344
1. 지배조직의 공고화 __ 344
2. 국방과 사법 __ 351
3. 교육과 문화 __ 353
4. 식민지 개발 __ 356
II. 독립운동 __ 370
1. 사대부 중심의 독립운동 __ 370
2. 민족주의운동 __ 377
3. 급진적 민족주의운동 __ 392
4. 응에 띵 소비에트운동 __ 09
5. 인도차이나민주전선 __ 411
III. 8월혁명 __ 415
1.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 __ 415
2. 까오 다이 교 __ 418
3. 화 하오 교 __ 421
4. 베트남독립동맹 __ 423
5. 베트남선전해방군대 __ 425
6. 일제봉기 __ 29
IV. 제1차 인도지나전쟁 __ 434
1. 연합군의 진주 __ 434
2.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 수립 __ 437
3. 프랑스의 북베트남 진출 __ 442
4. 협상실패 __ 444
5. 전쟁의 발발 __ 447
6. 대리정권의 수립 __ 449
7. 미국의 개입 __ 451
8. 디엔 비엔 푸 __ 454
9. 전시체제 __ 461
10. 제네바협정 __ 472
제6장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__ 480
I. 제2차 인도지나전쟁 __ 480
1. 북베트남 사회주의 건설 __ 481
2. 대미 응오 딩 지엠 항쟁 __ 485
3. 미국의 직접 개입 __ 491
4.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__ 504
II. 통일국가 설립 __ 507
1. 전흔의 회복 __ 508
2. 통일정부 수립 __ 509
III. 사회주의 베트남 건설 __ 509
1. 집단경제(1975-1980) __ 509
2. 코안 경제(1981-1986) __ 511
3. 도이 머이 정책 __ 513
4. 정치구조 __ 517
5. 대외정책 __ 521
부록 I. 베트남 역사 연표 __ 527
II. 베트남 역대 왕조 세보 __ 534
참고문헌 __ 538
찾아보기 __ 552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