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산13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獻陵의 특징 태종(이방원 :1367-1422 : 재위 18년, 상왕 4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1365-1420)의 쌍릉(雙陵) 형태의 헌릉(獻陵)은 창업수성(創業守成)의 업적인 조선 개국(開國)과 왕실의 기반을 공고하게 만든 태종의 치적답게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형식을 따른 헌릉은 원경왕후 승하 후 태종의 명으로 조성되었으며, 건원릉과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같은 경내(境內)에 23대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함께 모셔져 '헌인릉(獻仁陵)'의 명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4대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_ 영릉(英陵) |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 사 적 : 제 195 호
英陵의 특징 세종(이도:1397-1450, 재위32년)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1395-1446)의 영릉은 본래 소헌왕후 승하{세종 28년} 후 태종의 헌릉(獻陵) 영내에 하나의 봉분(封墳)에 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초기 영릉의 석조물(石造物)들은 그대로 매장(埋葬)되었는데, 이 때 신도비(神道碑)도 함께 묻고는 여주의 새 능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금의 자취는 국사(國事)에 실려 있기 때문이라 했고, 이는 5대 문종(文宗) 때부터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영릉의 능원(陵原) 구조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상석(床石)이 두 개 놓여 합장릉(合葬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자각(丁字閣) 왼쪽에는 수라간(水刺間)이 있어 제사 때에 제물(祭物)을 준비하는 곳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울러 바로 인접한 곳에 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5대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_ 현릉(顯陵)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顯陵의 특징 문종(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홍살문(紅--門)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릉은 웅장하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까지 두르고 있지만, 현덕왕후릉은 다소 치우쳐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본래 현덕왕후가 세자빈 때(1441년: 세종23년) 단종(端宗)을 출산하고 승하해서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추숭되어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가 단종 즉위년[1452년]에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집안이 동생이 단종의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세가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다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6대 단종(端宗) _ 장릉(莊陵)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21 사 적 : 제 196 호
莊陵의 특징 단종(이홍위(李弘暐) : 1441-1457, 재위 3년)의 장릉은 비운의 소년 임금 능답게 많은 우여곡절 끝에 조성되었습니다. 영월로의 유배생활에서 서인(庶人)으로까지 강등되어 사약(賜藥)을 받고 생을 마감한 단종은 영월 야산에 암매장되었던 것을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와서야 묘를 찾아 봉분(封墳)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뒤 240년이 지난 숙종(肅宗) 24년(1698년)에 복위(復位)되어 단종(端宗)으로 묘호(廟號)를 붙이고 종묘(宗廟)에 부묘하고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습니다. 추봉된 능의 예를 따라 난간석(欄干石)과 무인석(武人石)은 설치하지 않았고 양식 또한 가장 간단하게 조성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배식단(配食壇)을 설치했습니다.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貞熹王后) _ 광릉(光陵)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247 사 적 : 제 197 호
光陵의 특징 세조(이유 : 1417-1468, 재위 14년)와 왕비(王妃)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 1418-1483)의 광릉(光陵)은 조선조 내내 풀 한 포기의 채취도 금지할 정도로 잘 보호되어 울창한 산림을 자랑합니다. 주위의 수목원을 떠올리면 되겠지요.
정자각(丁字閣)을 중심으로 좌우 언덕에 세조의 능과 정희왕후의 능이 각각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간략한 의례로 백성들의 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세조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지 않았고, 석실(石室)과 석곽(石槨)도 사용하지 않고 회격(灰隔: 관(棺)과 광중(廣中)사이를 석회(石灰)로 다짐)으로 석실, 석곽을 대신했다고 합니다. 정희왕후 승하 후 세조의 능과 다른 언덕에 왕후릉을 조성하면서 신하들의 의견이 능호(陵號)를 달리할 것인가, 정자각(丁字閣)을 새로 세울 것인가 등으로 분분하다가 성종(成宗)이 먼저 건립한 세조릉의 정자각을 두 언덕 사이로 옮겨지어 함께 제사 지내도록 함으로 인해 광릉(光陵)의 단독 능호(陵號)를 유지하게 됩니다. 광릉 근처 능안마을의 봉선사(奉先寺)는 정희왕후 명으로 중건된 세조의 명복을 빌었던 광릉의 원찰(願刹)입니다.
제8대 예종(睿宗)과 계비(繼妃) 안순왕후(安順王后) _ 창릉(昌陵)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30 <서오릉(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7 호
昌陵의 특징 일반인에게 비공개 능인 창릉(昌陵)은 단명 임금 예종(이황(李晄) : 1450-1469, 재위 14개월)과 계비(繼妃)인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 -1498)의 능으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취하고 석물(石物)의 배치는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의 전통적인 예를 따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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睿宗의 비(妃) 장순왕후(章順王后) _공릉(恭陵)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恭陵의 특징 예종(睿宗)의 비(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 : 1445-1461)의 공릉(恭陵)은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봉분(封墳)의 난간석(欄干石)과 병풍석(屛風石), 무인석(武人石) 등이 생략되어 간략하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에 성종(成宗) 1년(1470년)에 공릉(恭陵)으로 명명되고 장순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주변에 장순왕후와 자매간인 성종(成宗)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과 영조(英祖)의 장자(長子)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진종(眞宗))와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이 있어 공순영릉(恭順永陵)으로도 불립니다.
제9대 성종(成宗)과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_선릉(宣陵)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宣陵의 특징 세조의 손자이고 추존(追尊)된 덕종(德宗)의 차남인 成宗(이혈 : 1457-1494, 재위 25년)과 계비(繼妃)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 1462-1530)의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성종의 능에는 검약(儉約)해야 한다는 세조(世祖)의 명과 다르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한 것이 특이합니다. 후에 중종(中宗)의 정릉(靖陵)이 그의 두 번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선릉의 경내로 옮겨져 선정릉(宣靖陵)의 명칭으로 불리는데,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될 때 성종의 선릉이 그 모범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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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 산15 <공순영릉(恭順永陵) 소재> 사 적 : 제 205 호
純陵의 특징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 1456-1474)의 순릉(純陵)은 왕비 책봉 5년만에 슬하에 자식 없이 19살의 나이로 승하[성종 6년]해 언니인 장순왕후(章順王后 - 예종의 비) 공릉(恭陵)과 나란하게 단릉(單陵)의 형식으로 순릉(純陵)이라 명명되어 자리잡게 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은 없고 모든 부속물들은 정갈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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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연산군(燕山君)과 부인신씨(夫人愼氏)- 연산군묘(燕山君墓) |
소재지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5 사 적 : 제 362 호
燕山君墓의 특징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폐왕(廢王)인 연산군(이융; 1476-1506, 재위12년)과 폐비(廢妃) 부인 신씨(愼氏;?-1537)의 연산군묘는 유배지 강화도 교동(喬桐)에서 31세의 나이로 사망한 연산군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512년(중종 7년)에 폐비 부인 신씨의 상언(上言)으로 양주군(楊州郡) 해촌(海村)-{현재의 위치}에 이장(移葬)하여 왕자군(王子君)의 예우로 개장(改葬)했습니다. 그 후 1537년(중종 32년)에 부인 신씨가 사망하자 쌍분(雙墳)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왕자군의 예우로 조성되었기에 곡장(曲墻)과 상석(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만으로 조촐하게 설치했지만, 그 보다는 폐위된 왕이었기에 봉분 앞의 비석 전면의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비명을 보면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제11대 중종(中宗) - 정릉(靖陵) |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135-4 { 宣靖陵 소재 } 사 적 : 제 199 호
靖陵의 특징 중종(이역;1488-1544, 재위39년)의 정릉이 현 위치인 성종(成宗)의 선릉(宣陵)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기 까지는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이 있었습니다. 또한 왕비(王妃)가 3명이나 되었으면서도 같은 곳에 능이 조성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세 번째 왕비였던 명종(明宗)의 생모(生母)인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때문입니다. 처음 중종 승하 후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章敬王后) 능인 희릉(禧陵;서삼릉 소재) 옆에 조성되었으나, 1562년[명종 17년]에 당시 권력을 움직였던 문정왕후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겉으로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따라 옮겼다고 했지만, 오히려 지대가 낮아 자주 침수(沈水)되었기에 결국 중종의 옆에 같이 잠들고 싶었던 문정왕후는 자신의 능을 다른 곳{태릉}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중종의 정릉(靖陵)을 잘못 옮김으로 인해 그 다음 해에 명종(明宗)의 세자인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서거하고, 2년 뒤에는 문정왕후 자신, 또 2년 뒤에는 명종(明宗)이 승하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倭賊)에게 도굴까지 당하게 되는 비운의 능이 됩니다. 능역의 양식은 함께 있는 성종의 선릉(宣陵) 양식을 따라 웅장하게 조성되어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 문양까지 조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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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 온릉(溫陵) |
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산 19 사 적 : 제 210 호
溫陵의 특징 중종의 정비(正妃)인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1487-1557)의 온릉은 왕비 책봉 1주일 만에 폐위되는 불우한 신씨의 일생을 대변하듯 조촐하게 조성되어, 현재 비공개 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경왕후는 중종반정(中宗反政)에 반대했던 아버지{신수근}로 인해 폐위되어 1557년[명종 12년] 71세의 나이로 사저에서 승하한 뒤 본가 선영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년]에 복위(復位)되어 단경(端敬)의 시호와 온릉(溫陵)의 능호를 받고, 뒤에 추복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 양식을 따라 능역이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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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禧陵의 특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1491-1515)의 희릉은 중종의 정릉(靖陵)처럼 천장(遷葬)되어 현재의 서삼릉(西三陵) 능역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능입니다. 원자{인종(仁宗)}를 낳고 1515년 25세의 나이로 승하한 장경왕후는 처음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에 조성되었으나, 1537년(중종 3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역시 중종의 부마(駙馬)였던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암투가 희릉 천장(遷葬)의 사단(事端)이었습니다. 희릉은 봉분의 병풍석(屛風石) 없이 모든 양식을 조선 전기의 왕릉 양식에 따르는 전형적인 능역으로 조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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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宗의 제2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_태릉(泰陵)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 223-19 <泰康陵 소재> 사 적 : 제 201 호
泰陵의 특징 중종(中宗)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 1501-1565)의 태릉(泰陵)은 명종(明宗)의 강릉(康陵)과 함께 태강릉(泰康陵)으로 불리우면서 주변의 태릉 푸른동산, 태릉선수촌 등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재위 1년을 못넘긴 인종(仁宗)을 이어 13대 명종(明宗)이 즉위하면서 명종의 생모(生母)였던 문정왕후가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에 사후(死後)의 능역 조성 역시 웅장하고 화려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유난하게 거대한 석인(石人)의 얼굴과 봉분의 병풍석(屛風石)에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十二支身像) 등은 당대 권력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제12대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 _ 효릉(孝陵)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 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孝陵의 특징 조선조 최단명 왕위에 있었던 仁宗(이호; 1515-1545, 재위 8개월)과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 朴氏; 1514-1577)의 효릉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인종(仁宗)의 능을 먼저 단촐하게 조성했다가, 인성왕후 승하[선조 10년] 후에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재 조성할 때 인종(仁宗)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인성왕후 능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난간석(欄干石)으로 두 능을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비공개 능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13대 명종(明宗)과 인순왕후(仁順王后) _강릉(康陵) |
소재지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산233-19 사 적 : 제 201 호
康陵의 특징 明宗(이환; 1534-1567, 재위 22년)과 비(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강릉은 현재 원형보존을 위해 비공개 능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의 제2계비)의 태릉(泰陵)과 함께 능 위치나 의미에 많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능이라면 태릉 입구에라도 강릉(康陵)에 대한 보다 자세한 안내나 설명이 아쉽습니다. 왕과 왕비의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고, 두 능의 봉분에는 모두 병풍석(屛風石)을 두르고 난간석(欄干石)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좌우측 무인석(武人石)의 외형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입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선조 4년[1571년]에 강릉(康陵)의 정자각(丁字閣)에 화재가 나자 임금과 세자가 의복을 갈아입고 풍악(風樂)을 금하며 반찬 수를 줄이는 등 근신(謹愼)의 예를 다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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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懿仁王后), 계비(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 _목릉(穆陵)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穆陵의 특징 宣祖(이균; 1552-1608, 재위 41년)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 1584-1632)의 목릉은 세 개의 능이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에서 변형된 형태로 조성되었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현재 수목보호를 위해 관람을 제한해서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선조의 능은 봉분(封墳)에 구름 문양[운채(雲彩)]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된 병풍석(屛風石)이 설치되어 있고 난간석(欄干石)과 기타 석물(石物)들이 전통의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나, 전란(戰亂)의 폐해(弊害) 후에 제작되어서 그런지 조형미(造形美)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선조의 목릉은 건원릉 서쪽 산기슭에 정해졌는데, 불길(不吉)하고 습기가 있다는 원주목사(原州牧使)의 상소로 위치를 이동해 현 위치에 의인왕후릉과 함께 자리잡습니다.
두 번째 의인왕후릉은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이 설치되었고 특이한 점은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의 줄기에 꽃무늬[화문(花紋)]가 처음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후 후대(後代)의 능까지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의인왕후릉 역시 처음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유릉(裕陵)이라 묘호를 정해 조성했다가, 선조의 능과 함께 현 위치로 옮겨와 모시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능은 앞의 두 능에 비해 조금 뒤에 조성되어서 그런지 어느 정도 조형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역시 병풍석(屛風石)은 생략되었고 난간석(欄干石)만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의인왕후 약사_略史 1555년[명종 10년]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로 태어난 의인왕후는 1569년에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嘉禮)를 행하였고 소생(所生)이 없이 1600년(선조 33년) 46세의 나이로 승하(昇遐)해 재론 끝에 건원릉(健元陵) 동쪽 목릉(穆陵)의 세 능 가운데 첫 번째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 약사_略史 인조대(仁祖代)까지 생존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호칭이 친근한 인목왕후는 선조의 계비(繼妃)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로 1584년(선조 17년)에 태어났습니다. 1602년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어 1606년 선조의 유일한 적통(嫡統)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으나 광해군(光海君) 즉위 후에 영창대군과 김제남은 피살되고 인목대비 역시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계기로 복위하여 왕대비에 오르게 되고 1632년(인조 10년) 48세의 나이로 승하해 목릉(穆陵)의 세 번째 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인목왕후는 글씨에도 능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인목왕후의 어필(御筆)인 [보문경(普門經)] 일부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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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대 광해군(光海君)과 부인 유씨(柳氏) _ 광해군묘(光海君墓)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승리 산59 사 적 : 제 363 호
光海君墓의 특징 조선조의 두 번째 폐위(廢位) 임금 광해군(이혼 ; 1575-1641, 재위14년)과 문성군부인 유씨(文城郡夫人 柳氏 ; ?-1623)의 광해군묘는 연산군묘(燕山君墓)와 동일하게 군묘(君墓)의 형식으로 간촐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근방에 단종(端宗)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이 있고 일반인은 찾아보기도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두 봉분(封墳)에 각각 비석(碑石)이 있고 망주석(望柱石)과 장명등(長明燈), 그리고 문인석(文人石)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16대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_장릉(長陵)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사 적 : 제 203 호
長陵의 특징 仁祖(이종 ; 1595-1649, 재위 27년)와 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韓氏 ; 1594-1635)의 長陵은 본래 경기도 파주시 운천리에 인열왕후릉을 먼저 조성하고 인조 승하후 곁에 인조의 능을 조성했다가 영조(英祖) 7년(1731년)에 현 위치로 옮겨와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으로 다시 조성되었습니다.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은 합장릉으로 천장(遷葬)할 때 다시 만들어졌고, 병풍석과 장명등에는 모란과 연꽃의 화문(花紋)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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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徽陵의 특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 ; 1624-1688)의 휘릉(徽陵)은 그녀가 4대의 왕대를 살아 숙종대(肅宗代)에 승하함으로 해서 현종(顯宗)의 숭릉(崇陵)에 이어 유사한 형식으로 조성되어 동구릉(東九陵) 소재 태조(太祖)의 건원릉(建元陵)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에는 병풍석(屛風石)이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설치하였고, 상석(床石)의 받침 고석에는 악귀를 쫓는 귀신 얼굴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제17대 효종(孝宗)과 인선왕후(仁宣王后)_영릉(寧陵) |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사 적 : 제 195 호
寧陵의 특징 孝宗(이호 ; 1619-1659, 제위 10년)과 비(妃)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 ; 1618-1674)의 寧陵은 바로 근처에 세종(世宗)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영릉(英陵)을 이웃하고 있어 위치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어도 세종, 효종과의 200여년간의 시공(時空)을 넘나들 수 있는 유익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곳으로 삼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석물(石物)들을 별도로 제작한 쌍릉(雙陵)의 형식을 하고 있는 영릉은 조금 특이한 위치를 하고 있는데, 두 릉의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인선왕후릉}뒤{효종릉}로 비스듬하게 위치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 연유는 본래 영릉(寧陵)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소재의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는데,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風水說)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효종(孝宗)의 릉에만 곡장(曲墻)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石物)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봉분(封墳) 모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_숭릉(崇陵)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崇陵의 특징 顯宗{이연; 1641-1674, 재위 15년}과 비(妃)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 1642-1683)의 숭릉은 위치가 동구릉의 가장 남쪽으로 현재 경종(景宗) 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왕릉제도에 따라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두 봉분이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각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능원 아래 정자각(丁字閣)의 정면 지붕이 일반적인 여타 능의 지붕처럼 지붕의 양 옆면이 막 잘려진 '맞배지붕' 양식이 아니라, 위 절반은 박공지붕{건물의 두 옆쪽에 'ㅅ'꼴로 붙여 놓은 두꺼운 널빤지인 박공널을 대어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올라간 지붕}꼴이고 아래 절반은 네모꼴로 된 '합각지붕{혹은 팔작지붕}'의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점입니다.
제19대 숙종(肅宗)과
계비(繼妃)인현왕후(仁顯王后),인원왕후(仁元王后)_명릉(明陵)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明陵의 특징 肅宗{이순; 1661-1720, 재위46년}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1667-1701),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의 명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정자각(丁字閣)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雙陵)이 있고, 오른쪽에 인원왕후의 단릉(單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성된 순서는 인현왕후가 처음 이 위치에 조성되었고, 다음 숙종이 그 옆에 쌍릉(雙陵)으로 조성된 후 인원왕후릉이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게 됩니다. 숙종 6년{1680년}에 승하(昇遐)한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이 또한 같은 서오릉(西五陵) 내에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숙종은 사후(死後)에도 자신의 세 왕비를 모두 가까이 두게 된 것입니다. 11대 중종(中宗) 역시 세 명의 왕비를 두었지만 모두 다른 위치에 조성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명릉의 특이한 점은 석물(石物)들이 왜소하다는 것입니다. 숙종이 재위(在位) 시절 복위된 단종(端宗)과 그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의 능인 장릉(莊陵)과 사릉(思陵)을 조성하면서 검소하고 간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고 자신 역시 간소하게 조성하면서 석물(石物)들도 거의 실물의 크기와 비슷하게 다소 작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울러 부장(副藏) 명물(明物)도 간촐하게 줄였다고 합니다. 또한 새로운 양식으로는 능 앞의 장명등(長明燈)의 지붕이 팔각(八角)이 아닌 사각(四角)의 모양을 하게 된 것도 명릉부터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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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翼陵의 특징 숙종의 비(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 1661-1680)의 익릉은 숙종이 왕릉을 간소화하라는 명(命)을 내리기 이전에 조성된 능이었기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오릉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석물(石物)들의 크기도 명릉(明陵)에 비해 크고 장명등(長明燈) 역시 팔각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제20대 경종(景宗)과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_의릉(懿陵) |
소재지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5 사 적 : 제 204 호
懿陵의 특징 景宗{이균; 1688-1724, 재위 4년}과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 1705-1730)의 의릉은 쌍릉(雙陵)의 형식이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좌우로 나란한 봉분 조성이 아니라 앞뒤로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여주(驪州)에 있는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경종의 의릉은 영릉보다 더 정확하게 앞뒤로 조성되어 정자각(丁字閣)에 보았을 때 앞의 능은 선의왕후릉이고 뒤의 능은 경종의 능입니다. 경종의 능에만 뒤에 곡장(曲墻)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숙종의 명릉(明陵)에 이어 역시 왜소한 석물(石物)들과 사각(四角)의 장명등이 특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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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惠陵의 특징 경종(景宗) 즉위 후 추존(追尊)된 정비(正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 1686-1718)의 혜릉은 소실되어 초석만 남아있던 정자각(丁字閣)과 홍살문(紅--門)을 근래에 다시 고증(考證)을 통해 복원해서 주변의 다른 능들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에 작은 석물(石物)들 등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특이하게 능의 방향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봉분은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으며, 난간석에는 12지수(十二支獸)가 새겨져 있습니다. | | | |
제21대 영조(英祖)와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_원릉(元陵)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元陵의 특징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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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西五陵 소재} 사 적 : 제 198 호
弘陵의 특징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 1692-1757)의 홍릉은 특이하게 쌍릉(雙陵)으로 조성하려다가 단릉(單陵)으로 남게 되어 곡장(曲墻) 안쪽의 반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조가 홍릉을 정하면서 후(後)에 함께 묻히고자 공간을 미리 조성했는데, 영조 승하 후에 대신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정조(正祖)는 현재의 동구릉 소재 원릉(元陵)으로 영조의 능을 정하고 홍릉의 빈 공간은 그대로 남겨둔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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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대 정조(正祖)와 비(妃) 효의왕후(孝懿王后)_건릉(健陵) |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1-1 {隆健陵 소재} 사 적 : 제 206 호
健陵의 특징 正祖(이성 ; 1752 - 1800, 재위 24년, 본래 시호(諡號)가 정종(正宗)이었으나 고종대[광무3년, 1899년]에 정조(正祖)로 추존됨)와 비(妃)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金氏 ; 1753 - 1821)의 건릉은 본래 정조(正祖) 승하 후 친부(親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릉원(顯陵園; 후에 장조(莊祖) 융릉(隆陵)으로 개칭) 동쪽에 안장(安葬)되고자 했던 유언에 따랐으나 풍수학(風水學)으로 나쁘다고 해서 천장(遷葬)의 논의가 있던 차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순조 21년]하자 현재의 위치인 융릉(隆陵) 서쪽으로 이장(移葬)하고 함께 합장(合葬)을 하게 됩니다. 능제(陵制)는 봉분(封墳)에 병풍석(屛風石)은 없이 난간석(欄干石)만 돌리고 상석(床石) 하나에 8각의 장명등(長明燈)과 망주석(望柱石)을 설치하였으며 문무인석(文武人石)과 수석(獸石: 석호(石虎),석양(石羊),석마(石馬))들은 왕릉(王陵)의 예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특히 정자각(丁字閣) 앞의 참도(參道)가 넓게 박석(薄石)으로 깔려있는 모습은 정조(正祖)의 업적을 느끼게 하는 웅장함이 있습니다.
제23대 순조(純祖)와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_인릉(仁陵) |
소재지 : 서울시 강남구 내곡동 산 13-1 {獻仁陵 소재} 사 적 : 제 194 호
仁陵의 특징 純祖(이공 : 1790 - 1834, 재위 34년)와 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金氏: 1789 - 1857)의 인릉은 본래 순조(純祖) 승하 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仁祖)의 장릉(長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재의 위치인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순원왕후도 함께 합장(合葬)되었습니다.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쌓여 있는 봉분(封墳)에 상석(床石) 하나를 설치해 놓았으며 기타 석물(石物) 역시 정연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같은 강남 지역에 있는 선정릉(宣靖陵 :성종과 중종)이 도심의 빌딩 숲 속에 포위되어 있는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헌인릉(獻仁陵)은 자연(自然)과 어우러져 있어 다행입니다.
제24대 헌종(憲宗)과
비(妃) 효현왕후(孝顯王后), 계비 효정왕후(孝定王后)_경릉(景陵) |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景陵의 특징 憲宗(이환 : 1827 - 1849, 재위 15년)과 정비(正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1828 - 1843),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 1831 - 1904)를 모신 경릉은 조선조의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의 변형인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왕과 정비, 계비의 순으로 배치된 경릉은 각 봉분 앞에 상석(床石)만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여타(餘他)의 석물(石物)들은 단릉(單陵)의 상설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동구릉(東九陵) 소재 9개의 능으로 논할 때 조성 시기로는 추존(追尊)된 익종(翼宗:[문조])의 유릉(綏陵)이 마지막이지만 세가(世家) 계통(繼統)으로는 익종의 아들인 헌종의 경릉이 마지막이 됩니다.
제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哲仁王后)_예릉(睿陵)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산37-1 {西三陵 소재} 사 적 : 제 200 호
睿陵의 특징 조선조 제25대 哲宗(이변, 속명 이원범 : 1831 - 1863, 재위 14년)과 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金氏 : 1837 - 1878)의 예릉은 서삼릉(西三陵)의 세 번째 능으로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다음 대인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이 황제릉(皇帝凌)의 형식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예릉(睿陵)은 조선조 왕릉(王陵) 형식의 마지막 능(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릉의 상설(常設)제도를 보면 왕과 왕비릉의 봉분(封墳)은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되어 있고, 병풍석(屛風石)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장명등(長明燈)의 위치가 상석(床石)과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왕릉(王陵)의 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26대 고종(高宗)과 황후(皇后) 명성왕후(明成王后)_홍릉(洪陵)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洪陵의 특징 조선의 제26대 국왕(國王)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초대 황제(皇帝)이기도 했던 고종(이재황(李載晃) : 1852-1919, 재위 44년)과 황후(皇后)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 1851-1895)의 홍릉(洪陵)은 같은 능역(陵域)에 있는 고종의 아들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계후(繼后)를 모신 유릉(裕陵)과 함께 새로운 양식의 능 제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능역 조성은 처음 명성황후가 1895년에 시해(弑害)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 동구릉 내에 숙릉(肅陵)으로 조성했다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서울 청량리로 옮겨 홍릉(洪陵)으로 조성합니다. 그 후 1919년에 고종이 승하(昇遐)하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천장(遷葬)해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홍릉의 능제는 유릉(裕陵)과 함께 이전의 조선 왕릉 제도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皇帝)로 승하했기 때문에 명(明)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떠 황제릉(皇帝陵)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즉, 종래의 능원 앞의 정자각(丁字閣)을 대신해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봉분(封墳) 주위에 있던 석인(石人: 문,무인석)과 석수(石獸)들이 아래로 내려와 침전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크기의 석인(石人)이 좌우로 도열해 있는데, 문인석(文人石)이 금관(金冠)을 쓰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고 대체로 조선왕릉 석인(石人)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아래 양쪽의 석수(石獸)들 역시 종래의 석인(石人) 뒤에 석마(石馬)만 세웠던 것과 달리 좌우의 문무인석과 같은 열로 홍살문(紅--門)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서로 세워놓았습니다. 봉분(封墳)에는 화려한 병풍석(屛風石)을 감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과 같은 연화(蓮花)와 모란무늬를 조각했고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상석(床石) 앞의 장명등(長明燈)은 사각(四角) 형식은 동일하나, 대석(臺石)이 기존 방식과 다른 변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릉(洪陵)의 새로운 능제는 조선(朝鮮)이 망한 이후에 조성되어 종래의 왕릉 제도가 발전된 모습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를 것입니다.
제27대 순종(純宗)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_유릉(裕陵)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洪裕陵 소재 > 사 적 : 제 207 호
裕陵의 특징 조선 제27대 국왕이자 마지막 임금이며 황제인 純宗(이척 : 1874-1926, 재위 4년)과 황후(皇后)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 : 1872-1904)와 계후(繼后)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尹氏 : 1894-1966)를 모두 함께 합장(合葬)한 유릉(裕陵)은 역시 고종의 홍릉과 함께 황제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릉의 조성 시기는 처음 순명황후가 순종 즉위 전인 1904년에 황태자빈으로 승하해 서울 뚝섬 근처에 유릉으로 장사를 지냈는데, 순종이 승하한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합장을 했고 그 뒤 계후인 순정황후가 1966년에 승하하고 유릉에 함께 합장을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습니다. 능의 제도는 홍릉과 마찬가지로 종래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寢殿)을 세웠고 그 앞에 양쪽으로 문무석(文武石)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두 마리의 순으로 석수(石獸)를 세워놓았습니다. 역시 문인석은 금관을 쓰고 있는데, 석물들이 보다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봉분에도 홍릉과 같이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있습니다.
출처:http://www.coreaking.com/4sub/pop1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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