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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파노라마 중에서 -
36:1-25절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음이라
18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 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36장에서도 엘리후의 변론은 계속됩니다.
본장의 중심점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 할 말이란 한마디로 하나님께 “의를 돌려보내리라”(3)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죄에서 돌아오라(10),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크다(16),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24) 합니다.
도표를 보시면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를 중심으로,
①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다”,
② “지식을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다” 하면서,
③ 하나님은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신다”,
④ “죄악에서 돌아오라”,
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케(고난) 함은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시는 것이라”, 즉 더욱 큰 은혜를 주시려는 것이니,
⑥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대적하지 말라”,
⑦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시나니”,
⑧ “그를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 합니다. 이를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6) 귀를 여시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둘째 단원(17-25)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찬양
주제(主題) :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음이라
㉠ 엘리후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하고 말하고 있는데,
형제도 그러하냐고 묻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는” 증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새 가죽 부대가 터질 것 같은” 충만함으로 말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1차적으로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담당하신 십자가도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후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36:3)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예,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는 일이 설교의 1차적인 목적입니다.
㉡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기를,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 12:27-28) 하고,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을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증거하기를,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계 1:6)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증거하기를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하고
선교의 최우선순위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즉 영예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신 증인들의 임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그리고 보다 많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의로우심,
하나님의 주권,
언약하신 바는 반드시 지켜주시는 신실하심을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세움을 받은 사람들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윤리란
기관차가 열차를 끌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끄는 자발적인 순종의 삶입니다.
㉣ 문자만을 본다면
엘리후도 욥을 정죄하고 있는 양 여길 수도 있으나 묻습니다.
“정죄와 책망”이 같은 것입니까?
책망은 하지 말고 듣기 좋은 말만을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길 예비자 요한은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 하고 책망했고,
사도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0, 26-27) 하고 “꺼림이 없이”, 즉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주저함이 없이 전하였다고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
엘리후도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32:21),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36:2) 합니다.
그 “할 말”이 무엇인가?
첫째 단원(1-16) 귀를 여시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36장에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만 합니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1),
①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2)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다”니 얼마나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직무인가?
이처럼 영광스러운 사명이 설교(說敎)자의 직무입니다.
㉠ 엘리후는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3상)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는 자”는 우선적으로 “지식”(知識)을 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로 하여금 “알고, 믿고, 행하게” 하는 지정의(知情意)적인 신앙인격을 구비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호 4:6) 합니다.
우리는
선지자란 눈만 감으면 하나님이 다 보여주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다”(벧전 1:10)고 말씀합니다.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 왜 지식을 취해야만 하는가?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義)를 돌려보내기”(3)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설교의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의를 돌려보내기” 위해서라는데 확고해야만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선하심과 의로우심” 등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왜 지식(知識)을 취해야하는가?
아는 만큼 “의를 돌려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9) 아는 만큼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② 그러므로 엘리후는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4) 하고 말합니다.
㉠ “지식이 구비(具備)한 자”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데 교만하기 짝이 없는 말로 여길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 하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아,!“지식이 구비한” 목회자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 “지식”이라는 말을 3절과 4절에서 거듭 말하면서
엘리후는 “먼데서 지식을 취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에 대한 답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7) 하신 말씀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속자가 나타나실 일(19:25)은 가까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선지자 발람의 눈을 뜨게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민 24:17) 하고
먼 훗날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히 11:13)한 사람들입니다.
㉢ 6절에는 “악인”이 있고, 7절에는 “의인”(7)이 있습니다.
“악인을 살려 두지 않으신다” 하시는 것은 핍박당하는 의인을 신원하여 주시기(6)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이란
불신자일 수도 있지만, 믿노라하면서 “그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9) 한 “교만한 자”를 가리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7상)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욥을 계속 보고 계셨다는 것이 아닌가?
㉠ “그를 왕과 함께 영원히 위에 앉히사”(7중) 합니다.
저는 엘리후가 영감에 의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의인을 “왕과 함께 영원히 위(位)에 앉게 하신다”는 말이 세상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바라는 것이 세상 영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세상 영화에는 “영원”(永遠)이라는 말이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그리하여 영원토록 왕 노릇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존귀(尊貴)하게 하신다”(7하) 하십니다.
그런데 미련한 인간은 어떠한가?
“혹시 누설(고통)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히게 되는 것”(8)은 왜 그런가?
9절 안에는 “소행, 허물, 교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교만”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④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아오게 하시나니”(10) 합니다.
㉠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구약시대에
그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신 목적(目的)은
“돌아오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청종(聽從)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이 해를 지낼 것이요, 만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11-12) 합니다.
“지식 없이”가 무슨 뜻이겠는가?
깨닫지 못하여, 궁극적으로는 복음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되리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15) 합니다. 무슨 뜻인가?
㉠ 10절에서도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신다”고 말씀하는데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고난에는
“귀를 여시고”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교만을 깨뜨리시고 겸비케 하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께 속박을 받을지라도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나니”(13), 즉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깨닫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15-16절에는 “곤고함”이란 말이 세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지금 욥은 참으로 “곤고한 자”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곤고한 가운데 두시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를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넓은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16상) 합니다.
16절 안에는
“좁은 곳과, 넓은 곳”이 있는데
적극적으로는 “좁은 곳”은 옥에 갇힌 멸망을 가리킵니다.
이점이
“곤고함에서 이끌어 내사” 라는 말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넓은 곳”이란 해방, 자유,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는
세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욥도 “좁은 곳”에 갇혀있는 신앙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넓은 곳으로 옮기려”,
즉 좀 더 큰 그릇, 성숙한 자가 되게 하시려는 연단이라는 뜻입니다.
㉢ 이점이 바울의 경우에도 나타나는데
바울도 욥처럼,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안 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의미를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합니다.
“무릇 네 상에 차린 것은 살진 것이 되었으리라”(16하) 하는데
“살진 것”, 즉 하나님께서 욥에게 차려주시는
살진 축복의 상을 마지막 장(42장)에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 바울은
피조물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고(롬 8:22),
야고보는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를 지르는 것”(약 5:4)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매사에 “귀를 여시고”(15) 성령이 교회(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 단원(17-25)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찬양
둘째 단원의 중심점은
엘리후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한
“할 말”의 결론이라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⑥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네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공의가 너를 잡았나니”(17) 합니다.
㉠ 17절 안에는
악인의 받을 “벌, 심판, 공의”가 있습니다. “가득하다” 합니다.
여기서 욥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 그러므로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代贖)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18) 합니다.
욥기의 중심부분(3장-42:6)은
시(詩)의 형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어서 의미가 함축적입니다.
그래서 의역(意譯)본들을 보면
그 뜻이 정반대로 되어 있는 것도 있어서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럴 경우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근시안(近視眼)적으로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대속함을 얻을 일”이 무엇인가?
㉢ 이는 욥기가 번제로 시작하여 번제로 마치고 있다는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아야만 합니다.
“번제”에 대한 구속사적 의미를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그 의미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19:25) 하고 고백하는 욥을 향해서,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크다” 하고 말하고 있는데 이를
“뇌물을 주고 고난을 면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새 번역)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단 말인가?
㉣ 이어지는 19-21절을 보십시오.
“너”라는 인칭(人稱)이 세 절 안에 6번이나 등장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너의 부르짖음,
너의 세력”이, “너의 곤고한 가운데서,
너로 유익하게 하겠느냐”, 즉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속함을 얻을 일이 크다” 한 “구속”은,
㉮ 부르짖음으로도 못하고,
㉯ 능력(세력)으로도 못하고,
㉰ “너는 밤 곧 인생이 자기 곳에서 제함을 받는 때를 사모하지 말것이니라”(20),
즉 죽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 그러므로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네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21),
즉 환난 자체만을 면하려할 뿐 죄 값인 영원한 형벌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크다”(18) 하고 말한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22) 합니다.
㉠ 22절은 “하나님은” 하고 시작을 합니다.
22절 이하의 호칭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호칭뿐입니다.
즉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구속”함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⑧ 사람이 해야 할 “너는”이라는 말이 단 한번 나오는데,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24) 하는 “찬양”하는 일 뿐입니다.
㉠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찬양인가?
“하나님 하신 일”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란
“첫 창조”를 가리키는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시편 8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 8:1) 하고 첫 창조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 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복음이 밝히 드러난 신약성경에서는,
“오직 우리가 천사보다 잠간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히 2:9) 하고
이 시를 통해서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능으로 큰일을 행하시나니(22상),
너는 하나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24)는 말씀을
첫 창조사역으로 국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첫 창조사역보다 더욱 “큰일”이
자기 아들의 구속으로 이루시는 재창조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일군들(고후 3:6)은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에 밝히 드러난 복음의 빛을 받아서 해석해야만 마땅합니다.
즉 신약의 실체(實體)를 통해서
구약의 그림자를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자주의자들은 구약으로 구약을 해석하려합니다.
이는 본문에 가장 충실한 것 같으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 학자들의 해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 재창조의 사역임이 이어지는 말씀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나니 먼데서도 보느니라”(25) 합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보고, 먼데서도 바라볼 “그 일”이 무엇인가?
엘리후도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36:3)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이 첫 창조인 자연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먼데서도 보느니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첫 창조의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해야 마땅하다면,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하신
재창조의 사역을 생각하면서 찬양한다는 것은 더욱더 합당한 것입니다.
㉣ 이것이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18) 한
“큰 일”이요,
이것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양하기를 잊지 말라”(24) 한
찬양의 제목이요,
이것이 엘리후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한
“할 말”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담대히 증거해야 할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⑨ 묵상해보겠습니다.
㉠ 하나님을 위하여 할 말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 “의를 돌려보내리라”는 의미에 대해서,
㉢ 귀를 여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36:15-16)에 대해서,
㉣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찬양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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