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고 있다 꼭 해보고 싶었던 양양 정족산 산행! 자세히 모르지만 정족이라 함은 '솥의 발(鼎足)'이라는 뜻으로 '솥발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 같다. 세 개의 발이 정해진 위치에 똑같은 모양과 길이로 붙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게 솥의 발이면, 정족산도 세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형국일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합동산행은 비교적 짧은 코스를 잡는 게 보편적이라서 여유 있고 재미난 하루가 기대된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오전 10시에 산행이 시작되었다. 벽실임도교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후천을 따라 임도를 걷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작되는 된비알에 소풍나온 기분이 사그라든다. 정족산까지 4.84km면 그야말로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르는 거리와 맞먹는다. 푹신한 낙엽이 쌓이고 부드러운 흙길이라 다행이지만, 넘어야할 봉우리들이 정족산을 꼭꼭 숨겨둔 채 줄지어 버티고 있다.
약 500m를 쉼없이 오르면서 20분 동안 '고행'의 쓴맛을 보았다. 그 봉우리엔 6.25전쟁 때의 교통호가 반듯하게 보수되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후천과 서림리 일대가 조망되어 쓴맛을 가셔주는 달콤함이 느껴진다. 여기는 '38선 숨길'로 쉼터, 로프, 계단 등이 잘 정비된 등산로가 인상적이다. 속초에 사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상당히 부러운 면이다. 38선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눠 점령한 군사분계선이라고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민족적 비극과 고통을 안겨준 한많은 경계선이다. 힘없는 약소국이라 이념이 다른 강대국들에 의해 두동강이 난 것이다.
교통호를 내려선 안부에서 잠시 쉬었다. 초반부터 진을 뺀 회원님들이 푸념을 늘어놓는다. 관동산악회가 안내하는 코스는 죄다 힘들단다. 정족산 코스는 이러다 말겠지 하는 요행심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만만하게 생각했다 덩치 큰 정족산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능선에서 혀를 내둘렀다. 소 잔등을 걷듯 유유히 얕은 봉을 몇 개 넘으면 정족산에 도착할 줄 알았다. 꼭대기를 보면 봉우리가 '山'자 모양을 하고 있어 다리가 세 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습임을 알 수 있다. 푹 꺼진 안부에서 까마득한 800m를 올려쳐야 정상이다. 결국 안부에서 기권을 선언하는 회원님들이 생겨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집행부가 정상을 찍고 내려와 여기 안부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싸울듯이 땅바닥만 노려보면서 겨우 올라왔더니 전망데크가 설치된 정상이 약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0분을 더 걷는다는 것이 별나게 손해본다는 속상한 기분이 든다. 팔뚝만치 빠진 혀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밑으로 뚫린 터널에서도 홍수 같은 쌍콧물이 질질 흐른다. 기운이 없을 땐 거리를 표시한 판때기가 너무 촘촘하게 설치된 것이 달갑지만은 않다. 드디어 2시간 40분 만에 정상의 전망데크에 도착했다. 흐렸다 맑아진 날씨에 끝내주는 조망이 속상했던 기분을 깨끗하게 정리해준다. 동해바다와 가까운 이런 각도에서 설악의 서북주능이 조망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었다. 조망을 가리는 잡목들을 정리해놓아 한층 깨끗한 주변 경관을 만끽할 수 있어 좋다. 역시 기(氣)를 받는 명산으로 알려질 만하다.
이제 잘 가꾸어진 정족산은 '38선 숨길'의 명소라 해도 손색이 없는 산이다. 여기는 버섯이 많이 나는 지역이라 가을철 산행시 주민들과의 마찰이 잦은 곳이라고 한다. 정상에서 따뜻한 곳을 찾아 팀별로 점심을 먹고 올라왔던 길로 하산을 한다. 아직 식사 중인 팀을 지나가려면 의례히 술을 밥그릇떼기로 소진시켜야 보내준다. 어느 팀이든 취급하는 품목이 잡다한 잡화상들처럼 배낭에서 나온 갖가지 먹거리와 술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머리에 쥐가 나도록 쌓이기 시작하는 스트레스만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멋진 조망에 배가 부르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산지점을 2.5km 남겨둔 거리에서 서림리 출신이신 관동산악회 이병광 회장님의 안내를 받으며 임도쪽 조림지로 내려갔다. 길이 없는 여기를 이병광 회장님이 송이철엔 밥먹듯이 올라다녔고, 첫 번째 임도를 가로지른 계곡에 식재된 훤칠한 낙엽송을 청소년 시절에 본인이 심은 것이라 하신다. 알려지지 않았던 비경을 간직한 벽실계곡과 나란한 두 번째 임도에 닿으면 하산이 완료된 거나 다름이 없다. 벽실임도교를 지나 걸어갈 때 서림리 해담마을과 연결된 다리의 이름이 '김영철 다리'라고 하신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시다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前 이장님을 기리는 거란다. 산과 산 사이에 해를 담은 해담마을은 국내의 대표적인 정보화 농촌체험마을로 알려졌다. 해가 뉘엿뉘엿 조침령으로 일찍 넘어가는 오후 4시 40분, 모든 회원님들이 안전하게 하산을 완료하였다. 하산을 했어도 기운이 뻗친다는 걸 알았을까? 주최측에서 넉넉하게 준비한 주님한테 정족산에서 받아온 기를 모조리 헌납했다. 모쪼록 산방기간인데도 정족산 산행을 할 수 있게 애써주신 주최측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