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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60년대 개발에 밀려나 일그러진 모습을 노래한 '성북동 산비둘기' 로
유명한 서울 성북동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吉祥寺)가 들어섰다.
애잔한 사랑을 간직한 '문학기생' 김영한의 염원은 '比丘 法頂'을 통해
"누군든지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정과 삶과 지혜를 나누는 절"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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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이 절을 떠나던 그날도 눈은 하얗게 소복히 내렸다.
"입은 옷대로 관도 만들지 말고 다비하라."
그는 자신의 유언대로 강원도 오두막의 대나무 평상위에 누어서 가사 2장에 만족했다.
그의 법구를 운구하던 8명의 스님들은 극락전 앞에서 평상을 약간 내렸다 올리며
부처님께 마지막 삼배를 올렸다.그에게는 그게 바로 영결식이었다.
그가 길상사를 떠날 때 마지막 의식치고는 지극히 간소해서 인상이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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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설법전(說法殿) 앞마당에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 전서울대교수가 만든 보살상이다.
최종태 전서울대교수는 법정스님 추모글을 그 영전에 올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관세음보살상 조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원이 이루어진 것은 순전히 법정스님 덕이었다.
만약에 내가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절 마당에 나의 관음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연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스님이 세상을 뜨시고 나서야 내가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작년 이맘때는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고서 우리는 허전했었다.
법정과 김 추기경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형제와 같았다.
특히 우리 사회에 청순한 바람을 일으킨 점에서 그랬다.
어쩌면 1년을 사이하고 두 분을 한꺼번에 잃는 일이 생겼는가.
전에 내가 김 추기경께 물었다.
'언젠가는 내가 관음상을 만들게 될 텐데요.
천주교회가 나를 파문하는 건 아닐까요?'
그랬더니 그 분은 일본의 박해시대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셨다.
천주교도들이 관음상을 놓고 기도를 했다고 하셨다.
관음조각 뒤편 잘 안 보이는 곳에다 십자 표시를 했다고 하셨다.
길상사 창립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 장익 주교가 함께 참석해서 눈길을 끌었었다.
관음상 봉안식이 끝났는데 맨 먼저 전화를 주신이가 장익 주교셨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셨다.
그날 나는 이렇게 인사말을 했다.
'땅에는 국경이 있지만 하늘에 어디 경계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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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만의 공간은 아니였다.
"저는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군든지 부담없이 드나들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고 삶과 지혜를 나누는
그런 절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길상사 개원1주년기념법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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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은 진선미 일체라는 고전적 가치관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는 거인의 삶을 사셨다.
스님은 받쳐줄 직함도 없는 분이셨다. 오직 스님이란 단어가 있었는데
법정은 그 스님이란 말조차도 부담스러워 하셨다. 스스로를 중이라 하였다.
누가 큰스님이라 할라치면 아니라고 펄쩍 뛰셨다.
병상에서 스님은 강원도 눈이 보고 싶다 하셨다.
시간과 공간을 버리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아주 떠나셨다.
그렇게 맑게 사셨으면서도 그래도 스님은 하얀 눈이 그리운 것이었다."
<최종태교수의 법정스님 추모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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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어떤 사회적 지위나
신분 소유물이 아니다.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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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 맑고 향기로운 도량으로 출발한다.
법정스님은 길상사 개원1주년기념법회에서 절은 수행공간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 세상에서 처음부터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행이 있고나서 절이 세워진 것입니다.
불교교단에서 맨 처음 세워진 중림정사라는 절도 그렇습니다. 수행이 있고나서 절이 생겨난 것입니다.
수행이 없는 절은 절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저기 법당과 요사채가 있고 스님들이 살고 신도들이 드나든다고 해서 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법다운 수행으로 주초가 놓인 그자리에서 비로소 절이 세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대원각 시절 요정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은 범종이 들어 종루로 되어 이 세상에
법음(法音)을 널리 널리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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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의 유명한 요정 대원각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 요정의 주인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고
대원각을 시주하여 길상사를 창건하게 한다.
법정스님은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고
108 염주 한벌을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고 한다.
김영한은 1999년 11월 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이튿날 11월 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채 83세의 나이로
그녀의 평생 연인이였던 '백석(白石)'의 곁으로 떠났다.
그 해 12월 14일, 길상사에 흰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스님들이 길상사 경내에 그녀의 유언대로 재를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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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많은 여인입니다.
이곳이 아무나 와서 고뇌를 털고가는 열린 장소가 되길 바랍니다.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입니다.
저의 소원은 저 곳에서 장엄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1천억원 상당의 재산을 시주하는 행사장에서 김영한여사는 말한다.
그는 오래전에 이곳 배밭을 사들여 '청암장'이라는 한정식 집을 운영하다가
대원각이라는 요정으로 확장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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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한은 시인 백석을 사랑했다.
불과 3년동안의 짧은 행복한,꿈같은 둘만의 시절이었지만
60년동안 그 사랑을 죽는 그날까지 간직하고 살아온 여인이다.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백석은 예명으로 백기연이 그의 본명이다.
일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그는 시인 기자 교사로 기생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청혼을 하지만 거절당하고 만주로 떠났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 김영한에게 남긴 유명한 신파조의 말이다.
그는 죽기 얼마전 기자와 인터뷰를 한다.
-천억 재산이 아깝지 않으세요?
"천억 재산도 백 석 시인의 시 한줄보다 못해"
-그 분이 그리웠던 적이 많았나요?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때가 어디 있어?
항상 그립고 보고 싶은 거지"
타계 2년 전 류시화 시인과의 대담에서 백석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꿈에 그 사람 늙은 모습은 안 나오고 60년 전 인생이 나와요.
38선이 터지면 기어서라도 가서 산소를 찾을 거예요."
"50년 만에 담배를 끊었는데 니코틴보다 그리운 사람이 그 사람이야"
"내 탓입니다. 미스터 백은 자식도 낳고 결혼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총각이 기생과 결혼하면 남자 집안이 망하던 세월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첩이나 될래요,라고 했지요.
거기서 실망한 거지요. 사랑을 그렇게 버려도 되는 거야?
말 다한 사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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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아름다운 순애보를 60년동안 간직한 김영한의 사랑이 스며든 하얀 공간이다.
'무소유'를 가르처주고 인연의 업장을 끝까지 착하게 선하게 이어가라고 일러준
比丘 法頂이 하얀재로 여전히 남아 '맑고 향기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길상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