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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현 [屬縣]
고려·조선 초기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지방행정구역
속부(屬府)·속군(屬郡)·속현(屬縣) 등으로 구분될 수 있으나 통상 속현으로 총칭된다. 지방관이 파견된 지역을 주현(主縣)이라 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을 통하여 인근 속현을 간접 통치하는 주현·속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체제가 발생한 원인으로는 신라 말과 고려 초의 지방 호족들간에 성립된 지배·복속 관계를 군현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대읍(大邑)을 주현으로 삼고, 소읍(小邑)을 속현으로 삼았다는 견해도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 전기에 주현 130개, 속현 374개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같은 속현의 존재는 고려 지방제도의 미숙성을 보여준다. 1106년(예종 1) 27개의 속현에 감무(監務)를 파견한 이래 국가에서는 계속해서 속현의 수를 줄이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정안국 [定安國]
10세기 전반 발해(渤海)가 거란에게 망한 뒤, 발해의 일부 유민들이 압록강 중·상류로 피난하여 세운 소국.
10세기 초 만주 북서부에서 발흥한 거란족(契丹族)이 요(遼)나라를 세우고 칭제를 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중국은 물론 주변의 발해(渤海), 고려(高麗)에까지 그 위협이 다가왔다. 거란족은 중국 북부를 장악한 다음 쇠약해져가는 동쪽의 발해를 침공하였다. 결국 발해는 대인선 26년, 926년에 망하고 말았다. 거란은 발해의 고토를 동거란(東契丹)이라 칭하고 지배하였다. 그런데 동거란이 요동지방으로 이동하였다(928).
그러자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주변으로 모여 세력을 형성하였다. 압록강 주변은 산악지대로 적을 피하기가 쉽고, 압록강을 이용하여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잇점이 있었다. 발해 왕족이 대(大)씨가 중심이 되어 단결하였다. 929년부터 936년까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여, 이 시기를 '후발해'라 칭한다. 그후 대(大)씨에서 열(烈)씨, 오(烏)씨가 정권을 잡는 정치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일부 호족세력이 중국 후주(後周)로 귀화하거나 발해 왕족 출신인 대광현(大光顯) 등 상류층이 고려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후발해에서 내분이 생겼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처] 정안국 [定安國 ] | 네이버 백과사전
의창 [義倉]
고려와 조선시대에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
평상시에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저장한 곡식으로 빈민을 구제하였던 구호기관이다. 이러한 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는데, 고구려에서는 194년(고국천왕 16)부터 매년 3∼7월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의창은 중국 수(隋)나라에서 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를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였다. 986년(성종 5)에는 흑창의 진대곡을 1만 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의창이었으며, 의창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 설치되었다.
[출처] 의창 [義倉 ] | 네이버 백과사전
팔관회 [八關會]
삼국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시대 국가행사로 치러진 종교행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는 551년(진흥왕 12)에 처음 행해진 이래 4 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특히 이 때 행해진 팔관회는 모두 호국적인 성격이 짙었다. 이런 팔관회가 국가적 정기 행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고려조에 들어서였다.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에서 '천령(天靈) 및 오악(五惡)·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팔관회는 불가에서 말하는 살생·도둑질·간음·헛된 말·음주를 금하는 오대계 (五大戒)에 사치하지말고, 높은 곳에 앉지 않고, 오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세가지를 덧붙인 8가지의 계율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한하여 엄격히 지키게하는 불교의식의 하나였다.
[출처]|팔관회 [八關會 네이버 백과사전
공음전시 [功蔭田柴 ]
고려시대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전시과 토지제도 가운데 있는 토지 항목중의 하나이다.
공음전, 혹은 공음전시과라고도 한다. 문종 3년 제정된 규정에 의하면 국가로부터 공음전시를 받는 대상은 1-5품의 관리로 규정되어 있는데, 1품 문하시랑평장사 이상은 전지(田地) 25결, 시지(柴地) 15결, 2품 참정(參政) 이상은 전지 22결, 시지 12결, 그리고 5품은 전지 15결, 시지 5결을 지급하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1-5품을 5품 이상의 고위관리로 보는 의견과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리를 5단계로 구분한 것이라는 해석이 대립되고 있다. 지급받은 공음전시는 다른 토지와는 달리 자손에게 세습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전자의 학설에서는 이것이 고려사회의 귀족제적 성격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논거로 제시되어 왔으며, 반면 후자의 개념으로 본다면 공음전시는 공신전과 비슷한 토지 항목으로서 고려사회가 왕권중심의 관료사회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출처] 공음전시 [功蔭田柴 ] | 네이버 백과사전
과전 [科田]
고려 ·조선 왕조에서 국가가 국정 운영에 참여한 대가로 문무양반 등 직역자(職役者)에게 그 직책의 품(品)을 기준으로 한 과(科)에 따라 일정한 특권을 갖도록 지정한 토지.
직책수행과 관련된 토지이므로 직전(職田)이라고도 한다. 세계 여러 문명 민족과 마찬가지로 한국 중세 국가에서도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가 보편적인 원리로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국민의 소유지가 실제로는 사유였지만, 전국의 모든 땅이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이 깔려서 그들의 땅은 공전(公田)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국정수행의 상징적 대표자인 왕이 지정하는 특정 절차를 거쳐 국정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그 대가로 특권적인 토지지배가 허용되었는데, 이러한 토지가 사전(私田)이었다. 따라서 사전은 국가에서 지급되는 형식을 밟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정 참여를 매개로 당사자의 특권이 확인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사전은 단순한 사적 소유지가 아니라 직역을 매개로 한 특권적 사적 소유지였다.
[출처] 과전 [科田 ] | 네이버 백과사전
제왕운기 [帝王韻紀]
1287년(충렬왕 13) 이승휴(李承休)가 7언시(七言詩)와 5언시로 지은 역사책.
고려 후기인 1287년(충렬 13)에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책이다. 상·하 각 1책씩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서(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와 진(秦), 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내용을 7언고시 264귀로 쓴 것이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어 놓았다. ‘동국군왕개국연대’에는 서(序)에 이어 지리기(地理記),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후조선(後朝鮮), 위만, 삼한,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과 후삼국 및 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7언시(七言詩) 264귀 1460언으로 서영(敍詠)하고 있다. ‘본조군왕세계연대’에는 고려 태조 세계설화(世系說話)에서부터 필자 당대인 충렬왕 때까지를 오언시(五言詩)로 700언을 읊고 있다.
[출처] 제왕운기 [帝王韻紀 ] | 네이버 백과사전
만권당 [萬卷堂]
고려의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燕京)에 세운 독서당(讀書堂).
충선왕은 정치개혁에 뜻을 두어, 이를 실천하려다 실패하자 본래부터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성품에 따라, 왕위를 아들에게 선양(禪讓)하고, 1314년(고려 충숙왕 1) 만권당을 마련하였다. 그는 상왕(上王)으로서 입장이 자유롭고 재정이 넉넉했으므로, 만권당에 고금의 진서(珍書)를 많이 수집한 후,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을 부르고,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인 조맹부(趙孟頫) ·염복(閻復) ·우집(虞集) ·요봉(姚烽) 등과 교유하면서 중국의 고전 및 당시 북중국에서 유행한 성리학(性理學)도 연구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을 섬기면서 만권당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보다 늦게 만권당에 출입하게 된 이제현 ·박충좌 등에게 이 학문을 전수(傳授)하였다. 이것은 다시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 여말(麗末)의 삼은(三隱)에게 전수되었다. 만권당에 모여든 학자들은 학술뿐만 아니라 예술 ·골동(骨董) 등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함으로써 고려와 원나라와의 문화교류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출처] 만권당 [萬卷堂 ] | 네이버 백과사전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은 8만 1258판이다. 8만여 판에 8만 4000번뇌에 해당하는 법문이 실려 있으므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의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하였다.
[출처] 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 | 네이버 백과사전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이며, 백운화상 경한(景閑)이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 데에 필요한 내용을 뽑아 1377년에 펴낸 불교 서적이다.[1] 간단히 ‘직지심체요절’, ‘직지’로 부른다.(#명칭 참고)
원나라에서 받아온 《불조직지심체요절》의 내용을 대폭 늘려 상·하 2권으로 엮은 것이다. 중심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 뿐인데, 1800년대 말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가 돈을 주고 사 갔으며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박병선 박사에 의해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밝혀졌고, 1972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 박람회에 공개되었다. 2001년 9월 4일에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출처]위키백과
소감: 고려 사전 만들기를 하면서 예전에 몰랐던 내용을 새로 알면서 고려의 역사를 다시 되짚을수 있었으며 수업시간에 배운 고려의 역사를 복습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고려사전만들기는 무심코 하게되는 숙제가 아니라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는것을 느끼게 되었다. 선생님...제가 수업시간퀴즈로 숙제량은 8개 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두 단어를 추가한 이유는 친구들의 내용과 중복되는 단어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중요한 유산으로서 우리가 우리나라 역사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질수 있는 내용이라 다시한번 찾아 읽고 쓰고 싶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숙제를 좀더 일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