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8. 02 20. 20:40
■ 죽림당(竹林堂) -
익재 이제현 선생 유거지(遺墟地)
2008년 1월 24일(목요일) 이재정통일부장관과 함께 전후(戰後) 처음으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의 익재공 묘소와 개성시 선죽동 숭양서원 입구 우측에 있는 익재선생 유거지 죽림당(竹林堂) 유적지를 사전 답사하고 이어서 2월 13일(수요일) 전국의 여러문중인사 213명과 마이크로 버스 운전기사 9명을 모시고 익재공의 묘소와 개성시내 익재선생 유거지 죽림당(竹林堂)을 다녀왔습니다.
700년 전의 익재 선생을 뵈온 듯 옛 선조를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였으며 옛날 이곳 후원에는 대나무들이 무성하여 이곳을 죽림당이라고 불리웠다고 북측의 문화해설사의 설명이었습니다.
이 일은 제 인생의 가장 보람을 느끼는 선조유적답사 추진이였습니다.
아울러 개성시내에서 익재공 산소를 가는 중간에 황진이 묘와 열하일기를 집필한 박지원 선생 묘지도 있었습니다.
글 이재훈
▲고려 말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선생 유거지(遺居地)이다.
개성시 선죽동 소재, 숭양서원 입구 우측이다.
▲유거터 후원(後園) 모습이다.
▲사진의 윗편에 어린아이 둘이 정겹게 노는 모습이 보인다. 남이던 북이던 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똑 같나 보다.
▲익재공의 유거지임을 알리는 이 유허비(遺墟碑)는 1798년(정조 22) 6월에 글씨는 익재공의 15대손 덕봉 이진택이 삼가
글을 짓고, 생원 청주한종락(生員 淸州韓宗樂)이 삼가 글씨를 쓰고, 윤자사(尹玆士)가 세웠다.
▲덕봉 이진택『德峯 李鎭宅, 1738년(영조 14)-1805년(순조 5)』은 1780(정조 4)년 문과에 합격하고 지평(持平), 장령
(掌令)등의 요직을 지내고 정약용(丁若鏞), 채홍원(蔡弘遠), 채제공(蔡濟恭), 이집두(李集斗), 이가환(李家煥) 등의 당
대 석학(碩學)들과 교유(交遊)한 사람이다.
죽림당은 개성시내 숭양서원 입구에 있지만 아직은 북측에서 개방하지 않은곳임으로 일반 관광객이 들어갈순 없습니다.
현재로선 안타까운 일입니다. 죽림당의 유허비의 글은 덕봉공이 짓고 글씨는 한종락(韓宗樂) 선생이 쓴것으로 기록되 있습니다.
익재공은 족보에 나타나지 않는 체원이란 법명의(스님) 중형 한분이 계셨는데 이분은 화엄경을 집필한 분으로서 오늘날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187번지의 반룡사(盤龍寺)와 해인사(海印寺)의 주지를 지내셨고 그분의 저서인 목판이 현제 해인사에 보존되 있습니다.
족보에 기록이 없는 까닭은 당시엔 불가에 출가하면 부모 형제와도 연을 단절한다는 국교의 연유라 사료 됩니다.
당시 익재공은 성리학자이면서 불교학문에도 대가셨고, 더욱이 중형인 체원(體元)과 슬하의 6녀인 해비(惠妃)와 손자인 실림(實林)과 처남인 회안군(淮安君)이 불가에 출가했기 때문에 당시 성리학의 대가라는 평가에 있어 일부 인사들로 부터 견제를 받은 기록들이 있기도 합니다.
익재공 묘소가 있는 마을을 현제 북측 행정명으로 십탄리(十灘里) 서원촌(書院村)이라 칭하는데 십탄리란 여울탄자로 그곳이 개울물 10곳이 합쳐지는 곳이라 하며, 서원촌이란 익재공을 주벽으로 모신 도산서원(道山書院)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익재공은 개성 죽림당 유거 이전에 수철동에 유거했다고 목은 이색이 기록을 남겼는데 오늘날엔 전해지지 않습니다.
개성 수철동의 오늘날 행정명은 황해북도 개성시 성남동입니다.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면 현지를 찿을수 있지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개성의 옛 수철동은 오늘날 개성시 성남동의 중심부에 소재했던 마을로 지난 날 무쇠점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수철동이라 합니다.
글 >야촌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