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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용문사와 비밀의 숲을 다녀와서!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일대에 조성된 관광지로, 1971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문화유적이 많고, 놀이공원인 용문산그린랜드가 있어 가족
단위 관광지로 알맞다. 관광지 내의 볼거리로는 용문사, 용문사의 은행
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용각암, 마당바위, 상원사, 운필암, 장군약수,
정지국사 부도 및 비(보물 제531로), 용문산지구전적비 등이 있다.양평
군은 경기도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은 강원도 홍천군, 횡성군,
원주시, 남서쪽은 여주시, 광주시, 북서쪽은 남양주시, 가평군에 접한다.
군의 중앙부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용문산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산악
지대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도일봉, 백운봉 등이 있으며 이 밖에
북쪽 군계에 통방산, 소리산 등이 있고 남쪽 군계에 양자산, 파사산, 우두산
등이 있다. 북한강이 북서 지역을 남서류하고, 남한강이 남서 지역을
북서류하여 양수리 부근에서 합류, 한강의 본류를 이룬다. 군의 면적은
경기도 내의 시군 가운데 가장 넓은 편이다. 용문산 일대는 1971년 5월
20일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고 1983년부터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다.
용문사, 용문사의 은행나무, 정지국사 부도 및 비, 용문산지구 전적비 등
문화유적이 많다. 용문사는 가을에는 천연기념물 제30호인 은행나무의
단풍을 볼 수 있으며 사계절 여행객이 끊이지 않는 관광지이다.
* 용문산 관광지의 꽃, 용문사 은행나무 *
이 나무는 현재 우리 나라에 생존하고 있는 은행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우람하며 오래된 것으로 용문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0여m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2.3m를 넘어 동양에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이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세자 마의
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전란으로 사찰은 여러 번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났
을 때 일본군이 의병의 본거지라 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으나, 이 은행
나무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던 나무라하여 천왕목(天王木)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때에는 정 3품의 벼슬인 당상직첩을 하사 받기도 한
명목이다. 이 나무에는 또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
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하며 또한,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가지
가 1개 부러졌고, 8.15 해방과 6.25 전쟁때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출처:(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註:용문산공원내에 세워진 역사적 인물들의 시비(詩碑) 중에
모두가 잘 알고있는 이항복 서거정 김시습 세 분의 시 비문에
그 분들의 생애에 대한 해설을 붙입니다.
이항복(李恒福)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덕형과 돈독한 우정으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고, 오성부원군에 진봉
되었다. 임진왜란 시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수습책에 힘썼다
본관 경주(慶州). 자 자상(子常). 호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
(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
(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 장군의 딸과 혼인하였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과 돈독한 우정을 유지하여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우정과 해학이 얽힌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오게 되었다.
1580년(선조 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81년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이의 문하로 서인에
속했다. 이후 저작(著作)·박사·정언(正言)·수찬(修撰) 등 언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89년 예조정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다스리는데
참여했다. 1590년 정여립의 옥사를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
(平難功臣) 3등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로 선조
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전란 중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한음 이덕형
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는 한편 국왕의 근위병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1595년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병조
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는데 앞장섰다. 1598년 조선이 왜와 함께 명
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오해가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하여 그 공로가 인정되었으며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대북파(大北派)
들과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으며 1617년 이이첨(李爾瞻) 등 강경 대북파
가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적극 반대하다가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이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귀양가는 길에 자신
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시조가 유명하다.
《철령 높은 봉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었다가
님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란 후에는 그
수습책에 힘썼다. 고향인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
(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상신(宣祖朝相臣)〉조에 행적이 소개되어 있다. 서울 부암동
에는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으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부른다.
출처:(두산백과)
서거정(徐居正)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 서익진(徐益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전서
(戶曹典書) 서의(徐義)이고, 아버지는 목사(牧使) 서미성(徐彌性)이다.
어머니는 권근(權近)의 딸이다. 자형(姉兄)이 최항(崔恒)이다.
조수(趙須)·유방선(柳方善) 등에게 배웠으며,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
(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
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
(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
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
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부교리
(副校理)에 올랐다. 1453년수양대군(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종사관
(從事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 세자우필선(世子右
弼善)이 되고, 1456년 집현전이 혁파되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壁賦)」 글자를 모아 칠언절구 16수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해 세조가 이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57년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 우사간·지제교에 초수(招授)되었다. 1458년 정시
(庭試)에서 우등해 공조참의·지제교에 올랐다가 곧이어 예조참의로 옮겼다.
세조의 명으로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였다. 1460년 이조참의로
옮기고, 사은사(謝恩使)로서 중국에 갔을 때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사신
(安南使臣)과 시재(詩才)를 겨루어 탄복을 받았으며, 요동인 구제(丘霽)는
서거정의 초고를 보고 감탄했다 한다. 1465년 예문관제학·중추부동지사
(中樞府同知事)를 거쳐,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을과로 급제, 예조참판
이 되었다. 이어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급제해 행동지중추부사
(行同知中樞府事)에 특가(特加)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에도 참가하였다.
1467년 형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성균관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서거정의 손에서
나왔다. 1470년(성종 1) 좌참찬이 되었고, 1471년 순성명량좌리공신
(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4년 다시 군(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복배되었다. 1476년 원접
사(遠接使)가 되어 중국사신을 맞이했는데, 수창(酬唱: 시로써 서로의
마음을 문답함)을 잘해 기재(奇才)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 해 우찬성에
오르고,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공편했으며, 1477년달성군에
다시 봉해지고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다음 해 대제학을 겸직했고,
곧이어 한성부판윤에 제수되었다. 이 해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신찬하였다. 1479년 이조판서가 되어 송나라 제도에 의거해 문과의 관시
(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에서 일곱 번 합격한 자를 서용하는
법을 세웠다. 1480년『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찬진하였다. 1481년『신찬동국여지승람(新撰東國與地勝覽)』 50권을
찬진하고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483년 좌찬성에 제수되었다. 1485년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했으며, 이 해 『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해 바쳤다. 1486년『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
사관(史官)의 결락을 보충하였다.
1487년 왕세자가 입학하자 박사가 되어 『논어(論語)』를 강했으며, 다음
해 죽었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 23년 간 문형을 관장
하고, 23차에 걸쳐 과거 시험을 관장해 많은 인재를 뽑았다. 저술로는 시문
집으로 『사가집(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東國通鑑)』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경국대전(經國大典)』
·『연주시격언해(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
(歷代年表)』·『동인시화(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필원잡기(筆苑雜記)』·『동인시문(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
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서거정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서거정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東文選)』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했는데, 서거정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
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서거정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실린 서거정의 서문과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동국
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서문에서는 우리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與地勝覽)』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방여승람(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이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
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시습(金時習)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의 학자이다.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고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등을 정리했으며
《산거백영》을 썼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
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
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
(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
(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
(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
(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
(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용문사(龍門寺)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龍門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대경대사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용문산은
미지산(彌智山)이라고도 한다.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元曉)가 창건
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1378년(우왕 4) 정지국사
(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우왕이 원각(願刻)한
대장경판을 이곳에 옮겨 세 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지어 봉안했으며,
1395년(태조 4)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1447년(세종 29)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모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
(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이듬해 경찬회(慶讚會)
를 열었다. 수양대군은 이 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 불사리(佛舍利)의
방광을 목격하고 이 절을 원찰(願刹)로 삼았으며, 1457년(세조 3) 퇴락한
법당과 승방(僧房)을 중수하였다. 1480년(성종 11) 처안(處安)이 중수
하였으며, 1890년(고종 30) 봉성(鳳城)이 조대비(趙大妃)의 외호를 받아
중창하였고, 1893년에도 한 차례 중창하였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모든 건물이 불타자 취운(翠雲)이 큰방을 중건하였고,
1938년 주지 홍태욱(洪泰旭)이 대웅전·어실각(御室閣)·칠성각·기념각·요사채
등을 복구하였다. 6·25전쟁 때 용문산전투로 다시 불에 탔으나 1958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 뒤 1983년 지장전·범종각·일주문 일부를 중수했고, 관음
전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그 중 지장전은 1994년에 완공되었다. 현존하는 당우
로는 대웅전·지장전·관음전·삼성각·종각·요사채·일주문(一柱門) 등이 있으며,
옛 절터에는 주춧돌이 산재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
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가 있으며, 산신각 동쪽에는 부도 5기가 있다.
이 밖에 이 절 앞에는 높이 42m, 가슴높이 둘레 14m의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이곳에 들러 심었다고 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양평용문사은행나무(楊平龍門寺銀杏木)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로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퍼져 있다. 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
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는 649년(신라 진덕여왕 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
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
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
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
와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
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숲속 아늑한 비밀의 쉼터
양평쉬자파크가 개원한 것은 지난 5월, 따지자면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햇병아리 공원이다. 하지만 공원 안에 조성된 나무와 정원은 자리잡은
지 꽤 오래된 듯 자연스럽다. 기존의 숲을 자연스럽게 활용하고, 또 여러
해 동안 준비 기간을 거친 덕분이다. 산중턱에 자리하여 조용하고 평화
롭다. 쉬자파크가 둥지를 튼 봉우리를 넘어가면 용문산자연휴양림이다.
홍천으로 이어진 6번 국도를 벗어나 산으로 한참을 굽이굽이 올라온 보람
이 있다. 도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숲속 아늑한 곳에 숨은 비밀스런 쉼터다.
경사진 지형을 고스란히 살린 덕분에 공원 입구에서 가장 위쪽에 자리한
산림교육센터 사이에 높낮이 차이가 크다. 입구에서부터 쉬엄쉬엄 구경
하며 올라가도 좋고, 맨 위까지 올라간 다음에 내려가며 찬찬히 즐겨도
된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산림교육센터, 초가원, 솔쉼터, 트리마켓, 야외
공연장, 야생화정원, 관찰데크, 방문객센터, 암벽등반장, 주차장, 관리
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산림교육센터와 초가원은 산림교육과 숲 관련 프로그램이 진행될 장소로
아직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근처 치유의 숲이 완공되면 다양한 체험 프로
그램으로 맞아줄 것이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즐길 거리는 없는 편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마음 편히 쉬러 온 것이므로
솔쉼터에 앉아 솔향기를 맡거나, 야생화정원을 거닐며 가을꽃을 구경
하는 심심한 재미를 느껴보자.
솔쉼터는 원래 있던 솔숲에 산책로를 내고 벤치와 해먹 등 최소한의
시설만 더했다. 해먹에 누워 소나무를 올려다보거나, 책을 읽거나,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기 좋다. 해먹 아래쪽은 아이들을 위한 모험의
숲이다. 매달아놓은 통나무 위를 흔들거리며 지나가거나 경사진 곳
을 줄을 타고 오른다. 서너 살 아이들에게는 모험이지만, 그보다 큰
아이들에게는 조금 시시할 수도 있다.
출처:(대한민국구석구석 여행이야기, 한국관광공사)
이성애 옛노래 전집 고향길은 그리운 길 산꿩이 운다 처녀림:작사 / 김교성: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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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7 작성자 청해명파
첫댓글 대자연을 사랑하시는 지기님의 전국 유명지 발걸음 가볍게
방방곡곡 나들이하시며 많은 사람들에 자연사랑 나라사랑 일깨우며
좋은 자료 영상으로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용문산에 대한 정보 잘 알고갑니다. 행복한 하루펼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