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있을때 써둔 소설입니다. 호국문예 응모했는데 떨어진 거 보면 그렇게 잘된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밤잠안자가면서 조금씩, 정성들여 쓴 소설이라 애착이 많이 가네요.
좀 더 노력하면 좋은 글 쓸 수 있을꺼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아마추어니까 실력보다는 언제난 열정이 앞섭니다.
썩으러 가는 길
----- 군대가는 이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밤늦게까지 과음이라도 한 듯 흘부들한 모습으로 강의실을 들어선 중년 교수의 턱, 턱, 걸리는 목청이 영 시원찮았다. 이에 맞장구라도 치 듯 강의실 뒷문을 슬로우 모션으로 여닫으며 멋적은 모양, 머릴 벅벅 긁는 짓시늉으로 슬그머니 뒷자리로 가 앉는 후배의 행투가 정겹다기보다는 어째 식상하고 유치해 보였다. 아직도 늦잠에서 덜 깨어난 건지 눈곱 낀 두리벙한 낯짝으로 부스스 칠판에 초점을 걸고 있는 또 다른 후배를 보고 있으려니 짐짓 기합이 바짝 들 때까지 쪼그려 뛰기나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한 술 더 떠서 창(窓)가, 볕드는 구석에 앉아 살찐 애완용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몇몇 후배들은 완전무장에 연병장 스무 바퀴 정도는 돌아야 혼글혼글 정신이 들겠다고 생각이 됐지만 억규는 이내 도리질을 치며 마음을 조금 너그러이 먹었다.
"하긴 2년 2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세상이 변하면 얼마나 변하겠어? 괜스레 군바리 티나 내지 말고 물에 물탄 듯 조용히 스며드는 게 좋을 것 같군."
... 하지만 ... 하지만 어느 날 뜬금없이 현상 수배범이 된 것같은 정체불명의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막연한 불안감, 물에 뜬 기름처럼 저 혼자서만 둥둥 떠다니는 듯 한 이 주체할 수 없는 부유감의 뿌리를 어디서부터 캐내야 하는 지... 억규의 마음밭 깊숙이 시나브로 민들레 잔뿌리처럼 기어들고 있는 낯설음과 외로움들이 소스라치게 억규의 정신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복학 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부터 였다. 일어나 보니 징글징글한 벌레가 되어 있었다는 까뮈의 주인공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군대에서 사회로 적을 옮긴 억규 자신도 마찬가지로 벌레나 이무기가 된 것처럼 사회와 타인으로부터 괜한 주눅과 심각한 자기의식의 허방다리로 빠지기가 일쑤였다.
내무실과 연병장, 훈련장에서의 생활이 강의실과 캠퍼스, 도서관, 단골막창집, 번화가로 확연하게 바뀐 것부터 애인처럼 지니고 다니던 K -2 소총과 어깨를 짓누르던 완정무장 대신에 나이키 스포츠 가방, 전역 선물이라며 삼촌이 선물한 깔끔한 흰 색 바탕에 은도금이 된 무선 호출기, 그리고 강의서적들까지 완전히 탈바꿈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억규의 마음속에 있는 듯 했다.
여전히 비몽사몽간에 만나고 있는 호랑이 중대장님, 항상 아버지처럼 대원들을 아끼고 챙겨주시던 작달만한 키에 그 두배는 됨직한 마음의 키를 가진 소대선임하사님, 가족들보다도 더 많은 정과 의리로 똘똘 뭉쳤던 소대원들, 사계절 자신들의 청춘을 불태워가며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었던 훈련장...
억규는 오매불망 이런 것들을 못 잊고 있었다. 아니 2년 2개월 동안의 사연 많고 일도 많았던 두리 둥실한 기억들이 억규를 쉽사리 놓아 줄 것같지 않았다. 기억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헤어날 수 없는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반달곰처럼 기약도 없는 겨울잠을 자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규의 복학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원래 속탈이 모난 데가 없어 두 세 해 아래 후배들과도 심심찮게 어울리며 군 생활 동안 익힌 요령과 성실함으로 그 사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 새로운 강의 과정과 강의 방식에도 수월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간혹 몇 번의 시행착오가 생기긴 했지만.
복학문제로 지도교수를 만나러 왔던 억규는 교수실 입구에서부터 자못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교수란 사람을 만나 본 지가 이태가 훨씬 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대대장실 앞에서 호흡을 길게 가다듬는 것처럼 뭐랄까? 소작인이 지주를 찾아와 무의식적으로 고갤 조아리고 두 손을 공손히 하는 프롤레타리아적 반사신경이라고 할까? 여하튼 억규는 교수실 문을 절도 있게 똑, 똑, 똑 세 번 두드리고,
"들어가도 좋습니까?"
라고 훈병처럼 굵고 짧게 말했다.
잠시 후, 들어오라는 말을 들리자,
"예!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교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곤 대뜸,
"충, 성!"
"... ."
그 순간 지도교수의 표정은 과히 해외포토 제닉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억규가 자주 가는 단골 막창집에서였다.
전역 기념 및 복학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과후배들이 마련한 술자리였는데 간만에 그리웠던 사람들과 마시는 술이 여서 그랬는 지 원래 주량에 훨씬 못미처 억규는 곤드레만드레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 때였다.
"야, 박억규!"
"예... 예, 병장 박억규!"
짜장 거짓말처럼 조금전 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비틀 비틀거리던 사람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는 것이였다. 막창집 주인 아저씨 목소리가 예전의 중대장님 목소리와 너무 똑같아서 그랬다고 이튿날 해명하기는 했지만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선, 후배들은 역시 군인은 군인이구나 하며 감탄을 하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어떻게 수업이 끝났는 지 모를 정도로 하루는 빨리 지나갔다. 과업이라는 이름으로 군대에서 공동으로 해치우던 작업이나 훈련과는 그 마무리 감이 달랐다. 아무래도 혼자서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처리하는 게 영 익숙지 않은 이유 때문이리라. 허겁지겁 강의 시간에 맞쳐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억규도 이제는 진이 다 빠진 듯 농구장이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억규 선배!"
뒤돌아보니 같은 과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과대표 후배 세훈이였다.
"오늘 현수랑 약속 있는 거 알죠? 7시니까 이따 시간맞쳐서 거기로 오세요."
... 현수? 아, 그러고 보니 현수가 곧 군에 간다고 그랬다. 과후배에다 같은 동아리 후배이기도 한 현수가 군에 간다니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가뜩이나 복학 후에 정신이 없어 죽겠는데 애송이 - 군 필자들이 보기에 군대 안 간 남자는 십중팔구 어린애나 미숙아처럼 보이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리라 - 군대 가는 것까지 봐줄 생각을 하니 왼쪽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 왔다.
하긴 복학 후에 현수가 후배 노릇을 톡톡히 해줘서 전부터 고마운 맘이 없지 않아 있었다. 갓 복학해서 천애고아처럼 강의실과 도서관, 집만을 들락날락거리던 억규에게 털털한 성격으로 먼저 다가와 과후배들과의 어울림을 주선하고 그들만의 울타리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는 튼실한 다리역할을 해준 현수가 개인적으로는 친동생 같고 너무 맘에 들었던 것도 사실 이였다.
그런데 군에 간다고 날짜까지 받아 났다니 지금쯤 마음이 쑥대밭이 된 것처럼 심난해 있으리라. 이건 경험이다. 대한민국의 건강하고 생각이 옳게 박힌 사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관례니까.
관혼상제에다 우리 나라 남자들에게는 영(營)이라는 또 하나의 통과의례를 부여해야 옳다는 생각을 하면서 억규는 아직 두 시간 정도의 여유를 도서관에서 보낼 요량으로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535번 버스는 항상 만원이다. 시내 주요 길목을 오가기 때문이지만 오늘만은 아마도 지방병무청에 볼일이 많은 사람들 때문이리라.
우두커니 턱을 괴고 우울한 듯 뒷자리에 앉아있는 현수도 마찬가지로 병무청에 볼일이 있었다. 영장 수령 때문에 0월 0일 0시까지 병무청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은 건 보름 전 쯤이였다. 미상불 군에 갈 때가 됐다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영장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현수였기에 그 동안의 마음고생이 의외로 많았다.
"미안하지만 병무청 갈려면 어디서 내려야 하나요?"
내내 현수의 어두운 얼굴에 눈치를 살피던 옆자리의 파란 모자를 쓴 호리호리한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요. ... 저도 그 쪽에 볼일이 있으니까... 같이 내리죠?"
그런 배려까지 해 줄 기분은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이 사람도 영장 때문에 그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어디에선가 묘한 연민의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뜻밖의 친절에 기운을 얻었는지 그 남자는 싱긋거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하지만 생뚱스럽게도 현수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 채 시선을 번화가 쪽으로 주었다. 예전엔 별 관심 없이 지나치던 길거리가 오늘따라 정겹고 사람 사는 것같이 보였다. 언젠가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근처 전시장에서 열리는 사진전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너무나 평범한 우리네 삶을 또 그런 식으로 액자 한 쪽에 붙잡아놓고 보니까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항상 그런 식이다. 그 안에 있을 땐 잘 모르던 것이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리기 마련이다.
버스가 막 병무청입구 쪽을 향해 커다란 반원 모양으로 핸들을 돌리자 버스 안의 사람들이 동시에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렸다. 잠시 후 스피커에서 다음 정류장은 지방병무청이라고 그 곳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내리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이윽고 버스가 서서히 멈춰 서자 버스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뒷문을 향해서 돌아섰다. 현수가 일어서서 내릴 차례를 기다리자 아까 그 파란모자를 쓴 남자도 엄마 손을 놓친 어린아이처럼 부리나케 현수의 한 발짝 뒤에 섰다.
병무청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오늘 영장 수령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손바닥만한 영장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현수와 파란 모자를 눌러 쓴 그 남자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 섰다.
"129번 000!"
"예!"
"130 번 구병수!"
" ... . "
"구병수!"
"예... 예!"
파란 모자를 눌러 쓴 그 남자였다. 촌놈처럼 두리 번 두리번거리더니 호명소리를 못들었는 모양이다. 갑자기 들리는 자기 이름에 화들짝 놀란 그가 우스꽝스럽게도 두 손을 번쩍 들고 앞으로 나섰다.
신경질적인 호명관이 성의 없이 건네준 영장을 받아들고는 다시 현수 곁으로 돌아온 그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이윽고 현수의 이름도 호명되고 마찬가지로 영장을 받아든 현수는 호명관의 주의 사항 몇 가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내 병무청을 나왔다. 그리곤 자석에 끌리 듯 바로 앞에 있는 중앙공원으로 들어가 한적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0월 0일 오후 2시 춘천 106 신병훈련소로 집결하시오, 라고 적힌 영장을 현수는 황망히 쳐다보았다. 친절하게도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고 입영 시 소지해야 할 품목과 주의 사항들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불과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전혀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막상 영장까지 받고 나니 마음이 영 심난했다. 두 달 전에 먼저 군에 간 절친했던 동기녀석이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냥 ... 정말 그냥 남이 계속 가왔고 지금도 가니까 나도 별 생각 없이 가는 거지. 솔직히 군에 안 갈 수만 있다면 나도 안가고 싶어. 뭐, 신의 아들이니 태양의 아들이니 하면서 엄청난 빽과 돈줄로 사실 우리 주위에도 안가는 사람이 몇 있잖아? 구태여 그런 식으로까지 해서 회피하겠단 생각은 아니지만 좋은 보직이나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겠어?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군대, 안 갈 수만 있다면 십중팔구 안 갈려고 하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2년 2개월이라는 시간도 그렇거니와 이 황금 같은 이십대의 한 시절을 군대에서 푹푹 썩혀야 한다니... "
그 동기녀석의 한숨소리가 어느새 파닥파닥 거리며 현수의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이튿날 그 녀석은 아무 연락도 없이 저 혼자서 입영열차를 타고 멀고 험난한 길을 향해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아무연락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듯도 하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현수는 마음속으로나마 스스로를 위한 하고 있었다.
어느 듯 해거름 이였다. 발가레진 하늘 때문인지 네둘레가 온통 붉그수름하니 어두워져왔다. 꼼짝도 하지 않고 여태 그 자리에 앉아있던 현수의 얼굴이 서편 하늘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담뿍 물기를 머금고 있는 스펀지처럼 수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무거워 보이는 현수의 머리위로 철새가 행군대형으로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삐삐삐... 삐삐삐.... ."
난데없이 현수의 삐삐가 요동쳤다. 누군가 음성을 남긴 모양 이였다. 둘러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 ... 응, 현수야! 나 세훈인데 오늘 7시에 약속 있는 거 알지? 억규선배랑 00선배, 또 ... "
깜빡했다. 영장이 나오면 술 한 잔하자던 과사람들과의 약속이 오늘인 것을 미처 짚어볼 겨를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7시를 지나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다. 아마 오늘 술을 마신다면 과음할 것 같지만 이런 기분으로 집에 들어가기는 더더욱 싫었다.
총총걸음으로 중앙공원을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연히 군복을 입은 군인과 거리에서 마주쳤는데 영락없이 자신과 닮은 얼굴 이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든 건지도 몰랐다. 참말 이상한 일이다 싶었지만 가까이 에서 보니 생면부지였다. 버스에 올라타고서도 현수는 내내 그 일이 잊혀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내가 오늘따라 웬일인 지 정겹고 자꾸만 눈에 밟혔다. 멀리 떠나는 사람의 마음은 모르긴 몰라도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현수도 이리 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막창집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게 있다. 솔솔 피어오르는 희뿌윰한 연기와 곱창이 불 판에 타오르면서 이글지글거리는 그 인간적인 청음과 편안한 냄새!
억규는 피씩 웃음이 나왔다. 언젠가 살을 에는 듯 한 겨울 칼바람을 등지고 DMP 제 4소초에서 야간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왜 그 때 갑자기 이 막창 생각이 났던 걸까?
아까부터 혼자서 배시시 웃고 있는 억규를 쳐다보고는 전경출신의 문대선배가 한 잔소리 내뱉았다.
"야, 이놈아야! 뭐가 그래 좋다고 니 혼자 미친년처럼 헤헤거라노? "
"후훗 ... 갑자기 군대있을 때 생각이 나서요. "
"무슨, 생각? "
과대표 후배 세훈, 해병대 000기라고 술만 마시면 으시대는 주환 선배, 현수와 한때 캠퍼스 커플 이였던 희경, RT 이년차인 종문선배의 시선의 일제히 억규를 향해 옮겨졌다.
"야간 근무를 서다가 불현듯 이 막창이 떠올랐거든. 얼마나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던 지 그 때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걸 보면 정말 먹고 싶긴 먹고 싶었나 봐. "
" ...아닐 거예요. 억규선배. "
현수에게 연락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희경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건 정말 막창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음... 굳이 얘기하자면 막창같은 추억이 그리워서 일 거예요. 대개 그렇잖아요? 추억이라는 건 워낙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이라서 그 추상을 구체화 할 수 있는 매개물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구요. 그러니까 억규 선배한테도 이 막창이 잘은 모르겠지만 추억의 객관적 상관물인 셈이죠. "
객관적상관 물이라는 말에 문대선배와 주환 선배가 우리같이 무식한 놈을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건배를 했다.
"하긴 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대학 갓 들어와서 처음으로 필름이 끊기도록 마셔본 것도 여기고 동기들과 아우다웅거리며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뒷푸리하던 곳도 항상 여기 였으니까. "
그러고 보면 이 막창집이 국문과의 단골집이 된 것도 오랜 시간과 수많은 기억이 쇳물처럼 융화되어 만들어 낸 추억의 녹슬지 않는 동굴이기 때문이리라.
" 근데 현수는 왜 이래 안오노? "
내내 억규와 희경이의 얘기를 도통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보던 문대선배가 투정부리는 꼬마처럼 현수 얘기를 꺼낸 건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족히 지나서였다.
"글쎄요? 아까 분명히 7시라고 연락했는데... . "
"영장 받고 비관한 거 아냐? "
항상 자신감과 자만감의 경계에서 오락가락 하는 주환 선배의 난데없는 실언에 일순 분위기가 망간덩어리처럼 무거워졌다.
"선배는 사사건건 왜 그래요? "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훈이 발끈 화를 냈다.
"뭐, 영장이 그 영장이에요? 이제 너도 나라를 충분히 지킬 나이와 능력이 되니까 어서 군대로 오라는 일종의 초청장이지. "
"초청장? 헤헤, 초청장 좋아하네. 아직 군대 문턱에도 못가본 애송이가 알 면 얼마나 알겠냐! "
이제는 내놓고 화를 돋구는 통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거리는 세훈의, 술잔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 파르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군대는 말야 정말 생지옥이야.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초라해질 수 있는 지 실험하는 곳이랄까? ... 지독한 연극이지, 뭐! 다 알면서도, 밖에서는 이렇게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군대라는 곳에서는 모든 게 제약이고 구속이고 억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척 하는 거야. 생각해보라구,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냐? 밖에서 만났으면 친구고 후배고 선배고 형이고 동생이고 할 사람들이 그저 군대에서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롭히고 명령하고 때리고 경멸하고 하는 게... . "
이 때였다. 막창집 미닫이문이 힘없이 열리면서 현수가 들어왔다. 막창굽는 연기 때문인 지 현수의 얼굴 색이 희끄무레했다.
"이놈아야! 7시까지 오라고 했을 낀데 와 인자 오노, 으잉? "
이 때다 싶었는 지 부러 언성을 높인 문대선배가 그래도 잘 왔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현수를 반겼다.
"아이다, 아예 그라지 말고 오늘 술값은 현수가 내라! 이때까지 하늘같은 선배들을 기다리게 한 벌이다. 알았나? "
언제 어떻게 들어도 문대선배의 말은 정겹고 사심이 없었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현수도 시나브로 기분이 나아졌는 지 해시시 입에 웃음을 머금었다.
"예... 성님들! "
종전의 험악하던 분위기가 어디론 가로 사라지고 현수로 인해 마치 가족이 둘러 앉은 것처럼 분위기가 자못 화기애애 졌다.
술 한순배가 돌고 나서 현수는 오늘 받은 영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캬야아! 이거 얼마만에 보는 거야? 벌써 삼년하고도 육개월이 다되가는구나. 참, 세월한 번 무지 빠르다, 빨라! "
현수의 영장을 받아 들고는 주환 선배가 그리움에라도 사무치는 듯 주절거렸다.
"나도 저걸 받고 한 때는 철없이 울먹이고 했었는데... . "
"남자들은 다들 왜 그러는 지 몰라. 군대하면 무슨 원한이 사무친 여인들처럼 모이기만 하면 군대, 훈련얘기 뿐이니... 혹시 군대가면 세뇌교육같은 거 시키나 보죠? "
현수의 영장을 한 번 훝어보고는 희경이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여태까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RT 이년차인 종문선배가 대꾸했다.
"글쎄다. 나도 군대에 가본 건 아니지만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으며 학군단 선임들로부터 가끔은 두들겨 맞거나 강의실 뒤편에서 가혹한 기합 같은 걸 받을 땐 너무 억울하고 불만이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런 생활을 함께 해온 동기들과 끈적끈적한 정같은 것도 느껴지고 참고 견뎌낸 시간이 무시로 느끼게 하는 보람과 성취감이랄까? 뭐 이런 것들이 군에 갔다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건 여느 남자들의 모임에서건 빠질 수 없는 화제로 군대 얘기가 들 먹거리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그건 마치 우리 기억의 맨살 어딘엔가 불에 덴 흉물스러운 자국이 남아서 가끔씩 아리운 통증이 동반하는 남자들만의 달거리랄까? "
"달거리? "
달거리라는 말에 귀가 쫑긋해진 문대선배가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희경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 마디 거들었다.
"나는 그런 유식한 말은 잘 몰라도 종무이 니가 한 말은 그런 대로 일리가 있는 것같기는 하네. 나야 너거들이 다 알다시피 전경출신 아이가? 뭐, 말하자면 너거가 나라를 지켰다면 나는 이 덥덥한 사회를 지킨 셈인데 그런 와중에도 전역이란 걸 하고 나니까 종무이 니 말처럼 견뎌낸 시간과 거거서 보낸 날들의 성취감 같은 것들을 내도 모르게 의식하고 있다가 이래 술 한 잔 마시거나 옛날 동기들끼리 모이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얘기가 술술 나오더라 이거지. ... 그런 거 보면 참 이상하기도 해잉? 벌써 거기 나온 지 이 년이 다되가는데 아직까지도 못 잊고 떠벌리고 있는 게. 암만해도 평생가지 않겠나 싶다. "
자못 분위기가 무르익을 대로 익어가고 있었다. 선배들이 가지고 있는 군대를 향한 지독한 자기 의식과 독특한 기억의 회로가 현수로 하여금 시나브로 막연한 두려움과 구체적인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침 현수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발견한 세훈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선배들을 주루룩 훑어보았다.
" 혹시 선배들 이거 알아요? 각기 제 나라들마다 실제 자주국방능력이 퍼센테이지로 환산된 게 있는데 우리 나라가 몇 프론지 알아요? ...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나라의 자주국방능력은 85%를 넘지 못한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쉬운 말로 조국의 평화와 안녕을 우리 손으로는 완전히 지켜 낼 수 없단 말인데 ... 그럼 그 나머지는 누가 지켜준단 말이고 그건 바로 미국과 우방국가들인셈이죠.
얼마 전에 학생회 간부실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는데 사회과 학생회장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진정한 나라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조국애에 있는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으로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도모하는 것이라고요. 이런 사실들이 지금 선배들의 머릿속에는 나쁘게 받아들여질지 몰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라구요? 해마다 얼마나 많은 젊음을 국방이라는 가마솥 밑으로 지피고 있는데 우리의 밥과 국은 누군가의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이... . 그건 정말 옛날부터 그래왔어요. 단군 이래로 우리 나라는 약 931회가 넘는 크고 작은 침략을 받아왔고 게 중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치 수준의 사건도 한 두 번이 아니였어요. 지리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에 위치한 구차한 변명 따위를 듣는다 손쳐도 이런 역사는 정말 낯부끄럽고 초라한 일임에는 틀림없는 것같아요."
좌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굳이 군 입대를 앞둔 현수앞에서 이런 얘기를 해야겠냐고 한 마디 견주려던 억규도 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역시 00대학교 국문과 과학생 회장답다는 눈빛으로 세훈의 입을 주목하던 좌중은 진정한 나라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조국애에 있는 게 아니라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에 있다는 말에 극렬가담자처럼 동조라도 하는 듯 계속 세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에 터진 병역비리만해도 보세요? 그건 이미 오래 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신의 아들의 실체예요. 돈과 빽만 있으면 안돼는 게 없다는 그간의 소문을 방정식처럼 입증하는 사건이고요. 하지만 또 모르죠... 더 큰 비리를 감추기 위한 가진 자만의 우스꽝스런 판토마임일지. "
"하긴, 나도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어. 갓 실무 배치 받아서 정말 꾀죄죄하게 생활했는데 그 때 나랑 같이 실무 배치 받았던 한 녀석의 아버지가 뭐? 좀 사네, 투 스타의 친척이네 하더니 얼마안있다가 난데없이 복지단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더라구! 그 때는 뭐 다그렇고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었는데 사실 그런 경우를 찾아보면 군대에 안 오려고 발버둥 친 사람들만큼이나 비일비재하단 말야. "
간만에 주환 선배가 세훈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꾸했다. 그러자 문대선배도 현수를 가르키며,
" 현수 니도 집에 빽있는가 알아봐라. 혹시 아나? 땡보직으로 빼줄지. "
그러자 현수가 별 관심 없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 선배! 저희 집에 빽이라고는 세면 빽밖에 없어요. "
일순 껄껄거리며 한 바탕 웃음이 흘러 넘쳤다.
벌써 빈 소주병이 일곱 병째 실려나가고 있었고 어느덧 술자리의 사람들도 취기가 오르는 지 해롱해롱거렸다.
"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던 군에 가 걸라 몸성히 요령껏 복무하다가 건강하게 돌아온나. 그게 제일 좋은 거니까. "
문대선배의 말에 모두가 그래, 그래 하며 현수를 다독거렸다.
현수는 진정으로 자신을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힘을 얻은 모양인 지 아까 같지 않게 얼굴 색이 화사해져 있었다.
" 선배들, 우리 이렇게 갈 수는 없잖아요? 적어도 이등병의 편지 한 곡 정도는 불러야 기억에 남지! "
" 그래, 그래. 이등병의 편지 좋지! 오늘 현수 니가 한 곡조 빼봐라. "
잔뜩 신이라도 난 둣 젓가락을 들고 한껏 분위기를 띄우던 주환 선배가 빈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현수에게 내밀었다. 문대선배는 젓가락을 거꾸로 쥐어 들고는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억규와 종문선배, 희경, 세훈이는 그 분위기가 사뭇 정겹기라도 한 듯 박수를 치며 현수의 노래에 호응했다.
지입 떠어나와 여어열차 타아고... 훈려여언소오오로 가는 날알알... 부모님임께에 큰 절얼얼하고오오... 대문밖아을 나아설얼때에에...가아아슴속오에 무무우엇인이인가아아 아아쉬우우움이이 남암암지이이만안안 ...
자취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싸늘한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하마, 자정을 훨씬 넘긴 후 였다. 가랑비에 옷젖는다더니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던 술에 억규도 제 몸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분위기 탓이였는 지 평소 주량을 넘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마셨다. 게중에서도 현수는 자리가 파할 무렵 즈음해서 거의 정신을 잃고 아예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 ... 하긴, 나도 군대간다고 거의 일주일을 술에 절어 보냈잖아? "
그랬다. 영장이 나오고 입대 날짜가 잡힌 이 후부터는 무슨 걸신들린 사람처럼 오질 나게 술만 들이 퍼마셨다. 맨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자니 왠지 허전하고 약물중독자처럼 불안한 게 날만 어두워지면 이제는 한 동안 못 볼 사람들과 소위 이별주랍시고 분별없이 들이켰었다.
그러고 보면 군대라는 푸닥거리는 누구나 엇비슷했다. 억규 이전의 선배도 그랬었고 억규또래들도 그랬고 현수도 ... 그렇다. 아마 십 수년이 흘러도 군대가는 이의 마음과 행태는 지금과 별로 달라지지 않으리라.
결국 현수는 문대선배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갔다. 대충 씻고 누웠는데 별안간 현수 걱정이 되더니 오늘 막창집에서 있었던 일들, 나누었던 얘기들이 천장에 반추되었다.
정말 군대란 게 우리의 황금 같은 젊은 날을 푹푹 썩게 하는 감옥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대가는 길을 황천 가는 길만큼이나 아쉽고 못마땅해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친다는 생각보다는 불가항력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고 억규 자신 또한 그런 마음으로 군대가는 길을 떠났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애오라지 군대가 우리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갈아먹고 곰팡이 피게 하는 그런 곳만은 아니었다.
처음 훈련소로 들어 설 때의 그 생소하고 낯설은 기분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처량하고 씁쓸했지만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자기 육체의 성취감과 생면부지의 얼굴들이 친형제처럼 정겹고 살가운 느낌으로 그렇게 쉽게 어우러져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전우애야말로 어느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보람일까, 저절로 생각이 미치기도 하는 것이였다.
억규는 졸리는 눈을 껌뻑껌뻑거리다가 책상 맨 아래 서랍 속에 넣어둔 작은 상자 하나를 꺼집어냈다. 은색 포장지로 깔끔하게 포장된 뚜껑을 들어올리자 검은 독수리 마크가 큼지막하게 붙박여 있는 붉은 색 앨범과 수 십 통의 편지, 사진 등이 빼곡이 차 있는 게 보였다.
억규는 반가운 손님이라도 만난 것처럼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독수리 마크가 붙박여 있는 붉은 색 앨범을 꺼집어 냈다.
첫장을 넘기자 " 나는 대한의 남아로서 나의 젊음을 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곳 000부대에서 남김없이 불태웠다! " 라고 휴먼옛체의 기개 있는 글씨로 아로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 그 때는, 그 시절에는 왜 그토록 서럽고 답답하고 암울했던 것일까? 처음 훈련소 정문을 어색한 까까머리로 터벅터벅 들어 설 때와 전역 후 웃자란 머리칼을 귀찮은 듯 쓸어 올리며 탈랑탈랑 부대 정문을 걸어 나올 때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거의가 엇비슷한 심정이리라. 스무해 넘게 적을 두고 살던 곳에서 계급과 명령으로 견고하게 이루어진 군대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설 때의 불안감이나 그런 곳에서 이태가 넘게 생활하다 떠나야 하는 자의 시원섭섭한 기분은 일맥상통하는 감정인 것이다.
억규의 2년 2개월 동안의 군 생활을 되짚어 보면 누구 나다 그렇겠지만 참으로 인상적이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도 서 너번 있게 마련 이였다.
자대 배치받은 지 한 달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하루 종일 온갖 잡일에 이리 저리 불려 다니며 막내생활을 했던 억규가 하루는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려 온 몸에 제법 뜨거운 신열을 내며 간신히 하루를 마무리했던 날 이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날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에 있는 야간 소초 경계근무였다. 시간도 그렇거니와 그 때가 막 북쪽에서 칼바람이 불어온다는 1월 중순 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방한복으로 중무장을 한 다 해도 그 시간만큼은 수전증환자처럼 떨 수밖에 없는 노릇 이였다. 가뜩이나 군대에서 아프면 그렇게 서러울 수 없는 데 갓 전입한 이병이 아프다고 해도 어느 누구하나 살뜰하게 보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터라 억규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구리선처럼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기합이 빠지니 아프니, 이병이 아플 세가 어디 있냐고 하루 종일 정말 악독한 지주처럼 억규를 괴롭히던 김병장이 귀찮은 듯 느기적 느기적 일어났다.
" 야, 임마! 옷 다시 벗고 누워 있어. "
" ... . "
사슴처럼 멀뚱멀뚱 김병장을 쳐다보고 있던 억규에게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 뭐 하고 있어, 임마! 다시 누우란 말야. 오늘 근무는 내가 대신 서줄 테니까 니 몸이나 신경써! 이런 데서 아파 봤자 괜히 서럽고 고향 생각밖에 안 나니까 다음부턴 병신처럼 아프지 마! 알았어? "
언제나 그랬지만 김병장의 말투는 상당히 신경질적 이였다. 후임을 위해 그런 식으로 배려하면서도 추호의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선임으로서의 제 할 일을 다하는 김병장이 그 날부터 억규의 마음깊이 남은 건 어김없었다.
지금은 전남 목포 어딘가 에서 용접공으로 일한다고 몇 달 전에 연락이 닿기는 했지만 그 날처럼 억규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전우들간의 사랑과 의리는 그 이후로도 잊을 만하면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물론 상습적이고 정도를 넘어선다 싶은 구타와 가혹행위, 야만적이고 매몰찬 기합과 인격모독 등이 없었던 건 아니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변함없이 대한 민국의 군대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전우들간의 아교풀처럼 끈끈하게 엮어져있는 사랑과 의리가 아닐까 하고 억규는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따로 있었다.
한 학기 대학 생활을 뒤로하고 군 입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이였다. 이 광활한 자유와 낭만, 청춘을 내버리고 닭장 같은 군대라는 곳으로 갈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지고 모든 게 절망적으로 보이기 조차하는 것이였다.
그러다 입영을 위해 이른 아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배웅 나온 선배, 동기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평소 문학회에서 형, 동생처럼 절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가면서 읽어보라고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줄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는 듯.
버스가 막 요동치기 시작했고 배웅 나온 사람들이 콩알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지금 돌이켜봐도 억규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온갖 생각들로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억규는 마침 그 선배가 준 서류뭉치에 생각이 미쳤다. 뜯어보니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와 너덜너덜한 대학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억규는 먼저 종이 쪽지를 펼쳤다.
억규에게
군대가는 길을 내가 존경하는 어떤 시인은 썩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더구나. 생각해보니 그도 맞는 듯 하다. 황금의 꽃같은 이 청춘을 군대라는 곳에서 보내기엔 너무나 간절한 무엇이 있다. 하지만 왜 군대가는 길을 썩으러 가는 길이라고했는 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렴. 아울러 썩는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지, 왜 썩어야 하는 지, 어떻게 썩어야 하는 지도 마음속 깊이 되새겨 보렴. 네가 썩는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훈련소 정문을 들어선다면, 확신하건데 2년 2개월의 군생활이 결코 후회되거나 아쉽지만은 않을 꺼다. 그리고 같이 동봉하는 대학노트는 훈련병 시절부터 제대할 때까지 틈틈이 선배가 써온 일기장, 아니 수양록이다. 정말 아끼고 간직하고 싶은 내 보물 1호지만 너에게 많은 도움과 위안이 될 것 같아 큰맘먹고 함께 넣어 보낸다. 모쪼록 건강하고 성실하게 복무하길 바라며...
가슴이 뜨거워져 왔다. 아직 시작해보지도 못한 군생활이였지만 선배의 편지 한 통으로 아예 자신감을 얻은 듯한 묘한 전율을 느꼈다. 사람이란 이렇듯 사람에게 위안 받고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다시 현수는 대학노트를 주루룩 펼쳐 보았다. 낡을 대로 낡아버린 노트였지만 왠지 맑고 그윽한 향기가 나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억규는 군 입대를 하루 앞두고 써놓은 듯한 첫페이지에 눈길이 멈쳤다. 그것은 선배만의 고백이기보다는 억규 자신의 동일한 심정이기도 했기 때문 이였다.
... 이제 채 몇 시간도 남지 않았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멍하니 창문만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누군가와 얘길 하고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누군가가 아버지도 어머니도 친구도 아닌 바로나 자신인 것을 알았을 때 난 이미 진정한 남자가 되어 가는 험난한 길 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난 결코 두려워하거나 아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당당하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걸으며 나 자신을 좀더 구석으로, 시련과 고통이 있는 곳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대는 날 시험할 수 있는 좋은 장소임에 틀림없다. 아니, 새로운 날 만날 수 있는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다, 축복이다...어쩌면...
아무리 뜨거워지고 고양된 억규의 감정으로도 군 입대를 코앞에 두고 기회니 축복이니 하고 적을수 있는 선배의 일기는 짜장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 후 선배가 내놓은 이 일기장은 억규의 군 생활 내내 부모님과 같은 비중으로 많은 도움과 의지가 되었다. 특히 일이병때는 편지와 함께 억규의 든든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면서 억규도 마찬가지로 바쁘고 눈치보이는 일과 속에서도 수양록,아니 일기라 는걸 틈틈이 써왔고 그 일기장은 선배가 얘기한 것처럼 지금 억규의 보물 1호가 되어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 이순간,왜 갑자기 현수가떠오르는지 억규는 흠칫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그래도 이 일기장은 필요한사람이 따로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억규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현수에게 억규의 일기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일기장 속에 베어있는 인내와 용기, 지혜가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몰랐다. 억규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일기장을 한동안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해온 친구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깊은 산 속 이였다. 쫓기는 산토끼처럼 허겁지겁, 철저망을 넘고 마을을 지나 미로 같은 산기슭으로 뛰쳐올라온 현수는 막무가내로 목졸라오는 이 적막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구덩이에 몸을 숨기고 잠시 네둘레를 살펴보고 있던 현수는 새처럼 자유롭게 풀어 줘! 날 놓아 달란 말이야! 외치고 싶었지만 머얼리서 현수를 찾는 수 십개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곤 다시 몸을 구덩이 깊숙이 밀착시켰다. 제발... 제발... 그러나 현수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수십, 수백 명의 부대 원들이 현수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네 까짓게 도망가면 얼마나 가겠냐는 듯 조소와 비아냥거림으로 무장한 그 얼굴들이 스르르 현수를 향해서 다가오자... 악!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막 세 번의 종을 두드리던 벽시계가 우두커니 현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위는 마취라도 된 것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하, 꿈이었구나!'
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껌뻑껌벅거리던 형광등이 두 눈을 부릅뜨고 방안을 노려보자 순식간에 방안을 옥죄던 어둠이 알코올처럼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요사이 부쩍 악몽에 시달리는 현수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군대가 뭐기에 이토록 현수의 자유분방한 정신을 옥죄고 드는 지... 정말 알 수없는 노릇 이였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현수는 춘천가는 기차를 타고 정든 고향과 사랑했던 사람들을 두고 기약 없이 떠나야 한다. 그런데... 왜?... 왜 내가 떠나야 하는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예 현수의 의식깊이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아버지 말씀처럼 쉽게 그리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쯤은 무엇보다도 현수 자신을 위해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자고로 대한 민국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야. 아버지도 니 나이 때는 철없이 시간 죽이고 방탕한 생활을 하곤 했지만 군대갔다오니 세상이 전혀 딴 판으로 보이더라 이기야. 시간 아까운 줄도 알겠고 친구, 부모 고마운 줄도 알겠고... 뭐, 불알차고 나와서 한 두 번 두들겨 맞는 것도 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경험인기라. 니도 다아 알게 될 끼라. 지금은 마 답답하고 죽으러 가는 것같아도 막상 부딪히고 넘어보면 별거 아닌게 군댄 기라. 이 자슥아! 너무 기죽어 있지 말고 인상 좀 펴라. 군대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 생각하면 니는 복받은 기다, 알겠냐? "
제 아무리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얘기라 해도 현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젊음의 절정을 고스란히 빼았겨야 하는 슬픔은 정당화 될 수 없었다. 시계침 소리만 더욱더 깊어지고 마찬가지로 현수의 마음도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는 첩첩산중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미 잠은 달아났고 뚝딱뚝딱 거리는 내부의 소음 때문에 더이상 방안에서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던 현수는 무작정 집을 빠져 나와 어디론 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새벽녁의 거리는 간간이 빛살처럼 쏘다니는 총알택시 몇 대를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마구잡이로 발걸음을 옮기는 현수의 눈에 가로등 불빛이 절망처럼 어른거리고 있었다.
현수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건 새벽 6시 경이였다.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던 억규의 귓가로 현수아버지가 내던진 말은 순식간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번쩍 정신이 들 정도로 충격적 이였다.
"현수가 없어졌다!"
...이럴 수가? 억규는 마치 제 자식이라도 잃어버린 듯 불쑥 이불을 걷어차고 나와 다시 한번 똑똑하게 물었다.
"현수가 뭐...뭐 어떻게 됐다고요?"
"글쎄, 새벽에 일어나 현술 깨우러 갔더니 얘가 방안에 없더라. 그래서 내딴엔 화장실 갔나 싶어 화장실에 가봐도 없고해서 마당에 바람쐬러 갔나싶어 나와봐도 없구나. 그래서 혹시 너한테 갔나싶어 이렇게 연락한 건데. 어이구! 도대체 이놈이 어딜간거야. 오늘이 어떤 날인데..."
현수아버지는 아예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억규야, 니는 혹시 짐작 가는 데가 없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시간에 현수가 갈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 후배, 선배들 집에 다 연락해봤지만 현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늘 현수가 타야할 기차는 9시30분발 춘천행 통일 호였다. 이미 9시에 동대구 역에서 현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던 억규와 세훈,문대선배,희경,종문선배,주환선배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느 곳에도 현수가 있음을 알지 못했던 억규는 다시 현수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마찬가지로 현수네 집에서도 난리가 난 듯 현수아버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저희들이 계속 찾아보고 연락드릴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수 절대 사고칠놈 아니니까요!"
이후 씻는 둥 마는 둥하고 현수가 갈만한 곳을 샅샅이 뒤지고 있던 억규는 8시가 조금 남짓해서 세훈,문대선배,희경,종문선배,주환선배를 학교 안 동아리 방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현수가 정말, 정말 도망간 거야?"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주환 선배가 먼 저말을 꺼냈다.
" ... 그럴 리가 없다. 현수가 어디 그럴 아가? 너거도 다 알잖아? 현수 그럴 자슥 아인거?"
문대선배가 현수편을 들며 다짐이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 하긴 ... 현수가 이럴 리 없어요. 절대... 이런 짓을 할 애가 아니에요."
세훈은 진심으로 걱정이라도 되는 듯 문대선배와 마찬가지로 현수를 옹호했다.
" 하지만, 영장 받고 현수가 좀 이상한 건 느꼈어. 얼굴 색도 어둡고 말수도 줄고... 저 혼자서 맘고생이 많았나 보다."
종문선배는 이제서야 기억난다는 듯 손바닥을 부딪히며 말했다.
다시 한 번 현수아버지께 전활 해봤지만 여전히 현수의 거처는 알 수 없었다. 막 9시를 알리는 동아리 방의 자명종 시계가 종을 울리자 아예 모두가 긴장이 되고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이제 현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연거푸 이런 생각들이 억규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이때였다. 갑자기 억규의 삐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현수네 집 전화번호였다. 머뭇거릴 것도 없이 부리나케 공중전화로 뛰어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억규야, 현수지금 동대구역에 있단다. 기차시간이 9시30분이니까 지금가면 볼수있을끼다. 나도 지금 출발할 테니 니도 어서 글로 오너라."
"...이 나쁜 자식!"
억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군대가는게 무슨 큰 대수라고 이토록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걱정시키는 걸까?
택실 타고 동대구 역에 도착했을 때는 9시 10분을 조금 넘긴 후였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후다닥 대합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현수 말고도 많은 입영 자들이 개찰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대합실을 둘러보고 있으니까 반대편 문에서 현수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현수는 어디있노?"
"저희들도 방금 도착해서 찾고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입영을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모두가 엇비슷한 꼴을 하고 있었다.
"저, 저기 있어요!"
그래도 희경이가 먼저 현수를 찾아내고 소리쳤다. LA 다져스라고 쓰여진 모자를 푹 눌러쓰고 사람들 사이에 서성이고 있으니 금세 보일 리가 만무했다.
"현수야! 유현수!"
현수가 무심하게 짝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석고상처럼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게 눈동자도 붉그수름하게 충혈 되어 있었다.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잔뜩 화가 나있던 아버지도 억규도 현수의 얼굴을 보자 이내 시들시들해지고 말았다.
"..."
아무 대꾸도 않고 휑하니 딴곳을 바라보고 있는 현수의 입가가 사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 왔어요... 왜 갑자기... 바다가보고 싶었는 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일출까지 보고 왔어요. 근데 그 순간 제가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거예요. 남자로 태어나서 어쩌면 축복 받은 일일지도 모르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레 겁먹었었나봐요. 한 번 해보지도 않고 막상 부딪혀 보지도 않고 지레짐작으로 움츠리고 겁먹은 꼴이죠. 주위를 둘러봐요. 나 말고도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영을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다 알고 있어요. 그들의 마음속에도 두려움 반 아쉬움 반의 감정이 파도치고 있다 는걸. 하지만 내가 날 믿듯 그들도 그들 자신을 믿을 거예요. 바로 그 힘인 것 같아요. 고향과 친구, 애인을 등지고 칼바람 부는 철책선 야간근무를 서고 있는 군인들의 가슴속에는 내가 이 조국과 평화를 지키고 있는 한 내 부모, 내 친구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바로 이런 생각들이 수많은 군인들로 하여금 하루하루 근무에 임하게 하고 조국을 지키게 하는 원동력인 것을 이제야 알았어요.... 그건 바로 사랑의 힘이죠. 크고 거룩한 사랑! 난... 그걸 몸소 실천하러 가는 거였어요.... 하지만 미처 그걸 몰랐던 거예요..."
현수의 얘기는 자못 진지했고 엄숙하기 조차했다.
억규는 현수의 초췌한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한 편으론 대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 이제 곧 9시 30분 동대구발 춘천행 입영열차 개찰을 시작하오니 탑승할 분들은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춘천행 입영 열차 개찰이 시작되었다.
현수 아버지는 어느새 김밥이며 음료수, 먹을 것을 사들고 와서는 현수에게 건네주며 지긋이 두 손을 잡았다.
" 이놈아야! 아무쪼록 가서 눈치껏 바리바리 행동해서 생활 잘 해라이이, 으잉!"
" ... 예, 아버지!"
현수아버지외에도 세훈, 종문선배, 희경, 문대선배, 주환 선배 순으로 서로 따뜻한 말 한 마디씩 건네자 마지막으로 억규차례가 돌아왔다.
억규는 가방 안에서 서류 뭉치와 편지 한 통을 꺼내었다.
" 내가 네게 줄 건 이것뿐이다. 기차 타서 읽어보고... 이 선배, 현수 믿는 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
그제서야 현수의 얼굴이 훤하게 펴지는 것같더니 손을 내밀었다.
" 걱정 마세요, 억규형! 저... 자신 있으니까!"
종전 같지 않게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 다 들어가는데 니도 들어가 봐라."
문대선배가 주위를 살피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마다 가족들, 친구들, 애인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못내 아쉬운 듯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물러서서 현수가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는 현수아버지와 억규일행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눈으로 현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개찰구를 막 빠져나간 현수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문대선배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 파이팅!"
엷게 웃음띤 얼굴과 마지막으로 들어 보이는 엄지손가락의 포즈를 마지막으로 현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현수가 앉은 곳은 다행스럽게도 창가였다.
'이제 모두 돌아갔겠지... '
그래도 아쉬운 듯 혹시 한 번 이라도 더 볼 수 있을까 해서 창가 밖을 기웃거렸다. 입영 자들의 부모님들로 보이는 몇몇의 어머니가 플랫포옴까지 들어와서 글썽이는 눈으로 아들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애절한 풍경임에 틀림없었지만 왠지 그 모습이 보기 싫어 현수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억규형이 준 서류뭉치에 생각이 미치자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서류 뭉치를 조심스레 뜯자 두툼한 편지 한 통과 오래되고 헐은 "나의 수양록" 이라고 적힌 노트가 나왔다. 먼저 편지를 뜯어읽기 시작했다.
지금 네 기분은 사오년전에 내 기분이고 마찬가지로 그 전전 사람들의 기분과 별반 다를 것 없으리라는 걸 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해주마. 군대가 결코 네 3년이라는 시간을 빈 채로 채우지는 않는 다는 것, 한 번 정도는 갔다올만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약속할 수 있다.
이 편지에 옮긴 시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지만 네 군 생활의 지침이 되었으면 바램으로 옮겨 보았다.
그리고 같이 동봉하는 노트! 좀 부끄럽긴 하지만 군 생활하면서 틈틈이 선배가 적은 내 일기장이다. 내가 왜 일기장을 너에게 주는가 말하자면 사연이 길지만 그 일기장이 그 무엇보다도 많은 도움과 위안을 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무척 아끼는 것에도 불구하고 너에게 주기로 결심했다.
현수야! 모쪼록 성실하게 뭔가 배워 나올 수 있는 군 생활이 되었으면 좋겠고 결코 후회하지 않는 시간이 주어지기를 기도하마. 건강해라.
열 여섯 앳띤 얼굴로
공장 문을 들어선 지 5년 세월을
밤낮으로 기계에 매달려
잘 먹지도 잘 놀지도 남은 것 하나 없이
설운 기름 밥에 몸부림하던 그대가
싸나이로 태어나서 이제 군대를 가는구나
한참 좋은 청춘을 썩으러 가는구나
굵은 눈물 흘리며
떠나가는 그대에게
이 못난 선배는 줄 것이 없다
하지만 현수야
그대는 썩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푸른 제복에 갇힌 3년 세월 어느 하루도
헛되이 버릴 수 없는 고귀한 삶이다
그대는 군에서도 열심히 살아라
행정 반이나 편안한 보직을 탐내지 말고
동료들 속에서도 열외 치지 말아라
똑같이 군복 입고 똑같이 짬밥 먹고
똑같이 땀 흘리는 군대생활 속에서도
오직 성실성과 부지런함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아라
빗자루 한 번 더 들고
식기 한 개 더 닦고
작업할 땐 열심으로
까라면 까고 뽑으라면 뽑고
요령 피우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아라
고참들의 횡포나 윗동기의 한따까리가
억울할지 몰라도
혼자서만 헛고생한다고 회의할 지 몰라도
세월 가면 그대도 고참이 되는 것,
평등하게 돌고 도는 군대생활이
오히려 공평하게 깨끗하지 않으냐
그 속에서 비굴을 넘어선 인종을 배우고
공동으로 위해 다 함께 땀 흘리는 참된 사랑을 배워라
몸으로 움직이는 실천적 사랑과
궂은 일 마다 않는 희생정신으로
그대는 좋은 벗들을 찾고 만들어라
오직 성실과 부지런함만이
진실하고 소중한 가치임을 온몸으로 일깨워
끈끈한 협동 속에 하나가 되는 또 다른 그대,
좋은 벗들을 얻어라
걸진 웃음 속에 모험과 호기를 펼치고
유격과 행군과 한따까리 속에 깡다구를 기르고
명령으로 진위를 분별하여 행하는 용기와
쫄다구를 감싸주는 포용력을 넓혀라
시간 나면 읽고 생각하고 반성하며
열심히 학습하거라
달빛 쏟아지는 적막한 초소 아래서
분단의 비극을 깊이깊이 새기거라
그대는 울면서
군대 3년을 썩으러 가는구나
썩어 다시 꽃망울로
돌아올 날까지
열심히 썩어라
이 못난 선배도 그대도 벗들도
눈부신 꽃망울로 피어나
온 세상을 환히 뒤흔들 때까지
열심히 썩자
그리하여 달궈지고 다듬어진
틈실한 일꾼으로
성실과 실천과 협동성이
생활 속에 배인 좋은 벗들과 함께
빛나는 얼굴로
우리 품으로 돌아 오라
흐르는 눈물을 닦아라
대한 사나이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열심히 열심히
잘 썩어야 한다 ※1)주
이 시를 다읽은 찰나 막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쪽 하늘위로 햇살이 한 움큼씩 부서져 창가로 내려앉고 있었다.
현수는 불끈 두 주먹을 쥐며 창가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적소리가 시원하니 하늘위로 울려 펴지자 희망과 새날의 메시지 같은 수많은 비둘기가 푸드득 푸드득, 하늘위로 날라 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