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 22회 졸업 50주년 기념 문집이 2022년에 발간되었다.
1970년에 졸업하였으니 2020년이 졸업 50주년이었으나 코로나 사태로
2년 늦게 기념 문집이 발간되었고 또 여러 행사도 있었다.
여기에 출간된 나의 회고록을 소개한다.
22회 졸업 50주년 기념문집 이시우 회고록
충청남도 공주가 고향인 나는 1952년생이니 올해가 태어난 지 70년 되는 해로 지난 학기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퇴임하여 서울을 떠나 공주 옆 동네 세종시에 정착하였다. 아버지 따라 초등학교 때 서울로 올라와 노량진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당시 노량진은 거리에 우마차가 다니고 저수지가 있고 논이 있는 시골 동네였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구리 잡으러 다니고 노량진역에 가서 못을 철로에 놓아 기차가 지나갈 때 눌려 납작하게 되면 작은 손칼을 만들기도 하였다.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를 빼내 구워 먹는 데 쓴다. 노량진초등학교는 소위 사대문 안에 있는 일류 초등학교에 비해 낙후된 시골학교로 내 위에 선배 중 세칭 일류 중학교에는 한 명도 졸업생을 보낸 적이 없는 후진 학교였다. 그래서 중학교 입시에 겁먹어 경기중에 지원 못하고 서울중에 입학하게 되었다. 중, 고등학고 6년을 꼬박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통학을 하였고 시청앞에서 내려 이화여고 앞을 통해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비가 오는 날에는 동네에 보드블록이 깔리지 않아 내 운동화는 진흙투성이였고 친구들은 서울특별시가 아니라 보통시에 사는 촌놈이라고 놀리곤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에 서울공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노량진에서 경인선 열차를 타고 용산역에서 내려 경춘선 열차로 갈아타고 청량리 바깥 공릉역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생활을 2년 하였고 나머지 2년은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이제 생각하면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서울공대를 졸업할 즈음 박정희 대통령이 특례법에 의해 설립한 카이스트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카이스트는 교육부가 아닌 과기부 산하로 졸업생들에게는 국내에 3년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나는 2기생으로 졸업하였고 홍릉에서 2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 당시 지하철 1호선이 개통이 되고 청량리역에서 내려 경희대 앞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왕래하였던 기억이 난다. 졸업 후 방위들이 받는 3주 훈련을 마치고 이병으로 제대를 했으며 카이스트 옆 키스트에서 연구원으로 3년 근무하였다. 그 당시 우리의 대학은 여건이 좋지 않아 공부하려면 유학가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기억에 서울공대 화학실험실에서는 조선총독부라 찍혀 있는 화학천칭을 사용했고 나라가 해방이 된 후 긴 세월이 지났어도 일제 강점기 때 쓰던 기기를 그대로 쓸 정도로 가난했다. 그 당시 정부의 구호가 100억불 수출, 일인당 소득 1000불 시대가 목표였던 기억이 난다.
석사 2년, 키스트 복무 3년 하여 대학 졸업 후 5년 만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 최고의 공과대학 MIT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보스톤 옆 캠브리지에 도착해 보니 미국 사람들은 내 나이에 학위를 마치고 학교에 교수로 부임하는데 나는 학생이었고 문화적 충격에 극심한 경쟁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돌이켜 보면 대학 4년을 온전하게 보낸 해는 1학년뿐이었고 나머지는 데모로 얼룩져 제대로 공부를 못했었다. 이곳 로간 에어포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학교에서 소개해준 호스트 패밀리가 마중을 나왔고 숙소를 구하기 전까지는 그 집에 며칠 머물렀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해도 내색을 할 수 없었고 떠날 때 어디서 들으셨는지 어머니가 싸준 고추장 단지와 마른 멸치가 있었는데 꺼내 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1979년 8월에 도착했는데 미국에 도착해 칼러 티비를 처음 보게 되었고 10월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 뉴스가 있었고 그해 11월 추수감사절 때는 또 호스트 패밀리 집에 초대되어 칠면조 고기를 먹고 이민의 나라 미국에 살게 되어 감사하다며 미국의 정신에 대해 설명도 듣고. 하기는 유학생들 받는 것이 단순한 자선 사업이 아니라 친미주의자를 양성하고 또 그들의 두뇌를 활용하여 나라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이 있다 하는데. 광활한 땅, 드넓은 잔디밭, 그 옛날 우리 조상이 이곳에 와 깃발을 꽂았다면 하고 친구들끼리 이야기한 적도 있고. 어쨌든 귀국 후에도 대한민국 촌놈을 국제무대에서 교육받게 해준 감사의 마음으로 학교 모금에 헌금을 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 같다는 하바드, 공장 같다는 MIT가 있는 캠브리지는 그야말로 인재들이 모인 곳이다.
MIT의 상징 킬리안 코트. 건물 상단의 돔은 중앙도서관.
다른 주립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와보고는 이 동네 살벌해서 못 있겠다 하는 일도 있었다. 학교 화장실에 낙서가 그득한데 ‘MIT is hell’ 하는 글도 있는 것 보니 미국 학생들도 스트레스받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곳은 박사를 하겠다는 학생 중 반 정도는 두 번의 자격시험을 통해 걸러낸다. 부임한 젊은 교수도 반 정도는 테뉴어를 못 받고 쫓겨난다. 미국 학생들은 자격시험에 실패하면 취직하거나 다른 학교로 옮기면 되지만 외국에서 유학온 학생은 그야말로 배수진을 친 상황이다. 자격시험에 두 번 낙방해 눈물을 짜며 연구실을 떠나는 미국 학생을 보기도 하였다. 뉴욕 주 북부를 뉴잉글랜드라 하는데 영국에서 박해받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향해 도착한 곳이 마사츄세츠의 플리머스란 곳으로 영국식 지역 이름이 곳곳에 있고 지역 이름도 그래서 뉴잉글랜드이다. 5년의 세월이 흘러 학위를 받게 되고 화학공학과에서 재료공학과로 옮겨 2년의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0년 중반 당시 보면 일본 유학생들은 거의 없고 그 대신 파견 나온 회사의 연구원, 방문교수들은 많았다. 실로 그곳에서 일본 사람들의 철저함을 느낄 수 있었다. 파견 나온 연구원은 연구실의 연구 데이터, 교수들의 동정을 매주 꼼꼼하게 기록하여 보고하는 것 같고 방문교수들은 여유를 즐길 만도 한데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 그 나라의 수준과 국력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일본 자동차, 반도체, 각종 전자기기들이 미국으로 물밀 듯이 들어오던 때로 디트로이트에서는 미국 자동차 산업 근로자들이 일본차를 거리에 내놓고 망치, 도끼 등으로 부수는 일도 있었고 2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진정 누구이고 이제 미국은 농사나 지으며 살아야 한다는 자조적인 말이 퍼져나가던 때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동네 골목을 지날 때 놀던 아이들이 날 보고 ‘Japanese go home!’ 하는데 나는 한국 사람이야 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후에 안 일이지만 당시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이 무너지고 메모리에 집중했던 삼성이 덕을 보았으며 대만은 파운더리 산업을 키워 오늘날의 TSMC가 탄생하게 된다. 멕시코 학생이 나에게 탄식을 하며 이야기했다. 멕시코에는 철강회사가 옆에서 기름이 나고 철광석이 나도 한국의 포스코처럼 좋은 품질의 철을 값싸게 만들지 못한다 했다. 왜 그러냐 했더니 멕시코 제철소의 근로자들은 점심식사하며 낮술을 하고 나사가 풀려 있는데 사람의 차이가 아니겠나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포항공대에 부임해서 포스코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미국 철강회사들이 행정부, 의회에 항의를 해서 어떻게 포스코는 철을 그렇게 싸게 만드느냐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는 것이 틀림없으니 조사를 해 달라 해서 의회의 비공개 청문회에 불려가 발표도 했다는 것이다. 철광석, 코크스, 원유 등 원자재를 모두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에 자체 접안시설이 있어 별도의 항만 사용료도 내지 않고 또한 내륙으로 운송하는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한다. 이런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설명해야 했다 한다. 어쨌든 아무도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아 대일청구권 자금을 투입한 포스코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으로 제철소를 짓고 운영하였으며 돈을 많이 벌어 인재보국(人材報國)의 정신으로 포스텍을 설립하였다. 1986년 8월 신생대학인 포스텍에 부임하여 낯선 곳 포항에 도착하였다. 화학공학과 1호 부임 교수다. 다른 곳에서의 러브콜도 있었으나 포스코에서 한다하면 시시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설득도 있고 하여. 모든 것을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신생공대, 교과과정, 학칙 만들고 전국으로 홍보를 다녀야 했다. 포스텍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인 박태준 회장의 건학이념에는 국토의 균형발전도 들어 있었다. 벌써 동네 아줌마들은 엄마에게 그 애가 글쎄 어쩌다 포항에를 갔냐 한다하고. 그해 가을 학회를 가니 선후배 동기들이 우리나라에서 한국의 MIT만든다고 한 대학이 한둘이 아니니 기대하지 말라, 그러나 대학은 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서울에 자리가 나면 곧 올라와라 등 위로의 말들을 한다. 그렇게 세월이지나 포항 생활 30년이 흘렀다. 이 시점에서 성공했느냐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직 실패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없으니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포항공대 노벨 동산에는 다수의 노벨 수상자가 방문하여 기념 식수 했음.
여기에 세워진 박태준 포항공대 설립이사장 동상
2015년 숙대에서 공과대학을 만든단다. 과거 정부에서 이대, 숙대에 공대를 만들라 제안했는데 이대는 했고 숙대는 돈이 없다고 안 했단다. 결국은 20여 년이 늦은 시점에 숙대도 공대를 만들기로 했고 포항공대를 협조 대상으로 삼아 총장 이하 보직교수들이 포항공대를 방문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숙명여자대학교 공과대학 초대 학장 겸 석좌교수로 2016년 1월 1일 부임했고 퇴임을 1년 앞둔 시점에서 포항공대를 떠나게 되었다. 2016년 3월에 화공생명공학부와 IT공학과 두개 학과 정원 100명으로 시작한 공대가 2017년에 프라임사업을 유치하면서 기계, 전자과가 새로 설립되고 정원 430여명에 7개 전공으로 확대되었다. 부임하여 만든 화공생명공학부는 설립 6년 만에 교내에서 제일 많은 연구비를 확보한 학과로 발전하였으며 12명의 교수 중 8명이 우수 강의교수로 선정되었다. 2022년 1월 만 6년의 숙대 석좌교수를 마무리하게 되었고 두 번의 고별 강연을 끝으로 뒷일은 젊은 교수들에게 그리고 차세대를 짊어질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첫 번째 고별 강연은 ‘동북아 정세와 과학기술전쟁,’ 두 번째 고별 강연은 ‘인류세(anthropocene)의 환경문제’였다. 미중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반도체 기술 등의 전쟁, 그리고 미세먼지, 탄소중립 등의 환경문제, 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차이나 리스크 등을 다루었고 여성 공학도들의 책임도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로 숙대에는 ROTC(학군단)가 있고 올해에는 공군학생군사교육단도 창설되었다. 이제 국방도 그 짐을 같이 져야하는 상황이다. 숙명여대는 1906년에 조선황실에서 설립한 학교다. 조선왕조에서 녹봉을 받고 봉사한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인연이다.
이렇게 해서 교육에 몰두한 36년의 세월이 마무리되었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에 관련된 화학공정을 연구하고 교육하였다. 그간 CVD핸드북, 재료과학과 공학(교보문고), 소자재료공정개론(카오스북) 등 3권의 저서가 있으며 240여 편의 논문, 70여명의 석, 박사 학생을 양성하였다. 졸업생들은 산업체, 연구소, 학교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랜 세월 고락을 함께했고 인생의 반려자로 포항공대에서 함께 일했던 부인에게 감사드리고 딸아이에게도 감사한다. 이제 여생은 못 했던 일들을 하고 고향 공주에 있는 선영을 돌보는 일을 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