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鄭奉事) 증정봉사/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白首如今擇里仁,백수여금택리인) 내 이제 백발 되어 어진 이웃 만났구나
(好從林下日相親,호종임하일상친) 숲 속에 같이 앉아 도란도란 서로 정겹다네.
(春田共作耕雲叟,춘전공작경운수) 봄이 오면 밭을 갈아 함께 농사꾼 되고
(秋水同爲釣月人,추수동위조월인) 가을 물에 달 잠기면 함께 낚시꾼 되세나.
(隨處生涯由分劑,수처생애유분제) 이르는 곳마다 생애 분수에 맞게 살아가면서
(笑他奔走費精神,소타분주비정신) 속된 일에 정신 팔린 무리들 비웃어 주세.
(功名富貴何須說,공명부귀하수설) 부귀공명을 어찌 입에 올리겠는가
(但願高吟送晩春,단원고음송만춘)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늦은 봄을 즐기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1561~1642)는 송강 정철(松江 鄭澈),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32살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 종전 후 무과에 급제하였다.
50대 초반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51살쯤 「누항사(陋巷詞)」를 지었으며, 82살까지 살았다.
박인로의 삶을 두 축으로 나누자면, 전쟁 참전과 전쟁 후 귀향으로 볼 수 있다.
전쟁 후 귀향은 「누항사」처럼 무너진 삶과 마주한 '몰락 양반'의 현실이다.
박인로의 전반부 전쟁 참여는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무인으로서의 삶이었는데,
이 경험은 귀향 이후 그의 문학적 감수성의 바탕이 된다.
즉 그의 정체성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칼을 들고 나서는 사람이었고,
이 경험이 그의 자부심의 핵심이다.
박인로는 50대 이후 문인 선비가 되었지만, 무인의 정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전쟁을 겪은 무인의 정신을 문학으로 승화한 노년의 문인으로.
송강과 고산의 시가가 관념적인 사대부 풍이라면 노계는 서민 애환을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