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민 교회는 2-30년전 한국교회의 복사판이다.” 한국의 개혁 전도사로 유명한 김동호 목사의 말이다. 작년 12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부흥회에서 그가 진단한 이민 교회에 대한 힐난이다.
김목사는 서울에서 자신이 수천명으로 부흥시킨 동안교회를 과감히 사임하고 숭의교회를 개척하여 개척 일년만에 수천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목회의 달인이다.
이민 교회에 조금이라도 깊이 개입해 본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결코 틀리다고만은 못할 것이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말을 듣고 도전받지 않는 사람도 이상하다.
막가자는 식으로 표현하면 머리에서 뚜껑이 열리면서 이민교회를 뭘로 보는 거야 하면서 약간의 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이런 설교를 우리 이민 크리스쳔들은 한국에서 온 부흥사를 모셔서 듣는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매우 일리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이러한 진단이 일리가 있다는, 어떤 면에서 낯설지 않은 것은, 이민 교회 뿐 아니라 이민 사회에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0년전에 필자가 아틀란타에 발을 딛고 이곳에서 처음 주간지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그것은 문화 충격이 낯설음과 뒤섞인 것이었다.
필자는 일년 여 동안 주간지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일단 필자는 영어에 주눅이 들어야 했다. 한번은 컴퓨터 발음이 문제된 적이 있었다. 컴퓨터를 컴퓨터라고 말하는데 싱긋이 웃는 이민 고참 동료가 있었다. 비웃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컴퓨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발음이 옳건 그르건 싫건 좋건 나도 몇 년이 지나 한국에 갔을 때 컴퓨러로 발음하게 되었고 그런 나를 한국의 고교 동창들은 부러워한 적이 있다.
낯선 환경에서 영어와 문화에는 주눅이 들었지만 교포 신문을 보고는 묘한 우월감이 들기도 했다. 김목사가 보는 이민 교회가 한국에서 보는 신문과 이곳에서 보는 신문의 차이일까?
나도 주간지에서 일했지만, 지면과 활자는 그렇다 치고 내용 마져도 정말 왜 신문을 봐야 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교포 동향을 아는 데는 주간지가 그만이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인터넷도 없었고 신문의 내용과 형식의 질을 탓하기 전에 한국어로 된 종이와 활자가 정감이 있고 귀하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물론 엘에이나 뉴욕과 같이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는 대도시에서는 약간 다른 양상이 전개되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이민 교회와 사회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그 모든 진단은 피상적이기도 쉽다. 이민 사회의 특수성과 경제적 사정 등을 감안 할 때 한국, 그것도 서울의 상황과 직접 비교하는 자체가 무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목사의 진단이 전적으로 타당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김목사의 진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많은 이민 교회와 사회가 사실상 소위 말하는 주류 문화에 단절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절 자체는 굳이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단절이 세상의 흐름과 분리되어 굳어지고 고집이 생기게 되고 교회가 과거에 하던 형식과 내용을 되풀이 하기가 십상이다. 그 결과 새로운 새대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다.
웬만한 이민 교회를 가보면 교회마다 예배의 형식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소위 말하는 장로교 풍의 전통적인 예배 형식이 주종을 이룬다. 예배의 형식에 교파나 교단이 차이가 거의 없다. 장로교나 침례교나 감리교나 성결교나 순복음이나 모두 비슷비슷하다.
성가대도 그렇다. 성가대 복장도 천편 일률적일 뿐 아니라 내용도 매우 전통적이다. 성경을 보는 시각도 거의 같다. 어쩌다 조금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어느 교회를 가나 다르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어느 교회를 가나 은혜를 받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한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윤리나 도덕을 문제 삼아 교회가 분열된다.
윤리나 도덕은 중요하지만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은 사실 군대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람을 털면 먼지가 나오게 되어 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사람이 그렇게 도덕적이고 거룩할 수 있는가?
사람에 대한 진단을 예수에게서 들어보자.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방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장 20-23).
이 말을 한마디로 말하면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을 사람은 없다는 가르침이다.
점점 이민 교회는 사회와 단절이 되어 간다. 사회는 급속히 변해가는데 교회에서는 여전히 은혜를 강조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분명히 은혜를 받는데 사회에 나가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사회를 해석하고 이해할 능력을 교회가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세상에 나가서 6일을 살다보면 온갖 세상일에 부대낀다. 그러면서 분별력을 잃은 채 세상적(?) 으로 살아간다. 문화적 충격, 언어적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존 경쟁에 치중하다가 그나마 교회가 주는 편안함과 안식을 찿아 오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앞서가는 발전된 교회는 열린 예배니, 제자 훈련이니 하면서 한국교회의 성공적인 프로그램들을 직수입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의 소스는 우리의 터전인 미국에서 개발되고 도입된 프로그램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국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이 한국을 거쳐 다시 미국에 수입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교회 프로그램이 한국을 거쳐서 수입이 되든 미국의 것을 직접 받든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또 조금 늦는 것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점에 있다.
어느 교회를 가나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것만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교인들이 모든 교회의 예배와 설교가 같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극이다.
천편일률적이고 경건주의 일색인 교회는 결국 생명력을 잃어 버리게 된다. 신앙생활의 풍성함을 잃어 버리게 될 뿐이 아니라 후세에게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다.
성경이 이미 다양하게 하나님을 증언하고 있는데 왜 이민 교회는 한결 같은 모습을 띠어야 하고, 그것이 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마는가? 그런 결론은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교회가 세상과 교회를 분리해서 교회는 선이고 세상은 악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세상이 없이 어찌 교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가?
세상은 교회의 적이 아니다. 세상은 교회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다. 세상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교회가 이민 사회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민 교회가 2-30년전 한국 교회의 모습을 카피한다는 책망을 듣는 대신에 미국에 사는 이민교회 독특한 장점을 한국 교회에 역으로 가르쳐주는 길은 없을까? 길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