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고 목이 말라 눈을 먹었고, 가다가 지치고 졸리면 눈 위에 소나무 가지를 쌓아놓고 쪽잠을 잤다. 30분정도? 한번은 자다가 너무나 추워서 일어났는데 몸은 꼬집어도 아프지가 않았고, 이발이 덜덜 부딪쳤고, 그냥 엄마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출처 : 자유북한방송 선우은숙 2003년 입국
나는 93년도부터 언니와 중국연선지대에 장사를 같이 다녔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고, 장사랍시고 몸을 좀 움직이면 돈도 좀 벌 수 있었기에 중국을 드나들었다.
당시 내 나이는 14살이었다. 그 후로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간만 나면 중국물건을 받으러 언니를 따라다녔다. 단임 선생님한테 선물을 조금 드리면 출석 같은것은 따지지도 않았다.
1996년의 일이다. 16살 때 언니를 따라 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어느 날 우리가 묵고 있던 집 주인이 어디론가 함께 가자고 했다. 다른 언니들도 함께 가는 길이어서 주저 없이 따라 나섰다. 어느 외딴집에 도착하자 그 집 주인이 언니들과 나를 바라보며 데려온 사람에게 중국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것이었다.
예전에 여자들을 팔아먹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들었던 지라 몹시 긴장했던 순간을 보내야 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저녁을 대충 치르고 나서 안내해온 조선족 청년에게 물었다.
<우리를 팔려고 했나요? >
청년이 대답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왔는데 너만 모르고 왔다.>
엉뚱하고, 기막힌 일에 말려들었다 싶었지만 당시의 형편에서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나요?>
우리를 중국의 안쪽(변방에서 떨어진 곳)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다음날 언니가 떠나갔다. 다음날에는 청진에 있는 언니와 내가 낮선 사람들을 따라 떠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자에 대해 전혀 몰랐었고, 또 어머님으로부터 여자는 시집갈 때 까지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에...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어쩔수 없었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나의 눈앞에 시퍼런 칼이 문득 다가왔다. 만약 저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을 해 왔다. 나도 사람이면서 사람이 그렇게 무서워 본 적이 없었다.
낮선 남자들을 따라 나서야 했던 상황...고향에서 나를 기다리실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되어서 청진 언니와 나는 안쪽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청진 언니는 북한에 어린 아들을 두고 왔었는데 장사를 하다가 다 망해버려 피를 팔아(그때 당시 북한에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피를 팔면 밀가루를 줬음)장사밑천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다 또 망해서 중국으로 넘어 왔는데 이름도 알수 없던 중국 내륙의 59먹은 총각한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어린 탓인지 나보다 9살 많은 남자에게 팔리었다. 그때 나를 팔아먹던 조선족은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머리를 가로저으라고, 나름대로의 “선심”을 썯다.
그렇게 나는 중국 돈 8000위안에 팔려갔다. 연애한번 못해본 나였다. 한창 공부할 나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먼 타향에서 말도 안 통하는 중국인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에 또 눈물이 났다.
언니들과도 모두 헤어지고 앞으로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나 혼자 모든 걸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 또한 한 없이 떨려났다.
한편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망을 쳐야 한다...몇일 후, 내의 바람으로 부엌에 가는 것처럼 하면서 문을 열고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는데, 문은 쇄사슬로 잠겨 있었다.
아닌 밤중에 문소리가 나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내친걸음이라 대문을 타고 넘어 죽을 각오로 도망을 쳤다.
사랑하지도 않고, 한 민족도 아닌 남자에게 16살의 순정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이 없었다. 5시간 정도 숨어 있다가...밤길을 혼자 걸었었다. 겨울의 눈길을 내의 바람에 걸었다.
많이도 추웠지만 두려움과 추위를 뒤로 한 채 멀리 멀리 달음질 쳤다. 산길을 타야만 붙잡히지 않을 꺼라 생각하고 산 을 탔고 봉우리 세 개쯤을 울면서 넘었다.
배고프고 목이 말라 눈을 먹었고, 가다가 지치고 졸리면 눈 위에 소나무 가지를 쌓아놓고 쪽잠을 잤다. 30분정도? 한번은 자다가 너무나 추워서 일어났는데 몸은 꼬집어도 아프지가 않았고, 이발이 덜덜 부딪쳤고, 그냥 엄마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엄마 만 찾으면서 산속에서, 그것도 내의만 입고 눈 위에서 소나무가지를 이불처럼 가린 채 울었었는데...너무 울고 추위에 떨던 나머지 그날 이후로 피부가 이상해 졌다.
붙잡히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얼어붙은 몸과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이면서, 쓰라리는 얼굴을 싸쥐고서 나는 또 다시 도망자의 길을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끝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걷기만 했다. 하염없이 가다보니 눈앞에 저수지가 있고 작은 초막집이 있었다. 굴뚝에서 연기도 났다.
일단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서 그 집 근처에 다가가 집안을 은밀히 훔쳐보았는데 안에는 연세 많은 할아버지 한분이 홀로 계시는 것이었다.
신세를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70세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라 별다른 일이 꺼라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갔었다. 지금도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상도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라 조금 배워두었던 중국어로 “워 베이 초생라이더 쑈우쿠냥. 얼라 방망바” 난 북한에서 온 어린 소녀입니다. 배고픈데 좀 도와주세요. 할아버지가 들어오라고 했고, 들어간 방안에는 훈기가 돌았다.
몸을 녹이고 있는데 발이 가려워났다. 그 또한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가 두부 2모정도 되는 것을 그릇에 담아 들여오고 밥 담은 소래(그릇)를 내 앞에 내 밀었다. 저수지에서 잡았다는 고기도 요리해주셨다.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넋 나간 애처럼 먹어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이제는 자리를 펴 주셨다.
그렇게 맛있게 먹은 뒤 정신없이 자고 나니 중국 언니들이 내 주위에 빙 둘러 않아 있었다. 근처에 료양소(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가 있었는데 그곳 언니들이 할아버지가 외로워하신다고 종종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이젠 살았다 싶었다. 그곳 언니들과 어울렸고 손짓 발짓 해 가며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친숙해 졌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내가 팔려갔던 집에서 북한 여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트럭을 끌고 온 것이었다.
나는 안가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언니들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말리는 언니들을 밀쳐내며 찾아온 남자들이 얼마나 많이 주먹을 휘두르는지... 너무 많이 맞았었다. 너무나 아팠었다.
맞으면서도 나라를 잘못 만나 내가 이 고생을 하고, 나를 때리고도 아무일 당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횡포가 자유처럼 느껴져 오히려 부러웠다.
트럭에 탔던 남자들은 나를 꽁꽁 묶은 채 차에 던져버렸고 나를 태운 트럭이 료양소를 막 지나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공안을 태운 트럭 두 대가 또 나타났다. 언니들이 전화로 상황을 알린 모양이었다.
공안들이 차에 다가왔다. 나를 때리던 남자들에게 수갑을 채웠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나에게도 수갑을 내 밀었다.
나서 처음 수갑을 찬 내 마음은 콩볶듯 했다. 심장이 멎는것 같았다. 이번에는 춥고 배고파서가 아니라 앞으로 내 앞에 다가올 현실을 난 너무나도 잘 알기에, 겁에 질려서 떨고 있는 나였다.
그렇게 공안에 끌려갔고, 도망 못 가게 침대에 수갑을 연결해 버렸다. 다음날부터 조사가 시작 되었다. 난 중국의 공안오빠한테 살려달라고, 북으로 돌아가면 죽는 다고 울면서 사정했다.
닥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공안오빠라고 불러준 때문일까. 운 좋게 파출소에서 나올 수 있었고 공안 부책임자의 도움으로 식당에서 일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안 오빠를 통해서 한국에 대해 많이 들었다.
가끔은 식당에 공안오빠의 친구들도 와서 식사를 했고, 용돈(팁)도 주고 그랬다. 지금도 그 공안오빠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 식당에서 한 달에 150원씩 주었는데 하루 종일 설거지를 하였고, 또 채소를 씻었고, 아무튼 그때 당시 일년 만 벌어서 집에 가려고 하였었다. 그런데 얼마후 나랑 같이 팔려갔던 청진 언니가 식당에 나타났다.
우리를 팔아먹은 사람들이 붙잡혀서 언니도 잡혀왔다가 공안오빠가 살려줬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살았고, 이번에는 더 큰일이 터졌다. 청진 언니가 팔려갔던 남자의 집에서 성 공안국의 아는 사람에게 우리를 일러바쳤고 드디어 성공안국에서 우리들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우리를 구해준 공안오빠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잡혀가고 말았다. 그렇게 언니와 나는 성 공안국의 담 높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높은 보초막에 군대가 총을 쥐고 서있고, 담장꼭대기에는 전기선들이 칭칭 감겨 있었다.
감방으로 들어가 보니 철문들 사이로 죄수들이 보였다. 머리를 박박 민 사람들이 철문을 등지고 미륵처럼 않아 있는 것이었다. 감방은 처음 본 나에게는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우리를 중국 죄인들이 있는 곳에 함께 넣었다. 중국의 여자죄인들은 밖에만 못 나갈 뿐 료양소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밖에서 음식도 들여다 먹고 화장품들도 잘 쓰고 있었다. 놀음도 놀고 여유가 있어보였다.
북한의 감옥도 이럴꺼야...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다. 얼마후 변방부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정면, 측면...하면서 사진을 찍혔고, 열손가락 모두 지문을 찍었다.
변방부대 감방(탈북자 임시 수용소)에서 나처럼 탈북했던 여럿의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중국측에서 북한에 넘겨줄 인원을 맞추느라 대기시키고 있다는 사람들이었다.
중국에 팔려가서 6년 만에 잡혀왔다는 사람, 두만강을 건는지 8일만에 잡혀왔다는 사람...벼라별 사람들이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 여자는 함경남도에서 살던 여자였는데 나보다 덩치는 컸지만 나이는 열다섯 살인 어린 애였다. 중국에 와서 일 년도 안 되서 잡혔다고 했다. 남편과 같이 살면서 행복했다고 하면서 중국 남편이 자기를 살리느라고 돈도 많이 썼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임신 중이라고 했다.
너무나 놀라웠다. 그때 쯤이면 학교 다니고, 공부하느라 정신없고, 또한 막둥이나 외동딸이면 엄마한테서 어리광을 부리면서 살아야 할 어린애가 애 엄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부모들은 두분다 굶어서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같이 중국 넘어오다가 물에 떠내려가서 죽었다고 했다. 참 불쌍한 아이였는데 그 말을 하면서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드디어 북송되는 날이다. 차를 타고 북한으로 넘어가니 구경꾼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우리를 욕하는 사람들과 보위부의 무서운 눈길 때문에 정말 무서웠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욕이 시작되었다. 이 미친 간나들! 그렇게 ☓을 중국 놈들에게 주고 싶었냐? 간나새끼들, 죽어봐라! 야! 머리숙여! 머리쳐들면 죽여버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