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책에서 마지막 장인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 에 주목을 했다. 금욕? 자본주의? 어떻게 보면 서로 역설적인 문구가 아닌가? 이 주제는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중세시대에 신앙은 절대적인 것 이였다. 직업은 하늘이 정해주신 당연히 그러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고, 천국의 문으로 가기 위해선 향략과 사치를 삼가고 오로지 자신의 소명의식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 이였다. 거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이다! 신교도들은 천국의 열쇠는 나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었다. 이것은 하나의 엄청난 혁명이 였다. 면죄부를 팔아 그 세력을 유지하던 카톨릭계의 높의 신 분들은 당연히 프로테스탄티스트들을 강하게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신의 대한 반항이며 어떻게 보면 신권이 더 높았던 그 시대에 대역죄였을지도 모른다. 즉, 카톨릭의 강한 비세속성, 카톨릭의 최고 이상인 금욕적 성격이 신자들로 하여금 현세의 재물에 대해 보다 강한 무관심을 보이게 했던 상황에서 혼란을 줄 뿐 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카톨릭적인 삶의 영위가 갖는 금욕적 이상에 대한 비판에 이용하며 카톨릭측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한 모든 삶의 내용의 세속화 결과로 주장되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답한다.
카톨릭은 평온하며 영리충동이 보다 적기 때문에, 위험하고 자극적이지만 종국적으로는 명예과 부를 가져다 주는 삶보다는 아무리 적은 수입이라도 가능한 한 안정된 삶의 진로를 택한다. 익살맞은 속담 중에 "잘 먹든지 아니면 편히 자든지"라는 것이 있다. 이 경우 잘먹는 것은 프로테스탄트가 선택할 것이며 잘 자는 것은 당연히 카톨릭이 선택할 것이다. 이 작은 부분에서도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성격은 극명히 들어 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화폐 취득은 근대적 경제질서 안에서 직업상의 유능함의 표현이며 이 유능함은 쉽게 알 수 있듯이 프랭클린 도덕의 실질적인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이 자본주의는 적대적인 힘들과 세계에 대항하며 어려운 투쟁 속에서 꽃을 피워 왔다. "윤리"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규범 부여적인 일정한 생활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이 우선적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적수는 전통주의라 부를 수 있는 관점과 태도였다. 노동을 자기 목적, 즉 자본주의가 요구하듯이 소명으로 파악하는 것은 종교적 교육에 의해 주로 결과된 것으로로서 전통주의적 구습을 타파하는 최선의 기회였다.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생활방식을 자본주의적인 성공조건에 적응시키지 못한 자는 몰락하거나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정확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양에선 노동은 오래 전부터 인정된 금욕적 수단 이였다. 노동은 특히 부정한 생활이라고 일컫는 모든 유혹에 대한 특수한 예방이며 그 역할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였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바울의 말은 만인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 이 말은 노동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도 없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 즉 예를 들어 10시간의 노동시간을 제대로 다 수행하지 못하고 5시간 동안 오락을 하면서 만원의 비용을 지출하였다면 이것은 만원의 비용을 쓴 것뿐만 아니라 그 5시간 동안 일해서 소출 했을 노동력의 대가도 날린 것이 된다. 이 노동력의 대가는 측정이 불가능하여 그만큼 자기 소명을 다 하지 못했다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화제를 바꿔 프로테스탄트에 있어 한 사람이 여러 직업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평가 할 수 있는가? 이 것에 대한 대답은 무조건 ok이다. 단, 그것이 일반의 복지나 자신의 복지에 유익하고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범위내 에서라면 말이다. 그뿐 아니라 직업의 변경도 그것이 경솔한 한 것이 아니라 신의 만족을 위해서 라면 얼마든지 허용된다. 부의 축척 또한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더 이상 죄악이 아니 였다. 그 행위는 신의 만족을 위한 하나의 방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 금욕은 어떠한가? 그들에게 있어서 금욕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노동을 직업으로,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가장 좋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일하기도 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금욕은 다른 면에서 기업가의 화폐취득도 소명이라 해석하여 노동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의무의 이행을 통한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 추구와 교회규율이 당연히 무산계급에 강제했던 엄격한 금욕은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노동 생산성을 강력히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자본주의의 정신, 그리고 직업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방식은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의 최대 장점이자 그 목표는 이윤추구에 있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 자본주의 정신이며 자본주의 자체가 된다. 하지만 절제 없는 소비생활은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하며 인간의 비양심화를 가속화 할 것이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금욕이 없는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