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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성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St Isaiah the Solitary 사막교부들
지성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1번- 27번
There is some uncertainty about the identity of the author of the Twenty-Seven Texts that follow. According to St Nikodimos, St Isaiah the Solitary lived around the year 370 and was a contemporary Makarios the Great of Egypt. Most historians today consider him to be later in date. He is now usually identified with a monk who lived initially at Sketis in Egypt, and who then moved to Palestine at some date subsequent to 431, eventually dying in great old age as a recluse near Gaza on 11 August 491 (according to others, 489). Whichever date is preferred, it is evident that the author reflects the authentic spirituality of the Desert Fathers of Egypt and Palestine during the fourth and fifth centuries. St Nikodimos commends in particular his advice on the rebuttal of demonic provocations and on the need to be attentive to the conscience.
On Guarding the Intellect
Twenty-Seven Texts
1.There is among the passions an anger of the intellect, and this anger is inaccordance with nature. Without anger a man cannot attain purity:he has to feel angry with all that is sown in him by the enemy. When Job felt this anger he reviled his enemies, calling them ‘dishonourable men of no repute, lacking everything good, whom I would not consider fit to live with the dogs that guard my flocks’ (cf.Job 30:1, 4. LXX).He who wishes to acquire the anger that is in accordance with nature must uproot all self-will, until he establishes within himself the state natural to the intellect.
정념들(情念,passion) 중에서 지성의 노염은 자연과 조화를 이룹니다.
이 노염이 없는 사람은 깨끗함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는 원수가 그의 내면에 뿌려놓은 것에 대해 노여움을 느껴야 합니다. 욥은 이러한 노여움을 느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나를 비웃네, 나보다 나이 어린 자들이. 나는 그 아비들을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과도 앉히려 하지 않았을 터인데”(욥 31:1)라고 말하면서 원수들을 욕했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노염을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기심을 완전히 근절하여 내면에 지성에 어울리는 상태를 확보해야 합니다.
2. If you find yourself hating your fellow men and resist this hatred, and you see that it grows weak and withdraws, do not rejoice in your heart; for this withdrawal is a trick of the evil spirits. They are preparing a second attack worse than the first; they have left their troops behind the city and ordered them to remain there. If you go out to attack them, they will flee before you in weakness. But if your heart is then elated because you have driven them away, and you leave the city, some of them will attack you from the rear while the rest will stand their ground in front of you; and your wretched soul will be caught between them with no means of escape. The city is prayer. Resistance is rebuttal through Christ Jesus. The foundation is incensive power.
자신이 동료들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그 미움에 저항하여 미움이 조금씩 약해지고 사라질 때, 마음 속으로 기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한 영들의 속임수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처음보다 더 강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배후에 군대를 남겨 두고서 그곳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들을 공격하러 나간다면, 연약한 그들은 당신 앞에서 도망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을 몰아냈다고 해서 당신이 우쭐해져서 도시를 떠난다면, 다른 군인들이 당신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동안 그들 중 일부가 배후에서 당신을 공격할 것입니다. 불쌍한 당신의 영혼은 도망칠 방도가 없이 앞뒤에서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도시는 기도를 의미하고, 저항은 예수 그리수도를 통한 반격을 의미하고, 원수가 진을 친다는 것은 성 내는 기질을 말합니다.
3. Let us stand firm in the fear of God, rigorously practicing the virtues and not giving our conscience cause to stumble. In the fear of God let us keep our attention fixed within ourselves, until our conscience achieves its freedom. Then there will be a union between it and us, and thereafter it will be our guardian, showing us each thing that we must uproot. But if we do not obey our conscience, it will abandon us and we shall fall into the hands of our enemies, who will never let us go. This is what our Lord taught us when He said: ‘Come to an agreement with your adversary quickly while you are with him in the road, lest he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deliver you to the officer and you are cast into prison (Matt. 5:25).The conscience is called an ‘adversary’ because it opposes us when we wish to carry out the desires of our flesh; and if we do not listen to our conscience, it delivers us into the hands of our enemies.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며, 열심히 덕을 실천하여, 양심이 비틀거릴 이유를 제공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우리의 양심이 자유를 얻을 때까지 자신의 내면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양심과 우리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질 것이며, 양심은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우리가 근절해야 할 것을 낱낱이 보여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양심에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은 우리를 버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수의 수중에 떨어져서, 결코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마태 5:25)고 말씀하시면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육신의 소원을 성취하기를 원할 때 양심이 우리를 대적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우리가 양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양심이 우리를 원수에게 내어줄 것이기 때문에, 양심은 송사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4. If God sees that the intellect has entirely submitted to Him and puts its hope in Him alone. He strengthens it, saying: ‘Have no fear Jacob my son, my little Israel’ (Isa.41:14. LXX),and: ‘Have no fear: for I have delivered you, I have called you by My name; you are Mine. If you pass through water, I shall be with you, and the rivers will not drown you. If you go through fire, you will not be burnt, and the names will not consume you. For I am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who saves you’ (cf.Isa. 43:1-3. LXX).
만일 하느님께서 지성이 완전히 하느님께 복종하고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소망을 두는 것을 보신다면, 하느님은 지성에게 힘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벌레 같은 야곱아”(이사 41:14),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러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3:1-3).
5. When the intellect hears these words of reassurance, it says boldly to its enemies: ‘Who would fight with me? Let him stand against me. And who would accuse me? Let him draw near to me. Behold, the Lord is my helper; who will harm me? Behold, all of you are like an old moth-eaten garment’ (cf. Isa. 50:8-9. LXX).
이렇게 안심시켜 주는 말을 들을 때, 지성은 원수들에게 담대하게 말할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보라, 그들은 모두 옷처럼 해지고 좀이 그들을 먹어 버리리라”(이사50:8~9).
6. If your heart comes to feel a natural hatred for sin, it has defeated the causes of sin and freed itself from them. Keep hell’s torments in mind; but know that your Helper is at hand. Do nothing that will grieve Him, but say to Him with tears: ‘Be merciful and deliver me, O Lord, for without Thy help I cannot escape from the hands of my enemies.’ Be attentive to your heart, and He will guard you from all evil.
당신의 마음이 죄에 대해서 본성적인 증오를 느끼게 되었다면, 당신의 마음은 이미 죄의 원인들을 물리치고 그것들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항상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되, 도우시는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아십시오. 하느님을 근심하게 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 “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원수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당신이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면, 하느님께서 당신을 모든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7. The monk should shut all the gates of his soul, that is, the senses, so that he is not lured astray. When the intellect sees that it is not dominated by anything, it prepares itself for immortality, gathering its senses together and forming them into one body.
수도자는 영혼의 문, 다시 말해서 감각들을 모두 닫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유혹을 받아 길을 잃지 않습니다. 그 무엇에도 지배되지 않는 지성은 불멸을 위해 준비하면서 그 감각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하나의 몸을 형성합니다.
8. If your intellect is freed from all hope in things visible, this is a sign that sin has died in you.
당신의 지성이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한 모든 희망에서 해방되었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있는 죄가 죽었다는 표식입니다.
9. If your intellect is freed, the breach between it and God is eliminated.
만약 당신의 지성이 해방되었다면, 지성과 하느님 사이의 불화가 제거된 것입니다.
10. If your intellect is freed from all its enemies and attains the Sabbath rest, it lives in another age, a new age in which it contemplates things new and undecaying. For ‘wherever the dead body is, there will the eagles be gathered together’ (Matt. 24: 28).
만일 당신의 지성이 모든 원수에게서 해방되고 안식을 획득한다면, 그것은 썩지 않는 새로운 사물들을 관상하는 새로운 시대 안에서 살게 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마태 24,28).
11.The demons cunningly withdraw for a time in the hope that we will cease to guard our heart, thinking we have now attained peace; then they suddenly attack our unhappy soul and seize it like a sparrow. Gaining possession of it, they drag it down mercilessly into all kinds of sin, worse than those which we have already committed and for which we have asked forgiveness. Let us stand, therefore, with fear of God and keep guard over our heart, practicing the virtues which check the wickedness of our enemies.
교활한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평화를 획득하였다고 생각하고서 마음을 지키는 일을 중단하게 만들려고 얼마 동안 우리에게서 떠나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쌍한 참새 같은 우리의 영혼을 공격하여 붙잡아 무자비하게 온갖 종류의 죄 – 이미 범했으나 용서를 구한 죄보다 훨씬 악한 죄 – 속으로 끌고 내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서 항상 마음을 지키며, 원수의 사악함을 억제해 주는 덕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12. Our teacher Jesus Christ, out of pity for mankind and knowing the utter mercilessness of the demons, severely commands us: ‘Be ready at every hour, for you do not know when the thief will come; do not let him come and find you asleep’ (cf.Matt. 24:42-43). He also says: ‘Take heed, lest your hearts be overwhelmed with debauchery and drunkenness and the cares of this life, and the hour come upon you unawares’ (cf. Luke 21:34). Stand guard, then, over your heart and keep a watch on your senses; and if the remembrance of God dwells peaceably within you, you will catch the thieves when they try to deprive you of it. When a man has an exact knowledge about the nature of thoughts, he recognizes those which are about to enter and defile him, troubling the intellect with distractions and making it lazy. Those who recognize these evil thoughts for what they are remain undisturbed and continue in prayer to God.
우리의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며 마귀가 얼마나 무자비한지 잘 아시기 때문에, 엄격하게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명령하시고(마태 24,4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며 감각들을 경계하십시오. 만일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 당신의 내면에 평안히 거한다면, 그것을 빼앗으러 들어오는 도둑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들의 본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내면에 들어와서 자기를 더럽히며 정신을 산만하고 나태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악한 생각들을 알아채는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에 동요되지 않고 계속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13.Unless a man hates all the activity of this world, he cannot worship God. What then is meant by the worship of God? It means that we have nothing extraneous in our intellect when we are praying to Him: neither sensual pleasure as we bless Him, nor malice as we sing His praise, nor hatred as we exalt Him, nor jealousy to hinder us as we speak to Him and call Him to mind. For all these things are full of darkness; they are a wall imprisoning our wretched soul, and if the soul has them in itself it cannot worship God with purity. They obstruct its ascent and prevent it from meeting God; they hinder it from blessing Him inwardly and praying to Him with sweetness of heart, and so receiving His illumination. As a result the intellect is always shrouded in darkness and cannot advance in holiness, because it does not make the effort to uproot these thoughts by means of spiritual knowledge.
이 세상의 모든 활동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느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의 지성 안에 불필요한 것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정욕적인 즐거움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양해서는 안 되며, 악한 생각을 가지고 하느님을 찬미해서는 안되며, 미움을 가지고 하느님을 높여서는 안되며, 질투심 때문에 하느님을 기억하거나 기도하는 일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어두움으로 가득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불쌍한 우리의 영혼을 가두어 놓는 성벽입니다. 내면에 그것들을 가지고 있는 영혼은 순수하게 하느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영혼의 상승과 하느님을 만나는 일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의 지성은 항상 어두움에 덮여 있으며, 신령한 지식에 의해서 이러한 생각들을 근절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함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14. When the intellect rescues the soul’s senses from the desires of the flesh and imbues them with dispassion, the passions shamelessly attack the soul, trying to hold its senses fast in sin; but if the intellect then continually calls upon God in secret, He, seeing all this, will send His help and destroy all the passions at once.
지성이 영혼의 감각들을 육체의 욕망들로부터 구하여 무정념을 불어넣어 주면, 정념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영혼을 공격하여 영혼의 감각들을 죄 속에 굳게 붙잡아 두려 합니다. 그 때 지성이 은밀하게 계속 하느님을 의지한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영혼을 도우시고 모든 정념을 단번에 멸하실 것입니다.
15. I entreat you not to leave your heart unguarded, so long as you are in the body. Just as a farmer cannot feel confident about the crop growing in his fields, because he does not know what will happen to it before it is stored away in his granary, so a man should not leave his heart unguarded so long as he still has breath in his nostrils. Up to his last breath he cannot know what passion will attack him; so long as he breathes, therefore, he must not leave his heart unguarded, but should at every moment pray to God for His help and mercy.
육체 안에 있는 동안에는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농부가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들이기 전까지는, 밭에서 자라는 곡식에 대해 자신감을 느끼지 못하듯이, 우리가 코로 숨을 쉬며 사는 동안에는 결코 마음을 지키지 않고 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어떤 정념이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순간 순간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16. He who receives no help when at war should feel no confidence when at peace.
전쟁 중에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평화로울 때에 자신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17. When a man severs himself from evil, he gains an exact understanding of all the sins he has committed against God; for he does not see his sins unless he severs himself from them with a feeling of revulsion. Those who have reached this level pray to God with tears, and are filled with shame when they recall their evil love of the passions. Let us therefore pursue the spiritual way with all our strength, and God in His great mercy will help us. And if we have not guarded our hearts as our fathers guarded theirs, at least in obedience to God let us do all we can to keep our bodies sinless, trusting that at this time of spiritual dearth He will grant mercy to us together with His saints.
악과의 관계를 버리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께 범한 모든 죄를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혐오감을 느끼면서 자기의 죄와 결별하지 않는 한, 자기의 죄를 보지 못합니다.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느님께 기도하며, 자신이 정념들을 사랑하던 것을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힘을 다해 영적인 길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자식을 지키듯이 자기 마음을 지키지는 못해도, 최소한 하느님께 복종하면서 몸을 죄 없이 보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며, 이 영적 기근 속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성인들과 우리에게 자비를 주실 것이라고 신뢰해야 합니다.
18. Once you have begun to seek God with true devotion and with all your heart, then you cannot possibly imagine that you already conform to His will. So long as your conscience reproves you for anything that you have done contrary to nature, you are not yet free: the reproof means that you are still under trial and have not yet been acquitted. But if you find when you are praying that nothing at all accuses you of evil, then you are free and by God’s will have entered into His peace.
If you see growing within yourself a good crop, no longer choked by the tares of the evil one; if you find that the demons have reluctantly withdrawn, convinced that it is no use making further attacks on your senses; if 'a cloud overshadows your tent (cf. Exod.40:34), and 'the sun does not bum you by day, nor the moon by night' (Ps. 121:6);if you find yourself equipped to pitch your tent and keep it as God wishes - if all this has happened, then you have gained the victory with God's help, and henceforward He will Himself overshadow your tent, for it is His.
So long as the contest continues, a man is full of fear and trembling, wondering whether he will win today or be defeated, whether he will win tomorrow or be defeated: the struggle and stress constrict his heart. But when he has attained dispassion, the contest comes to an end; he receives the prize of victory and has no further anxiety about the three that were divided, for now through God they have made peace with one another. These three are the soul, the body and the spirit. When they become one through the energy of the Holy Spirit, they cannot again be separated. Do not think, then, that you have died to sin, so long as you suffer violence, whether waking or sleeping, at the hands of your opponents. For while a man is still competing in the arena, he cannot be sure of victory.
마음을 다하여 참 경건을 가지고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다고 해서, 이미 하느님의 뜻에 순응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을 거슬러 행한 모든 일에 대해 양심이 당신을 책망하는 한, 당신은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양심이 당신을 책망한다는 것은 곧 당신이 아직도 무죄 방면을 받지 못한 채 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일 기도하는 동안에 당신을 악하다고 고발하는 것이 없으면, 당신은 자유이며, 하느님의 뜻에 의해 하느님의 평화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내면에서 좋은 곡식이 악한 가라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잘 자라는 것을 보면, 만일 마귀들이 더 이상 당신의 감각을 공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퇴각한 것을 발견한다면, 만일 “구름이 만남의 천막을 덮고”(탈출 40,34),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않는다면”(시편 121,6), 만일 당신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장막을 세우고 보존할 준비가 되었음을 발견한다면 – 이 모든 일이 이미 발생했다면, 당신은 이미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 것이며, 이제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의 장막을 덮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오늘 승리할 것인지 패배할 것인지, 내일 승리할 것인지 패배할 것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싸움과 스트레스가 그의 마음을 조입니다. 그러나 그가 무정념을 획득하면, 싸움은 종식됩니다. 그는 승리의 상을 받으며, 나뉘어진 세 가지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서로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 가지란 영과 혼과 몸입니다. 그것들이 성령의 힘으로 하나가 되면, 다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에 대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한,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경기장에서 싸우는 동안에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법입니다.
19. When the intellect grows strong, it makes ready to pursue the love which quenches all bodily passions and which prevents anything contrary to nature from gaining control over the heart. Then the intellect, struggling against what is contrary to nature, separates this from what is in accordance with nature.
성장하여 튼튼해진 지성은, 모든 육적인 정념을 소멸시키며 본성을 거슬리는 것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 주는 사랑을 추구할 준비가 됩니다. 그 때 지성은 본성에 일치하는 것과 어긋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분리하며, 본성에 거스는 것과 맞서 싸웁니다.
20. Examine yourself daily in the sight of God, and discover which of the passions is in your heart. Cast it out, and so escape His judgment.
매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여, 마음 속에 있는 정념들을 찾아 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쫓아내어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십시오.
21. Be attentive to your heart and watch your enemies, for they are cunning in their malice. In your heart be persuaded of this: it is impossible for a man to achieve good through evil means. That is why our Savior told us to be watchful, saying: 'Strait is the gate, and narrow is the way that leads to life, and few there are that find it (Matt. 7:14).
원수는 교활하고 악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주의를 기울이고 원수를 경계하십시오. 악한 수단을 사용하여 선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4)고 말씀하십니다.
22. Be attentive to yourself, so that nothing destructive can separate you from the love of God. Guard your heart, and do not grow listless and say: 'How shall I guard it, since I am a sinner?' For when a man abandons his sins and returns to God, his repentance regenerates him and renews him entirely.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여, 파괴적인 것이 당신을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놓지 못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지키며, 부주의하게 “죄인인 내가 어떻게 마음을 지키겠는가?”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죄를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갈 때, 그의 회개는 그를 거듭나게 하고 완전히 새롭게 해줍니다.
23. Holy Scripture speaks everywhere about the guarding of the heart, in both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David says in the Psalms: 'O sons of men, how long will you be heavy of heart?' (Ps.4:2. LXX), and again: 'Their heart is vain' (Ps.5:9. LXX); and of those who think futile thoughts, he says: 'For he has said in his heart, I shall not be moved'(Ps. 10:6), and: 'He has said in his heart, God has forgotten'(Ps. 10:11).
A monk should consider the purpose of each text in Scripture, to whom it speaks and on what occasions. He should persevere continually in the ascetic struggle and be on his guard against the provocations of the enemy. Like a pilot steering a boat through the waves, he should hold to his course, guided by grace. Keeping his attention fixed within himself, he should commune with God in stillness, guarding his thoughts from distraction and his intellect from curiosity.
신∙구약 성경은 마음을 지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아, 언제까지 내 명예를 짓밟고 헛된 것을 사랑하며 거짓을 찾아다니려 하느냐?”(시편4,2); “속에는 흉계만이 들어 있으며”(시편 5,10) 또 무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나는 영훤히 흔들리지 않으며’”(시편 10,6): “악인은 제 마음속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잊고 있다’”(시편 10,11)
수도자는 각각의 성경 본문이 기록된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 본문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내하며 끊임없이 수덕을 위해 노력하며, 깨어 원수의 도발에 대비해야 합니다. 그는 파도를 헤치고 배를 저어가는 도선사(導船士)처럼, 은총의 인도하심을 받아 항로를 고수해야 합니다. 그는 내면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생각을 분심으로부터 지키고 지성을 호기심으로부터 지키면서 고요한 가운데 하느님과 교제합니다.
24. In storms and squalls we need a pilot, and in this present life we need prayer; for we are susceptible to the provocations of our thoughts, both good and bad. If our thought is full of devotion and love of God, it rules over the passions. As hesychasts, we should discriminate between virtue and vice with discretion and watchfulness; and we should know which virtues to practice when in the presence of our brethren and elders and which to pursue when alone. We should know which virtue comes first, and which second or third; which passions attack the soul and which the body, and also which virtues concern the soul and which the body. We should know which virtue pride uses in order to assault the intellect, and which virtue leads to vainglory, wrath or gluttony. For we ought to purify our thoughts from 'all the self-esteem that exalts itself against the knowledge of God'(2 Cor. 10:5).
폭풍우 속을 항해할 때에 안내인이 필요하듯이, 현세에서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의 도전을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에 경건과 하느님 사랑이 가득하다면, 그 생각이 정념을 지배할 것입니다. 헤시카스트(hesychast)인 우리는 조심하여 신중하게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윗 사람들이나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에 실천해야 할 덕은 무엇인지, 홀로 있을 때에 실천히야 할 덕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덕이 가장 중요하며,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영혼을 공격하는 정념은 무엇이며, 몸을 공격하는 정념은 무엇인지, 영혼과 관련된 덕은 무엇이며 몸과 관련되 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교만이 지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덕은 무엇인지, 허영심과 진노, 또는 탐식으로 인도하는 덕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또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고 일어서는 것”(2코린 10,5)으로부터 생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25.The first virtue is detachment, that is, death in relation to every person or thing. This produces the desire for God, and this in turn gives rise to the anger that is in accordance with nature, and that flares up against all the tricks of the enemy. Then the fear ofGod will establish itself within us, and through this fear love will be made manifest.
첫 번째 덕은 이탈(detachment)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 안에서의 죽음입니다. 이탈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만들어 내며,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자연과 일치하는 노염을 일으키고, 이 노염은 모든 원수의 책략에 맞서 타오릅니다. 그 때에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으며, 그 두려움을 통해서 사랑이 드러날 것입니다.
26. At the time of prayer, we should expel from our heart the provocation of each evil thought, rebutting it in a spirit of devotion so that we do not prove to be speaking to God with our lips, while pondering wicked thoughts in our heart. God will not accept from the hesychast a prayer that is turbid and careless, for everywhere Scripture tells us to guard the soul's organs of perception. If a monk submits his will to the law of God, then his intellect will govern in accordance with this law all that is subordinate to itself. It will direct as it should all the soul's impulses, especially its incensive power and desire, for these are subordinate to it.
We have practiced virtue and done what is right, turning our desire towards God and His will, and directing our incensive power, or wrath, against the devil and sin. What then do we still lack? Inward meditation.
기도할 때에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의 도발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으로는 악한 생각을 하면서 입으로만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은 부주의하고 어지러운 기도는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성경에서는 영혼의 감각 기관들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만일 수도자가 자기의 뜻을 하느님의 법에 복종시킨다면, 그의 지성은 자기에게 종속된 모든 것을 이 법에 따라 다스릴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모든 충동들, 특히 격분하는 힘과 갈망을 지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갈망을 하느님과 그의 뜻을 향하게 하며, 격분하는 힘이나 진노는 죄와 마귀를 향하게 하면서, 덕을 실천하고 의로운 일을 행해왔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적인 묵상입니다.
27. If some shameful thought is sown in your heart as you are sitting in your cell, watch out. Resist the evil, so that it does not gain control over you. Make every effort to call God to mind, for He is looking at you, and whatever you are thinking in your heart is plainly visible to Him. Say to your soul: 'If you are afraid of sinners like yourself seeing your sins, how much more should you be afraid of God who notes everything? 'As a result of this warning the fear of God will be revealed in your soul, and if you cleave to Him you will not be shaken by the passions; for it is written: 'They that trust in the Lord shall be as Mount Zion; he that dwells in Jerusalem shall never be shaken' (Ps.125:1. LXX).Whatever you are doing, remember that God sees all your thoughts, and then you will never sin. To Him be glory through all the ages. Amen.
만일 독방에 앉아 있을 때에 마음 속에 부끄러운 생각의 씨앗이 뿌려진다면, 경계하고 그것에 저항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당신을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력을 다해 하느님을 기억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을 보고 계시며, 당신의 마음에 품은 모든 생각을 훤히 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영혼에게 “죄인인 네가 네 죄를 보는 것이 두렵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을 얼마나 두려워해야 하겠느냐?”고 말하십시오. 이렇게 경고하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영혼 안에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께 매달린다면, 정념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 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시편 125,1).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생각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결코 범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세토록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 사제 헤시키오스의 깨어있음과 거룩함에 대하여
(영문 포함, 46-202)
02. (영한대역) 헤시키오스 깨어있음과 거룩함(46-20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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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The provocation comes first, then our coupling with it, or the mingling of our thoughts with those of the wicked demons. Third comes our assent to the provocation, with both sets of intermingling thoughts contriving how to commit the sin in practice. Fourth comes the concrete action – that is, the sin itself. If, however, the intellect is attentive and watchful, and at once repulses the provocation by counter-attacking and gainsaying it and invoking the Lord Jesus, its consequences remain inoperative; for the devil, being a bodiless intellect, can deceive our souls only by means of fantasies and thoughts.
46. 첫째, 악한 마귀의 도발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것을 증식하거나 우리의 생각과 악한 마귀의 생각을 혼합합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실제로 죄를 범하는 방법을 도모하는 혼합된 생각을 가지고서 마귀의 도발에 동의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넷째로, 구체적인 행동, 즉 죄 자체가 임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성이 경청하고 깨어 지키면서 마귀의 도발에 맞서 반격하고 주 예수께 기원한다면, 도발의 결과들이 작용하지 못합니다. 몸이 없는 지성인 마귀는 환상과 생각에 의해서만 영혼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61. We should therefore set about our task, for by doing so and advancing steadily we will find that hope in God, sure faith, inner knowledge, release from temptations, gifts of grace, heart-felt confession and prolonged tears come to the faithful through prayer. For not only these blessings, but the patient acceptance of affliction, sincere forgiveness of our neighbor, knowledge of the spiritual law, the discovery of God’s justice, frequent visitations of the Holy Spirit, the giving of spiritual treasures and all that God has promised to bestow to men of faith now and in the future age – in short, the manifestation of the soul in accordance with the image of God — can come only through God’s grace and man’s faith when. he guards his mind with great humility and undistracted prayer.
61. 그러므로 우리는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행하여 꾸준히 진보함으로써, 하느님 안에 있는 소망, 확실한 믿음, 내적인 지식, 유혹으로부터의 해방, 은총의 선물들, 진심에서 우러난 죄 고백, 눈물 등의 축복이 기도를 통해서 신실한 사람들에 임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들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인내하며 받아들임,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함, 신령한 법에 대한 지식, 하느님의 공의를 발견함, 성령의 잦은 방문, 영적 보물 및 하느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것이 주어짐 등이 우리가 겸손하게 집중하여 기도하면서 마음을 지킬 때에 하느님의 은총과 믿음을 통해서 임합니다.
72. Many passions are hidden in the soul; they can be checked only when their causes are revealed.
72. 영혼 안에는 많은 정념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의 원인이 드러나야만 그것들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73. Do not devote all your time to your body but apply to it a measure of asceticism appropriate to its strength and then turn all your intellect to what is within. ‘Bodily asceticism has only a limited use, but true devotion is useful in all things’ (1 Tim. 4:8).
73. 육체적인 일에만 시간을 보내지 말고, 체력에 따라 적절한 금욕 고행을 행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지성을 오로지 내면에 있는 것에 집중시키십시오. “몸의 단련도 조금은 유익하지만 신심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1티모 4,8).
75. Humility and ascetic hardship free a man from all sin, for the one cuts out the passions of the soul, the other those of the body.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Lord says: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Matt. 5:8). They shall see God and the riches that are in Him when they have purified themselves through love and selfcontrol; and the greater their purity, the more they will see.
75. 겸손과 수덕적인 고난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하게 해줍니다. 왜냐하면, 겸손은 영혼의 정념들을 제거해 주며, 수덕적인 고난은 몸의 정념들을 제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과 극기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보화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이 깨끗해지면 더 많은 것을 볼 것입니다.
115. If you wish to be 'in the Lord', do not just seem to be a monk, and good, and gentle, and always at one with God; decide to be such a person in truth. With all your strength pursue the virtue of attentiveness - that guard and watch of the intellect, that perfect stillness of heart and blessed state of the soul when free from images, which is all too rarely found in man.
115. 만일 당신이 주님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겉 모습만 수도자처럼 하지 말고 선하고 온유하며 항상 하느님과 하나가 되십시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십시오. 지성을 깨어 지키며, 정신적 심상들로부터 자유한 영혼의 복된 상태와 완전히 고요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십시오.
117. Just as valleys produce copious wheat, so this wisdom produces copious blessings in the heart - or, rather, our Lord Jesus Christ produces them, for without Him we can do nothing (cf John 15:5). At first, you will find that it is a ladder; then, a book to be read; then, as you advance, you will find that it is the heavenly city of Jerusalem, and you will have a clear spiritual vision of Christ, King of the hosts of Israel, together with His co-essential Father and the Holy Spirit, adored in our worship.
117. 기름진 밭에서 풍성한 곡식이 자라듯이, 지혜는 마음 속에서 풍성한 축복을 만들어 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복을 만들어 내십니다. 주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처음에는 사다리를 발견하고, 다음에는 책을, 그 다음에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음에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그리스도, 그와 동일본질을 가지신 아버지와 성령을 영적으로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118. The demons always lead us into sin by means of deceitful fantasies. Through the fantasy of gaining wealth they led the wretched Judas to betray the Lord and God of all; through the deceit of worthless bodily comfort and of esteem, gain and glory they put the noose around his neck and brought him to age-long death. The scoundrels requited him with precisely the opposite of what their fantasy, or provocation, had suggested to him.
118. 마귀들은 기만하는 환상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속으로 인도합니다. 그들은 부를 획득하는 환상을 사용하여 불쌍한 유다로 하여금 만군의 주 하느님을 배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무가치한 육체적인 위로, 존경과 이익과 영광 등의 속임수를 사용하여 유다의 목에 올가미를 걸어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귀들은 환상을 통해서 그에게 제안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 그에게 갚았습니다.
119. Do you see how the enemies of our salvation make us fell by means of their fantasies, deceits and empty promises? Satan himself was cast down like lightning from the heights because he fancied himself to be the equal of God (cf. Luke 10: 18); and he sundered
119. 구원의 원수들은 환상, 속임수, 헛된 약속 등을 사용하여 우리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탄은 스스로 하느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번개처럼 내던짐을 당했습니다(루카 10,18 참조).
121. The science of sciences and art of arts is the mastery of evil thoughts. The best way to master them is to see with spiritual vision the fantasy in which the demonic provocation is concealed and to protect the mmd from it. It is just the same as the way in which we protect our bodily eyes, looking sharply about us and doing all we can to prevent anything, however small, from striking them.
121. 악한 생각을 정복하는 것은 학문 중의 학문이요 기술 중의 기술입니다. 악한 생각을 정복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영적인 시각으로 마귀의 도발이 감추어져 있는 환상을 파악하고 정신을 그것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주위를 자세히 살피며 작은 것에라도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126. We should use the three aspects of the soul fittingly and in accordance with nature, as created by God, We should use our mcensive power against our outer self and against Satan. 'Be incensed', it is written, 'against sin' (cf. Ps. 4:4), that is, be incensed with yourselves and the devil, so that you will not sin against God. Our desire should be directed towards God and towards holiness. Our intelligence should control our incensive power and our desire with wisdom and skill, regulating them, admonishing them, correcting them and ruling them as a king rules over his subjects. Then, even should they rebel against it, our inmost intelligence will direct the passions in a way that accords with God's will, for we shall have set it in charge of them. The brother of the Lord declares: 'He who does not lapse in his inmost intelligence is a perfect man, able also to bridle the whole body' (.Tas. 3:2). For the truth is that every sin and transgression is brought about through these three aspects of the soul, just as every virtue and good action is also produced through them.
126. 우리는 영혼의 세 가지 측면을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일치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겉사람과 사탄을 대적하여 노염을 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마귀에게 성을 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 범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갈망은 하느님과 거룩함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은 지혜롭고 솜씨좋게 노염을 발하는 기질과 욕망을 제어하고 규제하며 권면하고 바로잡고, 왕이 백성을 다스리듯이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그것들이 지성에게 반항해도,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지성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방법으로 정념들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성에게 그것들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어서 그 온 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야고 3,2)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덕과 선한 행동이 영혼의 세 가지 측면에 의해서 만들어지듯이, 모든 죄와 범죄도 영혼의 세 가지 측면을 통해서 초래됩니다.
137. When combined with watchfulness and deep understanding, the Jesus Prayer will erase from our heart even those thoughts rooted there against our will.
137. 깨어있음과 깊은 이해가 결합된다면, 예수기도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 속에 뿌리 내린 생각들을 제거할 것입니다.
143. Rebuttal bridles evil thoughts, but the invocation of Jesus Christ drives them from the heart. Now when the provocation has taken the form of a mental image of a sensory object, the evil thought behind it can be identified. For instance, if the image is of the face of someone who has angered us, or of a beautiful woman, or of gold or silver, it can at once be shown that it is the thought of rancor, or of unchastity, or of avarice that fills our heart with fantasies. And if our intellect is experienced, well-trained and used to guarding itself: and to examining clearly and openly the seductive fantasies and deceits of the demons, it will instantly 'quench the fiery darts of the devil' (cf. Eph. 6:16), counter- attacking by means of its power of rebuttal and the Jesus Prayer. It will not allow the impassioned fantasy to consort with it or allow our thoughts passionately to conform themselves to the fantasy, or to become intimate with it, or be distracted by it, or give assent to it. If anything like this happens, then evil actions will follow as surely as night follows day.
143. 악한 생각들을 반격함으로써 속박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마음에서 몰아내려면 예수 그리스도께 기원해야 합니다. 도발이 감각적인 사물의 정신적인 영상의 형태를 취한다면,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노하게 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또는 금이나 은의 형상이 떠오른다면, 그 배후에 앙심, 부정함, 또는 우리 마음을 망상으로 가득 채우는 탐욕 등과 관련된 생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지성이 경험이 풍부하고 교육이 잘 되어 있고 마귀의 속임수와 미혹하는 환상들을 경계하고 공공연하게 조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지성은 즉시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끄고”(에페 6,16), 자체의 반격력과 예수기도를 사용하여 반격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욕적인 망상과 교제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생각이 스스로 망상과 조화를 이루거나 친밀해지는 것, 또는 그 때문에 산만해지거나 거기에 동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낮이 지나면 밤이 되듯이, 악한 행동이 따를 것입니다.
153. It is the task of unceasing watchfulness - and one of great benefit and help to the soul - to see the mental images of evil thoughts as soon as they are formed in the intellect. The task of rebuttal is to counter and expose such thoughts when they attempt to infiltrate our intellect in the form of an image of some material thing. What instantly extinguishes and destroys every demonic concept, thought, fantasy, illusion and idol is the invocation of the Lord. And in our intellect we ourselves can observe how our great God, Jesus, triumphs over them all, and how He avenges us, poor, base and useless as we are.
153. 지성 안에서 악한 생각들의 정신적 심상들이 형성되는 즉시 파악하는 것이 끊임없는 깨어있음이 하는 일이며, 영혼에게 주는 큰 유익입니다. 악한 생각이 어떤 유형적인 것의 형상으로 우리의 지성에 침투하려 할 때에 그 생각에 맞서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께 기원함으로써 모든 악한 개념과 생각과 환상과 망상과 우상을 순간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성 안에서 위대하신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그것들을 이기고 승리하시는 것, 그리고 가련하고 비천하고 무익한 우리를 대신하여 갚아 주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154. Most of us do not realize that all evil thoughts are but images of material and worldly things. Yet if we persist in watchful prayer, this will rid our mind of all such images; it will also make if conscious both of the devices of our enemies and of the great benefit of prayer and watchfulness. 'With year eyes you will see how spiritual sinners are recompensed; you yourself will see spiritualits' and understand', says David the divine poet (cf Ps. 91:8).
154. 우리는 악한 생각이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꾸준히 깨어 기도하면, 우리의 정신에서 그러한 이미지들이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의 계략, 그리고 기도와 깨어있음이 주는 큰 유익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오히려 네 눈으로 바라보리라. 악인들이 벌받음을 너는 보리라”(시편 91,8)라고 말합니다.
158. Again, every monk will be at a loss when he sees the abyss of his evil thoughts and the swarming children of Babylon. But again Christ will resolve this doubt if we always base our mind firmly on Him. By dashing them against this rock we can repulse all the children of Babylon (cf. Ps. 137:9), thus doing what we want with them, in accordance with the sayings: 'Whoever keeps the commandment will know no evil thing' (Eccles. 8:5. LXX), and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John 15:5).
158. 우리는 자신의 악한 생각들의 심연과 들끓는 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볼 때에 당황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정신의 토대를 그리스도께 둔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의심을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빌론의 어린 것들을 이 바위에 메어침으로써 물리칠 수 있으며(시편 137,9), 그럼으로써 다음과 같은 말씀대로 그것들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명령을 지키는 이는 나쁜 일을 겪지 않으리라”(코헬 8,5);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159. A true monk is one who has achieved watchfulness; and he who is truly watchful is a monk in his heart.
159. 참된 수도자란 깨어있음(watchfulness)을 획득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진정한 수도자입니다.
160. Human life extends cyclically through years, months, weeks, days and nights, hours and minutes. Through these periods we should extend our ascetic labors - our watchfulness, our prayer, our sweetness of heart, our diligent stillness - until our departure from this life.
160. 인간의 삶은 해, 달, 주(週), 낮과 밤, 시간과 분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덕적인 노력 – 깨어있음, 기도, 마음의 부드럽게 가짐 –을 행합니다.
165. The fruit starts in the flower; and the guarding of the intellect begins with self-control in food and drink, the rejection of all evil thoughts and abstention from them, and stillness of heart.
165. 열매는 꽃 안에서 시작됩니다. 지성을 지키는 일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절제하는 것, 악한 생각을 완전히 거부하고 삼가는 것, 그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166. While we are being strengthened in Christ Jesus and beginning to move forward in steadfast watchfulness. He at first appears in our intellect like a torch which, carried in the hand of the intellect, guides us along the tracks of the mind; then He appears like a full moon, circling the heart's firmament; then He appears to us like the sun, radiating justice, clearly revealing Himself in the full light of spiritual vision.
16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얻어 꾸준히 깨어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그리스도는 처음에는 마치 지성의 손에 들린 횃불처럼 지성 안에 나타나셔서 정신이 나아가는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음의 하늘을 회전하는 보름달처럼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태양처럼 나타나셔서 공의의 빛을 발하며, 영적 이상의 충분한 빛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171. The guarding of the intellect may appropriately be called 'light-producing', 'lightning-producing', 'light- giving' and 'fire -bearing', for truly it surpasses endless virtues, bodily and other. Because of this, and because of the glorious light to which it gives birth, one must honor this virtue with worthy epithets. Those who are seized by love for this virtue, from being worthless sinners, ignorant, profane, uncomprehending and unjust, are enabled to become just, responsive, pure, holy, and wise through Jesus Christ. Not only this, but they are able to contemplate mystically and to theologize; and when they have become contemplatives, they bathe in a sea of pure and infinite light, touching it ineffably and living and dwelling in it. They have tasted that the Lord is good (cf Ps. 34:8), and in these harbingers are fulfilled the words of David: 'Surely the righteous shall give thanks unto Thy name; and the upright shall dwell in Thy presence' (Ps. 140: 13). Such men alone truly call upon God and give thanks to Him, and in their love for Him continually speak with Him.
171. 지성을 지키는 것은 “빛의 생산”, “번개의 생산”, “빛을 줌” 등으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육체적인 것을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덕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영광스러운 빛 때문에, 우리는 적절한 명칭을 사용하여 이 덕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 덕을 향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지하고 방탕하고 이해력이 부족하고 불의하고 무가치한 죄인의 상태에서 공정하고 책임감 있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지혜로운 상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비한 관상을 행하고 신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관상을 행하고 나면, 그들은 순수하고 무한한 빛의 바다에 잠겨 생활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맛보았습니다(시편 34,8 참조). 그리고 이러한 전조 안에서 “정녕 의인들은 당신 이름을 찬송하고 올곧은 이들은 당신 앞에서 살리이다”(시편 140,14)라고 한 다윗의 말이 성취됩니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하느님께 요청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쉬지 않고 하느님과 대화합니다.
179. In this way the soul can attain in the Lord that state of beauty, loveliness and integrity in which it was created by God in the beginning. As Antony, the great servant of God, said, 'Holiness is achieved when the intellect is in its natural state.' And again he said: 'The soul realizes its integrity when its intellect is in that state in which it was created.' And shortly after this he adds: 'Let us purify our mind, for 1 believe that when the mind is completely pure and is in its natural state, it gains penetrating insight, and it sees more clearly and further than the demons, since the Lord reveals things to it.' So spoke the renowned Antony, according to the Life of Antony by Athanasios the Great.
179.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은 태초에 하느님에 의해 지음을 받을 때에 지녔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고결한 상태를 주님 안에서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종 안토니오는 “지성이 본래의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을 때에 거룩함이 획득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지성이 지음을 받은 상태에 있을 때에 영혼은 그 고결함을 깨닫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덧붙여서 “우리는 정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정신이 완전히 순수하며 본래의 상태에 있을 때에 통찰력을 얻으며, 마귀들보다 더 분명하게 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영혼에게 사물을 계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성 안토니오의 생애』(Life of Antony)에 기록된 말입니다.
202. There is no venom more poisonous than that of the asp or cobra, and there is no evil greater than that of self-love. The winged children of self-love are self-praise, self-satisfaction, gluttony, unchastity, self-esteem, jealousy and the crown of all these, pride. Pride can drag down not men alone, but even angels from heaven, and surround them with darkness instead of light.
202. 독사나 코브라의 독처럼 독한 것은 없고, 이기심보다 더 큰 악은 없습니다. 이기심의 자녀는 자기 자랑, 자기 만족, 탐식, 부정, 자만, 질투, 그리고 이것들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사람들만 아니라 천사들까지도 하늘에서 끌어내리며 빛이 아니라 어두움으로 그들을 에워쌀 수 있습니다.
번역본 책 필로칼리아 1 도서출판 은성 엄성옥 옮김
영어책 The philokalia the complete text vol 1 compiled by st nikodimos of the holy mountain and st makarios of corinth faber faber
3. 수도승의 목표 - 마음의 순결함
수도승의 목표 마음의 순결(깨끗함)
03. 수도승의 목표 마음의 순결 깨끗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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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이에 아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다. 그대들은 목표에 관해서는 똑똑히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 즉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꾸준히 추구해야 할 (직접적) 목적 또는 표적이 무엇이냐 하는가를 그대들은 먼저 알아야 한다. ― 그 점에 대하여 우리는 모른다고 단순히 고백했다. 그래서 아빠스는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기술과 학문에는 첫째로 어떤 목적, 즉 마음이 향하는 방향과 정신이 꾸준히 갖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 누가 지극한 근면과 인내로써 이것을 눈앞에 두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농부의 목표는 곡식의 풍부한 수확을 얻어서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지만 자기 일의 목적은 자기 밭에서 모든 가시를 치우고 쓸데없는 모든 잡초를 없애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얻으려는 바가 자기가 하는 작업과 품고 있는 희망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지 않다면 풍요로움 속에 조용히 쉬려는 자기 목표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인도 큰 이익을 남겨서 부유해지기 위하여 쉬지 않고 상품을 사 놓는다. 그 이유는 적합한 길을 택하지 않고서는 이윤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높은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일정한 자리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느 직업이나 임무를 택해야 좋은지 미리 궁리한다. 그래야 자기 희망을 성취할 수 있는 적합한 길을 따라 결국 목표로 삼던 높은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길의 목표가 하느님 나라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목적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도 함께 발견해 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쓸데없이 기진 해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길 없이 여행하는 사람은 걷는 고생만 하고 전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에 우리가 놀랐더니 노인은 계속 말했다.
우리 신분의 목표는 우리가 말한 대로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다. 그런데 그 직접적인 목표(가까운 목표)는 마음의 순결이다. 그것 없이는 아무도 저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는 그려진 줄을 따르는 것처럼 직선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만일 우리의 상념들이 조금이라도 그 방향에서 빗나간다면 우리는 즉시 다시 우리 시선을 그 가까운 목표에 되돌리며 그것을 준거로 하여 생각을 교정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그 결정한 방향으로부터 약간이라도 벗어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이 하나의 표적에로 집중시키는 그 준거에 의하여 경고를 받는다.
V.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왕 앞에서 자기 솜씨를 드러내 주려는 궁수나 사격수와 비슷한 경우이다. 그들은 상급이 그려진 작은 표지판에다 화살을 쏘아본다. 그들은 그 표적을 향하여 똑바로 겨누지 않고서는 그들이 노린 상급을 획득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표적을 맞출 때는 상급이 그들의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이 저 표지판을 볼 수 없다면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길이 없어서 서투른 궁수의 화살이 아무리 빗나가도 바른 선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쓸데없이 화살을 쏜다 해도 옳은 방향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지적하는 표지가 없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그 방향을 교정해야 되는지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잘못이나 착각을 분간할 길이 없다.
이와 같이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 생활의 최종 목표(Telos, End)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맺는 열매는 성화이며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다’(로마 6,22 라틴어역)라는 말씀대로 (우리 생활)의 가까운 목표는 사도가 성화라고 적절히 표현하는 마음의 순결인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 꼭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니 사도가 한 말씀은 ‘너희의 가까운 목표는 마음의 순결이며 최종 목표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는 것과 같다. 이 표적에 대하여 같은 사도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몸을 내 뻗치면서 목표(skopos·σκοποζ)를 바라보고 주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시면서 내거신 상을 얻기 위하여 달려간다’(필립 3,14 라틴어역). 그 뜻은 그리스말로 더 분명하다. 원문에서는 목표를 ‘스코포스’(σκοποζ), 즉 표적이라고 하니 그것은 내가 뒤에 있는 것, 즉 묵은 사람의 죄악을 잊어버림이라는 가까운 표적을 겨눔으로써 천상 상급의 최종 목표에 도달하도록 노력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가까운 목표, 즉 마음의 순결에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온 힘을 다하여 따라야 하고, 반면에 방해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위태롭고 해로운 것으로 알아 피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지 행하고 무엇이든지 견디며, 이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부모, 조국, 명예, 부(富), 이 세상의 즐거움과 온갖 쾌락을 경시한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마음의 순결을 보존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가까운 목표가 우리 앞에 제대로 놓여질 때 우리는 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을 언제나 곧장 그리로 향하게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우리 눈앞에 항구히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헛되고 소용없는 것이 되어 아무런 보답도 이익도 없이 되고 말 뿐만이 아니라 서로 모순 되는 갖가지 잡념마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되돌아가서 붙잡을 수 있는 고정된 점이 없다면, 틀림없이 정신은 시시각각으로 오만가지 떠돌아다니는 상념들에 따라 뒤바꿔질 것이며,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VI.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어떤 이들이 이 세상의 엄청난 재물, 즉 무수한 금은과 함께 화려한 부동산 같은 것을 업신여기고서 작은 주머니칼이나 펜이나 바늘이나 연필 때문에 흥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만일 깨끗한 마음에만 꾸준히 주의를 기울였다면 크고 귀한 재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그것을 아예 버리기로 한 그들은 작은 물건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이들은 너무 열심히 자기 책을 지켜서 남이 그것을 보거나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므로 인내와 애덕의 공로를 얻어야 할 기회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짜증과 죽음의 기회가 되어 버린다. 그러니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기의 모든 재산을 나누어도 그들은 옛날의 욕심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사소한 물건에 붙여서 그 탓으로 가끔 화를 내게 된다. 그들은 사도가 말하는 사랑을 지니지 못해서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사도는 이런 것을 성령 안에서 미리 보시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위하여 내 모든 재산을 나누고 내 몸마저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내게는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1고린 13,3)라고 말했다. 그러니 사도가 차례대로 묘사하는 사랑이 없다면 누가 재산을 포기하며 벼슬을 무시함으로써 모든 것을 버려도 즉시 완덕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사랑은 오직 마음의 순결로 정립된다. 시기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 것과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찾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등은(1고린 13,4-6) 완전하고 깨끗한 마음을 언제나 하느님께 바치고 모든 동요로부터 깨끗이 지키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인가?
VII.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수행하며 추구해야 한다. 오직 이를 위해 우리는 고독을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재 지키기, 밤새움, 주소, 육신의 헐벗음을 감수하고 독서와 그 외의 모든 덕행을 마땅히 함양해야 함을 우리는 안다. 그런 것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마음이 모든 사악한 욕정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지킬 수 있으며 이러한 단계들을 따라 사랑의 완성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유익하고 필요한 어떤 일에 종사하다가 관례적인 규율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것들을 준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슬퍼하거나 성을 내거나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빠뜨린 수행의 목적은 오직 이런 악덕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재를 지켜서 얻은 이득은 성을 내는 데서 오는 손실보다 적고 독서를 통해 맺는 열매는 형제를 경멸하는 데서 오는 해악보다 적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차적인 것, 곧 재 지키기, 밤새움, 고독, 성경묵상 등을 주된 목적, 곧 애덕과 동일한 마음의 순결을 위하여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수행 때문에 주된 사랑의 덕을 탈선시키지 말아야 한다. 사실 사랑만 온전하게 지킨다면 이차적인 것 가운데 불가피하게 빠뜨리는 것이 있다 해도 우리는 해를 입지 않는다. 한편 우리가 모든 것을 수행하면서 사랑을 빼놓는다면 아무런 이익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의 덕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어떤 부분의 기술에 소용되는 도구들을 구하고 마련할 때, 그는 그것들을 가만히 소유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으며 그 도구들로부터 기대하는 이득이 그것들을 단순히 소유함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도구들을 사용함으로써 그것들을 활용하는 기술에 능숙해지고 그 기술의 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재 지키기, 밤새움, 성경묵상, 헐벗음, 모든 재산의 포기 등은 완덕이 아니라 완덕의 도구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수행의 목표가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목표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들을 행해야 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력하지 않고 마치 이것들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그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마음의 지향을 고정시키는 사람은 그것들을 수행하는 데 헛수고만 한다.
그런 사람은 이 기술의 도구만 차지하고 있지, 모든 열매를 맺게 될 목표를 모르고 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순결과 평화를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 그것이 유용하고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해도 – 해로운 것으로서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규칙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실수와 엉뚱한 짓을 잘 피하여 탈선할 위험 없이 안전한 선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똑바로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담화집 제1담화(모세 아빠스의 담화)에서 발췌
4. 에바그리오 - 정념, 그리고 생각을 식별하는 것에 관하여
- 독수자 에바그리오, 『필로칼리아 1』, 도서출판 은성, 엄성옥 옮김, pp.46-69
04.정념 그리고 생각을 식별하는 것에 관하여 영어포함.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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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덕생활을 실천하는 우리를 최전방에서 공격하는 마귀들의 세 집단이 있습니다: 탐식(gluttony)의 욕구를 부추기는 마귀, 탐욕적인 생각을 선동하는 마귀, 그리고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을 추구하도록 선동하는 마귀들. 그 외의 다른 마귀들은 이들을 뒤따라오면서 이미 이 세 집단의 마귀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우리는 먼저 탐식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한 음란의 마귀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또 먹을 것이나 재산, 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싸우지 않는 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물질들을 박탈당했을 때에 고통을 느낀다면, 우리는 좌절의 마귀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또 모든 악의 근원인 탐욕을 추방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마귀의 첫 자손인 교만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말에 의하면, 가난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잠언 10,4). 간단히 말해서, 최전방에 나선 마귀들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떤 마귀의 힘에도 함락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귀는 주님에게 이 세 가지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주님에게 돌들을 빵으로 변화시키라고 권했고, 다음에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면 온 세상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마지막으로 주님이 그의 말을 듣는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도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영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시험에 넘어가지 않고 마귀에게 물러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 가지 생각을 멸시하고 거부하지 않는 한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고 가르치십니다(마태 4,1-10 참조).
1. Of the demons opposing us in the practice of the ascetic life, there are three groups who fight in the front line: those entrusted with the appetites of gluttony, those who suggest avaricious thoughts, and those who incite us to seek the esteem of men. All the other demons follow behind and in their turn attack those already wounded by the first three groups. For one does not fall into the power of the demon of unchastity, unless one has first fallen because of gluttony; nor is one's anger aroused unless one is fighting for food or material possessions or the esteem of men. And one does not escape the demon of dejection, unless one no longer experiences suffering when deprived of these things. Nor will one escape pride, the first offspring of the devil, unless one has banished avarice, the root of all evil, since poverty makes a man humble, according to Solomon (cf. Prov. 10:4. LXX). In short, no one can fall into the power of any demon, unless he has been wounded by those of the front line. That is why the devil suggested these three thoughts to the Savior: first he exhorted Him to turn stones into bread; then he promised Him the whole world, if Christ would fall down and worship him; and thirdly he said that, if our Lord would listen to him, He would be glorified and suffer nothing in falling from the pinnacle of the temple. But our Lord, having shown Himself superior to these temptations, commanded the devil to 'get behind Him'. In this way He teaches us that it is not possible to drive away the devil, unless we scornfully reject these three thoughts (cf. Matt. 4:1-10).
2. 마귀들이 선동하는 생각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감각적인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을 만들어 내며, 이러한 개념들이 새겨진 지성은 내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형태를 지닙니다. 따라서 지성은 자신에게 제시된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어떤 마귀가 접근하고 있는지 압니다. 예를 들어, 나를 모욕하거나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큰 증오의 마귀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존경과 관련된 제안이 떠오른다면, 그것과 관련된 마귀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생각들과 관련해서도, 우리의 정신 속에 모습을 나타내는 대상에 따라서 어떤 마귀가 우리 가까이에서 그 대상을 주입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모두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성은 본질적으로 활동에 의해 과거의 사건들의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본성에 어긋나는 노염이나 욕구를 만들어 내는 생각들은 마귀가 야기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선동을 받은 지성은 정신적으로 간음을 범하며, 몹시 성을 내며, 따라서 우리를 질서있게 유지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동안 지성이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생각에서 해방되어 있어야만 하느님의 광채가 지성에게 모습을 나타냅니다.
2. All thoughts inspired by the demons produce within us conceptions of sensory objects; and in this way the intellect, with such conceptions imprinted on it, bears the forms of these objects within itself. So, by recognizing the object presented to it, the intellect knows which demon is approaching. For example, if the face of a person who has done me harm or insulted me appears in my mind, I recognize the demon of rancor approaching. If there is a suggestion of material things or of esteem, again it will be clear which demon is troubling me. In the same way with other thoughts, we can infer from the object appearing in the mind which demon is close at hand, suggesting that object to us. I do not say that all thoughts of such things come from the demons; for when the intellect is activated by man it is its nature to bring forth the images of past events. But all thoughts producing anger or desire in a way that is contrary to nature are caused by demons. For through demonic agitation the intellect mentally commits adultery and becomes incensed. Thus it cannot receive the vision of God, who sets us in order; for the divine splendor only appears to the intellect during prayer, when the intellect is free from conceptions of sensory objects.
3. 욕망과 분노를 경계하여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정욕적인 생각들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철야하고 바닥에서 잠을 잠으로써 욕망을 죽이며, 오래 참음과 인내, 용서, 자비로운 행동을 통해서 분노를 길들입니다. 이 두 가지 정념(욕망과 분노)은 지성을 재앙과 멸망으로 몰고 가는 모든 악한 생각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음식과 재산, 자만(자기높임), 그리고 자기 몸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이러한 정념들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마귀들은 몸을 통해서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다를 항해하다가 거센 바람과 파도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이 배에 실은 물건들을 내던져 버리듯이, 우리도 그렇게 행해야 합니다. 그런 행동을 할 때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려고 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행해도 원하는 상을 받겠지만, 자만심이라는 마귀의 바람 때문에 처음 것보다 더 심한 파도를 만나 항로에서 벗어나서 파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주님은 우리의 키잡이인 지성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엋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18)
영혼을 고치시는 의원께서 자비로운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분노하는 부분을 고쳐 주시고, 기도를 통해서 지성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금식을 통해서 욕망을 시들게 하시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이러한 덕행들에 의해서,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 새롭게 지음을 받은 새 아담 – 그 안에서는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이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 이 형성됩니다(갈라 3,28; 콜로 3,10-11).
3. Man cannot drive away impassioned thoughts unless he watches over his desire and incensive power. He destroys desire through fasting, vigils and sleeping on the ground, and he tames his incensive power through longsuffering, forbearance, forgiveness and acts of compassion. For with these two passions are connected almost all the demonic thoughts which lead the intellect to disaster and perdition. It is impossible to overcome these passions unless we can rise above attachment to food and possessions, to self-esteem and even to our very body, because it is through the body that the demons often attempt to attack us. It is essential, then, to imitate people who are in danger at sea and throw things overboard because of the violence of the winds and the threatening waves. But here we must be very careful in case we cast things overboard just to be seen doing so by men. For then we shall get the reward we want; but we shall suffer another shipwreck, worse than the first, blown off our course by the contrary wind of the demon of self-esteem. That is why our Lord, instructing the intellect, our helmsman, says in the Gospels: 'Take heed that you do not give alms in front of others, to be seen by them; for unless you take heed, you will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in heaven.' Again, He says: 'When you pray, you must not be as the hypocrites are: for they love to pray standing in synagogues and at street-corners, so as to be seen by men. Truly I say to you, they get the reward they want. . . . Moreover when you fast, do not put on a gloomy face,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disfigure their faces, so that they may be seen by men to be fasting. Truly I say to you, they get the reward they want' (cf. Matt. 6: 1-18). Observe how the Physician of souls here corrects our incensive power through acts of compassion, purifies the intellect through prayer, and through fasting withers desire. By means of these virtues the new Adam is formed, made again according to the image of his Creator - an Adam in whom, thanks to dispassion, there is 'neither male nor female' and, thanks to singleness of faith, there is 'neither Greek nor Jew, circumcision nor uncircumcision, barbarian, Scythian, bond n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n all' (Gal. 3:28; Col. 3: 10:11).
4. 잠자는 동안에 일어나는 환상들 속에서 마귀들이 우리의 지성에 어떻게 형상과 형태를 새겨 놓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정상적인 경우, 지성은 사물을 볼 때에 눈을 통해서, 말을 들을 때에 귀를 통해서, 또는 몸을 통해서 경험한 것들을 지성에게 새겨 놓고 지성을 자극하는 기억을 통해서 이러한 형태와 형상들을 받아들입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잠을 잘 때, 육적인 감각들의 활동이 정지될 때에, 마귀들은 기억을 일으킴으로써 이러한 인상을 새겨 놓는 듯합니다. 그 경우에, 마귀들은 어떻게 기억을 일으키는 것일까요? 정념들을 통해서일까요? 그렇습니다. 정념이 휘둘리지 않고 냉정하고 순결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잠 잘 때에 악한 환상을 경험하지 않으며, 악하지 않은 기억의 활동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나 천사들의 힘에 의해서 야기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성인들을 만나며 그들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립니다. 자는 동안에 기억은 몸의 참여가 없이 영혼이 몸과 제휴한 상태에서 받아들인 이미지들을 선동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종종 잠 자는 동안에, 몸이 휴식하는 동안에 그러한 이미지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목이 마를 때에도 물을 생각할 수 있고 목이 마르지 않을 때에도 물을 생각할 수 있듯이, 탐심을 가지고 금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탐심이 없이도 금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일에도 적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한 종류의 환상과 다른 종류의 환상을 식별할 수 있다면, 마귀들의 교활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들이 환상을 일으키기 위해서 파도 소리와 같은 외적인 것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We shall now enquire how, in the fantasies that occur during sleep, the demons imprint shapes and forms on our intellect. Normally the intellect receives these shapes and forms either through the eyes when it is seeing, or through the ears when it is hearing, or through some other sense, or else through the memory, which stirs up and imprints on the intellect things which it has experienced through the body. Now it seems to me that in our sleep, when the activity of our bodily senses is suspended, it is by arousing the memory that the demons make this imprint. But, in that case, how do the demons arouse the memory? Is it through the passions? Clearly this is so, for those in a state of purity and dispassion no longer experience demonic fantasies in sleep. There is also an activity of the memory that is not demonic: it is caused by ourselves or by the angelic powers, and through it we may meet with saints and delight in their company. We should notice in addition that during sleep the memory stirs up, without the body's participation, those very images which the soul has received in association with the body. This is clear from the fact that we often experience such images during sleep, when the body is at rest.
Just as it is possible to think of water both while thirsty and while not thirsty, so it is possible to think of gold with greed and without greed. The same applies to other things. Thus if we can discriminate in this way between one kind of fantasy and another, we can then recognize the artfulness of the demons. We should be aware, too, that the demons also use external things to produce fantasies, such as the sound of waves heard at sea.
5. 성내는 것은 마귀들의 악한 의도에 협력하는 것으로서, 마귀들의 목표를 크게 촉진시킵니다. 그렇게 때문에 마귀들은 밤낮 우리로 하여금 성 내게 하려고 애씁니다. 우리의 온유함 때문에 성냄이 방해를 받으면, 마귀는 즉시 그럴 듯한 핑계를 대어 성 내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가 크게 성 내면, 마귀는 더러운 목적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당한 이유에서든지 부당한 이유에서든지 성내서는 안 되며,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칼을 넘겨 주어서는 안 됩니다.
종종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이유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흥분합니다. 당신이 음식, 재산, 영광 등에 대한 관심을 초월했다고 말하면서도, 그처럼 서둘러 전쟁에 뛰어드는 이유를 말해 보십시오. 당신이 모든 것을 체념했다고 하면서도, 계속 지키는 개를 데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일 당신이 개를 데리고 있어 그 개가 다른 사람들에게 짖고 공격한다면, 아직도 당신에게 개가 지켜 주어야 할 재산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격앙하는 것이 순수한 기도를 파괴한다고 알고 있으므로,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순수한 기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줍니다. 나는 당신이 성도들을 망각하고 있음에도 놀랍니다: 다윗은 “노여움을 그치고 성을 가라앉혀라”(시편 37,8)고 외쳤고, 전도자는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 버려라”(코헬 11,10)고 촉구하며, 사도 바울로는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1티모 2,8)고 말합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개들을 집 밖에 세워 두는 신비한 옛관습에서도 동일한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에 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 독사의 무서운 독이다”(신명 32,33). 그렇기 때문에 나자렛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음식이나 의복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 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그런 것에 대해 근심하는 것은 이방인들과 불신자들, 주님의 섭리를 거부하고 창조주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표식입니다. 한 닢에 팔리는 참새 두 마리라도 거룩한 천사들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갖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입니다(마태 10,29). 그런데 마귀는 우리의 내면에 더러운 생각들을 일으킨 후에 계속해서 이런 종류의 걱정을 선동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셨습니다(요한 5,13 참조). 염려 때문에 기운이 막히면, 거룩한 말씀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이러한 염려들을 주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살면서 날마다 자만심을 채워 주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제거해야 합니다. 혹 가난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춥고 헐벗은 중에도 인내하며 의의 면류관을 기다린 사도 바울로를 기억해야 합니다(2코린 11,27; 2티모 4,8). 바울로는 이 세상을 운동장에서의 경주에 비유했습니다(1코린 9,24 참조). 걱정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필리 3,14)을 위해 달음질 할 수 있으며,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에페 6,12)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운동 선수가 입은 옷이 무거우면 방해를 받듯이, 자체의 보물에 집착하는 지성은 염려하는 생각들의 방해를 받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고 했습니다.
5. When our incensive power is aroused in a way contrary to nature, it greatly furthers the aim of the demons and is an ally in all their evil designs. Day and night, therefore, they are always trying to provoke it. And when they see it tethered by gentleness, they at once try to set it free on some seemingly just pretext; in this way, when it is violently aroused, they can use it for their shameful purposes. So it must not be aroused either for just or for unjust reasons; and we must not hand a dangerous sword to those too readily incensed to wrath, for it often happens that people become excessively worked up for quite trivial reasons. Tell me, why do you rush into battle so quickly, if you are really above caring about food, possessions and glory? Why keep a watchdog if you have renounced everything? If you do, and it barks and attacks other men, it is clear that there are still some possessions for it to guard. But since I know that wrath is destructive of pure prayer, the fact that you cannot control it shows how far you are from such prayer. I am also surprised that you have forgotten the saints: David who exclaims, 'Cease from anger, and put aside your wrath’ (Ps. 37:8. LXX); and Ecclesiastes who urges us, 'Remove wrath from your heart, and put away evil from your flesh' (Eccles. 11:10. LXX); while the Apostle commands that always and everywhere men should 'lift up holy hands, without anger and without quarrelling’ (1 Tim. 2:8). And do we not learn the same from the mysterious and ancient custom of putting dogs out of the house during prayer? This indicates that there should be no wrath in those who pray. 'Their wine is the wrath of serpents' (Deut. 32:33. LXX); that is why the Nazarenes abstained from wine.
It is needless to insist that we should not worry about clothes or food. The Savior Himself forbids this in the Gospels: 'Do not worry about what to eat or drink, or about what to wear' (cf. Matt. 6:25). Such anxiety is a mark of the Gentiles and unbelievers, who reject the providence of the Lord and deny the Creator. An attitude of this kind is entirely wrong for Christians who believe that even two sparrows which are sold for a farthing are under the care of the holy angels (cf. Matt. 10: 29). The demons, however, after arousing impure thoughts, go on to suggest worries of this kind, so that 'Jesus conveys Himself away', because of the multitude of concerns in our mind (cf. John 5:13). The divine word can bear no fruit, being choked by our cares. Let us, then, renounce these cares, and throw them down before the Lord, being content with what we have at the moment; and living in poverty and rags, let us day by day rid ourselves of all that fills us with self-esteem. If anyone thinks it shameful to live in rags, he should remember St Paul, who 'in cold and nakedness' patiently awaited the 'crown of righteousness' (2 Cor. 11:27; 2 Tim. 4:8). The Apostle likened this world to a contest in an arena (cf. 1 Cor. 9:24); how then can someone clothed with anxious thoughts run for 'the prize of the high calling of God' (Phil. 3:14), or 'wrestle against principalities, against powers, against the rulers of the darkness of this world' (Eph. 6:12)? I do not see how this is possible; for just as a runner is obstructed and weighed down by clothing, so too is the intellect by anxious thoughts - if indeed the saying is true that the intellect is attached to its own treasure; for it is said,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will your heart be also' (Matt. 6:21).
6. 생각들은 어떤 때는 다른 것에 의해서 중지되며, 어떤 때는 스스로 중단됩니다. 악한 생각들은 선한 생각들을 중단시키며, 역으로 선한 생각에 의해 중단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생각을 중시하는지 주목해 보시고, 그에 따라서 우리를 정죄하시거나 인정하십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을 환대하려는 생각은 주님을 위한 것이지만, 시험하는 자가 공격할 때에 그 생각이 중지되며, 시험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환대를 베풀려는 생각이 임하지만, 선한 생각이 임할 때에 이 생각은 중단됩니다. 선한 생각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이 덕을 실천하게 합니다
.6. Sometimes thoughts are cut off, and sometimes they do the cutting off. Evil thoughts cut off good thoughts, and in turn are cut off by good thoughts. The Holy Spirit therefore notes to which thought we give priority and condemns or approves us accordingly. What I mean is something like this: the thought occurs to me to give hospitality and it is for the Lord's sake; but when the tempter attacks, this thought is cut off and in its place he suggests giving hospitality for the sake of display. Again, the thought comes to me of giving hospitality so as to appear hospitable in the eyes of others. But this thought in its turn is cut off when a better thought comes, which leads me to practice this virtue for the Lord's sake and not so as to gain esteem from men.
7. 우리는 많은 관찰을 한 결과로서 천사들의 생각, 인간의 생각, 그리고 마귀들에게서 온 생각의 차이점을 식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천사들의 생각은 사물의 참된 본성, 그리고 그것들의 영적 본질을 찾아내는 것과 관련됩니다. 예를 들면, 금이 땅 속에 마치 모래처럼 흩어져 있어 크게 수고하고 노력해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땅에서 발견된 금은 물로 씻고 불로 정련한 다음에 장인들의 수중에 들어가며, 장인들은 그것으로 장막의 촛대와 잔과 향로를 만드는데(탈출 25,22-39 참조), 우리 구세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바빌론 왕은 그 잔으로 마시지 못합니다(다니 5,2, 3 참조). 클레오파스 같은 사람은 이러한 신비로 불 타는 마음을 가져 옵니다(루카 24,32 참조). 반면에 마귀의 생각은 그러한 일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습니다. 마귀의 생각은 파렴치하게도 유형적인 금을 취하며, 거기서 올 부와 영광을 기대하라고 속삭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적인 생각은 금을 획득하려 하지 않으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정념이나 탐심이 없이 금의 이미지를 정신 앞에 가져다
7. We have learnt, after much observation, to recognize the difference between angelic thoughts, human thoughts, and thoughts that come from demons. Angelic thought is concerned with the true nature of things and with searching out their spiritual essences. For example, why was gold created and scattered like sand in the lower regions of the earth, to be found only with much toil and effort? And how, when found, is it washed in water and committed to the fire, and then put into the hands of craftsmen who fashion it into the candlestick of the tabernacle and the censers and the vessels (cf. Exod. 25:22-39) from which, by the grace of our Savior, the king of Babylon no longer drinks (cf. Dan. 5:2, 3)? A man such as Cleopas brings a heart burning with these mysteries (cf. Luke 24:32). Demonic thought, on the other hand, neither knows nor can know such things. It can only shamelessly suggest the acquisition of physical gold, looking forward to the wealth and glory that will come from this. Finally, human thought neither seeks to acquire gold nor is concerned to know what it symbolizes, but brings before the mind simply the image of gold, without passion or greed. The same principle applies to other things as well.놓습니다. 다른 것들에게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8. 미혹자라고 알려진 마귀는 특히 새벽에 형제들을 찾아와서 지성을 이 도시 저 도시, 이 집 저 집으로 데려가는데, 그러한 방문을 통해서 결코 정념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지성은 꽤 오랫동안 옛 친지들을 만나며, 그러한 만남에 의해서 자신의 상태가 부패하는 것을 허용하게 됩니다. 지성은 조금씩 하느님의 지식(영적 지식)과 거룩에서 멀어지며, 자신의 소명을 망각합니다. 그러므로 홀로 지내는 은수자는 이 마귀를 경계하며, 자신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내야 할지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마귀는 목적 없이 되는 대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독수도승의 상태를 타락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랑에 의해 지나치게 흥분하고 많은 만남에 취한 지성은 즉시 음란의 마귀, 분노의 마귀, 또는 좌절의 마귀의 포로가 됩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지성이 지닌 고유의 밝음을 파괴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로 이 마귀의 교활함을 알고 싶다면, 성급하게 그에게 말을 걸거나, 현재 일어나는 일 및 마귀가 우리의 정신 안에서 이러한 방문들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강압하는지, 그리고 서서히 지성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 등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그는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도망칠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알고자 하는 것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나 이틀 정도 마귀가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마귀의 속임수를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정신적으로 마귀를 책망하여 도망치게 합니다. 그러나 시험을 받는 동안에 지성은 구름에 가려져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가 물러갈 때까지 다음과 같이 행해야 합니다. 홀로 고독하게 앉아서 지금까지 발생한 일들을 회상하십시오: 당신은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어디로 갔습니까. 어디에서 음란의 영, 좌절의 영, 분노의 영에게 붙잡혔으며,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러한 사실들을 세밀하게 살펴보고 기억해 두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번에 마귀가 접근할 때에 그의 가면을 벗길 준비를 갖출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내면의 약한 부분을 의식하려고 노력하면, 다시는 마귀를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마귀를 노하게 하려면, 그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즉시 그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당신이 처음에 어디로 갔고 다음에는 어디로 갔는지 등에 대해 그에게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마귀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크게 화를 낼 것입니다. 마귀가 당신에게 속삭였던 생각들이 당신에게서 떠나갔다고 말하면 더욱 효과적입니다. 마귀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합니다.
이 마귀를 물리치고 나면, 매우 졸립고 무감각해지며, 어깨가 무겁고 하품이 나오고 눈꺼풀이 무거운 느낌이 임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께서 이 모든 현상을 쫓아 주실 것입니다.
8. There is a demon, known as the deluder, who visits the brethren especially at dawn, and leads the intellect about from city to city, from village to village, from house to house, pretending that no passions are aroused through such visits; but then the intellect goes on to meet and talk with old acquaintances at greater length, and so allows its own state to be corrupted by those it encounters. Little by little it falls away from the knowledge of God and holiness, and forgets its calling. Therefore the solitary must watch this demon, noting where he comes from and where he ends up; for this demon does not make this long circuit without purpose and at random, but because he wishes to corrupt the state of the solitary, so that his intellect, over-excited by all this wandering, and intoxicated by its many meetings, may immediately fall prey to the demons of unchastity, anger or dejection - the demons that above all others destroy its inherent brightness.
But if we really want to understand the cunning of this demon, we should not be hasty in speaking to him, or tell others what is taking place, how he is compelling us to make these visits in our mind and how he is gradually driving the intellect to its death - for then he will flee from us, as he cannot bear to be seen doing this; and so we shall not grasp any of the things we are anxious to learn. But, instead, we should allow him one more day, or even two, to play out his role, so that we can learn about his deceitfulness in detail; then, mentally rebuking him, we put him to flight. But because during temptation the intellect is clouded and does not see exactly what is happening, do as follows after the demon has withdrawn. Sit down and recall in solitude the things that have happened: where you started and where you went, in what place you were seized by the spirit of unchastity, dejection or anger and how it all happened. Examine these things closely and commit them to memory, so that you will then be ready to expose the demon when he next approaches you. Try to become conscious of the weak spot in yourself which he hid from you, and you will not follow him again. If you wish to enrage him, expose him at once when he reappears, and tell him just where you went first, and where next, and so on. For he becomes very angry and cannot bear the disgrace. And the proof that you spoke to him effectively is that the thoughts he suggested leave you. For he cannot remain in action when he is openly exposed. The defeat of this demon is followed by heavy sleepiness and deadness, together with a feeling of great coldness in the eyelids, countless yawnings, and heaviness in the shoulders. But if you pray intensely all this is dispersed by the Holy Spirit.
9. 마귀들을 미워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에 크게 기여하며 거룩한 성장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서 이러한 미움을 튼튼한 나무로 키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쾌락을 사랑하는 영들이 그것을 억제하며, 영혼으로 하여금 다시 과거의 습관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고치시는 의원께서는 우리를 버림으로써 이러한 방종 – 또는 치료하기 어려운 부패의 원인 – 을 치료하십니다. 그분은 밤낮 우리가 두려운 고난을 겪는 것을 허락하시는데, 그 때에 영혼은 다시 원래의 미움을 회복하며, 다윗처럼 “더할 수 없는 미움으로 미워하나이다. 그들은 저에게도 원수가 되었나이다”(시편 139,22)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행동으로나 생각으로 범죄하지 않을 때 – 이것은 완전히 정념에서 벗어난 상태의 표식입니다 – 에 원수들을 완전히 미워합니다.
9. Hatred against the demons contributes greatly to our salvation and helps our growth in holiness. But we do not of ourselves have the power to nourish this hatred into a strong plant, because the pleasure-loving spirits restrict it and encourage the soul again to indulge in its old habitual loves. But this indulgence - or rather this gangrene that is so hard to cure - the Physician of souls heals by abandoning us. For He permits us to undergo some fearful suffering night and day, and then the soul returns again to its original hatred, and learns like David to say to the Lord: 'I hate them with perfect hatred: I count them my enemies' (Ps. 139: 22). For a man hates his enemies with perfect hatred when he sins neither in act nor in thought - which is a sign of complete dispassion.
10. 영혼을 우둔하게 만드는 마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러한 마귀가 다가올 때에 영혼이 자신에게 합당한 상태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벗어버리고, 죄를 죄로 여기지 않거나 사악함을 사악함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조차 두렵습니다. 그러한 영혼은 심판과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말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며, 세상을 두려워 떨게 만드는 지옥 불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하느님의 계명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영혼이 죄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보면서 당신이 성경을 읽어 주어도 그 영혼은 무관심하며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영혼의 수치와 치욕을 지적해도, 그 영혼은 마치 두 눈을 감고 울타리를 향해 돌진하는 돼지처럼 당신의 말을 무시합니다. 이 마귀는 영혼으로 하여금 계속 자만하는 생각을 갖게 함으로써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그 날수를 줄여 주지 않으시면 어떠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마태 24,22).
이 마귀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형제들에게는 거의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이 불행해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갑자기 죽음을 맞으면, 이 마귀는 몰려 나갑니다. 그 영혼이 약간의 가책이나 동정심을 경험하기만 하면, 마귀가 초래한 무감각함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독수도승에게는 이런 일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야에서 생활하며 질병에 걸리는 일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복음서에서 병자들을 돌아보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라고 명하신 것은 특히 이 마귀를 쫓아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마태 25,36)
그러나 은수자가 이 마귀를 만났으나 부정한 생각들을 받아들이거나 자기 독방을 떠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인내와 자기 지배를 받은 것이며, 무정념(dispassion, apatheia)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거룩한 생활을 하겠다고 서원했으나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의 거래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 마귀를 조심해야 합니다.
10. Now what am I to say about the demon who makes the soul obtuse? For I am afraid to write about him: how, at his approach, the soul departs from its own proper state and strips itself of reverence and the fear of God, no longer regarding sin as sin, or wickedness as wickedness; it looks on judgment and the eternal punishment of hell as mere words; it laughs at the fire which causes the earth to tremble; and, while supposedly confessing God, it has no understanding of His commandments. You may beat your breast as such a soul draws near to sin, but it takes no notice. You recite from the Scripture, yet it is wholly indifferent and will not hear. You point out its shame and disgrace among men, and it ignores you, like a pig that closes its eyes and charges through a fence. This demon gets into the soul by way of long-continuing thoughts of self-esteem; and unless 'those days are shortened, no flesh will be saved' (Matt. 24:22).
This is one of those demons that seldom approach brethren living in a community. The reason is clear: when people round us fall into misfortune, or are afflicted by illness, or are suffering in prison, or meet sudden death, this demon is driven out; for the soul has only to experience even a little compunction or compassion and the callousness caused by the demon is dissolved. We solitaries lack these things, because we live in the wilderness and sickness is rare among us. It was to banish this demon especially that the Lord enjoined us in the Gospels to call on the sick and visit those in prison. For 'I was sick,' He says, 'and you visited Me' (Matt. 25:36).
But you should know this: if an anchorite falls in with this demon, yet does not admit unchaste thoughts or leave his cell out of listlessness, this means he has received the patience and self-restraint that come from heaven, and is blessed with dispassion. Those, on the other hand, who profess to practice godliness, yet choose to have dealings with people of the world, should be on their guard against this demon. I feel ashamed to say or write more about him.
11. 모든 마귀들은 영혼에게 쾌락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다만 낙담의 마귀만이 그것을 삼가는데, 이는 그는 낙담을 통해서 영혼의 모든 즐거움을 차단하고 영혼을 메마르게 만들어 영혼의 생각들을 부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기가 꺾인 정신은 뼈를 말린다”(잠언 17:22). 만일 이 마귀가 어느 정도까지만 공격한다면, 운둔자는 더욱 단호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마귀는 은둔자로 하여금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모든 쾌락을 피하라고 격려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보다 오랫동안 머물게 되면, 영혼으로 하여금 포기하게 하거나 도망치게 만듭니다. 욥도 이 마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으며, 그 때문에 “폐허 더미 속에서 누가 손을 내뻗지 않으며 재난 속에서 누가 부르짖지 않으랴?”(욥기 30,24)라고 말했습니다.
이 마귀를 나타내는 상징은 독사입니다. 사람이 독사의 독을 적절히 사용하면 다른 해로운 동물들의 독을 없애는 해독제가 되지만, 그것을 과도하게 취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습니다.
바오로는 고린도에서 한 사람을 이 마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즉시 고린도 교회에게 다시 편지하면서 “여러분은 이제 반대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빠지고 맙니다”(2코린 2:7)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영이 사람들을 괴롭히면 참 회개를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자요한은 이 영의 괴롭힘을 받으면서 하느님 안에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마태 3:7-9)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본받아 그의 고향과 친척들을 떠나는 사람은(창세기 12:1 참조) 이 마귀보다 더 강해집니다.
11. All the demons teach the soul to love pleasure; only the demon of dejection refrains from doing this, since he corrupts the thoughts of those he enters by cutting off every pleasure of the soul and drying it up through dejection, for 'the bones of the dejected are dried up' (Prov. 17:22. LXX). Now if this demon attacks only to a moderate degree, he makes the anchorite more resolute; for he encourages him to seek nothing worldly and to shun all pleasures. But when the demon remains for longer, he encourages the soul to give up, or forces it to run away. Even Job was tormented by this demon, and it was because of this that he said: '0 that I might lay hands upon myself, or at least ask someone else to do this for me' (Job 30:24. LXX).
The symbol of this demon is the viper. When used in moderation for man's good, its poison is an antidote against that of other venomous creatures, but when taken in excess it kills whoever takes it. It was to this demon that Paul delivered the man at Corinth who had fallen into sin. That is why he quickly wrote again to the Corinthians saying: 'Confirm your love towards him . . . lest perhaps he should be swallowed up with too great dejection' (2 Cor. 2:7-8). He knew that this spirit, in troubling men, can also bring about true repentance. It was for this reason that St John the Baptist gave the name 'progeny of vipers' to those who were goaded by this spirit to seek refuge in God, saying: 'Who has warned you to flee from the anger to come? Bring forth fruits, then, that testify to your repentance; and do not think that you can justsay within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father' (Matt. 3:7-9). But if a man imitates Abraham and leaves his country and kindred (cf. Gen. 12:1), he thereby becomes stronger than this demon.
12.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마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질의 노예가 된 사람은 수도 생활이나 주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다윗은 주님에 관해서 “가련한 이들에게 당신 길을 가르치신다”(시편 25:9)라고 말했습니다. 마귀가 홀로 생활하는 수도자의 지성을 사로잡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성은 온유함이라는 땅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어떤 덕목보다도 온유함을 더 두려워합니다. 모세는 이 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주님,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노고를 기억하소서”(시편 132:1)라고 말하면서 온유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기억하심을 받을 자격이 있게 해준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주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절제하지만 악한 생각들 때문에 격앙하여 화를 내는 사람은 마치 마귀를 키잡이로 삼고서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파수견을 주의 깊게 제어하며 양은 삼키지 않고 늑대만 죽이도록 훈련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12. He who has mastery over his incensive power has mastery also over the demons. But anyone who is a slave to it is a stranger to the monastic life and to the ways of our Savior, for as David said of the Lord: 'He will teach the gentle His ways' (Ps. 25:9). The intellect of the solitary is hard for the demon to catch, for it shelters in the land of gentleness. There is scarcely any other virtue which the demons fear as much as gentleness. Moses possessed this virtue, for he was called 'very gentle, above all men' (Num. 12:3). And David showed that it makes men worthy to be remembered by God when he said: 'Lord, remember David and all his gentleness' (Ps. 132:1. LXX). And the Savior Himself also enjoined us to imitate Him in His gentleness, saying: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Matt. 11:29). Now if a man abstains from food and drink, but becomes incensed to wrath because of evil thoughts, he is like a ship sailing the open sea with a demon for pilot. So we must keep this watchdog under careful control, training him to destroy only the wolves and not to devour the sheep, and to show the greatest gentleness towards all men.
13. 악한 생각들 중에서 자만심만큼 책략이 풍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되며, 도시 안에 거하는 교활한 반역자처럼 성문을 열어 모든 마귀들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것은 독수도승의 지성에 많은 말과 개념들을 채우고, 그가 자기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를 오염시키면서 그의 지성을 크게 저하 시킵니다. 다른 마귀들은 패배하면 서로 제휴하여 이 악한 생각의 힘을 증가시키며, 자만심이라는 문을 통해서 영혼 안으로 들어와 그 사람의 나중 상태가 처음 상태보다 못하게 만듭니다(마태 12:45 참조). 자만심은 교만을 낳는데, 교만은 하느님의 모양의 인(印)이요 모든 아름다움의 면류관인 천사를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목숨이 무자비한 사람의 수중에 달려 있을 때에 속히 교만을 버리십시오. 열렬한 기도에 의해서, 그리고 당신 자신의 중요성을 의식하는 데 기여하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 마귀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13. In the whole range of evil thoughts, none is richer in resources than self-esteem; for it is to be found almost everywhere, and like some cunning traitor in a city it opens the gates to all the demons. So it greatly debases the intellect of the solitary, filling it with many words and notions, and polluting the prayers through which he is saying anything that contributes to the sense of your own importance.
14. 독수도승의 지성이 무정념을 조금이라도 획득하면, 그것은 자만심이라는 말을 타고서 즉시 도시안으로 달려 들어가서 그 명성에게 주어진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음란의 영이 지성을 방탕의 돼지우리 안에 가둡니다. 이것은 그것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불순종하는 환자들, 즉 병이 완전히 낫기 전에 돌아다니거나 목욕을 시작하여 병이 도지는 환자들처럼 행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서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면 거룩함이 성장하고, 우리는 보다 강력하게 악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영적 지식을 깨우친 사람은 많은 일에 대한 관상적인 통찰을 획득할 것이며, 한층 더 높이 올라가면, 주님의 빛을 보다 분명히 받을 것입니다.
14. When the intellect of the solitary attains some small degree of dispassion, it mounts the horse of self-esteem and immediately rides off into cities, taking its fill of the lavish praise accorded to its repute. But by God's providence the spirit of unchastity now confronts it and shuts it up in a sty of dissipation. This is to teach it to stay in bed until it is completely recovered and not to act like disobedient patients who, before they are fully cured of their disease, start taking walks and baths and so fall sick again. Let us sit still and keep our attention fixed within ourselves, so that we advance in holiness and resist vice more strongly. Awakened in this way to spiritual knowledge, we shall acquire contemplative insight into many things; and ascending still higher, we shall receive a clearer vision of the light of our Savior.
15. 마귀들의 극악함을 모조리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단순한 독자들에게 해를 끼칠 염려가 있어 그것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하기도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음란의 마귀의 교활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해 보렵니다. 수도승이 영혼의 육욕적인 부분에서 무정념을 획득하고 내면의 부끄러운 생각들을 진정시켰을 때, 이 마귀는 즉시 함께 놀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독수도승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행동과 몸짓을 구경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영구적인 것은 되지 못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음식을 절제하고 철야하고, 영적 관상을 발달시키면, 그것을 가벼운 구름처럼 몰아낼 수 있습니다. 때로 이 교활한 마귀는 육에 접촉하여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불을 붙이기도 하며, 여러 가지 책략을 끝없이 고안해 내기도 합니다.
분노가 이 마귀를 대적하는 훌륭한 방어책이 되기도 합니다. 그 성질이 이러한 종류의 악한 생각을 대상으로 발휘되면, 마귀는 두려워하며 그의 악한 계획이 파괴됩니다. 그러한 노염은 시험을 받는 영혼에게 유익한 약입니다.
분노의 마귀도 부정의 마귀가 사용하는 것과 흡사한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는 우리의 부모나 친구나 친척들이 이유 없이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을 내어 마음속에 등장한 사람들에게 악한 말이나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상들을 경계해야 하며, 그것들을 재빨리 정신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에 그것들을 몰아내지 않고 우물쭈물하면, 그것들은 타오르는 횃불이 될 것입니다. 쉽게 노염을 품는 사람들은 특히 이러한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노염을 품는 사람은 순수한 기도 및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집니다.
15. I cannot write about all the villainies of the demons; and I feel ashamed to speak about them at length and in detail, for fear of harming the more simple-minded among my readers. But let me tell you about the cunning of the demon of unchastity. When a man has acquired dispassion in the appetitive part of his soul and shameful thoughts cool down within him, this demon at once suggests images of men and women playing with one another, and makes the solitary a spectator of shameful acts and gestures. But this temptation need not be permanent; for intense prayer, a very frugal diet, together with vigils and the development of spiritual contemplation, drive it away like a light cloud. There are times when this cunning demon even touches the flesh, inflaming it to uncontrolled desire; and it devises endless other tricks which need not be described.
Our incensive power is also a good defense against this demon. When it is directed against evil thoughts of this kind, such power fills the demon with fear and destroys his designs. And this is the meaning of the statement: 'Be angry, and do not sin' (Ps. 4:4). Such anger is a useful medicine for the soul at times of temptation.
The demon of anger employs tactics resembling those of the demon of unchastity. For he suggests images of our parents, friends or kinsmen being gratuitously insulted; and in this way he excites our incensive power, making us say or do something vicious to those who appear in our minds. We must be on our guard against these fantasies and expel them quickly from our mind, for if we dally with them, they will prove a blazing firebrand to us during prayer. People prone to anger are especially liable to fall into these temptations; and if they do, then they are far from pure prayer and from the knowledge of our Savior Jesus Christ.
16.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그렇듯이, 주님은 인간에게 현세에 대한 이해를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마음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을 새겨주리라”(히브 10:16)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돕기 위해서 그에게 분노하는 능력과 갈망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분노하는 능력의 도움을 받아 늑대 같은 생각들을 몰아내며, 비록 종종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갈망의 도움을 받아 사랑으로 양들을 보살핍니다. 게다가 하느님은 인간이 양을 돌볼 수 있도록 법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푸른 풀밭과 시원한 물을 주셨고(시편 23:2), 시편과 수금, 막대기와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는 산에서 건초를 모으며, 양의 젖을 먹고 양털로 지은 옷을 입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 떼를 치면서 그 젖을 짜 먹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1코린 9:7)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수도승은 밤낮 이 양 떼를 지키며, 한 마리 양이라도 사나운 짐승에게 잡히거나 도둑에게 잡혀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혹시 골짜기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즉시 사자나 곰의 입에서 양을 구해내야 합니다(1사무 17:35 참조).
양이 사나운 짐승에게 잡힌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형제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 여인에 대해 생각할 때에 부끄러운 욕정을 느끼는 것, 금이나 은을 생각할 때에 탐욕으로 가득차는 것,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들에 대해 생각할 때에 우리의 정신이 자만심으로 부풀어 오르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낮에만 아니라 밤에도 이 양 떼를 지켜야 합니다. 부끄러운 환상과 악한 것들을 소유함으로써,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 중 일부를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음과 같은 야곱의 말의 의미입니다: “들짐승에게 찢긴 것은 장인께 가져가지 않고 제가 물어냈습니다. 낮에 도둑을 맞든 밤에 도둑을 맞든 장인께서는 그것을 저에게 물리셨습니다. 낮에는 더위가, 밤에는 추위가 저를 괴롭혀,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습니다”(창세 31:39-40)
우리가 노력하다가 냉담해질 때에는 영적 지식의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서 그 지식의 기술로 줄을 뜯으면서 수금을 연주해야 합니다. 우리가 시내 산 밑에서 양들에게 풀을 먹이면,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떨기나무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탈출 3 참조) 표적과 기사의 내적 본질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16. As sheep to a good shepherd, the Lord has given to man intellections of this present world; for it is written: 'He has given intellection to the heart of every man' (cf. Heb. 10:16). To help man He has given him incensive power and desire, so that with the first he may drive away wolflike intellections, while with the second he may lovingly tend the sheep, even though he is often exposed to rains and winds. In addition, God has given man the law, so that he may shepherd the sheep; He has given him green pastures and refreshing water (cf. Ps. 23:2), a psaltery and harp, a rod and staff. In this way he gathers hay from the mountains, and is fed and clothed from his Hock; for it is written, 'Does anyone feed a Hock and not drink its milk?' (1 Cor. 9:7). Therefore the solitary ought to guard this Hock night and day, making sure that none of the lambs is caught by wild beasts or falls into the hands of thieves. Should this happen in some valley, he must at once snatch the creature from the mouth of the lion or the bear (cf. 1 Sam. 17:35).
What does it mean for the lambs to be caught by wild beasts? It means that when we think about our brother we feed on hatred; when we think about a woman we are moved with shameful lust; when we think about gold and silver we are filled with greed; and likewise when we think about gifts received from God, our mind is gorged with self-esteem. The same happens in the case of other intellections if they are seized by the passions.
We must not only guard this flock by day, but also keep watch at night; for by having fantasies of shameful and evil things we may lose some of the sheep entrusted to us. And this is the meaning of Jacob's words: 'I did not bring you a sheep which was caught by wild beasts; I made good of myself the thefts of the day and the thefts of the night. I was parched with heat by day, and chilled with frost by night, and sleep departed from my eyes' (Gen. 31:39-40. LXX).
If a certain listlessness overtakes us as a result of our efforts, we should climb a little up the rock of spiritual knowledge and play on the harp, plucking the strings with the skills of such knowledge. Let us pasture our sheep below Mount Sinai, so that the God of our fathers may speak to us, too, out of the bush (cf. Exod. 3) and show us the inner essence of signs and wonders.
17. 사악함 때문에 죽어버린 우리의 영적 본성은 창조의 모든 시대에 대한 관상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에 대해 주신 영적 지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2티모 2:11)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의 의미입니다.
17. Our spiritual nature, which had become dead through wickedness, is raised once more by Christ through the contemplation of all the ages of creation. And through the spiritual knowledge that He gives of Himself, the Father raises the soul which has died the death of Christ. And this is the meaning of Paul's statement: 'If we have died with Christ, we believe that we shall also live with Him' (cf. 2 Tim. 2:11).
18. 타락한 상태를 떨쳐 버리고 은혜의 상태를 획득한 지성은 기도하는 동안에 청옥 같고 하늘 같이 청명한 자신의 본성을 보게될 것입니다. 이것이 원로들이 시나이 산에서 본 하느님의 세계였습니다(탈출 24:10).
18. When the intellect has shed its fallen state and acquired the state of grace, then during prayer it will see its own nature like a sapphire or the color of heaven. In Scripture this is called the realm of God that was seen by the elders on Mount Sinai (cf. Exod. 24:10).
19. 부정한 마귀들 중에서 일부는 인간의 수준에서 인간을 유혹하지만, 나머지 마귀들은 비이성적인 동물의 수준에서 유혹합니다. 전자는 자만심, 교만, 질투 등 비이성적인 동물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못하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자연스럽지 못한 방법으로 욕망과 노염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이 정념들은 인간이나 동물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이성적이고 영적인 본성 밑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에서는 이성적인 인간에게 다가오는 생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사람들처럼 죽으리라. 어느 대관들처럼 쓰러지리다”(시편 82:6-7). 그러나 인간의 내면에서 비이성적으로 선동하는 생각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지각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제갈과 고삐라야 그 극성을 꺾느니, 그러지 않으면 네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시편 32:9). 만일 “죄지은 자만 죽는다”(에제 18:4), 우리가 인간으로서 죽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매장해 주겠지만, 우리가 비이성적인 동물의 상태에서 살해되거나 쓰러진다면 독수리와 까마귀들에게 먹힐 것입니다. 그것들의 새끼들은 울며(시편 147:9), 피를 빱니다(욥기 39:30),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
19. Of the unclean demons, some tempt man in so far as he is man, while others disturb him in so far as he is a nonrational animal. The first, when they approach us, suggest to us notions of self-esteem, pride, envy or censoriousness, notions by which non-rational animals are not affected; whereas the second, when they approach, arouse incensive power and desire in a manner contrary to nature. For these passions are common to us and to animals, and lie concealed beneath our rational and spiritual nature. Hence the Holy Spirit says of the thoughts that come to men in so far as they are men: 'I have said, you are gods, and all of you are children of the most High. But you shall die as men, and fall as one of the princes' (Ps. 82:6-7). But what does He say of the thoughts which stir in men non-rationally? 'Do not be as the horse and mule, which have no understanding: whose mouth must be controlled with bit and bridle in case they attack you' (Ps. 32:9). Now if 'the soul that sins shall die' (Ezek. 18:4), it is clear that in so far as we die as men we are buried by men, but in so far as we are slain or fall as non-rational animals, we are devoured by vultures and ravens whose young 'cry' to the Lord (Ps. 147:9) and 'roll themselves in blood' (Job 39:30. LXX). 'He that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Matt. 11:15).
20. 원수가 당신에게 다가와서 상처를 입혔을 때에 원수로 하여금 칼로 제 마음을 찌르게 하기를 원하다면(시편 37:15 참조), 다음과 같이 행하십시오: 당신의 내면에서 상처를 입힌 죄악된 생각을 분석해 보십시오. 즉,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무엇이 지성을 괴롭히는지 분석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탐욕으로 가득한 생각이 당신에게 제안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생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분하십시오: 그 생각을 받아들인 지성, 황금에 대한 개념, 황금 자체, 그리고 탐욕이라는 정념 등. 그 다음에는 이것들 중 어디에 죄가 존재하고 있는지 질문해 보십시오. 지성입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지성이 하느님의 형상이 될 수 있겠습니다? 황금에 대한 개념입니까?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이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황금 자체가 죄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왜 피조 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의 원인은 네 번째 요소입니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도 아니고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개념도 아니라, 자유로이 선택될 때에 지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지으신 것들을 오용하게 만드는 쾌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쾌락을 베어 내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조사하고 그 구성 요소들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파괴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지식에 의해서 정신이 보다 높은 수준으로 들려 올려지면, 마귀는 즉시 도망칠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칼로 제 마음을 찌르기 전에, 당신은 먼저 새총으로 마귀를 공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가방에서 들을 꺼내어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써 그것을 던지십시오: 우리가 천사들의 세상과 마귀들의 세상을 침범하지 않는 데 반해, 천사들과 마귀들이 우리 세상을 침범하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이는 우리는 천사들을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할 수 없고 마귀들을 더욱 부정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 빛나는 별인 루시퍼가 땅에 떨어져(이사 14:12) ”해심을 가마솥처럼 끓게 하고”(욥기 41:23)그 사악함으로 모든 것을 어지럽게 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려 함은 어찌 된 일입니까? 이러한 일들에 대한 통찰은 마귀에게 깊은 상처를 주며 그의 군대를 도망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정화되고 피조물의 내적 본질에 대한 이상을 획득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정한 사람들은 이러한 본질들을 통찰할 수 없으며, 혹시 원수를 속이는 방법을 배웠어도 전쟁 때에 그들의 정념이 일으킨 먼지와 소동의 큰 구름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원수의 군대를 잠잠하게 만들어야만 다윗이 골리앗만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정한 생각들과 싸울 때에, 두 가지 방법-우리를 공격하는 생각을 분석하는 것, 그리고 내적 본질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20. When one of the enemy approaches you and wounds you, and you wish to turn his sword back into his own heart (cf. Ps. 37:37:15), then do as follows: analyze in yourself the sinful thought that has wounded you, what it is, what it consists of, and what in it especially afflicts the intellect. Suppose, for instance, that a thought full of avarice is suggested to you. Distinguish between the component elements: the intellect which has accepted the thought, the intellection of gold, gold itself, and the passion of avarice. Then ask: in which of these does the sin consist? Is it the intellect? But how then can the intellect be the image of God? Is it the intellection of gold? But what sensible person would ever say that? Then is gold itself the sin? In that case, why was it created? It follows, then, that the cause of the sin is the fourth element, which is neither an objective reality, nor the intellection of something real, but is a certain noxious pleasure which, once it is freely chosen, compels the intellect to misuse what God has created. It is this pleasure that the law of God commands us to cut off. Now as you investigate the thought in this way and analyze it into its components, it will be destroyed; and the demon will take to flight once your mind is raised to a higher level by this spiritual knowledge.
But before using his own sword against him, you may choose first to use your sling against him. Then take a stone from your shepherd's bag and sling it (cf. 1 Sam. 17) by asking these questions: how is it that angels and demons affect our world whereas we do not affect their worlds, for we cannot bring the angels closer to God, and we cannot make the demons more impure? And how was Lucifer, the morning star, cast down to the earth (cf. Isa. 14:12), 'making the deep boil like a brazen cauldron’ (Job 41:31. LXX), disturbing all by his wickedness and seeking to rule over all? Insight into these things grievously wounds the demon and puts all his troops to flight. But this is possible only for those who have been in some measure purified and gained a certain vision of the inner essences of created things; whereas the impure have no insight into these essences, and even if they have been taught by others how to outwit the enemy they will fail because of the great clouds of dust and the turmoil aroused by their passions at the time of battle. For the enemy's troops must be made quiet, so that Goliath alone can face our David. In combat with all unclean thoughts, then, let us use these two methods: analysis of the thought attacking us, and the asking of questions about inner essences.
21. 부정한 생각을 재빨리 쫓아낸 후에는 그 일이 발생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원수가 우리를 제압하지 못한 것은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무정념을 획득했기 때문입니까? 예를 들면 만일 어느 독수도승이 자신이 한 도시의 영적 통치를 맡았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실현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이 생각에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 도시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는데도 젠체하지 않는다면, 그는 무정념의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른 생각들을 판단할 때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건과 힘을 평가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요르단 강을 건너 야자 숲 가까이에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광야에서 원수의 괴롭힘을 받고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서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탐욕의 마귀의 속임수는 특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종종 탐욕의 마귀는 우리의 엄격한 극기와 자제 때문에 좌절할 때면, 즉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살펴 주는 자인 체합니다. 그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은 나그네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라거나 이곳에 있지 않은 형제들에게 양식을 보내라고 촉구합니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도시에 있는 감옥을 방문하게 하고 노예로 팔리는 사람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롭게 해주게 만듭니다. 그는 우리가 부유한 여인들에게 매달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돈 많은 사람들에게 아부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을 속인 후에는, 점차 영혼을 탐욕스러운 생각들 속에 빠지게 하여, 자만심의 마귀에게 넘겨줍니다.
자만심의 마귀는 상상 속에서 우리가 행한 자비한 행위들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는 칭송자들의 무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는 우리가 성직에 임명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만들고, 현재의 사제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불쌍한 우리의 지성은 이러한 생각들로 뒤얽혀 자신의 성직 임명을 반대하는 사람을 공격하며, 찬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을 주고 아첨을 합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 중 일부를 재판하여 도시에서 추방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정신 속에서 맴도는 동안에 교만의 마귀가 모습을 나타내며, 번개와 두려운 환상으로 독방을 채우며 우리를 미치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의 멸망을 기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1티모 6:7-8),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하십시오.
21. Whenever unclean thoughts have been driven off quickly, we should try to find out why this has happened. Did the enemy fail to overpower us because there was no possibility of the thought idea of bread persists in a hungry man because of his hunger, and the idea of water in a thirsty man because of his thirst, so ideas of material things and of the shameful thoughts that follow a surfeit of food and drink persist in us because of the passions. The same is true about thoughts of self-esteem and other ideas. It is not possible for an intellect choked by such ideas to appear before God and receive the crown of righteousness. It is through being dragged down by such thoughts that the wretched intellect, like the man in the Gospels, declines the invitation to the supper of the knowledge of God (cf. Luke 14:18); and the man who was bound hand and foot and cast into outer darkness (cf. Matt. 22:13) was clothed in a garment woven of these thoughts, and so was judged by the Lord, who had invited him, not to be worthy of the wedding feast. For the true wedding garment is the dispassion of the deiform soul which has renounced worldly desires. [In the texts On Prayer it is explained why dwelling on ideas of sensory objects destroys true knowledge of God.]
22. 우리의 정념 때문에 우리의 내면에 계속 존속하는 모든 음란한 생각들은 지성을 멸망하게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서는 빵 생각이 떠나지 않고, 목마른 사람에게서는 물 생각이 떠나지 않듯이, 실컷 먹고 마신 후에 이어지는 물질에 대한 생각과 수치스러운 생각들은 정념들 때문에 계속 우리 안에 존속합니다. 자만심이나 다른 개념들에 대한 생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생각들 때문에 질식한 지성은 하느님 앞에 서서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에 끌려간 지성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하느님을 아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거절합니다(루카 14:18), 손과 발을 결박당한 채 바깥 어두움에 내어쫓긴 사람(마태 22:13)은 이러한 생각들로 짠 옷을 입고 있었으며, 혼인 잔치에 초대했던 주님으로부터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세상적인 욕망르 부인한 영혼의 무정념은 참된 혼인 예복입니다.
『기도에 관하여』(On Prayer)에서는 감각적인 사물들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 참된 하느님의 지식을 파괴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22 Whenever unclean thoughts have been driven off quickly, we should try to find out why this has happened. Did the enemy fail to overpower us because there was no possibility of the thought ... missing text ...
... idea of bread persists in a hungry man because of his hunger, and the idea of water in a thirsty man because of his thirst, so ideas of material things and of the shameful thoughts that follow a surfeit of food and drink persist in us because of the passions. The same is true about thoughts of self-esteem and other ideas. It is not possible for an intellect choked by such ideas to appear before God and receive the crown of righteousness. It is through being dragged down by such thoughts that the wretched intellect, like the man in the Gospels, declines the invitation to the supper of the knowledge of God (cf. Luke 14:18); and the man who was bound hand and foot and cast into outer darkness (cf. Matt. 22:13) was clothed in a garment woven of these thoughts, and so was judged by the Lord, who had invited him, not to be worthy of the wedding feast. For the true wedding garment is the dispassion of the deiform soul which has renounced worldly desires.
In the texts On Prayer it is explained why dwellinng on ideas of sensory objects destroys true knowledge of God.
23. 앞에서 말했듯이, 수덕 생활을 실천할 때에 마귀들의 세 가지 집단이 우리를 전방에서 공격하며, 그들의 뒤를 원수의 군대가 따릅니다. 이 세 집단은 최전방에서 싸우며, 불순한 생각으로 영혼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합니다. 세 집단이란 탐식의 욕구를 감독하는 마귀들, 탐욕적인 생각을 주입하는 마귀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으라고 부추기는 마귀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순수한 기도를 간절히 원한다면, 쉽게 분노함을 제어하십시오. 그리고 만일 극기를 원하다면, 당신의 배를 제어하며 음식을 배불리 먹지 마십시오. 깨어 기도하고, 증오심을 버리십시오. 성령의 가르침을 항상 당신 곁에 두며, 덕을 사용하여 성경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 때에 당신의 내면에서 무정념이 생겨날 것이며, 당신은 기도하는 동안에 당신의 지성이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3. As we stated at the beginning, there are three chief groups of demons opposing us in the practice of the ascetic life, and after them follows the whole army of the enemy. These three groups fight in the front line, and with impure thoughts seduce our souls into wrongdoing. They are the demons set over the appetites of gluttony, those who suggest to us avaricious thoughts, and those who incite US to seek esteem in the eyes of men. If you long for pure prayer, keep guard over your incensive power; and if you desire self-restraint, control your belly, and do not take your fill even of bread and water. Be vigilant in prayer and avoid all rancor. Let the teachings of the Holy Spirit be always with you; and use the virtues as your hands to knock at the doors of Scripture. Then dispassion of heart will arise within you, and during prayer you will see your intellect shine like a star.
5. 요한 클리마쿠스 - 거룩한 등정의 계단 스물 두 번째 계단 : 허영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스물두 번째 계단 허영
05.요한 클리마쿠스 - 스물두 번째 계단 허영.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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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허영과 교만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특별히 허영을 구분하여 다룹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치명적인 대죄가 여덟 가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학자 그레고리¹)를 비롯한 교사들은 치명적인 대죄가 일곱 가지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허영을 정복한 사람에게 어찌 교만이 남아 있겠습니까? 전자는 출발점이요 후자는 종착점이므로, 그 차이는 아이와 어른, 밀과 빵의 차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정념들의 시작이요 완성인 자만심이라는 거룩하지 못한 악덕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려 합니다.
형태와 관련해서 보면, 허영은 본성의 변화 및 성품의 악용과 비판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특성상 허영은 일과 땀의 낭비, 보물을 폭로하는 것, 불신앙의 결과, 교만의 전조(前兆), 배가 항구에서 좌초하는 것, 작지만 우리의 수고의 열매를 의도적으로 가져가는 타작마당의 개미와 같습니다. 개미는 밀이 타작될 때까지 기다리며, 허영은 미덕들이 수집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전자는 도둑이요, 후자는 부랑아입니다.
낙심의 영은 악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크게 기뻐하며, 형영의 영은 덕의 보물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기뻐합니다. 전자에게로 들어가는 문은 많은 상처들이요, 후자에게로 들어가는 문은 힘들여 행한 일입니다.
허영을 주시하십시오. 그것은 죽어 땅에 묻히는 날까지 옷∙하인∙향수 등을 좋아합니다.
태양이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비추어주듯이, 허영은 모든 일에 작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금식하면 허영심이 강해집니다.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위해서 금식을 멈추면, 나의 신중함으로 인해 나는 허영심을 느낍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대 그레고리를 말한다. 에바그리우스가 언급한 여덟 가지 주요한 유혹(정념)은 탐식 (gluttony), 육욕(lust), 탐욕(avarice), 낙담(dejection), 노염(anger), 의기소침 (despondency), 허영(vainglory), 교만(pride)이다. 카시안은 이 목록을 서방에 고개했다. 교황 대 그레고리는 허영과 교만, 낙담과 의기소침을 합병하고, 시기(envy)를 도입하여 정 념들을 일곱 가지로 축소했다.
나는 옷을 제대로 잘 입든 말든 허영심을 느낍니다. 말을 하든지 침묵하든지 허영에게 패배합니다. 이 따끔따끔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 뿌려도 항상 뾰족한 면이 나를 향합니다.
허영심이 강한 신자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합니다.
과시하는 것은 허영심의 발로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모든 일을 칭찬받기 위해서 행하므로, 그의 금식은 상을 받지 못하며, 그의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허영심이 강한 금욕고행자는 두 배나 자신을 속여, 자기 몸을 지치게 하지만 상을 얻지 못합니다. 시편을 찬송하기 위해 서있으나 허영심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보이려고 때때로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주 우리가 이미 획득한 완전함조차도 우리가 보지 못하도록 감추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칭찬하거나 잘못 인도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의 말을 통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데, 우리가 눈을 뜨는 순간 보물은 사라집니다.
아첨하는 사람은 마귀의 종이요, 교만의 교사요, 마음의 통회를 파괴하는 자요, 덕의 파괴자요, 심술궂은 안내자입니다. 선지자는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사3:12)고 합니다.
영적으로 고결한 사람은 불쾌한 일을 기꺼이 참고 견딥니다. 그러나 오직 거룩한 사람들과 성인들만 칭찬을 받아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칭찬을 받을 때 화를 내는 것은 하나의 정념이 다른 정념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고전2:11). 그러므로 우리의 면전에서 우리를 칭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망신을 주어 침묵하게 해야 합니다.
당신의 이웃이나 친구가 당신 앞에서 또는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을 비난한다면, 그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그를 칭찬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의 칭찬을 무시하는 것은 큰 업적이요, 마귀들의 칭찬을 거부하는 것은 한층 더 큰 업적입니다.
스스로를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계속 사랑합니다.
허영의 마귀가 한 형제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제안하고, 그것들을 다른 형제에게 보여주며, 후자로 하여금 전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생각을 읽는 그의 능력을 칭찬하게 하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 무서운 마귀는 심지의 그의 몸의 음부를 흔들고 자극했습니다.
당신에게 주교나 수도원장이나 교사의 직무를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마귀를 무시하십시오. 정육점 앞을 맴도는 개는 쫒아내기 어렵습니다.
마귀는 어느 정도 내적 평온을 획득한 사람을 보면, 즉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사막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허영과 사막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허영은 다릅니다.
허영은 외부 세상으로부터 손님들이 도착할 것을 예상합니다. 허영은 교만이 가득한 경솔한 수도사를 자극하여 급히 나가서 그들을 맞이하고 그들 앞에 엎드려 겸손한 모습을 나타내게 합니다. 허영은 그로 하여금 겸손한 듯한 말과 행동을 하게하며, 방문객들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을까하는 생각에서 그들의 손을 바라보게 합니다. 허영은 그가 방문객들을 “경건한 생활을 하는 후원자들”로 여기고 맞이하게 합니다. 식사를 할 때는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절식할 것을 요구하며 아랫사람들을 무섭게 비난하게 만듭니다. 허영은 시편 찬송을 하는 동안 단정치 못한 태도로 서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력할 수 있게 해주고, 소리를 내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훌륭하게 찬송할 수 있게 해주며, 조는 사람을 깨웁니다. 허영은 (성가대의) 선창자(先唱者)를 우쭐하게 하여 성가대에서 으뜸으로 느끼게 하여 방문객들이 있는 동안에 그를 교사요 수도원장처럼 대하도록 합니다.
허영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교만을, 멸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원망을 심습니다. 종종 그것은 성난 제자들을 매우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에, 명예보다는 치욕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마른 사람들 앞에서 온순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것은 재주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무성하게 자라며, 종종 자기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옵니다.
나는 어떤 마귀가 자신의 형제에게 해를 입히고 쫒아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형제가 화가 나 있을 때 바깥세상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는데, 이 불쌍한 사람은 허영에 넘어갔습니다. 그는 한 번에 두 가지 정념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허영의 종은 이중생활을 하게 합니다. 그는 겉으로는 수도사들과 함께 살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에 존재합니다.
만일 우리가 진심으로 거룩한 것들을 갈망한다면, 분명히 하늘의 영광를 맛볼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맛본 사람은 세상의 영광을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늘의 영광을 맛보지 않고서도 세상의 영광을 멸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허영에 의해 벌거벗겨진 후에 일변하여 더욱 영리하게 그것을 떼어내기도 합니다. 나는 허영에서 벗어나 영성생활을 시작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출발은 좋지 않았지만, 의도를 바꾸었기 때문에 훌륭하게 과정을 마쳤습니다.
선천적인 능력들-영리함, 뛰어난 학습 능력, 글을 읽는 탁월한 능력, 훌륭한 말솜씨, 민첩한 이해력, 그리고 노력하지 않고서도 소유하는 기술들-을 뽐내는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큰일에서 허영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무정념, 하늘나라의 보물들, 기적을 행함, 예언적 능력 등을 추구하면서 목적 없이 몸을 지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가련한 바보들은 힘든 일이 아니라 겸손이 그러한 것들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구하는 사람은 불확실성 위에 집을 짓고 자신을 빚진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대할 수 없는 많은 갑작스런 부(富)를 얻을 것입니다.
청중들의 유익을 위하여 당신의 덕을 나타내라고 말하는 마귀에게 복종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우리의 이웃은 오직 진지하고 겸손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태도에 의해 감동을 받습니다.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이 사람들에게 본이 되고 자극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줍니다.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언젠가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데, 허영의 마귀와 교만의 마귀가 각기 내 양 옆에 와서 앉았습니다. 전자는 허영의 손가락으로 나를 콕콕 찌르면서 나에게 사막에서 본 환상이나 내가 행한 수고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라고 부추겼습니다. 나는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시40:14)라는 말로 그를 쫓아버렸습니다. 그때 왼쪽에 있던 마귀가 내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잘 했군, 잘 했어! 너는 염치없는 내 어미를 정복함으로써 위대해졌다.’ 나는 위의 시편 구절의 다음 구절을 이용하여 적절히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향하여 하하하는 자로 자기 수치로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시40:15).” 나는 그에게 어찌하여 허영이 교만의 어미인지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칭찬은 나를 우쭐대게 하고 자만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영혼이 우쭐해지면, 교만은 영혼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가 깊은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여호와로부터 오는 영광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삼상2: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 뒤를 이어 임하는 마귀들이 고안해낸 영광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6:26)라고 말합니다. 첫째 종류의 영광은 당신이 그것을 위험한 것으로 여겨 온갖 방법으로 그것에게서 도망치며, 어디에서나 당신 자신의 생활방식을 숨길 때 알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행할 때 둘째 종류의 영광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운 허영은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소유하지 않은 덕을 우리 자신의 것인체하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게 하라”(마5:16).
종종 주님은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굴욕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허영을 극복하는 첫 단계는 침묵하면서 굴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간 단계는 우쭐대려는 행동과 관련된 생각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굴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웃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당신의 죄를 감추지 마십시오. 물론 이 권고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죄의 본질에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만일 원하지 않는 영광이 우리에게 임한다면 또는 우리가 허영심 때문에 어떤 행동을 계획한다면, 홀로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면서 우리의 애통과 복된 두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행한다면, 즉 참된 기도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이 참되다면, 확실히 염치없는 허영의 허를 찌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것도 효과가 없으면, 항상 명예의 뒤를 따라오는 수치를 두려워하십시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분명히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크게 칭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의 많은 죄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존경한다며 행한 그들의 말이나 행동은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는 분명히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기도에 성공하여 교만이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규적으로 그들의 소원과 청원을 미리 막으십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허영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허영은 결국 단순성의 상실이요 위선적인 행동 방식입니다.
구더기가 완전히 성장하면 날개가 생겨서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허영이 완전히 성장하면 교만을 낳을 수 있는데, 그것은 모든 악의 시작이요 또한 마지막입니다.
허영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에 접근합니다. 허영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성도들의 영광에서 멀리 내쫓깁니다.
이상이 스물두 번째 계단입니다. 허영을 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교만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6. 요한 클리마쿠스 - 거룩한 등정의 계단 중 일곱 번 째 계단, 애통
요한 클리마쿠스,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 은성출판사 최대형번역
06.제7계단 애통 요한 클리마쿠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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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느님께 합당한 애통은 영혼의 우울증으로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다가 얻지 못할 때 부지런히 그것을 추적하며 슬퍼하면서 그 뒤를 따르는 영혼의 성질입니다. 애통은 모든 속박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슬픔에 의해서 마음을 지키는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황금 박차입니다.
2. 양심의 가책은 영원한 양심의 고통과 침묵으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마음의 불을 식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 고백 때문에 빵을 먹는 일을 망각하므로 죄고백은 본성의 망각입니다. (시편102.5)
3. 회개는 모든 피조물의 위로를 기꺼이 부인하는 것입니다.
4. 복된 애통에 있어서 어느 정도 진보하는 사람은 말이 없고 절제합니다. 진정으로 진보한 사람들은 성내지 않고 불평을 품지 않습니다. 완전한 사람들은 겸손하며 수치를 갈망하며 본의 아닌 고난을 기다리며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고 엄청나게 동정심이 많습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겨우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며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수치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물리게 할 수 없는 음식을 배불리 먹을 것입니다.
5. 만일 당신에게 애통이 주어진다면, 힘을 다해 그것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것은 제대로 확보하지 않으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밀랍이 불 가까이에 있으면 녹듯이, 비탄도 소음·세상의 염려·사치 등에 의해서 특히 천박함과 수다에 의해서 쉽게 사라집니다.
5. If you possess the gift of mourning, hold on to it with all your might. For it is easily lost when it is not firmly established. And just as wax melts in the presence of fire, so it is easily dissolved by noise and bodily cares, and by luxury, and especially by talkativeness and levity.
6. 세례를 받은 후에 흘리는 눈물은 세례 자체보다 위대합니다. 세례는 이전에 우리 안에 있던 악들을 씻어내며, 세례 후에 범한 죄들은 눈물에 의해 씻겨나갑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받은 세례를 완전히 더럽혔지만, 눈물로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눈물을 주시지 않았다면, 구원 받는 사람은 정말 찾기 어려울 정도로 드물 것입니다.
6. Greater than baptism itself is the fountain of tears after baptism, even though it is somewhat audacious to say so. For baptism is the washing away of evils that were in us before, but sins committed after baptism are washed away by tears. As baptism is received in infancy, we have all defiled it, but we cleanse it anew with tears. And if God in His love for mankind had not given us tears, few indeed and hard to find would be those in a state of grace.2 (Lit. ‘who are being saved’.)
7. 신음과 비애는 주님께 소리치며, 떨며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위해 중재해주며, 지극히 거룩한 사랑으로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기도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7. Groanings and sorrows cry to the Lord. Tears shed from fear intercede for us; but tears of all-holy love show us that our prayer has been accepted.
8. 겸손만큼 애통에 어울리는 것은 없으며, 웃음만큼 애통과 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8. If nothing goes so well with humility as mourning, certainly nothing is so opposed to it as laughter.
9. 거룩한 양심의 가책에서 나오는 복되고 즐거운 슬픔을 굳게 붙드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그것은 우리를 세상이 주는 것들 너머로 들어 올려 그리스도께 바치는 깨끗한 제물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9. Keep a firm hold of the blessed joy-grief of holy compunction, and do not stop working at it until it raises you high above the things of this world and presents you pure to Christ.
10. 어두운 불의 심연, 그것의 잔인한 앞잡이들, 무자비하고 냉혹한 심판관, 지하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끝없는 혼돈, 하계의 방들과 입을 벌리고 심연으로 내려가는 좁은 내리막길 등의 영상을 쉬지 말고 상상하며 조사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엄청난 공포에 의해서, 썩지 않을 순결에 복종함에 의해서 우리 영혼 안에 있는 욕정이 억제될 것이며, 모든 불을 너머 비추어주는 비물질적인 빛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 Do not cease to picture and scrutinize the dark abyss of eternal fire, and the merciless servants, the unsympathetic and in exorable Judge, the bottomless pit of subterranean flame, the narrow descents to the awful underground chambers and yawning gulfs, and all such things, so that the sensuality in our soul may be checked by great terror and give place to incorruptible chastity, and itself receive the shining of the immaterial light which radiates beyond any fire.
11. 기도하고 탄원할 때는 재판관 앞에 선 죄수처럼 두려워 떠십시오. 당신이 바라보는 방법과 마음의 성향은 의로우신 재판관의 분노를 극복할 것입니다. 그분은 슬픔의 짐을 지고 서서 지치지 않으시는 분을 귀찮게 하는 과부같은 영혼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cf. 루카18:5)
11. During prayer and supplication stand with trembling like a convict standing before a judge, so that both by your outward appearance as well as by your inner disposition you may extinguish the wrath of the just Judge; for He will not despise a widow soul standing before Him burdened with sorrow and wearying the Unwearying One.3(루까18 5)
12. 영적 눈물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순전히 외적인 겉치레에 불과하다면, 장소와 수단에 대한 그의 논의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보물은 시장에 진열된 때보다 숨겨질 때 더 안전합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십시오.
12. He who has obtained heartfelt tears will find any place convenient for mourning. But he whose weeping is only outward show will spend endless time discussing places and manners. Just as hidden treasure is safer from robbery than that exposed in the market, so let us apply this to what we have just said.
13. 죽은 자를 매장하는 자리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도 자리를 떠나서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본받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광산에서 매 시간 감시인으로부터 매질을 당하는 죄수들처럼 되십시오.
13. Do not be like those who in burying their dead first lament over them and then get drunk for their sake. But be like the prisoners in the mines who are flogged every hour by the gaolers.
14. 애통한 후에 상류생활과 웃음을 즐기는 사람은 음란의 개에게 빵을 던져주는 사람과 흡사합니다. 그 사람은 개를 쫓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가 자기 곁에 머무는 것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14. He who sometimes mourns and sometimes indulges in luxury and laughter is like one who stones the dog of sensuality with bread. In appearance he is driving it away, but in fact he is encouraging it to be constantly with him.
15. 묵상할 때는 자신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당신의 마음 속으로 물러가며, 도둑이 개를 두려워하듯이 마귀들은 묵상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15. Be concentrated without self-display, withdrawn into your heart. For the demons fear concentration as thieves fear dogs.
16. 우리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애통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16. It is not to a wedding banquet that we have been called here—certainly not—but He who has called us has called us here to mourn for ourselves.
17. 맹목적인 눈물은 비이성적인 존재들에게만 어울리지만, 개중에는 울면서 모든 생각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물은 실제로 생각의 산물이며, 생각의 근원은 이성적인 정신입니다.
17. When they weep, some force themselves unseasonably to think of nothing at all during this blessed time, not realizing that tears without thought are proper only to an irrational nature and not to a rational one. Tears are the product of thought, and the father of thought is a rational mind.
18. 당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무덤에 누워있는 것의 상징으로 여기십시오. 그리하면 지나치게 많이 잠을 자지 않을 것입니다.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구더기들이 득실거리는 음식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면 사치하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물을 마실 때는 불길의 갈증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분명히 자신의 본성을 거역할 것입니다.
18. Let your reclining in bed be for you an image of your declining into your grave—and you will sleep less. Let your refreshment at table be for you a reminder of the grim table of those worms—and you will be less luxurious. And in drinking water, do not forget the thirst of that flame—and you will certainly refuse your nature all it wants.
19. 상급자가 우리를 책망하거나 견책하거나 벌할 때는 영원한 심판관의 두려운 선고를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면 양쪽에 날이 선 칼인 온유함과 인내로써 우리 안에 뿌려질 비이성적인 슬픔과 괴로움을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19. When we suffer from the Superior honourable dishonour, scolding or punishment, let us remember the fearful sentence of the Judge, and we shall kill with meekness and patience, as with a two-edgedsword, the irrational sorrow and bitterness which will certainly be sown in us.
20. 욥은 “(때가 지남에 따라) 바다에서 물이 빠져나가고”(욥 14:11)라고 말합니다. 시간과 인내는 우리 안에서 점진적으로 획득되며 완전해집니다.
20. The sea wastes with time, as Job says.1 And with time and patience the things of which we have spoken are gradually acquired and perfected in us.
첫댓글 필로칼리아 강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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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 강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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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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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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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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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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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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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강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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