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각 선해져 ‘공’ 알면 지혜 생긴다.
불교에서의 ‘선함’은
‘있다-없다’ 초월한 행위
곧 부처님의 행 의미
양변 여읜 자리가 ‘귀의’
중생-부처 나누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 닦아야
『해와 달은 항상 밝으나 다만 구름이 덮이면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워 일월성신(日月星辰)을 보지 못한다,
홀연히 지혜의 바람이 불어
구름과 안개를 다 걷어 버리면 삼라만상이 모두 일시에 나타난다.』
이것도 비교가 하나 되지요.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면
진공묘유(眞空妙有) 일체 삼라만상이 다 보이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깨끗한 것이 맑은 하늘과 같아
혜(慧)는 해(日)와 같고, 또 지(智)는 달(月)과 같다.
지혜는 항상 밝되 밖으로 경계에 집착하여
망상의 뜬구름이 덮여 자성이 밝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참법(眞法)을 열어 미망을 불어 물리쳐 버리면
안팎이 사무치게 밝아(內外明徹) 자기 성품 가운데 만법이 다 나타나,
모든 법에 자재한 성품을 청정법신이라 한다.』
저 앞에서 뭐가 청정 법신이냐고 물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외(內外)가 명철하다는 말은
주관과 객관 모두 실체가 없고 공이란 것을 알게 되면
자성 가운데에 만법이 다 나타납니다. 여기서 일체 법은 존재를 말합니다.
일체 법의 자재한 성품이 청정 법신이라고 이름한다.
우리 성품 그 자리를 청정 법신이라 하고
그 성품에서 모든 작용도 나오고
그 작동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합니다.
스스로 귀의(歸依)한다 함은 무엇인가?
착하지 못한 행동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귀의한다고 함이다.
선하지 못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면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행위가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마음씨 좋은 것과 불교에서 말하는 선한 것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마음씨가 좋고 선한 행위를 하더라도
양변에 집착해 있는 한은 선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에서 말한 선한 행위는 ‘있다-없다’를 초월해서 하는 행위,
그것을 선하다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또 부처님 행입니다.
천백억 화신불이란 무엇인가?
그 법신 자리에서 우리가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성품이 공하고 법신 그대로 있는 거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있으면 굉장히 편하겠네, 이런 생각도 하는데
우리 이 존재원리의 속성은 절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변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서울에 갔다가 부산에 갔다가 하지요.
이 마음이란 것은 절대 가만히 있는 게 아니예요.
그래서 활발발(活潑潑)이라고 합니다.
작용했다 하면 벌써 작용 안 하고 작용 안 했다 하면 벌써 작용하고,
둘이라 하면 벌써 한 개가 되어 있고 한 개라 하면 벌써 두 개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이게 우리 속성입니다.
『생각(思量)하지 않으면 성품은 곧 비어 고요하지만,
생각하면 이는 곧 스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악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지옥이 되고,
선한 법을 생각하면 변하여 천당이 되며,
독과 해침(害)은 변하여 축생(畜生)이 되고, 자비는 변하여 보살이 되며,
지혜는 변하여 윗 세계(上界)가 되고, 또 어리석음은 변해서 하방(下方)이 된다.
이같이 자성의 변화가 매우 많은바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성품 그 자리에서 생각하면 곧 스스로 작용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쁜 생각을 하면, 변해서 지옥이 되고요.
또 선법(善法)을 생각하면 변해서 천당이 되고,
또 독한 마음으로 누구를 해치는 것은 변해서 축생이 되고,
자비스런 마음을 가지면 변화해서 보살이 되고,
지혜는 변화해서 상계(上界)가 되고, 상계라고 해서 천당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마음이 상계 상태가 되는 겁니다.
또 어리석은 것은 변화해서 하방(下方)이 되어서 자성의 변화가 심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일어날 때에 그 생각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이해를 하면 사실은 다른 생각을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체험하면
아예 나쁜 생각이 안 일어나고 자유자재합니다.
이런 경지에 못간 사람이라도 또 나쁜 생각 일어나도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나쁜 행위까지는 안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모르니까 행동까지도 하게 됩니다.
조그마한 정견(正見)만 갖춰도 만일에 화가 일어나면 얼른 알아챕니다.
알아채면 그 자리에서 녹이는데,
또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또 며칠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몇 시간 가는 사람이라도 행위로까지는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거예요.
『한 생각이 선하면 지혜가 생하니, 이것을 자성화신(自性化身)이라 한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생각에 따라서 천당도 되고 지옥도 되고 짐승도 되고
보살도 되고 상계도 되고 여러 가지 변한다 그랬지 않습니까?
그렇게 변하는데 미혹한 사람은 변하여 일어나는 줄도 몰라요.
모르고 그냥 일어남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겨 가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일념(一念)이 선하면, 한 생각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거기에서 지혜가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자성 화신이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원만한 보신불(報身佛)이란 무엇인가?』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는 능히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애니,
지금 여기가 깜깜하다고 했을 때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환해지지요?
바로 그 소리예요. 깜깜한데 위에서부터 조금 조금씩 밝혀오는 게 아니고
스위치 하나만 움직이면 전체가 환해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체가 없고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서
우리 마음 상태가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는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되면,
천년, 만년 어두웠던 것이 일시에 환하게 됩니다. 그게 돈오돈수(頓悟頓修)예요.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되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고,
단계적으로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 대승불교 특히 선(禪)은 한 몫에 다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예요.
감이 가을 햇살을 받고 세월이 흘러 홍시가 되는 것이지,
땡감이 하루아침에 홍시가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단계가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왜 단계를 얘기하는가 하면,
사실 홍시가 되기까지의 그 단계를 꿈에 비유하면,
꿈에 이런 저런 고통을 받다가 딱 깨는 순간에 고통이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렇듯이 꿈속에서 우리가 깨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러면 현실과 사실은 뭐냐? 깬 것뿐이에요. 꿈속의 고통은 허구예요.
그래서 그 허구를 이 대승불교, 즉 선불교에서는 인정을 안 합니다.
오직 사실과 현실만 인정해요. 잠자고 깬 거 이것뿐이에요.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항상 미래만을 생각하라.
항상 미래의 생각이 선한 것을 이름하여 보신이라 한다.』
전후(前後)를 논하는데, 전은 ‘있다-없다’ 분별심으로 하는 거라고 보시면 되고,
후는 우리가 ‘있다-없다’ ‘좋다-나쁘다’ ‘너다-나다’를 초월한 걸로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후념이 선한 것이 이름해서 보신불이 됨이니라.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선함을 물리쳐 그치고,
한 생각의 선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없앤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미래의 생각이 선함을 보신불(報身佛)이라 한다.』
악한 과보라고 하니까 몹시 나쁜 짓하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있다-없다’로 생각하는 과보입니다.
여기에 선한 과보할 때의 선(善)은 선악을 초월한 과보입니다.
한 생각 선한 과보는 도리어 천년의 악을 멸하나니, 이것은 영원히 멸해 버립니다.
다시는 어두움으로 안 오고 악으로도 안 옵니다. 절대 선입니다.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란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있다-없다’를 초월한 그 선이 보신불이라고 이름 한다.
법신(法身)을 쫓아 생각함이 곧 화신(化身)이고, 생각 생각이 선한 것이 보신(報身)이다.
생각 생각이 선한 것, 이것은 양변을 여읜 상태에서 작용하는 거예요.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곧 귀의(歸依)라 한다.
귀의라는 것은 양변을 여읜 자리가 바로 귀의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
‘나는 중생이니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귀의하겠다’ 이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 닦는 것을 귀의(歸依)라고 합니다.
가죽과 살은 색신(色身)이며 집이므로 귀의할 곳이 아니다.
다만 세 몸(三身)을 깨치면 곧 대의(大意)를 아는 것이다.
가죽과 살은 색신이며 사택이라 돌아갈 바가 있지 아니하다고 그랬는데,
사실 이 색신도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져 있거든요.
단일로 독립된 물체가 아니고, 연기로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실체가 없구나, 공이구나 하는 그 자리가 법신입니다.
그래서 마음도 육신도 법신이 있어요.
그래서 오온(五蘊)이 개공(皆空)이라고 그랬잖아요. 오온은 뭡니까?
색신은 몸이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이거든요. 정신, 몸 다 공이에요.
그러면 그 공 자리를 우리는 법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육조 스님이 조금 간략하게 하느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지 몰라도,
집이다, 색신이다 그러는데 사실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반야심경하고는 안 맞는 소리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다시피 이 육조단경을 필사하는 과정에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러나 다른 데 봐가지고는 조금도 단경이 우리가 말하는 정견에
조금도 틀림이 없으니까 육조 스님까지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2007. 01. 16
고우 스님의 돈황본 육조단경 대강좌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