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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계절에 찾은 가지산-운문산 산행
1. 일자 : 2011. 5. 5 (토)
2. 장소 : 가지산(1240m), 운문산(1196m)
3. 행로 및 시간
[석남터널(12:18) -> 석남고개(12:35) -> 계단 밑 대피소(12:49) -> 중봉(13:20) -> 제일농원 갈림(13:28) -> 가지산(13:42) -> 헬기장(13:37) -> (중식 -14:00) -> 1080봉(14:37) -> 백운산 갈림(14:43) -> 아랫재(15:09) -> 운문산(16:10) -> 떡밭재 갈림(16:22) -> 상운암(16:36) -> 석탑군(17:03) -> (상운암 계곡) -> 바위(17:35) -> 전망대(17:54) -> 석골사(18:15) -> 국도 변(18:38)]
4. 동행 : 홀로, 미투리산악회
< 운문산 산행을 준비하여 >
지난 천황-재약산, 간월-신불-영축산, 능동산-가지-상운산 산행에서 영남알프스 산행의 그 황홀한 매력을 경험한 이후, 그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운문산 산행을 오매불망 기다려 왔다. 그간의 다녀온 산들은 억새가 좋은 곳들이었다면, 이번 산행코스 가지-운문산은 봄 꽃이 좋은 곳이라 하여, 한 번 마음이 동하니 꽃피는 계절까지 기다리기가 쉽지 않았다.
일주일 사이로 미투리의 웹 페이지 정보가 두 번 변경되었다. 최대장의 성격으로 보아 당일 아침에도 코스를 변경하는 경우가 있으니, 일단 두 가지 코스를 모두 준비해 본다.
버전 1 : 운문-가지산
미투리 산악회에서 운문-가지산 산행을 게시했다. 산행시간이 7시간, 들머리는 석골사 날머리는 호박소로 되어 있다. 인도어 클라이밍부터 헷갈린다. 우선 호박소란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백운산 동쪽 구룡소폭포 밑에 위치한 곳이란 알았다. 다음은 산행시간, 석골사에서 상운암을 거쳐 운문산까지가 최소 2시간 30분(버스가 석골사 주차장까지 올라갈 경우), 운문산에서 가지산까지 3시간, 중봉을 거쳐 호박소까지 하산에 1시간 30분. 식사와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8시간. 이동 거리도 먼데, 등산 길이 너무 길다. 왕복 8시간의 이동거리를 생각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버전 2 : 가지-운문산
무리한 산행 거리에 대한 걱정처럼 산악회 홈페이지에 변경된 코스가 게재되었다. 이번에는 가지-운문산 코스다. 산행시간 6시간 30분, 들머리는 석남고개, 날머리가 석골사다. 중간 아랫재에서 삼양으로 하산하는 탈출로도 마련되어 있다. 역시 긴 코스이나 변경 전보다는 현실적이다. 석남고개에서 중봉을 거쳐 가지산까지가 1시간 40분, 가지산에서 1080봉을 거쳐 아랫재까지 1시간 40분, 아랫재에서 운문산 1시간 20분, 운문산에서 석골사까지 2시간. 식사와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7시간이 넘는다. 그래도 멀다, 미투리 최대장님의 길 욕심은 알아 주어야겠다.
생각해 보니 처음 천황-재약산, 두번째 간월-신불-영축산 산행을 계획할 때도 먼 이동거리와 긴 산행코스에 대한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 이번에도 눈 딱 감고 가자. ‘먼 산은 가기 전에는 여러 고민을 하지만 다녀 와서는 후회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이번에도 믿어보기로 한다. 가지산은 이미 올라 본 산이니, 운문산에 포커스를 맞춘다. 당초 계획한 1080봉에서 쇠정골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단축 코스는 물 건너 갔다. 이제는 무조건 가지-운문산 종주다. 대안이 사라졌으니 마음가짐을 독하게 먹어야겠다.
산림청에서 왜 운문산을 명산 반열에 올렸는지 자료를 뒤지니 운문사, 석남사, 도립공원이라는 낯선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다. 들머리 석남고개, 날머리 석골사는 이 산의 변방인가 보다. 명산의 호젓한 곳에서 나만의 봄을 즐겨야겠다.
< 희망사항 >
100대 명산 중에서도 선호도 랭킹이 상위인 두 곳의 산행지를 하루에 오른다 생각하니 출발 전부터 흥분이 된다. 맛 난 음식이 가득 차려진 고급 뷔페에 가는 느낌이다. 그러나 무리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지난 토요일 속초 유희의 여정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까닭이다.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세워 놓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햇수로는 4년 실제 기간으로는 2년 6개월만의 영남알프스 7개 봉우리를 완주한다고 생각하니 지리산 종주, 설악 공룡과 더불어 산꾼이 되어 가는 또 하나의 통과의례를 넘는 것 같아 스스로가 대견해진다.
어느 산꾼이 운문산과 가지산을 평하면서, 운문산은 “산에는 얇은 산이 있고 두터운 산이 있다. 얇은 산은 산줄기가 급하게 뻗히면서 솟구쳐 놓았으니 비탈이 가파르고 척박한 대신 보기에 시원스럽고, 두터운 산은 뭉글뭉글 등줄기를 치키면서 앉음새가 육중하여 겉으로 우선 듬직해 보인다. 사람으로 치면 전자는 청수하고 후자는 후덕스럽다 할까? 운문산은 두텁고 후덕스런 산이다.”라고 했다. 가지산에 대해서는 “아슴푸레하게 안개인 듯 구름인 듯 너울거리는 갈맷빛 산줄기 너머로 흡사 까치머리같이 오뚝하게 솟은 봉우리 하나가 유달리 눈을 끈다. 가지산이다. 가지산은 하늘아래 첫 산으로 인식된다” 라 했다. 흉내내기 어려운 멋진 표현들이다. 글재가 부족하여 이런 훌륭한 표현은 만들진 못해도, 내 산에 올라 글과 실제를 내 버전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
벗과 함께 운문산을 가려고 지리 종주 예약을 과감히 취소했다. 토요 당일 산행은 평화롭고 여유 있는 산에서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제격이다. 하루의 충실한 등반, 그것이 주는 황홀한 피로감을 느끼며, 내일의 휴일이 있음에 안도하며 껌껌한 귀경 버스 안에서 눈을 감으면 다시 떠오르는 가지-운문 능선의 그 잊을 수 없는 전경을 그리며, 토요일 아침을 맞는다.
흔히 운문산은 청도의 산이라 하는데 그것은 운문사의 영향인 것 같다. 오늘 들/날머리는 모두 밀양 땅에 속해 있다. 지난 산행에서 밀양이 얼마나 먼 곳인지를 알기에 이동거리에 대한 부담이 든다. 그래도 어찌하랴, 마음은 이미 버스를 타고 가고 있다. 아, 이 놈의 병!
(여기까지는 산행준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밀양 가는 길에 >
아침부터 일이 꼬인다. 복정에 도착하니 어인 일인지 출발이 30분 지연된다는 대장의 문자가 온다. 거리가 멀어 30분 일찍 출발하기로 했는데 누군가 시간을 잘못 알았나 보다. 처음엔 일행을 의심했으나 버스기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시 35분 버스가 왔다. 톨게이트부터 지체가 시작된다. 어린이날을 맞아 여행을 가는 차량들이 많다.
대장의 일갈이 시작된다. 기사가 바뀌어 출발이 늦었다는 말과 코스 변경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두 가지 모두 내 예측이 맞았다. 다만 변경된 가지-운문산 산행코스를 6시간 만에 완주 가능하다는 말은, 버스 뒤편에 앉은 늘 하산 시간을 어기는 젊은 여인네들을 보는 순간 허언임을 직감했다.
11시 50분 무렵 밀양 톨게이트를 나온 버스는 긴 꼬부랑 고개를 넘어 석남터널 입구에 멈추어 섰다. 길 건너 너울지는 산세가 만만치 않다. 남녘의 산하는 날로 푸르러지고 있다. 자! 이제 시작이다.
< 석남터널 가지산 >
고도계를 본다. 시작 고도 630미터, 석남고개를 향해 오른다. 날이 참 좋다. 햇살은 따가우나 바람이 산들산들 분다. 몸 컨디션이 의외로 좋다. 제법 가파른 비탈을 20여분 오른다. 작년 겨울 능동산에서 가지산으로 갈 때 경유했던 곳이다. 벌써 고도가 800미터에 근접한다.
길이 순해진다. 우측으로 예전 식사를 했던 작은 쉼터가 보인다. 길은 생각보다 걷기에 편하다. 작년에는 능동산을 넘어 2시간 가까이 걸은 후에 이곳을 지났고, 오늘은 아직 몸에 힘이 넘쳐나는 시기인 까닭에 느끼는 바가 다르다. 우측으로 멀리 가지능선이 보이나, 일단 가지산을 향해 걷는데만 집중한다. 초반부터 처지면 자칫 운문산을 못 가고 중간에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초반 늘 이렇게 서두르다가 이른 하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 석남터널 들머리 / 계단 전 대피소 >
길이 순해진다. 우측으로 예전 식사를 했던 작은 쉼터가 보인다. 길은 생각보다 걷기에
편하다. 작년에는 능동산을 넘어 2시간 가까이 걸은 후에
이곳을 지났고, 오늘은 아직 몸에 힘이 넘쳐나는 시기인 까닭에 느끼는 바가 다르다. 우측으로 멀리 가지능선이 보이나, 일단 가지산을 향해 걷는데만 집중한다. 초반부터 처지면 자칫 운문산을 못 가고 중간에 탈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초반 늘 이렇게 서두르다가 이른 하산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 쌀바위 원경 / 가지산 원경 >
석남고개 출발 15분만에 계단 밑 매점 겸 대피소에 도착했다. 무척 이른 행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출발, 긴 계단을 오른다. 우측으로 거대한 바위 군이 발 길을 잡아 멘다. 쌀바위다. 그 너머로 운문령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흐른다. 계절이 바뀌어 같은 길을 걷는다. 머릿속에서 길의 비교가 일어나며, 지난 겨울의 힘겨운 산행이 되살아 난다. 맹 추위 속에서 올랐던 상운산에서의 눈 덮인 풍경이 그리워진다.
중봉을 향해 길 오른 길을 걷는다. 예전엔 몰랐는데 중봉 길은 꽤 길고 가파르다. 완만한 원추형의 봉우리 중봉에 가려 가지산 정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최대장님과 조우한다. “잘 걸으시네요, 나도 힘이 듭니다.” 짧게 말하고 예의 흰 수염을 날리며 앞서 나간다. 대장도 힘이 든다는 말에서 묘한 동지애를 느낀다.
< 중봉의 최대장님 / 가지산 정상을 배경으로 >
중봉을 넘어서니 정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톱니 형태의 정상 암릉이 선명하게 들어난다. 가야 할 고지가 목도되니 다리에 힘이 붙는다. 등산은 머리로 생각하고 눈으로 그려나가지만 여전히 발을 움직여야 실행될 수 있는 행위이다. 어여 가자.
< 가지의 골짜기를 배경으로 / 가지산 정상 >
제일농원 갈림을 지난다. 당초 하산지점이다. 주변에 풍광이 참 좋다. 최대장의 코스 선정 안목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고수만이 느낄 수 있는 후미진 곳까지 살피는 정성이 감지된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
중봉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밀양고개 길은 오르막이지만 사방 시야가 트여 개방감이 힘겨움을 압도한다. 진행 방향 좌측, 즉 남쪽 방향으로 영남알프스의 맥들이 도도히 흐른다. 능동산 줄기 넘어 천황산과 재약산이 보인다. 특히 천황산 정상부의 너른 억새밭은 그 누런 빛깔이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그 뒤로는 무수히 많은 산들이 너울진다. 산의 맥은 분명히 흐르고 있다.
< 가지산에서 본 영남알프스 풍경 >
1시 42분, 출발 1시간 24분만에 가지산 정상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20여분 빠른 행보다. 나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한 일행은 대여섯 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 컨디션이 좋은 까닭도 있지만 이제 웬만해선 내 의지와는 달리 후미로 처지는 경우는 없다. 지난 봄 백두대간꾼들과 이 길을 오를 때의 느꼈던 자괴감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정상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다. 검음 돌과 흰 돌로 된 두 개의 정상석에서 모두 내 흔적을 남긴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운문산 방향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한 없이 너른 풍경이 넋을 잃는다. 여기는 낙동정맥의 중심 가지산이다.
< 가지산에서 운문산 >
지나 겨울에는 길을 우측으로 틀어 쌀바위 방향으로 하산했었는데, 그 길을 가름해 보다 오늘은 직진하여 헬기장 방향으로 이동한다. 정상 바로 밑에 천막매점이 있었다. 이 높은 곳까지 물건을 어떻게 조달하는지 궁금할 만큼 규모가 꽤 큰 구조물이 떡 하니 언덕에 서 있다. 그 밑에는 헬기장이 있다. 매점과 헬기장의 상관관계가 궁금했다. 혹, 물건을 헬기로 실어 나르나?
소나무 그늘에 주저앉는다. 노란 제비꽃이 날 반긴다. 그 화사한 색채가 오늘따라 샛노랗다. 주변에 양지꽃도 목격된다. 꽃들을 바라보며 식사를 한다. 샌드위치와 김밥, 풍성한 식단이다. 15분여의 식사가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꽃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 가지-운문산의 봄 꽃들 >
2시다. 식사하는 사이 시간이 흘렸다. 또 시간에 대한 조바심이 난다. 가지 않은 길을 나서며 늘 느끼는 고질병이다. 헬기장 부근에 선두대장을 포함한 미투리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 하고 있다. 그 앞을 지난다. 순간 내가 선두가 된다. 1080봉으로 향하는 길은 걷는 재미를 알게 해 주는 멋진 길이 이어졌다. 능동산에서 시작된 능선과 밀양고개에서 흘러내리는 길이 만나 거대한 골짜기를 이룬다. 그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신록의 푸르름이 내가 왜 이곳에 오려 했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광활함에 압도된다.
< 1080봉 가는 능선에서 1 / 1080봉 >
2시 37분, 암봉 위에 올라선다. 이정표는 없어도 이곳이 1080봉임을 직감한다. 발 아래 있는 봉우리가 백운산이다. 그 너머로 얼음골이 흐르고 위로 천황산으로 향하는 능선이 이어진다. 이미 다녀온 산을 한참 뒤에 복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4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가지-운문산과 천황-재약산이 맞서고 있다.
< 1080봉 가는 능선에서 1 / 운문산 풍경 >
2시 43분 백운산 갈림을 지난다. 이곳까지의 길은 걷는 재미를 새삼 일깨워주는 환상 그 자체였다. 이제 아랫재까지 1.3km를 내려서야 한다. 오름이 있었으니 내림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부디 너무 치고 내려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늘 그렇듯 바램은 바램일 뿐, 고도 300미터를 순 십간에 치고 내려간다. 내려가며 햇살 속에서 올려다 뵈는 운문산의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까지 또 언제 치고 오르나 ^^.
< 아랫재 / 돌아본 가지산 능선 >
3시 9분 아랫재를 지난다. 최후의 만찬마냥 아랫재는 평온한 평지 쉼터다. 한 시간여의 고도와의 전투를 앞 둔 전사에게는 이 평온이 짐으로 다가 온다. 내처 오름을 오른다. 힘겨움이 한계에 도달할 그 때에 쉬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길가에 보라빛 붓꽃이 지천이다. 꽃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쉼 없이 전진한 산꾼에게도 피로감이 몰려든다. 100미터 단위로 고도에 적응하며 짧은 다리 쉼을 한다. 이제 24번 국도가 바로 발 밑에 보이고 그 뒤로 천황-재약 능선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 있다. 짧은 고원이 나오고 그 뒤로 거대한 암봉이 서 있다. 저기가 운문산이거니 하고 오르니 그 뒤로 또 긴 나무 계단이 떡 하니 서 있다. 참 멀다. 지나온 가지산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참 평탄해 보인다. 누군가는 운문산이 후덕하고 너른 산이라 했는데, 내 눈에는 가지산이 더 그렇게 보인다.
나무계단에서도 10여분을 치고 올라야 운문은 정상을 내게 보여 주었다. 정상에는 미투리 선두 일행 서너 명이 보인다. 지난 금원산 산행에서 깝죽거리던 사내가 오늘도 억산으로 가자고 나선다. 댓거리를 아예 하지 않아 버린다. 산에서 자기 체력을 과신하는 것은 밉상 그 자체다.
< 건너편 영남알프스 / 운문산 정상에서 >
4시 10분, 운문산 정상에 섰다. 91번째 100대 명산이 실현되었다. 작은 성취감이 몰려든다. 행복이란 말이 떠 오른다.
< 운문산에서 석골사 >
초로의 아주머니 한 분이 나보다 먼저 정상에 와 하산을 했는데, 다시 길을 올라온다. 스틱을 두고 왔단다.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하며 걷는데 잠시 후 내 앞을 휑하니 지난다. 아니 벌써! 저 나이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 1시간 30분을 예상하며 석골사로 길을 나선다. 곧이어 떡밭재 삼거리가 나온다. 석골사까지는 이제 4km가 남았다.
상운암으로 내려가는 길을 완전 돌길이다. 육산의 흙 길을 기대했는데 여실히 무너졌다. 그냥 돌 길이 아니고 뽀족하여 걷기에 무척 성가시다. 삼거리에서 15분만에 상운암에 도착했다. 참 초라한 암자다. 나그네를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다. 절 앞 마당으로 이동하니 젊은 스님이 길이 아니라 한다. 물 만 한 바가지 먹고 곧바로 길을 나선다.
30여분 아무 생각 없이 돌 길을 내려왔다. 석탑이 무리 지어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뭔가 길의 변화를 기대했으나 돌 길은 계속 이어진다. 5시 16분 이정표를 만난다. 석골사 2.5km, 40분만에 1km를 내려왔다. 잠시 후 커다란 바위 앞에 선다. 5시 30분이 지났는데도 햇살이 강렬하다. 바위를 지나며부터 물소리가 거세다. 계곡의 기세가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어디서 모인 물줄기가 이 메마른 계절에 이리 풍부한 계곡을 만들게 하는지 감탄할 뿐이다.
< 상운암 / 큰 바위 전경 >
작은 폭포를 수 없이 지난다. 고도가 300미터대로 떨어져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할 무렵 바위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 기쁘기도 했지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에 힘겨움이 배가 된다.
6시가 지난다. 합수 지점에서 두 번째 세면을 하려고 안경을 벗어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그만 안경을 밟아버렸다. 낭패감이 든다. 갈 길은 아직 먼데 눈을 잃어 버렸으니 말이다. 고도는 낮아지지 않은 체 석골사로 향하는 길은 길게 이어진다.
지나온 길을 복기해 본다. 석남터널에서 가지산까지의 긴 오르막, 그 후 1시간 남짓의 행복한 능선 길을 제외하고는 긴 오르막과 험한 내리막의 연속이 오늘 길의 상황이다. 역시 1200미터급 거산을 반나절 만에 넘는 것은 무리다. 힘에 겨운 일이다.
그래도 길의 끝은 있는 법, 석골사 절 집이 눈에 들어온다. 해질녘 햇살에 단청이 더욱 곱게 보인다. 석골사 앞 폭포는 거대한 바위와 어우러진 거센 물줄기로 기억될 명소였다. 석골사를 지나고도 20여분을 더 걸어야 버스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6시간 20분의 고단하지만 행복한 여정이 이렇게 끝이 났다.
< 상운암 계곡에서 본 암릉 / 석골폭포의 장관 >
< 에필로그 >
땅거미가 짙게 질 무렵인 7시 20분이 되어서야 후미가 당도했다. 내게 늘 미움이 대상이 되는 처자들을 앞세워 최대장님이 버스에 올라탔다. 인원 점검을 마치고 버스가 출발하려고 할 무렵 한 명이 없단다. 후미대장 말로는 같이 내려왔는데 없어졌단다. 급히 전화가 연결되었고, 몸을 씻느라 늦는다 한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이들은 벌 받으리라. 그들 때문에 복정역 도착은 버스가 끊어진 이후였다.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할지 마음이 아프다.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이 앞서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잊어버린 인간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귀경 차 창을 바라보녀, 잠은 안 오고 휴식 대신 분노의 마음이 이글거렸다. 나도 누군가에게 분노를 야기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고 나를 되돌아 본다.
출발 전 머릿속에는 운문산은 “두텁고 후덕스런 산”, 가지산은 “까치머리같이 오뚝하게 솟은 암봉” 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가지산은 이미 다녀온 산이라 내심 운문산에 더 마음이 같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운문산은 두텁고 후덕한 육산이라기 보다는 돌이 많고 계곡이 시원한 골산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반면 가지산은 정상부가 돌로 이어져 골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다시 경험해 보니 능선 위 시원한 조망이 일품인 두텁고 후덕스런 산이었다. 통상의 평가가 서로 반대로 나와야 더 맞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좋은 계절에 영남알프스의 대표 산 두 곳을 한꺼번에 넘은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산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에도 가지산에서 1080봉 하산 길에 바라다 보던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와 도로 건너로 조망되던 천황산과 그 반대편 신불산 영축산의 전경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영남알프스는 큰 산이었고 그 큰 산의 주봉 7개를 드디어 완주한 것이 뿌듯하다.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삶은 세상으로부터 우주로부터의 한 수 배우기를 통해 지루한 동어 반복에서 한 걸음씩 위쪽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지-운문산 종주 길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하나는 인생의 무게는 곧 내 등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라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도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내게 꼭 필요한 것 만, 내가 견딜 수 있는 무게만큼만 최소한의 짐을 만들어야겠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집착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늘 그렇듯, 소박한 마음으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