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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단풍과 상원사가 인상 깊었던 치악산
1. 일자 : 2012. 10. 13(토)
2. 장소 : 남대봉(1182m)
3. 행로 및 시간
[(성남리) -> 600주차장(11:36, 남대봉 3.7km) -> 670 이정(11:44) -> (상원골) -> 샘터(12:49) -> 상원사(13:00-30, 1060m) -> (안부 갈림) -> 남대봉(13:51, 1182m) -> 안부 갈림(13:58, 금대야영장 4.9km) -> (험로) -> 다리(14:51) -> 영원사(15:11, 580m) -> 금대야영장(15:44)]
4. 동행 : 성우
< 치악산 산행을 준비하며 >
속초유희 10월 모임을 치악산에서 갖기로 했다. 지난 8월 강촌 행사가 한여름 뙤약볕에 심신이 지친 가운데 당일 행사로 진행되어 흥 없이 쫓기듯 끝나 버려 뒷맛이 개운하지 않아 이번에는 1박 2일의 엠티 산행을 계획한다. 소요거리로 볼 때 중간지점인 치악산 만한 곳은 많지 않다.
택리지에 묘사된 치악산 ‘산신의 영험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하는 곳이다. 산 앉음새가 흡사 거대한 도마뱀을 연상시켜 머리를 북동으로 쳐들고, 발로 잔뜩 땅바닥을 움켜쥐고, 몸을 구부리며, 산 줄기가 시작되는 오대산으로 기어가는 형국이랄까, 아니면 태백산 넘어 동해로 물을 찾아가는 시늉이랄까’로 묘사되어 있다. 곱지 못한 평가다. 늘 다니던 구룡사 코스가 아닌 영원사-상원사 길을 걸으며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
산행코스의 대강을 그려본다. 금대야영장을 출발 영원사와 남대봉을 지나 상원사까지는 5.2km 거리이며, 상원사에서 성남지킴터 까지는 5km 남짓이다. 산길의 사정은 영원사까지 40여분 비교적 널찍한 길이 이어지다가, 이후 아들바위까지 30여분 다리이 많이 놓여 있는 계곡 길을 걷게 되고, 상원사를 1.8km 남긴 지점부터 너덜, 급경사 오름 길을 한 시간여 힘겹게 오른 연후에 주 능선 안부에 닿게 된다. 안부에서 남대봉을 거쳐 상원사까지는 20분 정도의 거리이고, 이후 상원골을 거쳐 하산하는데 2시간을 예상한다. 전체 산행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될 것이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산행안내 자료에 금대봉이 아닌 상원사가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추측컨데 금대봉의 놓임새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반면에 비슷한 높이에 위치한 상원사의 풍광과 상징성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치악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이유는 ‘주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대봉과 매화산 등 1천여 미터의 고봉들이 연이어 있어 경관이 아름다우며 곳곳에 산성과 사찰, 사적지들이 널리 산재해 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구룡계곡, 부곡계곡, 금대계곡 등과 신선대, 구룡소, 세렴폭포, 상원사 등이 있음. 사계절 별로 봄 진달래와 철쭉, 여름 구룡사의 울창한 숲과 깨끗한 물, 가을의 단풍, 겨울 설경이 유명’이다. 가을 단풍이라는 말에 필이 확 꽂힌다.
< 희망사항 >
당초 이번 모임의 행선지로 치악산에 특별한 의미를 둔 것은 아니었다. 속초와 안양의 중간 거리의 산과 숙소를 찾다가 우연히 치악산이 떠 올랐고, 마침 부근에 ‘치악산클럽’이라는 인터넷 상으로는 근사한 펜션이 있어 예약을 해 버렸다. 멤버들에게 숙소를 통보하고 주변을 자세히 살피니 펜션의 위치가 평소 올라보고 싶었던 상원사 코스의 들/날머리로 적당한 곳이다. 또한 원주에 사는 홍규도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 연락을 하니 반갑게 동참 통보를 해 온다. 게다가 대식까지 참여하기로 한다. 일이 커졌다. 의도하지 않은 일에 대박이 나버렸다. 대개 급히 준비하여 가는 여행이 나중에 보면 에피소드가 많게 마련인데 이번 모임이 그랬으면 좋겠다. 더욱이 계절이 산이 옷을 갈아 입는 시절이라 곱게 물든 제대로 된 단풍산행도 기대해 본다.
이번 산행 코스의 백미는 1100m 고지에 위치한 상원사에서 굽어 보는 풍경일 것이다. 천 년 고찰에서 장고의 세월을 딛고 선 석탑과 꿩의 보은 설화를 품은 범종루 사이로 흘러가는 장엄한 치악의 능선은 마음 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여기까지는 산행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원주 가는 길에 >
농수산물 시장에서 새우를 사서 길을 나선다. 고속도로에서 바라보는 가을 볕을 머금은 황금 들판이 넘실거린다. 가을걷이를 마친 논들도 여럿 보인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나 보다.
호법 인터체인지 부근부터 막히기 시작한 도로는 여주휴게소에서도 길게 꼬리를 물고 있다. 낭패다. 약속한 시간이 많이 지나겠다. 마음은 급한데 난폭운전을 일삼은 차들에 신경을 쓰다가 인터체인지 하나를 놓치고 신림IC로 나왔다. 남에게 위협이 되는 나쁜 습관을 가진 그들에게 천벌이 있기를…
금대야영장에서 성우와 만남 성남리로 이동한다. 들/날머리를 변경했다. 길에서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려고 성남지킴터를 지나 소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간다. 해발 600미터 부근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덕분에 40여분의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 성남리에서 남대봉 >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이곳에 도로가 만들어진 것은 상원사 때문일 것이다. 1000미터가 넘은 고지에 위치한 절에 신도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들게 오르게 하려는 배려일 것이다.
11시 35분 길을 나선다. 잠시 후 해발 670미터와 남대봉까지 3.7km가 남았음을 알리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부터 본격 산행 길이 시작된다. 걷기에 무리가 없는 지능선 길을 한참 가다가 계곡을 만난다. 비가 온지가 꽤 오래되었을 터인데도 물살이 제법 거세다. 작은 소와 폭포를 여럿 만난다. 길에는 벌써 낙엽의 잔재들이 나뒹군다. 치악의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성우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입산의식을 치룬다.
< 치악의 가을, 단풍 1 >
점차 길이 가팔라진다. 치악은 급한 오르막을 들이밀며 내게 입산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산에선 잔머리나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걸음은 정직하다. 한걸음씩 내딛는 발 길이 단풍의 물결에 멈칫한다. 고도 900미터 어름부터 색이 점점 화려해진다. 붉은 단풍나무와 노란 참나무가
만들어내는 조화에 눈이 휘둥그레 지고 입이 벌어진다. 제대로 된 단풍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가? 치악산의 단풍이 좋다더니 명불허전이다.
샘터를 지난다. 한
두 방울의 물이 작은 샘을 이룬다. 줄을 서고 있자니, 한
바가지의 물이 모이는 시간이 더디다. 물 맛은 다음을 기약한다.
< 치악의 가을, 단풍 2 >
가파른 비탈 끝에 상원사가 눈에 들어온다. 맨 먼저 바위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범종루의 종각이 시선을 끈다. 절경이다.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보호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선다. 주위는 온통 바위지대인데 새로운 공사가 진행 중이다. 중장비 반입이 쉽지 않은 이곳에서 어찌 저런 큰 돌을 부릴지 신기함과 걱정의 마음이 공존하다. 절 입구에서 굽어보는 능선이 넘실거린다. 아! 좋다.
< 상원사 초입에서 성우와 >
상원사 경내로 들어선다. 대웅전 앞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3층 석탑이 있고 그 앞으로 잘 생긴 범종루가 서 있다. 이런 고지에 이리 너른 평지가 있고 그 위에 절 집을 그려낸 선인의 식견에 경의를 표한다. 바라보는 눈 맛이 최고다. 대웅전 우측 벼랑에 전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노랗게 가을 물이 들고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 보는 능선과 골짜기에도 가을이 찾아 들고 있었다. 온통 울긋불긋이다.
< 석탑과 법종루 / 노랗게 물든 전나무 >
대웅전 옆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는다. 성우가 고맙게도 내 몫의 도시락까지 준비해 왔다. 매양 먹던 김밥과 빵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정성까지 더해져 입 맛을 돋운다.
남대봉을 향해 길을 나선다. 고도 차 100미터인데도 영원사로 향하는 안부 갈림에서 봉우리까지는 꽤 가파르고 길다. 남대봉 정상부근 바위 전망대에서는 아들바위 너머로 원주 시가지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단풍과는 또 다른 색다른 풍경이다.
< 아들바위와 원주시가지 / 남대봉에서 >
1시 51분 남대봉에 도착했다. 치악의 넘버 2치고는 풍광도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도 대접이 박하다. 망경봉이라고도 불리우는 이곳은 향로봉을 지나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치악 주능선의 시발점이다. 비로봉까지의 거리는 9km, 멀다. 언젠가 이 길을 따라 치악산을 종주하는 날을 꿈꾼다. 인파 속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영원사로 길을 나선다.
< 남대봉에서 금대야영장 >
남대봉에서 영원사를 지나 금대야영장까지의 거리는 5.2km, 2시간을 예상하고 길을 나선다. 안부 갈림을 지나자 한동안 조릿대가 깔린 평탄한 길이 이어지다가, 갑자가 급경사가 나타난다. 긴 계단 길을 내려서자 너덜 수준의 돌 길이 계속된다. 그래도 한동안 트인 하늘 밑에 색색의 단풍이 있어 걷는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이내 점점 숲이 짙어지고 길은 험해진다.
< 영원사 하산 길 초입 풍경 >
2시 30분 무렵 바위 협곡지대를 지난다. 영원사까지 1.5km, 금대야영장까지는 3.9km가 남았다 한다. 큰 바위 밑에 누군가가 나무 막대기로 버팀목을 만들어 놓았다. 해학적이다. 저 큰 바위가 안 무너지는 것이 마치 작은 나무들의 힘으로 느껴졌다. 때로는 유치한 것에도 멋이 느껴진다. 항상 진지한 것만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아니다.
길이 좀 편해지려나 하고 걷지만 계곡이 깊어지고 고도감이 커져 오히려 걷기에는 더 부담이 된다. 20여분 묵언으로 걷는다. 그래도 성우가 길에 벗이 되어 주니 심심치 않다. 얼마만인가 누군가와 함께 산 길을 걷는 것이. 늘 혼자인 상태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도시락도 나누어 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니 벗이 있는 산행에 매력에 금새 빠져 버린다.
2시 50분, 오매불망하던 다리가 나타난다. 물 길이 넓어진다. 마음 속으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외쳐 본다. 부근에 깊은 폭포가 만들어내는 깊은 소(沼)가 있는 지대를 지난다. 갈색과 녹색이 섞인 듯한 물색에서도 가을이 느껴진다. 이 계절에는 모든 것들이 깊어지나 보다.
< 갈색과 녹색의 깊은 소 / 연한 가을의 색깔 >
지금까지와는 달리 길의 험함이 완화되었으나 여전히 돌이 많은 길이 이어진다. 위를 올려다 본다. 짙은 숲으로 하늘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연한 노랑색을 띤 나뭇잎들이 계절의 변화를 예고한다. 짙은 붉은 색 만이 이 계절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부드러운 색채가 곱다.
3시가 조금 지날 무렵 길이 포장도로로 바뀐다. 영원사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이곳까지의 2km 남짓의 내리막 길은 내가 걸어본 어느 길보다도 험한 길이었다. 내려오는 것이 이리 힘겨운데 오르는 길은 엄청난 힘과 인내를 요구하는 길임에 틀림없다. 이리로 오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내 말에 성우는 ‘그래도 어찌어찌 해서 다 올라가 지더라고’ 라고 맞장구를 친다. 맞는 말이다. 닥치면 다 할 수 있다. 지레짐작이 더 무서운 법이다.
< 영원사 돌탑 /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꽃 >
도로 길을 터벅터벅, 허위허위 내려간다. 3km 가까운 길을 40여분 만에 내려왔다. 포장도로의 위력 앞에 잠시 시간 감각이 무뎌진다. 그렇게 금대야영장으로 와 버렸다.
차를 회수하러 다시 성남으로 향한다. 남들은 하산하는 시간에 차를 몰고 올라가는 우리를 사람들은 무어라 생각할까, 내려오는 차와 좁은 길에서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두 번이나 현실이 되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큰 무리 없이 길을 내어 간다. 내 삶도 이러하리라 생각해 본다. 걱정보다는 준비를 하고 길을 개척한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랴,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말이다. 좁은 차 길을 다시 내려오며 평소에 들지 않던 자신감이 넘쳐난다.
< 에필로그 >
4시간 남짓의 산행을 마치고 복기해 보니 오늘 여정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길이었다. 비록 남대봉에서 영원사로 향하는 초입의 가파르고 험한 비탈 길에 당황하였으나, 성남에서 상원사 길에서 가을 단풍의 진수를 보았고, 상원사에서 굽어보는 풍경은 기대 이상의 감동이었다. 처음엔 큰 산을 보고 아! 했는데, 지금은 이 작은 풀꽃을 보고도 아! 할 수 있다. 큰 산의 정상에 오르지 않고도 작은 성취감은 맛볼 수 있다. 그만큼 산행 경험이 늘어났다는 것과 더불어 내 나이가 하나 둘 늘어간다는 반증이리라.
가을이 깊어 갈수록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만 커진다. 가을이 머물고 간 자리, 가을이 그린 색색의 그림 속에서 또 하나의 추억이 낙엽처럼 쌓인다.
문뜩 상원사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진 풍경을 보며 ‘인간적인 욕망 때문에 몸과 마음으로 저지르는 잘못의 깊이를 멈추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던 기도가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