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기도와 순종의 공동체>
- 성 프란치스코의 「유언」 20-22절을 중심으로 -
최문기 마티아 신부 /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1. 시작 성가 - 작은 자의 열망(지침서 성가 4번)
2. 시작 기도 (지침서 158-159쪽)
3. 출석 확인 및 인사
4. 독서 나눔
5. 생활 나눔. 생활 실천
6. 공지사항
7. 마침 기도(지침서 159-160쪽)
8. 마침 성가 - 가난함을 주소서 (지침서 성가 60번)
그리고 나는 내 손으로 일을 하였고 또 지금도 일하기를 원하며 다른 모든 형제들도 올바른 허드렛일에 종사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일할 줄 모르는 형제들은 일의 보수를 받을 욕심 때문이 아니라 모범을 보이고 한가함을 쫒기 위해서 일을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의 보수를 받지 못할 때에는 집집마다 동냥하면서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갑시다. (「유언」 20-22 )
중세 사회에서 육체노동은 대체로 낮은 계층의 몫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기에 상이 ㄴ계급 출신이엇던 프란치스코에게 손으로 일하는 삶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회개 생활은 노동과 함께 시작됩니다. 회개 초기에 세 개의 성당을 수리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프란치스코는 이 경험을 통해 몸으로 하는 수고가 단순한 육체적 활동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영적 행위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초창기의 경험은 형제들이 지켜야 할 생활 방식으로 발전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에서 "일을 할 줄 아는 형제들은 일을 할 것이며, 알고 잇는 기술이 영혼의 구원에 해가 되지 않고 올바르게 쓸 스 잇다면 그 기술을 사용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7,3). 프란치스코는 그 근거를 성경에서 찾습니다. "ㅇ예언자가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시편 127.2) 하고 말하고, 또 사도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마라.' (2테살 3,10)고 하며, 또 '저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기술과 일을 그대로 유지하십시오.' (1코린 7,2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7,4-6) 자기 손으로 일할 수 있다는것은 재물을 쌓아 두지 않고도 오늘의 약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삶은 거룩한 가난을 현실 안에서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방식이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일의 종류에 특별한 구분을 두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기준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형제들은 일터에서도 작음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했습니다. 남의 집에서 봉사할 때 감독관이나 관리인이 되지 말고, 주관하는 위치에 서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추문을 일으키거나 영혼에 해를 끼치는 직책을 맡지 말고, 오히려 그 집에 있는 모든 이들보다 더 낮은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작은 형제는 어디에서든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어야 했고, 이는 노동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책임 있는 자리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형제 안에 우월감과 소유욕과 지배욕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으 내적인 가난과 겸손을 무너뜨리는 일이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경계한 것은 노동을 통해 세상의 방식으로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기준은 기도와 신심의 정신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영혼의 구원에 해가 되지 않고 올바르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7,3 ). 노동은 기도를 방해해서는 안 되며, 형제들의 내적 자유를 거슬러서도 안 됩니다. 일이 마음을 빼앗고 하느님을 잊게 한다면 이미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안에서 이루어지는 수고는 기도의 걸림돌이 아니며, 오히려 기도를 지켜 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원한 노동은 형제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장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살아가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르는 삶은 성당과 경신례 안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일상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요한 21,1 - 14). 이 장면은 일상과 주님 체험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만약 형제들이 일의 보수로 필요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집집마다 동냥하며 주님의 식탁으로 달려가애 했습니다. '노동'과 '동냥'은 초기 형제 공동체가 가난 안에서 살아가던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사셨던 방식이었기에, 형제들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잇는 복음적 길어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선의에 자신을 맡기며 살아갔습니다. 받으면 감사하고, 받지 못하면 청하는 생활 속에서 그들은 결핍만을 본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넉넉함도 함께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형제들의 삶은 점차 변화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고 제도화되면서, 초창기의 단순한 생활 방식은 약해졌습니다. 손으로 하는 수고는 생계를 위한 필수적 방식이라기보다, 한가함을 피하기 위한 선택적 요소처럼 이애될 위험도 생겼습니다. 물론 그 또한 노동의 중요한 목적이지만, 프란치스코가 처음에 품엇던 지향은 그보다 더 넓고 깊었습니다. 노동은 가난을 지키고, 형제적 낮아짐을 배우며,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구체적인 복음의 방식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기도를 보호하고, ㅇ리상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필요한 만큼 받고, 받지 못할 때에는 주님의 식탁으로 나아가는 단순한 삶 속에서 형제들은 가난했지만 자유로웠고, 부족햇지만 주님께 의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생활 나눔
1, 일상의 노동이 나의 내적 겸손과 신앙의 성숙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장애가 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삶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로 살아가고자 노력했던 경험이나 어려움들을 나누어 봅시다.
생활 실천
1. 남들이 꺼리는 자곡 사소한 일(허드렛일)을 기꺼이 찾아 수행해 봅시다.
2. 내 노력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부족함을 주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