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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계 환영속 유대인들 일부 '불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2일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죄에 대해 신의 용서를 구한데 대해 세계의 가톨릭 교도들은 대체로 환영했으나 유태인, 동성연애자등은 자신들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이지 못해 아쉬워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라우 수석 랍비(유태교 율법학자)는 교황의 사죄를 환영하면서도 교황이 홀로코스트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데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라우 수석 라비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자세는 그의 선임자들의 노선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라우는 그러나 “교황의 설교에서 홀로코스트가 주제로 언급되지 않는데 대해 크게 실망했으며 특히 요한 바오로 2세가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목격했기에 실망감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교황의 사려깊은 용서의 기도를 환영한다는 반영을 보였다. 보스턴의 버나드 로 추기경은 미국의 노예제도와 신부들에 의해 자행되는 최근의 성적 학대에 대한 사죄를 했다. 보스턴의 가톨릭 신자 마이클 브래디는 “속죄가 치료과정의 시작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미국 유태인위원회의 랍비 제임스 두딘씨는 “이번 미사는 가톨릭-유태교 관계에 대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라고 평가했다.
■ 십자군 원정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가 실지(失地)를 회복하라는 칙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은 인류를 피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성지회복’이라는 숭고한 목적의 이면에는 너무나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 베네치아 상인은 무역로를 열어 축재(蓄財)하려 했고, 가난한 병사들은 한몫잡는 기회로, 교황은 자신의 영향력 극대화를 노렸다. 1,095~1,101년, 1,145~47년 등 총 8차레에 걸쳐 단행된 십자군은 분노에 찬 군사행위였다. 첫 원정에 나선 1,500명의 십자군은 4년간 부녀자를 포함해 무려 7만여명의 예루살렘인을 학살했다. 2세기간 계속된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이기주의를 낳았다.
십자군에 참가한 서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이 뒤따랐다. 특히 십자군 구성은 동·서 교회의 영구적인 분열을 낳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의 아픔이 이슬람 보다 클 수는 없었다. 유럽은 이슬람과의 접촉에서 여러가지 면에서 이득을 봤다.
종래 기대와는 달리 1,099년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한 십자군은 이곳에 여러 기독교 국가를 세워 증오의 씨앗을 심었다. 영국의 교회 사학자 폴 존슨은 “이 사건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이 공존할 기회를 영영 잃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 종교재판
가톨릭의 종교재판은 700년동안 계속된 이단자에 대한 박해의 과정으로, 수십만명이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심문한다’에서 비롯된 종교재판이란 말은 1231년 교황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시작됐다. 당시 그는 프랑스 주교들에게 마법, 연금술, 악마숭배와 같은 이단을 억압하겠다는 뜻을 알렸다.
처음 심문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카 수도회에 의해 독점적으로 행해졌다. 전국을 돌며 혐의자를 찾아나선 이들은 혐의자를 종교재판소로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중세 종교재판은 대부분 남부 프랑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행해졌다. 1252년 교황 이노센트 4세의 교서에 의해 고해를 끌어내는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1478년 식스투스 4세는 스페인의 종교재판을 인정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드와 카스티야의 이자벨라의 통치때에 절정을 이뤘다. 이들 군대는 15, 16세기 이베리아 반도를 휩쓸었으며, 유대인과 회교도를 기독교로 강제로 개종시켰다.
종교재판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스페인 종교재판소 초대 장관을 지낸 토마스 드 토르크마다(1420~98)인데, 그는 대심판관의 이름하에 약 2,000명의 이단자를 화형시켰다.
1808년 공식적으로 종료될 때까지 스페인 종교재판소는 30만명 이상을 화형시켰다. 여기에는 우상의 형태로 화형시킨 1만8,000명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1908년 바티칸은 규율과 파문을 다룰 곳으로 이단자 심문소(검사성성·檢邪聖省)를 만들었다. 종교재판의 희생자로는 현대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저 베이컨(1220~1292), 천문학자 갈릴레오 등이 있다.
■ 유대인 박해
교황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대해 기독교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숨의 위험을 무름쓰고 유대인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다른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답게 영적으로 저항하거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또 수세기간에 걸쳐 많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한 것이 슬픈 역사적 사실이다.
교회는 수십년 전까지 공공연히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 예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초기 기독교도는 유대인을 원수로 여겼다. 4세기 교부 크리소 스토머스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돼지같은 백정’으로 부르며 영원한 저주를 내렸다.
교회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된 것은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부터였다. 이후 유대인은 전염병을 옮기고 영아유괴나 일삼는 천민으로 취급받았다.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조차 “사악하고 독살스러운 뱀”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 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회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제대로 반대하지 못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지난해 기독교 역사학자 존 콘웰은 ‘히틀러의 교황: 숨겨진 역사’라는 책을 통해 당시 교황 비오 7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강력히 규탄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는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가톨릭 과오' 어떤 사건들인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용서를 구한 가톨릭의 과오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에 관련된 것이다.
▲ 종교재판
중세 말기 이후로 로마 교황의 공인 아래 이단자를 마녀로 몰아 태워죽인 이른바 ‘마녀사냥’이다. 1484년 교황이 ‘긴급요청’ 회칙을 발표해 마녀가 있다며 심문관의 활동을 옹호한 데 이어 1486년 ‘마녀의 쇠망치’라는 마녀사냥 지침서가 나오면서 마녀사냥이 본격화했다. 독일의 도미니크수도회 성직자 2명이 쓴 이 책은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은 마녀다, 열심히 다니는 사람도 마녀일지 모른다며 마녀를 찾아내 처단할 것을 촉구했다. 마녀는 초자연적 능력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악마의 정부라고 믿어졌다. 마녀로 몰리면 끔찍한 고문 끝에 산 채로 화형됐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처형된 숫자가 1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마녀사냥은 유럽에서 1590~1610년, 1625~35년, 1660~80년 사이에 특히 심했다. 마녀사냥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보급으로 사라졌다.
▲ 십자군전쟁
11세기 말부터 15세기 중엽까지 서유럽 그리스도교 연합군이 성도 예루살렘탈환을 내걸고 일으킨 전쟁이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 성지이기도한데 당시 이슬람 치하에 있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교도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자며 십자군운동을 선언하면서 십자군 운동에 불이 붙었다. 오스만 터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비잔틴제국이 성지 순례자들이 이슬람교도에게 박해받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한 게 계기가 됐다.
십자군은 8회 이상 츨정했는데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를 수없이 죽여 피가 발목까지 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십자군전쟁은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동지중해 패권 다툼, 영토 싸움으로 변질된 채 지속되다가 1153년 비잔틴제국의 멸망으로 공식 소멸됐다. 이 전쟁은 유럽의 ‘대항해시대’ 출발점이자 중세 봉건주의 몰락의 기폭제가 됐다.
▲ 홀로코스트(Holocaust)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가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나치는 대중적 불만의 배출구를 반유대주의에서 찾았다.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 나치의 게르만 민족 우월론이 동원됐고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발로 반공주의가 대두하면서 유대인 탄압을 정당화했다. 나치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로 끌고가 가스실에서 죽였다. 히틀러는 2차대전을 일으키면서 제일 먼저 로마 교황청과 화해협약을 맺었고 가톨릭교회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종교적 독재’를 자행하고 있다고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과 칼 요제프 쿠쉘 교수가 13일 비판했다.
쿠쉘 교수는 시사주간지 슈피겔 최신호에 실린 기고문을 통해 교황이 12일 가톨릭 교회의 잘못에 대해 사죄한 것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이런 사죄의 태도에 상응하는 교회의 혁신과 개선에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교조적인 교회법 적용,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 화해자세의 결여 등으로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쿠쉘 교수는 ‘혁신이 따르지 않은 사죄’라는 제목의 글에서 교황이 행한 사죄정신과 모순되는 일련의 사례를 열거했다.
그는 교황이 1994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가톨릭 교회의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재차 금지시켰고, 교황이 여성 차별을 속죄하는 서한을 발표했던 1995년에 교황청은 여성에 대한 사제 서품 금지가 영원히 지켜야 할 계율이라고 못박았으며, 독일법은 교회와의 상담을 거쳐 임신 3개월내에 낙태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나 교황은 독일 주교단이 이 상담에 참여하는 것을 독단적으로 금지시켰다고 주장했다.
쿠쉘 교수는 현재의 교황 아래서도 이혼자,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성, 전직 신부 등은 여전히 천대받고 있고 가톨릭은 개신교와의 화해 문제에 있어서도 여전히 공동성찬식, 교회직분의 상호인정 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교황의 절대 명령권과 무오류성이라는 독단이 계속 고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쿠쉘 교수는 특히 교황이 “신에 의해 세워진 필연적인 조직은 가톨릭 교회 뿐”이라는 주장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타종교와의 진정한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도 교황은 기독교의 반(反) 유대인적 전통이 ‘짐스러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교회가 반 유대주의 발생과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면서도 이런 사죄의 뜻을 현실 속에서 교회의 개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교황의 이번 사죄는 신뢰성을 잃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 출처 : http://www.durihana.tv/20003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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