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현덕은 서울로 돌아가는 천자의 사자를 배웅하면서 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문을 전했다.
아울러 조조에게도 여포를 천천히 도모하겠다는 뜻이 담긴 회신을 보냈다.
사자는 돌아와 조조를 뵙고 현덕이 여포를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고해바쳤다.
그 말을 듣고 조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순욱에게 물었다.
「그대의 계책이 성사되지 못했으니 어찌하면 좋겠나?」
순욱이 말했다.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라는 다른 계책이 또 하나 있사온데 이번에는
이 계책을 한 번 써보시지요.」
「그건 또 어떤 계책인가?」
「남몰래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비가 원술이 점령하고 있는 남군(南郡)을 치겠다는
표를 천자께 올렸다고 하소서. 원술이 그 말을 들으면 크게 노하여 반드시 유비를 공격할
것이옵니다. 그 때 명공께서 유비에게 원술을 공격하라는 천자의 조서를 내리시면 원술과
유비는 필시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또 그렇게되면 여포는 반드시 딴마음을 품게 될
것이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을 몰아 이리를 잡아먹게 하는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이옵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무릎을 쳤다.
즉시 원소에게 사람을 보낸 다음 천자의 조서를 꾸며 유비가 있는 서주로 사람을 보냈다.
한편 서주에 있던 현덕은 천자의 사자가 조서를 받들고 왔다는 전갈을 받고 성밖으로 나가
그를 영접했다.
조서를 펴들고 읽어보니 바로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토벌하라는 내용이었다.
현덕은 명을 받들겠다는 뜻을 전하면서 먼저 사자를 돌려보냈다.
미축이 말했다.
「이것도 조조의 계략이옵니다.」
현덕이 말했다.
「계략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왕명이니 어길 수는 없는 일이지요.」
현덕은 곧 군사를 점고하여 날을 정해 떠나기로 했다.
손건(孫乾)이 말했다.
「떠나려면 먼저 성을 지킬 사람을 정해놓아야 할 것이옵니다.」
현덕이 말했다.
「두 아우 중에 누가 남아서 성을 지키겠는가?」
관공(關公)이 말했다.
「제가 성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덕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 항상 자네와 일을 의논해야 할 텐데 어찌 잠시라도 떨어질 수 있겠느냐?」
곁에 있던 장비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럼 제가 성을 지키겠습니다.」
현덕이 말했다.
「너에게는 성을 맡길 수가 없다. 첫째로 너는 술만 먹었다하면 포악해져서 병사들에게
매질하기가 일쑤고, 둘째로 일을 경솔하게 처리하고 남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비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술도 안 마시고 병사들도 때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들이 충고하는 말을 잘 듣겠습니다.」
미축이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문제지요.」
장비는 그 말을 듣고 벌컥 성을 내며 말했다.
「내가 우리 형님을 여러 해 동안 모시고 다녔지만 아직 한 번도 신의를 저버린 적이 없는데,
네가 어째서 나를 업신여기느냐!」
현덕이 장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우의 말이 비록 그렇기는 해도 나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진원룡(陳元龍)이
내 아우를 잘 좀 도와 줘야겠소. 부디 술을 좀 마시지 못하게 하여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해주오.」
진등(陳登)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현덕은 이렇게 분부를 내린 다음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3만 명을 거느리고 서주를 떠나
남양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한편 원술은 유비가 표를 올려 자신의 주현(州縣)을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하여
말했다.
「이 촌놈이 돗자리나 치고 짚신이나 삼아 팔며 살다가 갑자기 대군(大郡)을 점거하여
우리 제후들의 반열에 섰다기에 내 한 번 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저놈이 도리어
나를 치려 온다고? 이런 괘씸하기 짝이 놈이로구나!」
원술은 즉시 상장(上將) 기령(紀靈)에게 10만 대군을 주어 서주를 향하여 달려가게 했다.
유비의 군사와 기령의 군사는 우이(盱眙) 땅에서 마주쳤다.
현덕은 군사가 적어서 산을 등지고 물가에 영채를 세우고 있었다.
기령으로 말하자면 본래 산동 사람으로 무게가 50근이나 되는 삼첨도(三尖刀)를 썼다.
기령은 군사들을 이끌고 진 앞으로 나와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유비 이 촌놈아! 어찌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느냐!」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역신(逆臣)을 치러 온 것인데 네가 감히 항거하다니
죽어 마땅하구나!」
기령은 크게 노하여 칼춤을 추며 현덕을 향해 말을 달려 나왔다.
그러자 관공이 목청을 높이며 호통을 쳤다.
「되먹지 못한 놈이 어디서 함부로 날뛰느냐!」
관공은 곧바로 말을 달려 나가 기령과 크게 싸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혈투를 벌여 연달아 30여 합을 싸웠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때 기령이 조금 쉬다가 싸우자고 고함을 치자, 관공이 말머리를 돌려 본 진영으로 돌아와
진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령이 갑자기 부장(副將) 순정(荀正)을 대신 내보내어 관공과 싸우게 했다.
관공이 말했다.
「기령에게 나와서 자웅을 겨루자 일러라!」
순정이 말했다.
「너 같이 이름도 없는 졸개는 기장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을 듣고 관공은 크게 노하여 곧바로 순정에게 달려들었다.
두 말이 엇갈리자, 단 한 합만에 순정은 관공의 청룡도에 몸이 두 동강 나면서 말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이때 현덕은 기회를 놓칠세라 군사를 휘몰아 쳐들어갔다.
마침내 기령은 크게 패하여 회음(淮陰)의 회하(淮河) 어귀까지 달아나 굳게 지키며 감히 나와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단지 병사들에게 현덕의 영채를 겁탈하게 했지만 그때마다 서주의 군사들에게 모두 목숨을
잃거나 쫓겨 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양 진영의 군사들은 한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줄이도록 하겠다.
한편 장비는 현덕이 떠난 이후로 자질구레한 잡무는 모두 진원룡에게 맡기고 군사적 기밀에
속하는 중요한 일만을 직접 챙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비는 연회석을 마련하고 여러 관원들을 청했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참석하여 자리를 잡고 앉자, 장비가 입을 열었다.
「우리 형님께서 떠나실 때 나에게 술을 조금만 마시라고 당부하셨소. 그러니 여러분들은
오늘 하루만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시고 내일부터는 모두 술을 끊고 나를 도와 성을
잘 지키도록 하시오. 그 대신 오늘만은 모두 취하도록 마셔야 하오.」
말을 마치자, 장비는 벌떡 일어나 친히 술잔을 들고 여러 관원들에게 차례로 술을 따르며
권했다.
그 술잔이 조표(曹豹)란 사람 앞으로 오자, 조표가 말했다.
「저는 본래부터 술을 마실 줄 모르옵니다.」
그러자 장비가 말했다.
「이 죽일 놈! 어째서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게냐? 나는 기어이 한 잔 먹여야겠다.」
조표는 겁이 나서 억지로 한 잔을 받아 마셨다.
장비는 여러 관원들에게 술을 한 잔씩 다 돌린 다음 자신은 커다란 뿔잔으로 연거푸
몇 십 잔을 들이켰다.
그리하여 크게 취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여러 관원들에게 차례로
잔을 돌렸다.
술잔이 다시 조표 앞에 이르자, 조표가 말했다.
「저는 정말 술을 마시지 못하옵니다.」
그러자 장비가 말했다.
「네가 아까는 곧잘 먹더니 왜 이제 또 마시지 못하겠다는 거냐?」
조표가 몇 번이나 거절하자, 장비는 취중에 주벽이 발동하여 노발대발하여 말했다.
「이놈! 네가 나의 장령(將令)을 어겼으니 곤장 1백대만 맞아야겠다!」
장비는 즉시 군사들에게 호령하여 조표를 끌어내리게 했다.
곁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원룡이 말했다.
「현덕공이 떠나실 때 무어라고 분부를 하시더이까?」
장비가 말했다.
「너는 문관(文官)이니 문관 할 일이나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할 생각은
말아라!」
조표는 할 수 없이 애걸을 했다.
「익덕공, 내 사위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장비가 말했다.
「네 사위가 도대체 누구냐?」
조표가 말했다.
「여포이옵니다.」
장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내가 본래 너를 때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는데, 네가 여포를 가지고 나를 겁주려고 하니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너를 때려야겠다.! 내가 너를 때리는 것은 바로 여포를
때리는 것일 테니 말이야!」
여러 관원들이 모두 말리려 하였으나 장비는 막무가내였다.
장비는 조표에게 곤장 5십 대를 때리다가 주위 사람들이 나서서 한결같이 용서를 빌자,
그제야 그쳤다.
연회석은 수라장이 되어 파했고, 조표는 원한을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조표는 가만히 편지 한 통을 써서 소패(小沛)에 있는 여포에게 보냈다.
여포에게 장비의 무례함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 현덕은 회남(淮南)으로 가고 없으니 오늘 밤 장비가 술에 취해 있는 틈을 이용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서주(徐州)를 습격하라. 아무쪼록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여포는 장인인 조표가 보낸 편지를 읽고 난 뒤 곧바로 대책을 의논하기 위하여 진궁을 불렀다.
진궁이 말했다.
「소패는 원래 땅이 좁고 척박해서 오래 머물 곳이 못되옵니다. 지금 서주를 차지할 기회가
왔는데 이 때를 놓치고 취하지 않는다면 오래도록 후회할 것이옵니다.」
여포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즉시 갑옷을 걸치고 말에 올라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앞장을 섰다.
진궁도 대군을 이끌고 그 뒤를 따르게 하고 고순(高順) 역시 그 뒤를 따라 출발하도록
분부를 내렸다.
소패는 서주에서 불과 4,5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기에 말을 달리면 삽시간에
이를 수 있었다.
여포가 서주성에 도달한 시각은 마침 사경(四更)이라 은빛 달빛이 휘영청 밝고 맑았다.
그러나 성 위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여포는 성문 앞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유사군(劉使君)께서 기밀을 전하라 하시어 온 사람이오!」
성 위에 있던 조표 수하의 군사가 이 사실을 조표에게 고하자, 조표는 성 위로 올라 자세히
관찰한 뒤 군사들에게 성문을 열라는 영을 내렸다.
여포가 군호(軍號)를 외치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이 때 장비는 술에 취한 나머지 마침 부중에서 드러누워 있었는데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황급히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겨우 일어나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장군, 일어나십시오. 큰일 났습니다. 여포가 성문지기들을 거짓말로 속여 성문을 열게 하고
쳐들어왔습니다!」
장비는 취중에도 크게 노하여 황급히 갑옷을 걸친 다음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움켜쥐고
뛰쳐나갔다.
막 부문을 열고 나가 말에 오르자마자 여포의 군마가 이미 당도하여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장비는 아직도 술이 다 깨지 않아 있는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여포 역시 평소에 장비의 용맹을 잘 알고 있던 터라 쉽사리 그와 맞부딪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장비의 부하인 연장(燕將: 장비의 고향인 연땅 출신의 장수) 18명의 보호를
받으며 장비는 가까스로 동문(東門)을 빠져나왔다.
현덕의 식솔들이 모두 부중에 남아 있지만 그 누구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한편 조표는 장비를 호위하고 있는 군사가 단지 10여 명뿐인데다 장비가 아직 술에 취해
있다고 가벼이 여기고 백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추격해갔다.
조표를 보자, 장비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당장 말을 달려 조표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조표는 장비의 적수가 아니었다.
싸운 지 단 3합 만에 조표는 패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비는 강변까지 달아나는 조표를 뒤쫓아 가 장팔사모창을 번쩍 들어 단번에 그의 등판을
푹 찔렀다.
조표는 비명을 지르며 말과 함께 강물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장비는 성밖에서 군사들을 불러낸 다음 성문을 나온 병사들과 함께 회남(淮南)쪽으로
말을 달렸다.
여포는 성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사 1백 명으로 현덕의 집을 지키게 하고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한편 장비는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곧바로 우이(盱眙)로 달려가 현덕을 뵙고 조표와 여포가
안팎으로 짜고 한밤중에 서주를 습격했던 일을 자초지종 고했다.
주변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놀라 안색이 변했다.
현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주를 얻었을 때 기쁘지 않았는데, 잃었다고 어찌 안타까워하겠느냐?」
관공이 장비에게 말했다.
「형수님들은 어디 계시냐?」
장비가 대답했다.
「성안에 그대로 갇혀 계십니다.」
현덕은 묵묵히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공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네가 애당초 성을 지키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했느냐? 또 형님께서 네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시더냐? 그런데 이제 성도 잃고 형수님들마저도 그 속에 갇혀
계시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장비는 그 말을 듣고는 황공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번득 뽑아 자신의 목을 찌르려 했다.
잔 들어 거침없이 마시던 호기는 어찌 버렸는가(擧杯暢飮情何放)?
칼 뽑아 목을 찌르며 후회해도 이미 늦으리(拔劍捐生悔已遲)!
장비의 목숨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다음 회를 기대하시라!
첫댓글 어이구~~~장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