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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토론방。 스크랩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본 영화 <매트릭스>: 자유와 진실의 의미 재고
반딧불이 추천 0 조회 274 18.09.22 2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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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로 본 영화 <매트릭스>:
자유와 진실의 의미 재고

 

황 은 주
(건국대학교)

 

 

1. 서론

 

19세기 말로 흔히 일컬어지는 염세주의적, 미래 비관적인 풍조가 있었다면 20세기 말에는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 버츄얼 리얼리티(virtual reality)영화가 세기말 현상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1985년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감독의 <브라질>(Brazil, 1985)로 시작하여, <토탈리콜>(Total Recall, 1990), <론머맨>(Lawnmower Man, 1992), <론머맨 2>(Lawnmower Man 2, 1996), <다크시티>(Dark City, 1998), <13층>(The Thirteenth Floor, 1999),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 <매트릭스>(The Matrix, 1999), <엑시스텐즈>(eXistenZ, 1999), <트루먼쇼>(The Truman Show, 1998) 등 디스토피안적인 가상현실 및 사이버 공간을 다루는 영화가 1990년대에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현실과 가상의 불안한 경계는 21세기 초에도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 <페이첵>(Paycheck, 2003), <빌리지>(The Village, 2004) 등의 영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는 주제에 대한 대중적 인기는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르고, <인셉션>(Inception, 2010) 등의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영화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다. 19세기의 세기말적(Fin de Siecle) 현상이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고 당시 문화의 불안감을 표현했다면, 21세기로 넘어오는 밀레니엄에는 인간이 그동안 확고히 믿고 있었던 진실과 거짓의 개념을 송두리째 의심하게 되는 문화적인 위기 현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본 논문은 1990년대 말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들 중의 하나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와 앤디 워쇼스키 감독(Andy Wachowski)의 <매트릭스>(1999)1를 주제로 하여, 현실과 가상현실의 관계를 알아보고, 매트릭스를 파괴해야 되는 이유와 그 당위성을 통해 자유와 진실의 의미를 재고하고자 한다.

 

1 본 논문에서는 내용의 방대함과 1, 2, 3편 영화의 줄거리 및 주제 등 각기 다른 특성으로 인해 <매트릭스 1>(The Matrix, 1999)만을 다루기로 한다.

 

 

2. 왜 진실을 알아야 하는 것인가

 

영화의 줄거리는 플라톤(Plato)의 동굴의 이데아를 기본 모티브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굴의 비유(또는 동굴의 이데아)는 소크라테스(Socrates)가 글라우콘(Glaukon)에게 철학자의 역할을 말해주기 위해 사용한 비유로 플라톤이 기술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동굴 안에 갇혀서 목을 움직여 옆을 볼 수도 없게 고정이 되어서 동굴의 벽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자유스러운 수인들의 존재를 가정한다.

수인들의 뒤쪽 천장에는 불이 타고 있고, 이 불로 인해 생겨난 사람들의 그림자는 수인이 마주보고 있는 동굴의 벽에 비추어지게 되고, 수인들은 목을 움직여 불을 보거나 타인을 볼 수도 없기 때문에 동굴에 비추어진 그림자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동굴에서 갑자기 한 명의 수인이 풀려나 동굴 밖에 나가게 된 상황을 묘사한다. 동굴에서 풀려난 수인은 동굴 밖에 나가게 되면서 처음 보는 빛의 세계에 눈이 아프게 되고, 또한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곧 눈이 빛에 적응하자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빛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고 즐거워한다. 이 수인의 행동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곧 동굴에 여전히 남아 그림자의 세계만을 경험한 다른 수인들을 기억해 내고, 그들에게 자신이 겪은 빛의 세계를 말해주고자 다시 동굴로 들어가게 된다.

동굴로 되돌아가게 된 수인은 다시 눈의 고통을 겪는다. 한 번 빛의 세계에 익숙해진 눈은 동굴에서 적응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며, 진실을 알게 된 다른 수인들이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여 화가 나서 그를 죽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까지 그는 동굴로 들어간다.2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빛의 세계를 이해한 철학자의 역할을 비유하기 위해 이 동굴의 비유를 글라우콘에게 말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본 논문은 동굴의 비유 중에서 한 가지 부분에 집중하고자 한다. 바로 수인이 모든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동굴로 되돌아간 사실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수인이 동굴의 밖에서 실재를 경험하듯이, 영화 속의 네오 역시 매트릭스를 벗어나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매트릭스와 실재를 모두 경험한 뒤에도 매트릭스에 남아 인간 배터리로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며, 매트릭스를 파괴하고자 한다.

왜 진실은 혼자만 누리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를 해야 하는 것일까?

진실에 대한 욕구가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넘어설 정도로 강한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왜 인간은 진실을 알아야하는 것일까? 많은 경우 득이 되면 선이고, 해가 되면 악이라고 구분이 된다.

하지만 오히려 진실이 해가 될 수도 있다. 더욱이 네오와 네브카드네자르(Nebuchadnezzar) 호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새로이 보여주는 진실의 세계는 빛의 세계도 아니고, 더 안락한 세계도 아니라 오히려 기계에 쫓기고, 도망다니며 꿀꿀이죽처럼 생긴 테이스티휘트로 연명하는 궁핍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쾌락을 포기하면서까지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면,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인간이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본능적인 것이라면, 모든 인간이 진실을 찾고자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인간의 미래지향적인 성향에서 찾았다. 하이데거는 개개인이 미래지향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개개인이 갖고 있는 미래의 의미를 비개념적인 의미에서의 미래(즉 약한 의미의 미래)와 개념적인 의미에서의 미래(강한 의미의 미래)로 구분한다.

하이데거는 강한 의미의 미래를 가진 사람에게 진실이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확고한 삶의 가치 위에 미래를 짓기 때문이다. 약한 의미의 미래를 가진 사람에게는 삶의 가치 역시 약하므로 진실보다는 쾌락을 더욱 중시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더 나은 미래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쾌락보다는 진실의 가치를 상위에 둔다고볼 수 있다.3


또한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선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실의 원래 의미는 “숨겨진 것에서 힘들게 끌어낸 것”이라고 한다(Heidegger 223). 묶여 있는 수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뒤쪽 천장에서 타고 있는 불을 보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일이며, 이는 동굴 안의 불 역시 진실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굴 밖의 태양의 세계가 더 큰 진실이라는 것의 근거는 그것이 그만큼 동굴 안에서 묶인 수인들로부터 더 깊이 숨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분석하면서, 진실은 숨겨진 것이라는 것과 힘들게 얻는 것이라는 두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Heidegger 228-29).

따라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하이데거는 진정한 자유의 순간은 수인이 동굴의 체인에서 풀려나는 그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 감추어져왔던 빛의 세계로 힘들게 나아가 태양을 본 순간이라고 주장한다(Heidegger 220-21).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네오(Neo)와 그 동료들은 숨겨졌던 매트릭스의 존재를 발견하고 매트릭스에서 살아가는 타인들에게 진실의 순간을 알리기 위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 하지만 매트릭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네오와 그 동료의 도움으로 너무나 쉽게 매트릭스에서 해방된다면 매트릭스의 존재는 그들에게 진실이 아니라 그저 사실로 다가올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진실은 어둠에 익숙해진 수인이 빛을 갑자기 보게 되는 것처럼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어떠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 예가 있다.

 하버드 철학과 교수 로버트 노지크(Robert Nozick)가 그의 책 아나키,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에서 언급한 “경험 기계”(The Experience Machine)라는 사유 실험이 그것이다.

노지크 교수는 “쾌락은 선”이며 쾌락이 없는 삶은 인간의 만족도를 높이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쾌락주의가 틀렸음을 보이기 위해 이 실험을 실시했다. 노지크 교수는 학생들에게 가상의 기계를 설명한다.

이 기계는 사용자가 원하는 경험이라면 무엇이든 제공할 수 있다. 사용자는 기계에 원하는 수많은 경험을 미리 프로그램 해놓고, 뇌에 수많은 전극을 부착하여 커다란 통 안에 담긴 액체 위를 둥둥 떠다니게 되는데, 사용자는 기계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원하는 경험만을 선택하여 지각할 수 있다.

노지크 교수는 이러한 기계가 있다고 가정하고 2년 동안 이 기계를 사용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는지를 물었을 때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노지크 교수는 사람들이 이 기계의 사용을 꺼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사람들은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갖기보다는 실제로 직접 경험하기를 원한다.

둘째, 사람들은 개성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데, 큰 통의 액체 위에서 떠다니는 인간은 어떠한 개성도 없다. 셋째, 정신 기계에 접속하는 것은 사용자가 자신이 만든 현실에 한정되어 경험하도록 만든(시크 주니어 229-31). 물론 이 사유 실험의 결론과 주장의 도출 방식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부정적인 견해가 있지만 가상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대해 일반인들이 어떠한 의견을 갖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영화<매트릭스>는 경험 기계라는 소재를 직접적으로 줄거리에 도입하여 액체에 둥둥 떠다니며 배터리로서 살아가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매트릭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마도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장면일 것이다. 네오는 노지크 교수의 경험 기계를 연상시키는 끈끈한 액체가 담긴 캡슐에서 일어나 머리 뒤에서 플러그를 뽑아 버리는데, 이 때 영화는 배경에 보이는 수많은 누에고치와 같은 통속에 다른 인간들이 여전히 인간 배터리로서 누워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아무리 행복과 쾌락이 있는 매트릭스라 할지라도 현실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 다시 말해 액체가 담긴 캡슐에서 연명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집합을 영화에서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진실을 알고 진실의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2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우매한 동굴 안의 수인들에 의해 빛을 경험한 수인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라는 부분에 대해서 플라톤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철학자로서 우매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 운명을 암시한다고 쓰고 있다(Heidegger, 224).

3 롤랜즈, 246-72 참고.

 

 

3. 자유와 쾌락: 본래성과 비본래성

 

영화에서 네오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네브카드네자르 호로 가게 된다.

현실로 대변되는 이 장소는 어떠한 곳인가. 화려한 매트릭스와는 달리 기계들에게 쫒기고 먹을 것도 없어서 꿀꿀이죽처럼 생긴 테이스티휘트로 연명을 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계속하여 궁핍한 생활이 있는 네브카드네자르 호가 화려한 매트릭스보다 훨씬 나은 곳이라고 강조한다.

이 영화는 쾌락의 문제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듯이 보인다.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네브카드네자르 호의 요원들 중의 하나인 마우스는 음식에 대해 불평하지만, 다른 대원들은 이러한 감각 및 쾌락은 배척해야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이 영화에서는 데카르트의 전통을 따라 “육체 < 정신, 쾌락 < 금욕, 물질 < 정신, 감각 < 이성”이라는 계급적 사고를 여전히 기본 구조로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매우 급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기본을 이루는 전체적인 철학적 틀은 진부한 경향을 보인다.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인간이 해방된다면 편안함을 겪은 인간은 매트릭스가 파괴된 후에도 편안한 세상을 원할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즐기듯이, 네오가 오라클(Oracle)의 집에서 맛있는 쿠키와 곁들인 커피를 마시듯이 사람들은 이러한 쾌락과 안락을 즐기고 싶어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다 제공할 수 없는 현실은 매트릭스를 파괴한 후에도 또 다시 안락한 매트릭스를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에 있어 쾌락이 매우 중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와 쾌락을 비교했을 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일가?

쾌락 안에도 어느 정도의 삶의 의미는 담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쾌락을 자유보다 상위 개념으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한계가 있는 것일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의미를 갖고자 한다. 어느 정도의 재미와 쾌락은 인간의 행복과 만족도를 높이지만, 프로이트의 「쾌락이론을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에서도 언급이 되듯이 쾌락이 어느 정도 증가하면, 사람들은 쾌락을 불쾌한 것으로 느끼고, 반대로 불쾌한 것을 쾌락으로 인식하게 된다. 즉, 쾌락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지속적인 쾌락은 불쾌의 양을 증가시키게 된다.

합리적, 이성적으로는 쾌락과 만족이 제공되면 인간의 행복도는 올라가야 하지만, 인간은 비이성적이게도 의미를 추구하고자 한다.

기계들은 만족한 인간들이 더 많은 에너지를 생산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더 많은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매트릭스를 최적의 환경으로 만든다. 기계들은 초기 매트릭스에서 인간들에게 지속적인 쾌락만을 제공하여 인간들을 무기력하게 만든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매트릭스는 경쟁과 갈등 구조가 있어서 현실과 매우 유사한 가상세계를 제공하여, 갈등과 경쟁의 요소와 대비한 쾌락을 제공하여, 쾌락의 수용을 극대화시킨다. 따라서 매트릭스는 경쟁과 갈등과 쾌락이 매우 적절히 배합되어 있는 유토피아 아닌 유토피아이다.

이러한 매트릭스를 등지고 황무지인 현실을 선택한 사람들은 편안함을 기준으로 볼 때는 비이성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 비이성적인 것에 진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이성적, 합리적으로 계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므로 니체가 한 말처럼 “바라지 않기 보다는 무(nothingness)를 바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인간이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가정할 때,
진정한 자유를 찾은 인간들이 모두 만족을 할 것인가?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던 인간들이 궁극의 자유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의 원하는 자유를 갖고 있었고, 사회
에서 자아 성취의 기회도 있었던 인간들이 매트릭스와 인간발전소에서 해방되어 현실이 사실은 황무지이고, 맛있는 스테이크도 안락한 삶도, 자아 성취의 기회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모든 인간들이 새롭게 얻은 궁극의 자유에 대해 환영하고 기뻐할 것인가?

영화는 매트릭스를 탈출하여 쾌락과 자유 중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관객에게 강요를 하고 있지만, 사이퍼와 같은 인물은 오히려 쾌락이 제공되는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고자 네오를 배신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네오와 네브카드네자르 호의 주인공들은 자유를 전제로 한 또 다른 유토피아를 약속하면서, 또 다른 매트릭스를 건설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네오와 네브카드네자르 호의 영웅들도 또 다른 종류의 기계에 속아 기존의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새로운 기계가 지배하는 새로운 매트릭스로 인간들을 데려오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그 속의 인간들을 해방시키는 것에 이렇게 많은 불확실성과 위험요소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를 파괴해야만 하는 것일까?

쾌락 대신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육체보다 정신을 상위개념으로 하는 데카르트 이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욕구라고 알려져 있는 자아 성취의 기회(물론 매트릭스 내에서의 자아 성취이지만)와 자유 중에서도 자유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이다.

 

자유는 무엇인가? 영화 <매트릭스>는 모든 의문에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자유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단은 이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유는 한 가지 종류가 아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삶의 목표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궁극적인 자유의 의미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모피어스(Morpheus)나 트리니티(Trinity)가 꿈꾸는 자유의 의미는 매트릭스로부터의 해방이며, 이들은 자기 개인의 해방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진정한 자유를 이루는 것을 궁극적인 자유라고 본다. 반면, 사이퍼에게 자유는 좀 더 현실적이며 개인적이다. 그는 매트릭스의 해방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세속적인 성공과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자한다. 비록 그 모든 것이 허상이고 프로그램된 설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그는 그러한 고차원적인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한 고차원적인 자유에 사이퍼는 마치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수인이 빛의 세계에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다시 고통이 없는 동굴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 더구나 사이퍼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단순히 어둡고 묶여 있는 동굴의 세계가 아니
라 매우 화려하고 안락한 성공이 보장된 세계이다. 영화에서는 사이퍼가 배신자로 그려지고 주인공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키고자 하는 진실을 깨달은 후에도 그 진실을 부정하는 무지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자유에 대해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 자유가 다른 자유보다 더 상위에 있다는 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가장 상위에 있는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매트릭스와 네브카드네자르호 중에서 자아실현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은 매트릭스 쪽일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운명처럼 이미 프로그램이 된 성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사이퍼는 네오를 스미스요원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매트릭스에 들어가 레이건 대통령처럼 영화배우로서 대중의 인기를 많이 받다가 정치인이 되어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삶을 요구한다. 즉, 매트릭스가 아닌 현실의 세계를 선택한다는 것은 매슬로우가 제기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충족시킬 기회를 모두 포기한다는 것과 같으며, 이러한 진실에 대한 욕구는 자아성취에 대한 욕구보다 더 상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주인공 네오와 그를 따르는 매트릭스 해방자들의 선택이 고귀함을 역설하고 있으며, 이는 곧 칸트(Immanuel Kant)의 절대 선의 의지와도 연결이 된다.

진실을 구하는 자는 왜 선하고 고귀한가?

하이데거는 그 답을 빛에서 찾고 있다. 빛을 어둠에 비해 선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전제했을 때 동굴에서 나와 태양을 바라본 수인의 눈에는 태양과 비슷한 빛이 비친다. 즉, 진실을 찾은 자의 눈에는 빛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고 지식을 가진 자에게 지식의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선이다”(Heidegger 226)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인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특징이 드러난다. 하이데거는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성질을 본래성(authenticity)으로, 그리고 쾌락과 일시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성질을 비본래성(inauthenticity)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네오와 그 동료들이 원하는 자유는 본래성을 가진 자유지만, 사이퍼가 원하는 자유는 비본래성의 자유인 것이다.

 

"본래성에 눈을 뜬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상황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비본래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비본래적으로 사는 개인들은 자신의 자유를 거부하며 산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없이 살아간다. 이와 비슷하게 비본래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광범위한 선택의 여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들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대신 예정된 정체성을 수용해 버린다. (맥마흔 112)"

 

영화 매트릭스 는 네브카드네자르로 대표되는 현실 세계는 본래성을 가진 공간으로, 그리고 매트릭스는 화려하지만 거짓으로 가득 차 비본래성을 가진 공간으로 그려내나, 마틴 A. 대너헤이(Martin A. Danahay)와 데이비드 리더(David Rieder)는 매트릭스의 세계가 지나치게 암울하게 표현되어 영화의 관객들이 매트릭스를 파괴해야 할 당위성을 잊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만약 ... 매트릭스가 반드시 깨어야 할 꿈이라면, 매트릭스의 세계는 흑백 화면으로 촬영되었어야 마땅했다. 흑백 화면이었다면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실상을 좀 더 적정하게 상징했을 것이다. 또, 만약 매트릭스가 흑백 화면으로 재연되었다면 그리고 네브카드네자르의 ‘진짜’ 세계가 화려한 색감으로 재연되었다면, 아마도 인류가 싸워 쟁취해야 할 혁명적인 미래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오즈가 그랬던 것처럼, 밝고 화려해 보였을 것이다. (대너헤이와 리더 259)"

 

하지만 대너헤이와 리더의 주장과는 반대로, 화려한 매트릭스와 피폐한 네브카드네자르호의 삶의 대비는 관객들은 모든 것이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고 안락한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에 작별을 고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더욱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진실의 세계가 빛의 세계로 그려졌다면 누구나 진실을 갈망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다. 하지만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거짓의 세계가 화려하고 편안함을 제공하는 반면, 진실의 세계는 어둡고 모든 것이 불편하게 그려진다. 때문에 영화는 진실을 찾는 것은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진실을 찾는 것이 더욱 더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4. 진실의 범주

 

이 영화에 나타나 있는 현실과 가상세계, 진실과 거짓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라”(Simulacra)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트릭스>는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보드리야르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네오가 아직 매트릭스의 존재를 알기 전 그는 낮에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일하고, 밤에는 해커로 일하는 이중적인 생활을 한다. 정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네오의 아파트에 왔을 때 네오는 디스크를 숨겨 둔 책을 꺼내는 데, 이 책이 바로드리야르의 시뮬라크라와 시뮬레이션 (Simulacra and Simulation)이었다.

이때부터 영화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라 이론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줄거리를 전개한다.
영화 중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한 말 “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역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라와 시뮬레이션 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영화가 제작되기 전부터, 즉 1990년대 이전부터 보드리야르의 인기는 단순히 학자로서의 인기를 넘어 선 것이었다. 1984년쯤이 되면 “시뮬레이션”(simulation)과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로 대변되는 보드리야르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의 인기는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4

이러한 대중 문화에 대한 인기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시뮬레이션, 하이퍼리얼리티를 논할 때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언급하지 않고는 논의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현실과 가상 세계를 다룬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들은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처럼 되었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감독의 <엑시스텐즈>(eXistenZ)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인셉션>(Inception)을 제외하고는, 본
논문의 서론에서 예를 든 가상현실을 주제로 한 영화 모두 보드리야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과 하이퍼리얼리티가 발전하기 전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나온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티 이론이 우리가 점차 직면하게 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따라서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영화 <매트릭스>에 묘사된 매트릭스와 현실의 구분, 그리고 이 둘이 대표하는 거짓과 진실의 세계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4 1980년대 보드리야르의 인기는 학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보드리야르는 런던, 뉴욕, 부에노스아이레스 뿐만 아니라 미주리 주의 작은 마을에까지 강의 초대를 받았다. 이코노미스트도 그의 저서 America를 리뷰하였고, 피터 할리(Peter Halley)라는 화가는 하이퍼리얼리티를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야구 모자에도 “simulacrum”이라는 단어가 새겨질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Genosko 3).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라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라를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눈다.

 

1. 심오한 진실을 반영한다.
2. 심오한 진실을 속이고 변형시킨다.
3. 심오한 진실의 부재를 가져온다.
4.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순수한 시뮬라크라일 뿐이다.
It is the reflection of a profound reality;
It masks and denatures a profound reality;
It makes the absence of a profound reality;
It has no relation to any reality whatsoever: it is its own pure simulacrum.
(Baudrillard, Simulacra and Simulation 6)

 

이중 매트릭스 내의 시뮬라크라는 현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단지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라는 점에서 최종 단계의 시뮬라크라로 분류될 수가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뮬라크라인 매트릭스 공간은 주인공들이 매트릭스 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기 때문에, 즉 피, 또는 죽음을 통해 여전히 현실과도 연결이 되는 공간이다.

 

“매트릭스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
“육체는 정신이 없으면 살 수 없어... 정신이 그것을 진짜로 만들지.”
(영화 <매트릭스> 중 네오와 모피어스의 대사)

 

그럼, 현실에 있는 것은 육체고, 정신은 매트릭스 안에만 있는가? 매트릭스에 들어간다 해도 정신이 현실에 있지는 않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진실의 범위를 알기 위해 “분명한 존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선행이 되어야 한다. 이 분명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 데카르트(Ren? Descartes)가 내린 결론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제1철학에 대한 성찰”은 절대적 확실성을 가진 것만을 실재로 수용한다.

데카르트는 존재의 확실성을 더하기 위해서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우리의 실재가 있어 보이도록 만드는 수많은 존재의 가능성을 의심해본다. 결국은 데카르트는 악령의 존재까지도 생각하며, 악령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도록 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이른다. 하지만 악령이 존재하여 마치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존재를 의심하는 주체, 즉 생각하는 주체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하면 존재하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에 대해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생각한다는 사실이 곧 생각의 주체가 되는 존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존재하는 육체가 없고 단지 생각의 집합만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 가운데 몇몇 생각들은 “당신
의 것”이라는 뜻을 가진 생각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고 그 가운데 “이 모든 생각들이 너의 생각”이라는 뜻을 가진 생각이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인격이 존재할 필요는 없으며, 인격이 존재한다고 확신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만 이러한 생각들이 동일한 인격에서 오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생각만이 필요할 뿐이므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생각이 있다는 것만 확실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하는 인격의 존재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생각들만이 있으며, 그 생각이 귀속되는 인격은 아무 데도 없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생각이란 존재만은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이 귀속된다고 추정되는 인격의 존재는 확신할 수 없다. (롤랜즈 56-57)"

 

즉,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이 어떠한 인격체에 귀속된다고 무의식적으로 믿지만, 실제로는 이 역시 일종의 가설에 기반을 둔 것이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은 생각한다는 것이 존재의 증거가 되지는않게 되는 것이다. <매트릭스>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매트릭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또한 스미스 요원같은 경우에는 생각하고 있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며, 컴퓨터 프로그램 그 자체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가 제시하는 문제는 “우리는 존재하는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존재하는가”이다. 현실에서 깨어있는 동안에는 깨어있다고 생각하고, 꿈을 꾸는 동안에도 역시 깨어있다고 생각한다.

매트릭스가 현실이고 인간 발전소가 허구일 수도 있는데, 영화가 매트릭스를 허구로, 인간 발전소가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가 통제력을 갖고 있는 곳이 현실이라는 명제 때문일 것이다.

매트릭스에서는 주체를 감싸고 있는 것이 매트릭스라는 것을 알기도 벗어나기도 불가능하지만, 현실로 이미 돌아와 매트릭스와 현실을 모두 겪은 상태에서는 그 세상의 대비를 통해 현실의 실체를 알게 된다. 바꿔 말하면 매트릭스에만 존재하여 매트릭스 외의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매트릭스만이 현실이라는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영화 내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현실인지에 대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영화 속에서 모피어스는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네오에게 이렇게 답을 한다.

 

"진짜가 뭐지? 진짜를 어떻게 정의 내리지? 촉각, 후각, 미각, 시각 뭐 이런 걸 말하는 거라면, 진짜라는 건 그저 너의 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일 뿐이야. (영화 <매트릭스> 중 모피어스의 대사)"

 

모피어스의 말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그의 말은 결국은 매트릭스도 현실도 결국은 다 감각의 세계이며, 이는 곧 매트릭스가 현실이 아니면 현실도 현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영화는 처음 매트릭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어리둥절해 하는 네오와 네오를 이해를 도와주려는 모피어스의 대화를 통해 진실과 거짓의 세계는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너무도 현실같이 느껴지는 꿈을 꿔 본 적 있나, 네오? 꿈에서 깨어날 수 없다면 어찌하겠나?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어떻게 구분하지? (영화 <매트릭스> 중 모피어스의 대사)"

 

하지만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명제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는 너무나도 쉽게 구분이 되는 거짓 세계 매트릭스와 현실 세계인 네브카드네자르 호를 이분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진실과 거짓의 불명확성을 가시화하는데 실패했다. 영화 <매트릭스>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너무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 발전소에서 살아가는 현실과 거짓으로 대변되는 매트릭스의 경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따라서 이 영화는 거짓으로 대표되는 매트릭스를 파괴시키고 그 안의 인간들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진실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이에 대해 힙스는 이렇게 비평한다.

 

"상황은 이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압제자는,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확인해서 제거방법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외부적인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힘은 우리 내부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통해 발휘된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실재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환상의 세계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릴 수도 있는 커다란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다. (힙스 87)"

 

이렇게 되면 진실이 무엇이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진실과 거짓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왜 진실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서조차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영화 <엑시스텐즈>(eXistenZ)에서는 진실과 거짓을 찾는 것이 보다 어려워지며, 진실과 허구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이 둘은 섞여 있다. 허구가 곧 현실이며, 현실이 곧 허구이다. 매트릭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실과 거짓의 구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매트릭스는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겠지만, 매트릭스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아는 것이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이퍼의 경우 현실과 거짓을 구분한 후에 거짓으로 뒤돌아 가려고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지만, 매트릭스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무지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 우리가 실재와 비실재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행동하거나 그것들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외양과 실재를 구분하는 경계선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분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는 허구와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해 그 경계선을 적극적으로 없앨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모자란 부분을 추측과 편견으로 채운다. 그러므로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상당 부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워드 127)"

 

따라서 진실과 거짓은 영화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처럼 이분법적인 논리로 나누어져 단순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동굴 이론」(“Plato’s Doctrine of Truth”)이라는 글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중 나오는 동굴 내에도 불이 타고 있음에 주목한다.

빛의 세계, 즉 진실은 동굴 밖의 태양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굴 내에도 작게나마 태양을 닮아 있고, 태양의 성질을 공유하고 있는 불이 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동굴 안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은 진실의 범주는 거짓을 포함한다. 진실과 거짓은 처음부터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거짓 역시 진실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5. 결론

 

영화 <매트릭스>는 플라톤-데카르트-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수많은 철학 이론들과 노지크 교수의 정신 기계, 거기에 기독교와 불교의 수많은 상징을 사용하여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르게 매우 복잡한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영화는 플라톤과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주로 사용하여, 진실과 가상세계라는 이분법을 네브카드네자르와 매트릭스라는 공간으로 확연히 구분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플라톤과 보드리야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했거나 이들 이론을 영화에서 다루는 것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네브카드네자르 호에는 과연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플라톤의 동굴에서 나온 수인은 동굴 밖의 세계에서 진실만을 볼 것인가? 동굴 밖의 빛의 세계에 나온다하더라도 현실과 가상세계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트릭스 밖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현실과 가상세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과 가상세계는 처음부터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매트릭스를 현실의 범주 내에 포함시키는 그 순간에 존재한다. 플라톤은 물론 동굴의 비유를 통해 진실의 세계와 동굴 내의 암흑의 세계를 보이지만, 동굴내부는 완전한 암흑은 아니며 동굴 내부에도 태양의 빛을 닮은 불이 타오르고 있음을 보임으로써 동굴 내에도 어느 정도의 진실이 있음을 보인다. 보드리야르 역시 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지만, 네 번째 단계의 하이퍼리얼리티에 이르면 진실과 가상세계는 더 이상 속고 속이는 것이 아닌 구별 불가능한 것이 됨을 보임으로써 진실과 가상세계가 대립되는 구조가 아님을 강조한다.


보드리야르가 미국 내의 디즈니랜드를 미국 사회 내의 유치성과 인공성을 은폐시키기 위한 것으로 정의를 내렸듯이 보드리야르적인 시뮬라크라 이론을 따르고 있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매트릭스는 현실 내 존재하는 가상현실의 존재를 은폐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마치 매트릭스를 파괴하면 가상현실의 세계가 모두 사라지는 것처럼 영화는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세계는 매트릭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꿈의 세계는 그 자체가 현실 내에 포함되어 있으며, 현실이 있어야만 꿈의 세계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 밖에서도 당연히 가상세계는 있다. 네브카드네자르 호의 인물들은 가상 프로그램을 통해 무술을 연마하며, 그들도 꿈을 꾸며 꿈이 제공하는 가상세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주제는 현실과 가상세계의 대립이 아니라 매트릭스 안과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어떠한 세계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최선의 선택과 무엇이 진정한 자유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결국 인간의 승리
도 아닌 기계의 승리도 아닌, 의미를 찾고자 하는 본래성에 대한 욕구의 승리이다.

 

따라서 매트릭스 전체 줄거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논의는 인간과 기계의 대립이나, 현실과 가상세계의 대립보다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의 대립이며, 진정한 자유로 이끄는 최선의 선택이 본래성에 존재하는가, 비본래성에 존재하는가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을 통해 왜 쾌락보다는 자유를 택해야 하고, 진실이 어떻게 자유와 연결이 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쾌락을 포기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2차 대전 이후 경제가 급성장하고 풍요로운 삶과 과학기술의 발전은 지나치게 쾌락을 발전시켰고, 그 결과 인간의 독립성과 궁극적 자유의 의미는 줄어들었다. 고통 없는 자유는 없듯이 쾌락의 추구를 포기하고 본래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은 선한 선택이다. 이상적으로는 매트릭스를 파괴하기 전에 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네오가 그랬던 것처럼 빨간 약을 먹을 것인지 파란 약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
다. 분명히 모든 사람들이 네오처럼 진실을 알기 위해 빨간 약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며, 진실과 매트릭스를 모두 겪은 후에도 사이퍼처럼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과 처음부터 파란 약을 택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택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절대 선하지도 고귀하지도 않다.

 

 

주제어
플라톤, 동굴의 비유, 매트릭스, 본래성, 가상현실, 시뮬라크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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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드, 사라 E. 「영화에 열중할수록 우리는 빨간 약을 선택하게 된다: 허구에 대한 진실한 반응의 역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윌리엄 어윈 엮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10. 116-30.

힙스, 토마스 S. 「인공 낙원 대신 진실의 사막을 걷겠다: 네오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윌리엄 어윈 엮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2010. 8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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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chowski, Larry and Andy(directors). The Matrix. Warner Bros., 1999.

 

 

 

Abstract

 

Analyzing The Matrix in the Frame of Plato's Allegory of the Cave: Rethinking the Meaning of Liberation and Truth

 

Hwang, Eunju

(Konkuk University)

 

This article analyzes a 1999 film The Matrix, directed by Larry and Andy Wachowski, in the frame of Plato’s allegory of the cave. In Plato’s allegory of the cave, this article particularly focuses on the part where the prisoner goes back to the cave after being released from his chains, in order to let other prisoners know the truth. Why is the truth important to know and why should the truth be shared? Why does Neo, the protagonist in The Matrix, have to liberate others? While trying to answer to the questions, this article examines the meaning of liberation and truth, through the allegorical connection between the film and Plato’s allegory of the cave. In order to analyze both the film and the allegory of the cave, this article delves into Heidegger’s concept of authenticity.

This article also argues that differentiating hyperreality from reality is not as simple as the film’s binarism between the matrix and reality represented by a levitating ship called Nebuchadnezzar. As Heidegger observes that there is also fire(the truth) in the cave(a false reality), this article includes the matrix in the realm of reality, rather than defining the matrix as opposing to reality.

 

 

Key Words

Plato, Allegory of the Cave, The Matrix, authenticity, virtual reality, simulacra

 

 

황은주

건국대학교 / 사이언스 픽션, 문화비평

 

접수연월일: 2012년 05월 20일

심사완료일: 2012년 06월 15일

게재확정일: 2012년 0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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