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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19년 9월 6일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나, 상하이에 와서 자신의 직책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가 임시정부 각료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그가 독단적으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것은 임시정부 각료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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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탄핵을 의결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1859~1925)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임시정부 공보 42호 심판서’ 등 기존 사료들에도 나와 있다. 당시 정부 요인과 임시의정원의 의원들은, "대통령은 정부에서 근무해야 효율적이다. 그게 힘들면 국무회의에 권한을 위임해달라."고 하였지만 이승만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나는 미국에 있을 것이고 어떤 권한도 넘겨줄 수 없다."
이후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대통령 교서를 발표했다.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마침내 정부 핵심요인들은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결국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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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저런 썩은 대가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
김규식 "말이 되는 대책이 있어야 참여해서 돕지 시간만 낭비하기 싫다."
안창호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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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이동휘)가 이미 떠난 상황에서 김규식과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을까? 그는 "긴급한 외교사명이 있어 미국에 간다."고 홀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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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상해 임정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임정을 개혁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1925년 3월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탄핵을 의결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면직시키고, 곧바로 박은식(1859~1925)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임시정부 공보 42호 심판서’ 등 기존 사료들에도 나와 있다.
아래 사진은 탄핵 이틀 뒤에 대량 제작되어 발행된 1925년 3월 25일자 독립신문 ‘호외’다. “대통령 이승만 면직”, “신(新)대통령을 선거”, “신대통령 박은식 취임식 거행”, “국무원 동의안 통과” 등의 제목으로 당시 상황을 비교적 건조하게 알리고 있다. 최초의 대통령이자 최초의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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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지금부터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보내지 마라."고 지시했다. 미국으로부터 독립자금이 들어오지 않자임정은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동포들에게 빌어먹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남자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임정의 문지기가 되도 좋다는 열혈민족주의자 백범 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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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는 "미약하더라도 우리가 일본과 직접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적대국들이 한국을 주목한다." 그리고 곧바로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상해 일본군 사령부, 국내 조선총독부, 만주 관동청, 그리고 도쿄의 일본 천황까지 직접 타격하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위해 김구는 특무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목표달성은 쉽지 않았다.
그때, 운명처럼 김구를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농민들을 가르친 계몽운동가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나도 알고 있다. 일본 장교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라고 했던 그 청년은 윤봉길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