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영적인삶]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요 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요 4:23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예배자입니까?
“영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예배를 드리다’ ("... led by the Spirit to worship the Father”)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예배는 장소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영적 예배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계신다고 믿지 않으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1. 랍비들의 언행은 늘 영적입니다. 하나님을 늘 의식하면서 언행을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순간순간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유대인 교사들은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하나님 눈앞에서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듣는 인격적인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랍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숙제을 “ 아무도 보지 않는곳 에서 닭을 잡아오라 ” 다음주 각자가 닭을 잡아 요리 ...한 학생만 ..아니들이 수끈거림 ...왜? 닭을 잡지 않았는냐? 그 학생이 어떻게 아무도 없는곳에서 [하나님도 보고,나도 알고 있는데...] 랍비가 하는말 아무도 보지 않는곳은 없다.
우리가 정말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혼자있는 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명한 목회자 뿐 아니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교인들 중에서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 만의 시간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많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 랍비의 성읍은 거리 잘 단장 되어 있었다.
요시야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후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킨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어고 후에도 없었다고 합니다(왕하23:25).
요시야는 8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31년을 통치했습니다(BC640-609).
요시야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은 그의 아버지 아몬왕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회개치 않아 즉위한지 2년 만에 신복들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되었지만, 철이 들면서 하나님을 찾고 무엇보다 우상을 척결하고 신앙개혁을 단행하는 등 하나님 마음에 들게 통치하여 세상을 떠났을 때 유다 역사에서 최고로 휼륭한 왕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지 12년 되는 해부터 6년 동안 우상제거 작업을 진행했습니다(3-7절).
요시야는 우상 척결 작업을 끝낸 후, 그가 26세 되는 해엔 성전을 수리하고 유월절을 대대적으로 지키게 하여 온 백성이 동참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8절이하).
황폐 할 때 -렘22;[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폐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요시야는 유다와 예루살렘과 베냐민 사람들은 물론, 므낫세, 에브라임 지역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거둔 돈을 하나님께 드려 그 돈으로 성전을 보수하게했습니다.
성전을 보수하는 중에 헌물을 보관하던 곳에서 모세가 전해준 뮬법책이 발견되었습니다(14절 이하). 대제사장 힐기야가 이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어 왕께 전달하게했습니다. 요시야왕은 이 율법책을 보고 옷을 찢으며 그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지낸 것을 회개하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여선지자 훌다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 미국에서의 이단의 부흥...[사회학자..] “이화여자 대학교 교수...포교...미국 통일교 문선명,,, 안되더라... 혈연 – 가까운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교리는 몰라도 삶으로 ...초대교회의 부흥 로마에 전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믿었을 것 같으냐? 누구냐... 초대교회의 부흥은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회의 부흥 ...외국 선교사님들이 일본 편에 서지 않고 .가난한자의 편에 서서 많은 수고와 헌신 ...헬이크 밀사 [선교사] - 우리나라 지성인들에게 감동 ,,,폭발적인 부흥,,,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의 쇠퇴기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권력과 결탁,,, [전,노태우,,,조찬 기도때...모세의 지팡이로 ... 결국 교회은 권력에 결탁 권력과 명성은 얻었을지 모르지만...가난한자드링 외면하는 교회가 되어가는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지금 일산 {벧엘}큰교회 시장,,,,끼고 불법으로 지을수 없는 땅에 지는다....교회가 지탄...[젊은 지성인들에게...]
서울대 모교수 장로 “젊음아이 멘토 되어주겠다.. 눈 너도나도,,,,한 아이 혹시 멘토 하면서 전도 하려는 것 아니냐? 다 취소 3명만 지원....
라스터 뉴비인 영국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 ,,,,[영국에 안식년...]정말 여기가 선교지,,라는 것을 느껬다. 왜? 몇 천명 되는 교인들이 없고 20-30명 노인 교우...그 노목사님“ 한국교회도 따라온다...
영국 교회가 300명 이상 되는 교회 청빈 [스폐 박사 이상...그것 요구]
한국교회 똑같이 따라간다. 그런데 문제 의식 없는 것 한국교회나 영국교회나 똑같다.
저는 말씀의 회복,,,,자기의 단장... 무조건적인 사랑으로...하나님이 우리을 그렇게 참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간호사 교육을 받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마친 당시의 젊은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1934년 6월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이미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됐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14명의 양자·양녀, 38명의 과부 거둬
서서평이 바라본 조선 땅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번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나서면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270㎞ 이상 거리를 돌았다. 진흙탕에 말이 쓰러지면 머리에 이고 백릿길을 걸었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지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
서서평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워 여성들을 가르쳤다. 조선간호부협회(현 간호협회의 전신)를 세우고 일본과 별도로 세계 간호사협회에 등록하려 애썼던 이도 서서평이다. 한글 말살정책이 진행 중인 일제 치하에서 간호부협회의 소식지와 서적들은 모두 한글 전용을 고집했다. 조선사람들에겐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독립의 확신을 심어주려 애썼다.
1914년 광주 제중원 여성 성경공부반의 조선 부인과 함께 선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출애굽 정신 가르치며 한글 사용 고집
1929년 조선간호부협회를 세계협회에 가입시키기 위해 갔던 미국에서, 서서평은 갓 1살 된 자신을 할머니에게 버려두고 떠났던 어머니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어머니는 “니 몰골이 내 딸이라 하기에 부끄러우니 썩 꺼지라”고 서서평을 내쳤다. 평생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서서평은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14명의 한국 아이를 입양해 기른 ‘조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냥 데려다 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좋은 곳으로 시집가도록 돕고, 소박이라도 맞으면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1933년에는 서서평은 조선인 목회자 등 동역자들과 함께 50여명의 나환자를 이끌고 서울로 행진을 시작했다. 강제 거세 등으로 나환자들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 총독부에 나환자들의 삶터를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소식을 들은 전국 각지의 나환자들이 이 행진에 합류했다. 서울의 총독부 앞에 이르렀을 때 동참한 나환자들의 숫자는 530여명에 달했다. 결국 총독부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소록도 한센병환자 요양시설과 병원은 이렇게 시작됐다.
◇장례행렬 나환자들 “어머니” 부르며 오열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사설에서 “백만장자의 귀한 위치에서 하인을 두고 차를 몰고 다니는 선교사들, 동족의 비참한 생활에 눈감고 오직 개인 향락주의로 매진하는 신여성들이 양심에 자극을 받길 바란다”고 썼다.
“여수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의 삶, 그리고 서서평 선교사의 삶.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출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
3. 레위인과 제사장의 11조는 다름아닌 자신의 동료들 때문에 한다.
제사장 중에서 적당한 소득을 얻지 못하는 제사장이 있다. 그리기에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지속적인 나눔이 반복되어야 한다. 왜? 제사장이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차별없이 균등한 수입으로 생활에 걱정이 없어야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데 사역에만 열중할수 있기 때문 이다. [도시- 시골....큰교회-작은교회 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