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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었으니,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신성과 인성(한 인격 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 칼케돈 신조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 완전한 인간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문제를 해결할 셈이다. 그러나 두 성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분명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가 정립되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기독론의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콘스탄티노플 회의부터 칼케톤 회의까지 다루어진 주제였다. 기독론의 논쟁은 362년 아폴리나리우스주의(Apollinarianism)로 시작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아폴로나리우스의 견해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견해가 그리고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는 유티키안의 견해가, 553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단성론이, 그리고 680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일의론(Monothelitism)이 정죄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Apollinaria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을 약화시켜 신성이 인성을 흡수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영(human soul)을 대신하였다고 이해함으로 신인(divine-human)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인간 예수가 로고스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안간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마음을 대신했다고 봄으로써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신적 지성을 가지고 활동하신 예수에 불고하다고 이해했다.
갑바도기아인들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면 구원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370년 갑바도기아 바실이 아폴리나리우스를 논박하기 시작하였고, 377년에는 로마 감독 다마수스 지도 하에 한 회의가 열려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 후 382년에 다시 확인하였다. 또한 379년에는 안디옥에서 한 회의가 열려 아폴리나리우스 주의를 정죄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아폴리나리우스는 388년 데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s) 이단 목록에도 포함되어다. 그 후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가현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아폴리나스리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진 분이다. 신성과 인성이 뚜렷이 구별되며, 양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아폴리나리우스의 약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어떻게 연합 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1) 논쟁의 핵심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과연 마리아를 데오토코스(Theotokos)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육체적 연합이 있었다면,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을 나신 분’(데오토코스)로 불러야한 다고 보았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불어야 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따라 시릴은 마리라를 데오토코스라고 주장한 반면 네스토리우스는 그녀는 데오토코스라고 부를 수 없고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성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신성은 십자가에 고난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즉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신적 그리스도와 인간적 그리스도 두 그리스도(two Christs)를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는 이단이라는 표지가 붙게 되었고 아울러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사이의 그릇된 대조를 주장하는 견해의 원형으로 간주되어왔다. 네스토리우스의 기계적 연합은 유기적인 연합과는 달리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을 나신 분(God-bearer)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데오토코스(theotokos)는 어머니의 특권을 강조하기 보다는 아들의 신성(the Deity of the Son)을 강조하는데 포인트가 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가 뱃속에 갖고 있는 예수는 단순한 인간 예수가 아니라 완전한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삼위 하나님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이다. 때문에 마리아는 육신과 연합된 하나님의 말씀(the Divine Word)을 잉태한 것이며 이런 면에서 마리아는 데오토코스(“theotokos" ; God bear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마리아가 인격적으로 신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연합되었기 때문에 양성의 구분은 가능하지만 양성의 분리는 불가능한 것이다.
(2) 에베소 회의와 평화안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데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요청에 따라 431년에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였다. 431년 6월 22일 성 마리아 교회당에서 개최된 에베소 회의는 지리적이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미루어 시릴에게 유리했다.
네스토리우스보다 먼저 도착한 시릴은 그들이 15일 가량 늦게 도착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는 감독들의 항의에도 그들의 도착하기 4일전 6월 22일 단독으로 에베소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스를 정죄하고 파문시켰다.
안디옥 감독 요한의 인솔 하에 나중에 도착한 네스토리우스 지지자들은 에베소의 주교 멤논의 직위를 박탈하고 시릴을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던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릴, 네스토리우스, 멤논 세 사람 모두를 해임하고 이들을 연금시켰으나, 시릴이 가지고온 거액의 뇌물을 황실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에게 보냄으로 시릴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에베소회의 이후 반 시릴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시릴도 교리적인 면에서 상당부분을 양보해야만 했다.
아폴리나리우스의 가르침과 유사한 시릴의 단성론적 기독론 이해는 그에 대한 반대세력이 등장할 것을 예견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시릴의 12개 파문조항은 반발을 샀고 극단적인 시릴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이들은 12개 조항을 완전히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데오도시우스 황제도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화해를 위해서는 안디옥의 요한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시릴에게는 안디옥이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는 대가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안디옥 전통을 융합시킨 통합신조 곧 평화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시릴은 사이러스의 데오도렛 감독이 작성한 평화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이 평화안은 안디옥 측이 에베소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디옥의 신학을 상당히 반영하는 것이지만,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사이에 긴 논쟁점이던 마리아 호칭을 데오토코스로 결정함으로써 시릴에게 상당한 명분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이 평화안은 한편으로는 시릴의 연합교리를 양성의 인정 하에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한 인격 안에서의 연합 하에 받아들어 한 인격(one person)의 두성(two natures)연합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다.
3. 유티키스주의(Eutychianism)와 단성론(Monophysite)논쟁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 유티키스도 평화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가 양성의 구분을 강조하여 예수를 두 인격으로 구별하는 오류를 낳았음을 잘 알고 있었던 유티키스는 에베소 회의이후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 후에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48년 11월 유티키스는 콘스탄티노플 한 지방 회의에 소환을 받고 이단성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티키스의 극단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레오는 연합 후에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진술하여 그의 사상이 후에 칼케돈회의에서 작성한 신조의 중심 교리로 정착될 수 있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티키스의 단성론을 배격하는 방향에서 진행된 칼케돈 신조는 433년의 조문으로서, 시릴의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 레오의 틈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따와 종합적으로 재합성한 것이다. 그 중에서 양성이 한 인격 안에서 혼합, 변함, 나뉨,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 레오의 가르침은 칼케돈 신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케돈 신조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교리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케돈신조는 지금까지 논란이 되어왔던 아폴리나리우스주의, 네스토리우스주의, 그리고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고,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했으며, 셋째 시릴과 네스토리우스 이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 사이에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동정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God-bearer)로 확정함과 동시 양성의 연합 관계를 피함으로써 그 동안의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는 데 있다. 이외에도 칼케돈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각 지방회의로부터 항소를 취급할 수 있는 상급법원으로 결정”됨으로써 명실상부한 로마교회 다름의 서열을 굳힌 셈이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칼케돈에서 정죄를 당한 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과 유티키스를 따르는 단성론자들은 칼케돈 신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지방에서 지지기반을 넓혀 나갔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앉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 제노는 단성론자들과 모종의 타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단성론자들에 2년간이나 추방당한 후 돌아온 제노황제는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과 분열을 피하기 위해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신조를 통합시키려는 통합성(Edict of Reunion), 헤노티콘(Henotikon)을 482년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제노황제 이후 동방황제들은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다 저스틴(Justine : 527-565) 황제가 들어서면서 반 칼케돈 쪽으로 방향이 선회되었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monothelitism)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콘스탄틴 포고나투스 황제는 단의론 논쟁으로 인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적대 관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681년 콘스탄티노플에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5차 에큐메니칼 회의를 재확인한 후 일의론 지도자인 셀기우스와 호노리우스를 정죄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기독론과 관련된 모든 회의 핵심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를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는데 이 말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조건을 모두 갖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기독론논쟁과 교회 회의 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1)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2)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그의 그리스도의 두 인격 교리(“the doctrine of Christ as two persons”)가 그리고 (3) 유티키스 단성교리(“the doctrine of one nature")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거부되었다. (4) 단성론 논쟁이 553년 제 5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칼케톤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고, (5) 그리스도의 일의론(monothelite)이 제 6차 콘스탄티노플 회의(680)에서 거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