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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는 급진적이고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정치적ㆍ계급적ㆍ집단적ㆍ종파적 이해에 따라 극과 극의 다양한 평가를 하고 있다. 크게는 일방적인 긍정과 부정의 입장이고, 또는 양방향에 걸친 입장에서 평가가 제시된다. 부정적인 차원에서,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왕권과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정당함으로, 일제 식민주의 사가들은 정복과 지배의 당위성을 위해, 개신교측 교회사가들은 구교와의 차별화를, 그리고 북한 사학자들은 집권자의 신격화와 사상적 이념과 체제를 위하여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단정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긍정적인 차원에서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호교론적 입장으로 옹호하면서도, 더불어 민족 사관적 입정에서 부정적으로도 평가한다. 그 외에 다원주의와 인권주의 입장들이 있는데, 일체가 백서를 두고 평가한 모두 타자 중심이다. 따라서 정작 본인 황사영과 그가 믿었던 유일신 하느님은 어떻게 판단하실지는 더욱 중요하여 편집 글의 앞뒤에 실어 본다. 또한 삼가 편집자의 견해를 '기울임체 ' 내용으로 추가해본다.
1. 조선왕조 입장(19세기 초~>
황사영 백서에 대해 조선왕조 위정자들은 "하늘과 땅을 다 찾아보고 만고에 걸쳐 살펴보아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흉모ㆍ음계(陰計)이다."( 「사학죄인사영등추안(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단정하여, 박해와 몰살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참고로 황사영의 육시 사형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죄인 황사영은…, 모반을 꾀해 황심과 옥천희와 더불어…, 그 흉서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측하고 구절마다 역심(逆心)이어서 위를 범하는 기막힌 말뿐이었고, 나라를 원수로 삼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역부도죄로 결안한다.”라고하였다.
그런데 이 백서의 내용이 정말 만고에 없는 일인가? 놀랍게도 2천 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 운동을 시작하면서 이사야 61,1-2를 인용한 희년을 내용을 선포하였다. 예수님이 직접 남긴 문자와 기록은 아니지만, 내용은 기존의 사회질서와 사뭇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영이 자신을 파견하여,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고 잡혀간 이들을 해방 시키겠다는 것이다”(루카 4,17-18) 당시 기득권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고 위협적인 역모 계획이며 선포이다.
2. 황사영 알렉시오 입장
황사영 알렉시오는 1801년 10월(음) 조선왕조 의금부의 백서 작성의 의도를 묻는 추국 심문 에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몸이 볼 때 천주학은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없는데, 다만 조선의 왕가에서 엄금嚴禁하므로...이 몸이 힘을 다하여 천주학을 금하지 못하게 할 계교로 한 짓이올시다.” 좀더 자세히 백서 기록 취지와 목적에 대해 다섯가지로 진술하고 있다. 첫 번째 목적은, “우리 거룩한 교회와 백성들은 천하 만방에 널리, 또한 자유롭게 번성해 있는 같은 동포요 같은 지체이기 때문에, 권력만을 믿고 애매한 백성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려고 한 것이 백서를 쓴 첫째 목적”이라고 한다. 두 번째 목적은 “큰 군함에 군사만을 태우고 와 달라고 요청한 것은 얼핏 보면 만고의 역적 행위요, 백번 죽어도 그 죄가 남을 것으로, 제가 어찌 제 나라를 쳐서 망하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만, 권력만을 무리하게 행사해서 제 백성도 못 알아보는 위정자들에게 한바탕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그 잘못을 깨닫도록 해 달라는 취지”라고 한다. 세 번째 목적은, 우리나라는 중국에 종속국으로 임금과 위정자들이 사대사상에 급급한 나머지 자주적으로 국정을 펴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런 처지에 종주국을 속여 가면서까지 온갖 불법을 감행하고 만만한 제 백성에게는 없는 잘못을 뒤집어 씌워 죽이는것만 장한 일로 알기 때문에, 우리도 이 땅 위에서 우리 임금의 성은과 보살핌 아래 살아보려고 부득이 종주국에 대해서 우리 조정에 경고하고 감시해달라고 호소한 것”이 백서를 쓴 세 번째라고 한다. 네 번째 목적은, “우리 조선의 거룩한 교회는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을 신속하게 하기위해서 변문에다 비밀 연락인을 배치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다섯 번째 목적은, “우리 교회는 세계적인 종교로서 로마 교황의 통치하에 움직이는 만큼, 우리 교황 성하께서 중국 황제에게 서신으로라도 조선의 이 참혹한 현상을 잘 살펴 시정토록 해주십사 호소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사영은 위의 다섯 가지 호소에 대해, 위정자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타깝고 달리 모면할 수 없는 가련한 처지를 넉넉히 헤아리시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대역부도로 다루지 마시고, 선하고 올바른 정치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전세권 모세는 그의 소설 ‘피의증거’에서 이러한 백서의 취지와 목적 그리고 황사영의 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강조한다. “백서에 대한 조선왕조 역사는 왕조 실록에만 근거하여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것은 왕조의 정당성에 입각한 기록일 뿐, 민중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 중 민중들의 삶의 애환을 극명하게 서술한 기록으로 황사영 백서가 있다.” “황사영는 전도양양한 사대부가의 양반으로 입신양명과 출세의 벼슬로 얻을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민중 편에 섰다. 황사영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조선과 세상을 구할 ‘양약良藥’이며 ‘정도正로 인식하고 그 인식과 믿음 행동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박해와 말살의 도탄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 진정한 그가 애국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전세권 모세는 황사영에 대한 다큐소설 ‘피의 증거’를 쓰기 위해 10년 가까이 황사영의 일대기를 추적하였다. 황사영의 진실한 열렬한 족적을 찾을 때마다 사람들은 대역적이라고 평가하는데, 그에게는 ‘애국자’로 ‘찬연한 시대의 증거자’로, 크고 장렬하게 불타오른 ‘시대의 쾌남아’로 이해되었다고 한다.
조광 교수는 “‘사람을 사랑하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천주교 교리를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수용하여 가르침 그대로 실천했다”라며 “‘양반도 상놈도 다 똑같다’며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 신자들을 보고 정부는 탄압 수위를 더욱 올렸다”라고 말했다.
하느님은 한 분이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모두 귀중하며 존엄한 존재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법을 넘어서 하느님과 서로의 존재 앞에 평등하고 다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신적이며 교회적 세계와 사람 이해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양육강식의 자연법적 질서가 오래도록 계승 유지되었다. 19세기 초 조선왕조는 미망과 무지의 시대로 소수의 권력자가 무력으로 군림하고 다수의 백성은 일방적으로 그 지배와 통제를 받았다. 그런데 천주교가 지향하고 가르치는 사상과 이념은 하느님 나라의 회복이다. 이는 세상과 각각의 사람이 서로 조화와 평형을 이루고 사는 이상세계 파라다이스의 구현이다. 이상세계의 구현은 막연한 기대와 설정만 해 놓고, 실제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한계 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필연으로 이루어야 하는 인류와 인간의 가장 큰 과제이며 소명이다. “우리 거룩한 교회와 백성들은 천하 만방에 널리 또한 자유롭게 번성해 있는 같은 동포요 같은 지체이기 때문에, 권력만을 믿고 애매한 백성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려고 한 것이 백서를 쓴 첫째 목적”이라고 한다. 황사영은 불과 십여 년 짧은 신앙생활 기간에, 경전도 변변한 교회 책자도 없었지만 참으로 놀랍게도 성경과 보편 교회 진리의 정수를 꿰뚫어 통찰하였다. 또한 그 자신 입교해서 순교하기까지 자신이 배우고 수용한 천주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전파하였다. 그는 자연 질서인 약육강식의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신적 질서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사상과 운동을 앞장서 실천하고 전파하려 한 예언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세권의 ‘역적’이 아닌 ‘애국자’란 호칭과 평가는 참으로 타당하다.
3. 부정적인 이해와 평가
1) 이규경
실학자 이덕무의 손자였던 이규경은 자신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황사영을 "간악한 무리"로 명명하고 위에 묘사한 조선왕조 위정자들이 단정하고 기록한 문서를 그대로 백과사전에 실었다. 인간이란 그가 자리한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과 정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대부분 사람에게 맞는 말이다. 더구나 ‘민족’과 ‘국가’라는 특별한 개념과 사상은 사람과 시대를 관통하며 꼼짝 못 하게 하는 매우 큰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변적인 시대정신 경향이 아닌, 불변과 영원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의 소유자로 전후좌우 세대를 관통하는 정신적 자유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워 따랐던 황사영도 상당 부분에서 그랬다.
2) 대한민국 역사학자(이상백&변태섭)
해방 후, 남한의 역사학자인 이상백은 백서에 대해 가장 먼저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황사영의 백서에 대해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모한 짓”으로 보았다. 변태섭은 “외세의존의 반국가적 행위”로 규정하는 부정적 평가하였다.
황사영은 1800년 무렵 당시 국제적 경향에 대해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교황청의 권위와,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안정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실현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 온 세상 천하 만민이 다 같은 ‘형제 자매’라는 ‘사해동포’ 사상이다. 외세外勢와 내세內勢, 민족과 국가란, 하나뿐인 지구의 공간적 환경에서 인간의 안전한 생존과 행복 추구의 욕구를 유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질서와 균형이다. 오직 민족주의와 오직 국가주의의 배타성은 심각한 착오이며 재앙이다.
3) 개신교 교회사학자
개신교 교회사학자들은 백서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이유로 청국에 의한 조선왕조 병합과 서양으로부터의 무력 침공(황사영의 기록은 ‘침공’이 아니라 ‘시위’)을 제의한 것이, ‘매국’ 행위로 규탄받을 구실로 전용되었고, 이러한 것은 순수한 신앙고백으로서의 순교 가치를 저하시킨 것으로 생각한다."(김재준 ,「한국사에 나타난 신교자 유에의 투쟁」, 1966)
신교 교회사가들은 평가와 기록은, 가톨릭교회와의 차별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즉 구교 신자인 황사영의 순교를 폄훼하는 것이다. 집권 세력의 조직과 개인에 대한 무자비한 몰살의 박해와 광기 앞에, 토굴에 숨어 하루 한순간 겨우 그 한목숨 부지하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어떻게 하다 잡혀 죽었으면 순수한 순교였을까? 설마 두 손 모으고 하늘의 하느님을 향해 연약하고 가련한 탄원의 기도만 올리다 잡혀 죽었으면 순수한 순교의 가치였을까? 순교자들은 순교를 명예를 도모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교회를 보호하려다 보니 죽어야만 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야말로 전대미문의 급진적 사상운동이었다. 그러니 집권자들에 의한 박해와 죽음은 정해진 수순이였다. 행정적 사법적 절차에 따른 죄목은 종교적인 것에 정치적인 면모를 포함하는 ‘하느님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사실적 죄는 종교,정치,문화 이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범사회적 선동죄였다. 그리고 이 운동은 본국에서 중단되었어야 했다. 그분의 죽음이 대역죄인이고 신성모독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네 복음서의 결론마다 예수님은 고약하게도 다시 살아나시고 부활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든 민족과 국가의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황사영이 외세에 의지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고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면,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국내 외세를 확장하려 한 것이다. 사전에 합법적이고 외교적인 협약이 없었기에 명백히 불법이며 국권 침탈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과 죽음의 순수성도 평가절하인가? 인류는 그분을 일컬어 ‘구세주(세상을 구하신 주님)’라 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영원불변의 보편 진리라고 한다. 예수의 죽음이 지고지순하듯이 황사영의 순교도 그렇다.
4) 북한 입장
북조선인민공화국 역사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황사영이란 남인 신자는 일단 법망을 벗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이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며 구원을 청하는 백서를, 북경에 있는 천주교 주교에게 몰래 보내다가 발각되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에서의 포교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구라파 열강의 무력 간섭을 요청하는 매국적 내용이 들어 있었다. 황사영의 백서는 조선에서의 천주교 포교가, 자본주의 침략 세력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체 폭로한 것으로서, 조선 인민들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봉건 통치자들은 내정을 개혁하고 국방을 정비할 데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직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만 광분하였다."(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 통사』,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 1956) 이는 북한 사회가 기본적으로 가톨릭 종교를 제국주의적 침략의 문화 첨병으로 보고 있으며, 전제 왕조시대처럼 김일성과 그 가계를 신격화하고 있는 입장이다.
5) 최석우 신부
그런가 하면 한국 천주교회 역사가 천주교 최석우 신부도 백서는” 서구제국에 대한 사대주의 발로”라고 비판한다. 동시에, 조선왕조의 집권자들도 종교와 정치를 혼동한 점에서 황사영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국가권력을 집권 세력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적 권력으로 악용한 잘못이 있다”라고 하였다.
6) 문규현 신부
문규현 신부는 황사영의 백서는 “천주교 신자가 인륜을 저버린 집단, 나라를 팔아먹은 집단으로 매도당한 원인을 제공했다”라고 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황사영 백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이 백서는 북경의 주교에게 들어가기 전 압수되었으나 파문은 대단히 컸습니다. 피신지 충청도 배론의 토굴 속에서 작성된 백서는 교회의 입장으로 보면, 심각한 탄압과 위기에 처한 교회를 구하고자 하는 열렬한 청원과 기도입니다. 또 당시의 박해 상황과 교회 실태를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서가 발각되자 나라 안은 발칵 뒤집혔고, 백서는 흉서(凶書)로 낙인이 찍혔으며, 천주교인들에 대한 체포와 학살은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그처럼 외세에 의존하려던 모습들은 너무나 캄캄한 암흑과 고립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기하면 다 되는 것인가?…, 오늘의 시선으로 찾아보는 교훈이긴 하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원동력, 힘은 민족의 현실, 민중의 삶의 자리에서 찾았어야 할 것입니다. 민족의 역사 안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가 빛내었던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모습의 예언자적 소명이 그간의 과정에서 사위여 갔음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완고할뿐더러 민중의 고혈을 짜낼 줄만 알 뿐, 위로하고 치유할 줄 모르는 봉건 정부를 향해 민중들과 일체를 이루고, 봉건 정부의 기반을 내부로부터 허물어 내리는 그러한 신앙 운동이 펼쳐졌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이익을 배반해가며 지키는 교회, 한 민족의 존엄성과 그 구성원들의 오랜 삶의 터전, 그리고 소중한 문화 전통을 쓸어내며 전파하는 복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되묻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만 주어진다면, 그렇게 해서 '교회'를 지킬 수만 있다면 다른 가치들은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 Ⅰ』, 1994).
대부분 한국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부정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인 양면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자신들의 고유한 사상적 이해와 더불어, 황사영의 백서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의 영향, 아직도 여전히 중요한 주체인 민족과 국가적 역사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적 실제적 한계라고 여겨진다.
4.긍정적 이해와 평가
백서에 긍정적 입장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사관, 천주교의 호교론적 관점 그리고 민중사관적 입장으로 이미 객관적인 평가가 있으므로, 따로 편집자의 견해를 부가하지 않겠다.
1) 일본제국의 관변학자
먼저 식민 사관적 입장에서, 일제 강점기 관학자 小田省吾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조 원년(純祖元年) 즉 1801년에 돌발한 천주교 박해는 실로 시벽(時僻) 양파의 투쟁에 터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종교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황사영 백서이다." (小田省吾, 「李朝の朋黨を略述して天主敎 迫害に及ぶ」,『靑丘學叢』1, 1930) 이 견해는 황사영 백서에 대한 옹호론이라기보다, 조선 망국론의 하나로 제시하려는 조선왕조 당파 이론을 합리화하려는 견해이다. 小田省吾를 계승하는 石井壽夫는 천주교의 국가관이 성리학 지상주의를 기반으로 한 조선왕조를 부정하는 혁명 원리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특히 황사영을 “조선왕조 붕괴기에 한계를 드러낸 성리학 지상주의를 타파하려 한 구시대의 반역아, 또는 신시대의 건설자로 보면서 선각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역사적 고뇌를 토로한 것이 황사영 백서”라고 평가하였다. 황사영과 그의 백서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의 견해 저의는 조선왕조 망국의 주된 원인을 당쟁으로 제시하여, 일본제국의 침략과 정복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이다.
2) 최석우 신부
다음은 호교론적 관점에서 황사영 백서를 긍정적으로 옹호하려는 대부분 천주교회사 연구자들의 견해이다. 최석우 신부는 백서에 대해, 민족주의적 측면과는 별도로 순수 신앙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호교론과 민중사관적 관점에 근거하여 백서를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3)조광 교수
조광 교수는 “서구 의존에 의한 신앙 자유 획득방안과 사회개혁 의식은 당시 민중들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외세(중국)에 의한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희구한 전환기적 의식과 일맥상통한다”라고 보고 있다. 또한 백서 작성 당시, 서구 자본주의 발전단계는 제국주의 전 단계인 중상주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고 백서 속의 외세 의존의식을 제국주의 침략주의와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며, 백서가 정당화될 수 없겠으나, 본질적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내적 발전의 흐름에 역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조심스럽게 변호했다.
3) 노길명 교수
노길명 교수는 백서가 봉건사회 해체기에 생존의 위협의 맞고 있던 민중 세계의 반봉건적 동향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제국주의 침략 이전의 민족의식은 민족으로서의 자각이라는 차원보다, 대건對建사회 질서의 청산과 근대사회로의 이행이라는 민족사적 과제에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4) 박노자 교수 & 허동현 교수 (다원주의 입장)
박노자는 황사영이 민중을 혹사 착취했던 집권 세도가들에게 맞섰음에도, 남한의 민중 사학자들이나 북한의 사학이 그를 맹목적인 ‘사대주의자’ 내지 ‘외세 의존적인 환상가’라고 혹평하는 것은, 바로 근대사의 쓰라린 경험에서 나오는 민족주의적 감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면서 백서가 담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외세를 끌어들이는 ‘사대주의적 환상으로 축소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황사영에게는 천주교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성교(聖敎)이자, 서구인도 중국인도 다 같이 믿거나 믿어야 하는 세계의 보편적인 진리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그를 외세 숭배자로 혹평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숭배했던 것은, 오직 전 지구인들이 공동으로 섬긴 보편적 유일신 唯一神 하느님과 그의 가르침이었다. 박노자 교수는, 황사영을 단순히 외세의 앞잡이로 매도할 것이 아니라, 21세기인 현대식으로 말하면 ‘보편적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유엔에 탄원한 탄원서’쯤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에 관한 판단은 현재의 민족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그 당시 인식의 틀과 논리, 그리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신념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다원주의의 원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가능한 최고의 객관성이라고 본다.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의 대담 서한을 통해 황사영 백서에 평가한다. 그는 조선왕조 500년 집권에서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민족적 국가적 주체성 결여와 외세의존이라는 약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통찰하면서, 황사영 백서는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발전에 묵시적인 정신사적 영향을 주었다고 이해한다. (황사영만이 백서에서 외세에 의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기간 동안 사실적으로 외세와 외압을 받는 처지였다) 또한 ‘인권선언’과 배타적 민족주의를 넘어 ‘국제적 연대의 이정표’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반면 황사영이 개인의 신념을 위해, 집권 세력의 물리적 폭력에 상응하는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허동현 교수는 논란 많은 백서 사건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대안으로 천주교 주교단이 발표한 다음의 글을 인용한다. "우리 교회는, 세계정세에 어둡던 박해 시대에, 외세에 힘입어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지키고자 한 적도 있었으며,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문화적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 안에서 다른 종교가 지닌 정신 문화적 가치와 사회 윤리적 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잘못도 고백합니다.…우리는 참회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선의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 정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쇄신과 화해(2000년 12월 3일)」) 다시 한번 인용하면 “개인과 집단의 가치와 신념을 고집하며 지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거나, 고귀한 목적을 이루려 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둘 다 바람직하지 않고, 관용과 대화만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힘”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교 불가한 거대한 다수의 절대 왕조와 절대 집권권력자 카르텔이, 천주교와 황사영을 암적인 존재와 집단으로 여겨 관용과 자비는 고사하고 몰살을 획책하는 터에, 허약하기 그지없는 한 개인(황사영)이 현실적으로 무슨 힘이 있어 관용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정치 역사는 긴 인류사에 우여곡절을 거쳐 다소간 발전하고 진화했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권력의 힘은 절대적인 것이 현실인데, 허동현 교수의 이 표현은 특히 황사영에 관한 서는 공감이 떨어진다.
5) 배은하 신부(인권 관점)
다음으로는 인권론적 관점에서의 평가이다. 먼저 배은하 신부는 황사영 백서를 현재 오늘날의 정치 역학에서 보지 말고, 1801년 당시 황사영 자신이 쓴 백서 텍스트 안에서 그와 만나 이야기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백서를 편견 없이 그 시대적 상황과 그의 인물됨과 함께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안전과 입신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재건과 이 겨레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왕정 체제에 과감히 도전하였기 때문에 진리 편에 서서 국가의 추한 면을 폭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 위주의 노선을 고수하면서, 겨레를 구하기 위해 국가를 거슬러 고발한 왕정 체제에 대한 도전이지 민족을 배반한 것은 아니다.…황사영의 백서는 박해로 인한 대량 학살의 비극으로부터 부당한 죽음과 어려움을 당하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 국제적인 원조를 요청한 ‘인권 존중 옹호의 텍스트’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실과 국가를 분리하려고 한 최초의 문서로서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상의 분기점을 이루고 있다.”(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 바오로 출판사, 1992)
6) 원재연 교수(인권관점)
원재연 교수는 근현대의 국제법과 대한민국 헌법의 인권론적 입장에서 황사영의 백서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황사영이 조선왕조의 부패와 무능함에 대하여 급진적인 사상으로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대의 혁명가’로 평가한다. 황사영 백서는 조선시대 소수자인 천주교도 황사영이, 폭압을 저지할 아무런 평화적인 수단이 전무하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가 믿는 신앙의 자유를 인간이면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의 하나로 당당하게 주장하고 세상에 선포한 ”조선시대판 인권선언서“라고 한다. 그러나 황사영이 백서에서 제기한 내복감호설內服監護設(조선을 청의 제후국의 하나로 제기한 이론)은 청국이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을 초래하여, 민족의 자존과 정통성 유지에 반하는 심각한 국가권력의 훼손이므로 환영할 수 없는 방책이라고 한다.
이처럼 백서는 신앙의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려 한 목적의 정당성과 외세를 동원하려 한 수단의 결함 때문에, 그 당시에서 오늘까지 그 평가를 둘러싸고 "흉서"ㆍ"매국의 계책"ㆍ"비상식을 극한 공상"ㆍ"외세의존의 반국가적 행위"ㆍ"몽상"ㆍ"매국적 편지"와 같은 혹평과 "조선교회 구출의 원대한 계획"ㆍ"인권 존중 옹호의 텍스트"ㆍ"인권선언서"와 같은 찬탄이 엇갈리는 미해결의 화두(話頭)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황사영의 인물됨에 대해서도 "전대미문의 역적"ㆍ"민족 반역자"ㆍ"민족 허무주의자"ㆍ"유럽에 대한 사대주의자"ㆍ"기만적 천주 교리를 맹목적으로 믿은 광신자"와 같은 악평과, "신시대의 건설자"ㆍ"선각적 지식인"ㆍ"훌륭한 순교자"ㆍ"사회변혁가ㆍ사상변혁을 시도한 개혁운동가"와 같은 호평이 교차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정치적ㆍ 계급적ㆍ집단적ㆍ종파적 이해에 따른 이해이며 평가이다.
최 성옥 마리 에스텔 수녀 관점>
나는 역사가도 교회학자도 아닌 그저 평범한 천주교 신자일 뿐이지만 이분들의 황사영에 대한 연구와 평가에 내 의견을 보태본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사는 만큼 안다"라고 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성황석두 루카 서원 출판물인 성인전 열 권을 읽으며 순교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중에 가장 관심있는 분이 황사영 알렉시오였다. 이유는, 하느님과 조선 천주교회사에 미친 그의 위대한 공적에 비해 공경이 너무 미약해서이다. 감사와 함께 미안하고 송구했다. 이것은 백서로 야기된 비판 때문으로 그는 여전히 국가 반역자의 불명예를 뒤집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연 반역자일까? '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출세도 영화도 벗어 던지고 신앙과 진리로 뛰어든 것과, 그 후 여일한 신앙의 투신 과정 그리고 마지막 증거가 이를 고백하고 있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체포된 후 의금부 취조 과정에서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몸이 볼 때 천주교는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없는데, 다만 왕가와 권력자들이 금교하므로 이 몸이 힘을 다하여 천주학을 금하지 못하게 할 계교로 한 짓이올시다"(전세권,피의 증거, 219p) 이 답변이 반역자의 답변인가?
역사적으로 미망의 조선왕조 시대, 너무 일찍 개화환 천주교가 때를 맞추지 못한 운명도 있지만,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을 평등하고 행복하게 구제하려는 절대 계시 진리이다. 이를 알고 출세도 재물도 벗어버린 그가 어찌 애국자가 아니고 반역자란 말인가? 조선왕조는 이 천주교를 거부하고 박해하지 않고 수용하여 받아들였다면 해는 커녕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 발전을 100년이나 찬란이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다. 반역자는 구원의 역사와 민족의 발전적 역사를 통찰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하고, 한 시대 그저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살다간 부끄러운 권력자들인 그들이 아닐까?
결론>
최홍준 스테파노는 황사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글을 남겼다. ”능지처참(陵遲處斬). 머리와 두 팔, 두 다리, 몸뚱이가 토막쳐치는 극형에 처해졌다. 그는 지상 여정의 마지막 순간을 이토록 큰 어려움 가운데서 맞이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갔다. 그 후 <다블뤼 주교 비망기> 제4권 ‘조선 순교자 비망기’에 ‘황사영’은 “국가에 해를 끼쳐 선정이 보류”됐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지난 21세기 초 한국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 특별위원회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하면서 “황사영이 순교자인 것은 확실하지만 교회 밖, 즉 국가에 해를 끼칠 수도 있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 황사영 알렉시오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는 그를 어떻게 맞이하셨을까? 그리고 대우하셨을까?“
*황사영 알렉시오의 순교와 백서의 공은 형용할 수 없이 크건만, 각계각층의 극단적인 이해와 평가로 교회에서 조차 아직도 여전히 공은 큰데 공경은 미약하다. 참으로 송구하고 빚진 심경으로, 하루라도 빨리 시복시성의 반열에 올라 반듯한 공경을 받으시기를 기도 담아 편집하다.
*교회 역사가 최석우 신부님, 박노자 교수님, 허동현 교수님, 특히 원재연 교수님의 논문 글을 감사히 읽으며 상당 부분 참조 카피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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