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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부안 49코스 제2부
주상천 둑방-대초리들녘-대초마을-신월마을-제내마을-
행안초등학교-시어산-매창공원-부안예술회관-부안중학교-
서림공원-상소산 아래전망대-문학마당-혜원사-매창시비-부안군청
20230510
1.상소산 전망대에서 매창과 간재 선생을 기리며
부안중학교 앞 당산로를 걸어오르다가 소금샘길로 올라섰다. 바로 앞 상소산 서림공원의 아래전망대가 보인다. 서림공원 아래 부안군청 앞까지 서해랑길 49코스 최종목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11시 30분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여 훌륭한 점심을 먹자고 하는 길동무의 제안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내닫고 있다. 본말이 뒤바뀌고 주객이 전도되어 탐방이 목적이 아니라 성찬과 음주 계획이 우선이 되었다. 염불보다 잿밥의 탐방길을 재촉한다. 향교2길로 들어서서 서림공원 철쭉길을 내달린다. 오른쪽에 편백나무숲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고, 편백숲에서 여유있게 편백향을 즐기는 분들이 있다. 저런 여유가 필요한데 길손은 허겁지겁 상소산 서림공원 아래전망대 팔각정으로 향하였다. 11시가 넘었다. 제 정신인가? 오후 1시 출발인데 11시 30분까지 도착하겠다고 막무가내로 달려온 길손의 꼴이 우습기 그지없다.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그대로 내뺄 수는 없다. 아래전망대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오,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뻥 뚫렸다. 정신줄이 끊어지는 듯 허둥지둥 사방을 둘러보았다. 걸어온 서해랑길 부안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을 돌려 살피면서 고창과 부안, 멀리 김제와 군산 지역을 가늠하였다. 가슴이 벅차다.
부안군 부안읍((扶安邑)은 고창군 부안면(富安面)과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 이름이 같아 부안이라고 하면 어느 지역인지 헷갈린다. 행정구역상 큰 지역인 부안군 부안읍을 일반적으로 부안이라고 이르지만 정확하게는 부안군과 고창군을 앞에 이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고창군은 삼한 시대에 마한(馬韓) 54국 중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었고, 부안군(扶安郡)은 지반국(支半國) 지역으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이루다가 4세기에 마한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지반국은 삼국 시대에 백제의 개화현(皆火縣),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부령현(扶寜縣)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시대인 1416년(태종 16)에는 북쪽의 부령현(扶寧縣)과 남쪽의 보안현(保安縣)을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하였으며, 별호는 낭주(浪州) 또는 부풍(扶風)이었다고 한다.
상소산 아래전망대 팔각정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시어산이 솟아 있고, 그 앞 왼쪽에 매창공원이 있다. 방금 거쳐온 매창공원에서 매창에 정신을 빼앗겨 헤매돌았다. 매창의 대표 작품이 새겨진 시비(詩碑)들과 유희경이 매창에게 보낸 시비,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는 후대 문인들의 시비, 그리고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의 묘를 찾아 이리저리 정신 없이 헤매었다. 이매창(李梅窓)은 1610년(광해군 2)에 38세의 나이로 죽어서 매창뜸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죽은 지 45년 만인 1655년(효종 6) 묘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학창 시절 이매창의 시조를 배웠다. "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 시조 그리고 허균과 나눈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빠져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 15년 전에 부안 상소산에 온 일이 까마득하게 떠오른다. 그녀는 황진이, 홍랑,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시대 지식인 여성의 삶을 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남서쪽 맨 뒤쪽에 내변산 산줄기가 보인다. 그 뒤가 곰소만 해안으로, 부안군 줄포면과 변산면으로 이어지는 변산반도 해안을 따라 탐방한 길이 선명하게 추억된다. 새벽의 어둠과 여명, 아침 노을과 밝은 햇빛 속에서 탐방하며 구체적으로 살핀 해안과 바다 그리고 마을들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내변산 산줄기 앞 상서면 용서봉과 명덕봉 앞쪽으로 방금 걸어온 상서면 장동리 들녘과 행안면 대초리 들녘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그 사이로 부안 들녘의 젖줄 주상천이 흐른다. 주상천은 내변산 북쪽 상서면 호벌치 계곡에서 발원하여 계화면 의복리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흘러드는 부안의 중요한 하천이다. 주상천은 상서면 고잔리 목포마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는데, 1935년 주상천 하구에 갑문을 설치하여 바닷물의 유입을 막아 간척되고, 다시 계화도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하서면 청호리, 상서면 장동리 일대와 고잔리, 행안면 대초리 일대가 간척된 것 같다. 전망대에서는 행안면 대초리 간척농지의 밀밭길을 가로질러 걸어온 길이 훤하게 보인다. 저 길을 걸으며 밀보다 키가 크고 모가지가 긴 호밀밭에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렸다. 호밀밭에서 싱싱하고 푸른 정신의 호밀이 자라고 있다. 그런데 우리 기성세대는 호밀의 푸른 정신을 퇴락시키는 선봉자가 되는가? 현실에서나 소설 작품에서나 기성세대는 새 세대의 디딤돌이 되기보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호밀을 세상의 허위와 가식으로부터 수호하는 파수꾼은 누구일까?
북서쪽을 조망하면 행안면 역리(驛里)에 고성산이 낮게 엎드려 있다. 고성산(古城山)에는 산성이 있으며, 옛 부안읍의 治所는 "부안현의 서쪽에 있다"는 고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부령현의 치소지는 고성산이었고, 1416년(태종 16)에 두개의 현(부령현과 보안현)을 합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명명하였을 때, 치소가 지금의 부안읍성(扶安邑城)으로 옮겼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성산 뒤 서해 바다 쪽에 석불산이 솟아 있다. 아침에 석불산을 바라보며 하서면 백련리와 장신리 들녘을 걸어 석불산에서 발원하는 악어산 기슭으로 내려왔다. 서해 바다 가까이서 바다를 내려보는 석불산은 높이는 낮지만 중요한 길목처럼 느껴졌다. 또한 석불산은 남쪽으로 내변산 최고봉인 의상봉을 마주하고 있어, 바다와 내륙을 수호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상소산 전망대에서 석불산 일대를 바라보니 아침에 판단한 것이 옳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전에 두포천(斗浦川), 목포천(木浦川)이라 불렸던 주상천(舟上川)은 부안군 내변산 북쪽 부안군 상서면과 행안면을 가로질러 흐르다 석불산을 돌아서 계화도(界火島)와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전망대에서 주상천 하류와 계화도 방조제가 가늠된다. 그리고 계화도에서 동진강으로 이어지는 방조제도 어림한다. "계화도는 육지와 가깝고 드넓은 갯벌이 있는 작은 섬이었으나, 1963년 시작된 동진강 하구의 대규모 간척 공사로 육지와 이어졌다. 계화도 간척 사업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부안군 계화도와 동쪽의 동진면을 연결하는 제1방조제, 계화도와 남쪽의 하서면을 연결하는 제2방조제를 축조하여 계화도와 육지 사이에 드넓은 농경지를 조성한 간척 사업이다."(디지털부안문화대전) 계화도 간척과 주상천 하류 간척, 그리고 이어지는 새만금 간척은 부안군을 풍요롭게 하였다고 하면 그른 판단일까? 간척 사업은 계화도 양지 포구를 비롯하여, 고단하지만 대대로 아름다운 삶을 가꿔온 갯벌과 백합과 어패류 등을 사라지게 하였지만, 현재의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판단하면 개발론의 밝은 면만 보게 되는 걸까? 환경과 인간 삶을 고려한 자연의 개척은 인간 문명에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15년 전 계화도에 들어간 기억이 솟아났다. 그때 계화산 자락에 있는 계양사(繼暘祠)를 탐방하였었다. 계양사(繼暘祠)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 선생 사후에 제자들이 간재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간재 선생은 조선 왕조 최후의 유학 종장(宗匠)으로, 조선 말기 전통 유학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학자이다. 15년 전 간재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어설프게 살펴본 일을 기억하지만 선생의 구체적인 학문사상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의 사상과 생애를 간략히 살펴본다. 그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오상(五常)의 성(性)을 구비한다는 주장)과 의리 정신을 숭상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송하고, 특히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하였고, 1910년(순종 4) 8월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섬으로 들어가 의리를 고수하였다. 1912년 부안군 계화도에 정착한 후 가묘(家廟)의 신주(神主)까지 계화도로 옮겨 계화도에서 300여 명의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에 힘쓰다 1922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한시 한 수를 음미하며 계화도 간재 정신을 기린다. "乾坤一草屋(건곤일초옥) 천지간에 한 채 초옥을 짓고 俯仰心悠哉(부앙심유재) 굽어보고 쳐다보며 마음 흐뭇하네. 窻外茂松樹(창외무송수) 창 밖에는 소나무 무성하고 溪雲閑往來(계운한왕래) 시냇가 구름은 한가이 왕래하네."<전우의 '송소(松巢소나무집'>
전망대에서 북쪽 부안군 동진면 일대와 멀리 동진강과 만경강 너머 김제시 김제평야 그리고 군산 지역을 어림한다. 서해랑길에서 앞으로 탐방할 저곳이 미지의 세계로 가슴을 부풀린다. 상소산 정상이 가로막고 있어 북동쪽이 가려있지만 상상의 지도를 펼친다. 저곳을 너머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했을 것이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에 의해 파멸한다. 이후 개화파가 득세하게 되자 수구세력이라고 불리는 위정척사파인 조선말기 성리학자들이 일어섰다. 개화파 박영효는 간재 전우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고 개화(開化)를 실현하기 위해 사형에 처할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구한말 역사가 이곳에서 펼쳐지고 상소산 자락의 부안향교가 조선말기 성리학의 종장(宗匠) 간재 전우 선생 향사(享祀) 제례를 계화도 계양사에서 봉행하고 있다. 서해랑길 부안 탐방의 지리와 역사의 흐름이 상소산 아래전망대에서 순식간에 전망되었다. 길손은 걸어온 탐방길에 아득해졌다. 이팝나무 하얗게 흐드러진 상소산 아래전망대를 내려서 서림공원에 조성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탐방은 중심에서 벗어나 있고 탐방 뒤의 성찬과 음주를 위하여 헐레벌떡 흘러간다.
2.탐방 과정
탐방 거리 : 전체 20.4km 중 8.1km
소요 시간 : 전체 5시간 5분 중 2시간 15분
주상천(舟上川) 둑방으로 올라서 주상천(舟上川)의 다리를 건넌다.
주상천 다리에서 주상천 상류 방향을 바라보았다. 위쪽의 마을은 상서면 고잔리(古棧里) 목포마을과 고잔마을일 것이다.
"주상천(舟上川)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서 발원하여 주산면, 행안면, 하서면을 지나 계화면 의복리를 흐르는 지방 하천이다. 주상천(舟上川)이라는 명칭은 부안군 보안면 월천리와 주산면 소산리·사산리 경계에 있는 주산(舟山)의 위쪽[上]을 흐르는 하천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두포천(斗浦川), 목포천(木浦川)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부안군 상서면과 보안면의 경계를 이루는 호벌치 계곡에서 시작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사산 저수지를 이루고 북쪽을 향한다. 호벌치에서 사산 저수지에 이르는 구간을 주상천 본류로 유입하는 소하천으로 보아 신흥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산 저수지로는 신흥천과 개암천, 감교천이 유입된다. 이후 주상천은 사산 저수지 옆 청등마을을 동쪽으로 흘러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가오마을로 내려오는 내동천을 합류하고 고잔리 목포마을을 지나 소포천이 합류한다. 이후 부안군 상서면 장동리를 거쳐 하서면 언독리 대교마을을 지나 신기천과 영은천이 합류하고 청호 저수지를 동쪽으로 휘감아 돌아 계화면 의복리 돈지 갑문에서 서해안 새만금으로 유입하고 있다. 신흥천과 함께 최상류 발원지 역할을 하는 지방 하천인 개암천은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開巖寺)와 우금암 사이에서 흐르는 냇물과 월정암 약수에서 흐르는 냇물이 개암사 일주문 앞에서 만나 개암 저수지를 만들고 북동쪽으로 흘러 사산 저수지로 유입하고 있다. 주상천은 호벌치 아래 최상류 부분과 일부 지류 하천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경지 정리가 된 넓은 평야지대를 흐르는 하천으로 직선 유로가 대부분이며 곡류가 심하지 않다. 발원지에서부터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흐르다가 청호 저수지 북쪽에서는 서쪽을 향해 흐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상천(舟上川)은 예전에 두포천(斗浦川), 목포천(木浦川)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주상천(舟上川)은 유로 연장 18.4㎞, 유역 면적 79.2㎢이다. 발원지인 호벌치에는 정유재란 호벌치 전적비(胡伐峙戰蹟碑)가 있으며 그 아래에 조그만 방죽이 있어 수원지 역할을 하고 있다. 호벌치 아래 유정 삼거리에서 국도 제23호선이 교차하며 유정 삼거리부터 사산 저수지의 일부는 부안군 주산면 사산리에 속하고 사산 저수지의 이름도 ‘사산리’에서 온 듯하다. 주상천은 청호 저수지 인근부터는 계화 간척지의 남쪽을 흘러 지나가고 있으며 새만금 방조제 건설 이전에는 계화 방조제 남쪽에서 서해로 유입하는 하천이었으나 새만금 방조제 건설 이후 돈지 갑문에서 배수된 이후로도 육지화된 새만금 간척지 사이에 조성된 수로를 따라 유로가 조금 더 늘어난 상황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서면 장동리에서 다리를 건너 행안면(幸安面) 대초리(大草里)로 넘어간다. 오른쪽 둑방에 대초양수장이 있으며, 왼쪽 건너편에 보이는 마을은 대초리(大草里) 야룡마을이다.
행안면(幸安面) 대초리(大草里) 들판의 시멘트 농로를 따라간다.
"행안면 대초리(大草里)는 원래 대추나무가 많아서 조촌(棗村) 혹은 대추멀이라고 불렀는데, 마을이 크고 발음 표기상 편하게 ‘대추’를 ‘대초’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남상면(南上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남상면의 장교리와 월현리, 송호리, 송서리, 제내리, 진동리, 묵교리의 각 일부와 남하면(南下面)의 구산리 일부를 병합하고 행안면 대초리로 개설하였다. 1963년 솔메마을이 송호마을과 송서마을로 분리되었으며, 송호마을 서쪽에 송서마을, 서쪽 들 가운데에 야룡마을이 형성되었다. 대초리의 동쪽은 행안면 진동리, 남쪽은 주산면 백초리, 서쪽은 상서면의 고잔리와 장동리, 북쪽은 행안면 신기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대초리·송호리·송서리·야룡리의 4개 행정리에 277명[남 148명/여 12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국도 제23호선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통과하며, 봉야로를 따라 야룡마을, 대초마을, 샛터마을이 자리하고, 부안로를 따라 송서마을이, 부안로와 순환남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송서마을과 송호마을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에 야룡마을이 있다. 중앙 맨 뒤에 보이는 산봉이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와 행안면 역리의 경계에 있는 114.9m 높이의 상소산(上蘇山)으로 부안의 주산이며 진산이라고 한다. 상소산 아래에 있는 부안군청 앞이 서해랑길 49코스 종점이다.
대초리 들판 밀밭이 펼쳐져 있는 시멘트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왼쪽 위는 행안면 신기리, 오른쪽은 진동리 지역인 것 같다. 정면 동쪽에 보이는 산은 부안읍 연곡리와 행안면 진동리의 경계에 있는 102.9m 시어산(侍御山)이다. 왕가산 또는 왕재산으로도 불리며, 조선시대의 행안산일 것이라 추정한다고 한다.
"부안군 행안면(幸安面)은 부안군의 중북부에 있는 면으로 부안읍 시가지와 가장 인접한 면이다. 행안면 사무소는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번영로 33[신기리 33-1번지]에 있다. 행안(幸安)은 『고려사(高麗史)』 권144, 「열전(列傳)」27 ‘나세(羅世)’ 조에 보이는 행안산(幸安山)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인다. 행안면 지역은 1895년(고종 32)까지 전주부의 부안군 서도면(西道面)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기리, 대초리, 진동리, 역리, 삼간리, 궁안리, 계화리의 7개 법정리로 개편하고 행안면으로 하였다. 1961년 7개 법정리, 33개 행정리로 개편하였다. 1976년 계화 출장소를 신설하면서 계화리가 분리되어 6개 리가 되었고, 1983년 계화 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승격하면서 궁안리가 분리, 편입되어 5개 법정리, 27개 행정리, 56반이 되었다. 역리에 있던 행안면 사무소를 신기리로 옮겼다.
동쪽은 부안읍, 남쪽은 주산면, 남서쪽은 상서면과 하서면, 북서쪽은 계화면, 북동쪽은 동진면과 접한다. 북동쪽에 고성산[68.3m]이 있고, 남동쪽에 행안산(幸安山)[104.3m]이 있으며 그 외 지역은 대부분 평야 지대이다. 1968년 계화 방조제 완공 이후 조성된 삼간 평야가 있다. 부안 읍내 남쪽에 자리한 행안산은 남산(南山), 왕가산(王駕山), 시어산(侍御山)이라고도 불리며, 동쪽은 석동산과 접한다. 과거 행안면의 대부분 지역은 바다여서 신기리 청교마을에서 진동리 지석마을 아래, 삼간리의 검암마을과 마동마을 아래까지 조수가 닿았다. 계화면 궁안리의 대벌마을에는 중선(重船)[어선]이 드나들었고, 새봉산 아래 계화도 일대 바다에서는 어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궁안마을과 삼간마을 일대 갯벌 지대 곳곳에서 소금을 구웠는데 간척은 19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초리 들판의 농로를 따라가다 위와 같은 곳에서 오른쪽 지역인 동남쪽을 조망하였다. 대초리 들판 너머 왼쪽 멀리는 정읍 지역일 것이며 오른쪽 산봉 뒤쪽 멀리는 곰소만일 것이라 추정한다.
대초리 들판 너머 중앙에 상서면 장동리 장서마을, 그 오른쪽에 장동마을, 맨 오른쪽 뒤에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이 조망된다. 맨 뒤는 우금산이며, 맨 왼쪽은 상서면 용서리, 중앙 뒤쪽은 상서면 통정리 지역, 오른쪽 앞은 대초리 야룡마을이다.
대초리 들판에 넓은 밀밭과 목초지가 펼쳐지고 대형 축사들이 있다. 축사 오른쪽 뒤에 부안의 진산 상소산이 조망된다.
대초리 들판 목초지와 대형 축사 앞을 거쳐간다. 정면에 시어산(왕가산, 남산), 중앙 오른쪽에 송서마을과 송호마을이 보인다.
길게 이어진 시멘트 농로를 따라오다가 오른쪽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밀밭 왼쪽 뒤의 '순환북로'로 나간다.
오른쪽에 대형 축사가 있다. 맨 뒤에 우금산과 쇠뿔바위봉, 왼쪽에 상서면 용서리 용서봉이 솟아 있다. 용서봉 아래에는 상서면 면소재지 지석마을이 자리한다. 왼쪽 앞은 상서면 고잔리 고잔마을과 목포마을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순환북로를 가로질러 정면의 농로를 따라간다.
앞쪽 스포츠파크사거리에서 순환북로는 국도 제23호선 부안로와 교차한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이 대초리 송서마을과 송호마을일 것이라 가늠한다. 동쪽으로 정읍군 백산면 지역으로 이어진다. 가로수로 조성된 이팝나무가 꽃들을 활짝 피워 흐드러진다.
북쪽으로 행안면 삼간리 지역으로 이어지고 더 북쪽에 부안군 계화면 지역이 있을 것이다. 오른쪽 농로로 진입한다. 가로수 이팝나무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농로에서 동쪽의 진동리 시어산을 조망한다. 앞쪽 마을은 대초리 송서마을과 송호마을일 것이며 밀밭의 호밀이 싱그럽다.
농로에서 봉야로로 나가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앞에 보이는 마을은 대초리 샛터마을이라고 가늠한다.
봉야로를 따라가다가 원일볼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주영목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봉야로 원일볼트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주영목장 방향으로 이어간다.
대초마을 입구에서 뒤돌아보았다. 오른쪽 맨 뒤에 내변산 지구의 우금산과 쇠뿔바위봉, 중앙에 상서면 용서리의 용서봉, 오른쪽 앞에 행안면 대초리 야룡마을이 가늠된다.
대초경로당이 중앙에 있고 그 앞에 대신경로당이 있다. 대신경로당이 쇠락하여 경로당을 새로 짓고 이름도 바꾼 것 같다. 서해랑길은 대초경로당 앞 골목길을 빠져 나간다.
행안면 대초리 대초마을의 대초길을 따라간다. 대초길 끝에서 행안중앙로와 만나 행안면 신기리로 넘어간다.
대초길을 따라가다 방금 거쳐온 대초마을 대초경로당을 뒤돌아보았다. 팽나무들이 그윽하다. 오른쪽 뒤에 대초리 야룡마을이 보이고 오른쪽 맨 뒤에 상서면 용서리 용서봉이 솟아 있다.
서해랑길은 행안중앙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신월경로당 앞으로 이어진다. 행안면 대초리에서 신기리로 넘어간다.
행안중앙로 북쪽에 신기리 안기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교회는 대초교회이다.
"부안군 행안면에 있는 신기리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 또는 신기(新基)라 불렀다고 한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남상면(南上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남상면의 월윤동, 묵교리, 제내리, 순제리, 신흥리, 대초리의 각 일부와 서도면(西道面)의 삼간리 일부, 하서면의 청계리 일부를 병합하고 행안면 신기리로 개설하였다. 대부분 지역이 평야지로 논농사를 주로 짓고, 남동쪽 일부에서 밭농사를 짓고 있다. 신기리의 동쪽은 부안읍 서외리, 남쪽은 행안면 진동리·대초리와 하서면 장동리, 서쪽은 하서면 언독리, 북쪽은 행안면 삼간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신기리(新月里)·청교리(晴橋里)·안기리(安基里)·계시리(鷄蒔里)의 4개 행정리에 360명[남 190명/여 17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행안중앙로를 따라 신기마을, 청교마을, 안기마을, 계시마을 등이 자리하며, 부안로와 연결되는 월륜길을 따라 월륜(月輪)마을이, 부안로를 따라 팔동마을이 있다. 신기리는 부안읍 시가지와 연결되어 있으며, 행안면 소재지로 행안면 사무소가 자리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신기신월길을 따라 행안면 진동리 제내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앞의 진동제내길을 따라 제내마을로 올라간다. 오른쪽은 농업회산법인 에스피(주)이며 맨 뒤에 성황산이 보인다.
신기리 신월마을 경로당 앞을 거쳐 진동리 진동제내길로 들어왔다.
오른쪽에 배합사료제조업체인 농업회사법인 에스피(주)이며, 맨 뒤에 부안의 주산이며 진산인 성황산이 솟아 있다.
행안면 진동리 제내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언덕을 올라간다.
"부안군 행안면에 진동리는 참으로 살기 좋은 마을이 되라는 뜻으로 진동(眞洞)이라 하였다.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남상면(南上面)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남상면의 남산리와 목하리, 제내리, 순제리, 송호리, 대초리, 신흥리, 월윤동, 월현리의 각 일부와 서도면(西道面)의 아제리 일부, 남하면(南下面)의 구산리 일부를 병합하고 행안면 진동리로 개설하였다. 북동쪽과 중앙에 시어산[104.3m]이 있고 남동쪽에는 승암산[모개산, 84.3m]의 일부가 자리하는데 이 주변 일대에서 밭농사를 짓고 대부분의 평탄지에서는 논농사를 짓는다. 행안산[104.3m]은 행안면을 상징하는 산으로 남산(南山)이라고도 하며, 왕가산(王鴐山) 또는 시어산(侍御山)이라고도 부른다. 진동리의 동쪽은 부안읍의 봉덕리와 연곡리, 남쪽은 부안읍 신흥리와 주산면 백석리, 서쪽은 행안면 대초리, 북쪽은 부안읍 서외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남산리·지석리·행산리·신목리·순제리·제내리의 6개 행정리에 583명[남 297명/여 28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부안로를 따라 북쪽에서부터 순제마을, 제내마을, 왕가산마을, 남산마을이 자리하고, 순환남로를 따라 괸돌마을, 신목마을, 행산마을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뒤에 농업회사법인 에스피(주) 건물이 보이며, 그 뒤쪽의 마을은 행안면 신기리 신월마을, 그 오른쪽은 안기마을이다.
서해랑길은 제내마을 뒤 언덕길을 따라서 행안초등학교 앞으로 이어진다.
진동제내길에서 북쪽으로 부안의 진산인 상소산(성황산)을 조망한다. 상소산 오른쪽 아래 부안군청 앞이 최종목적지이다.
서해랑길은 행안초등학교 앞 월륜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행안초교사거리로 이어간다.
"부안군 행안면 진동리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인 행안초등학교는 1941년 3월 25일 행안공립심상소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동년 4월 1일 행안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그해 4월 10일 개교하였다. 이후 학생 수가 611명으로 증가하여 8개 학급을 편성하였고, 1946년 4월 1일 고성국민학교가 분리되어 개교하였다. 1981년 3월 병설 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6년 3월 1일 행안초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07년 학생 수가 20명대로 감소하면서 존폐 위기를 겪었으나 교직원과 동문, 학부모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혁신 학교 운영이 제기되었다. 이후 2012년 전라북도교육청 제2기 혁신 학교로 지정되어 새로운 교육적 실험과 혁신을 거듭하면서 학생 수가 점점 증가하였다. 2020년 2월 7일 제74회 졸업식을 통해 8명이 졸업하여 총 4,40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20년 현재 총 6학급에 74명[남 44명, 여 30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1학급에 12명[남 6명, 여 6명], 2학년은 1학급에 12명[남 9명, 여 3명], 3학년은 1학급에 10명[남 5명, 여 5명], 4학년은 1학급에 12명[남 8명, 여 4명], 5학년은 1학급에 12명[남 8명, 여 4명], 6학년은 1학급에 16명[남 8명, 여 8명]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11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13명으로 총 26명이 근무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월륜길을 따라 국도 제23호선 부안로 '행안초교사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에 행안면 신기리의 부안 해양경찰서 건물이 있다.
행안초교사거리 동남쪽에 행안면 진동리 월륜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 노인요양원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좌우는 국도 제23호선 부안로, 서해랑길은 정면의 매창로를 따라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매창로를 따라 매창공원 입구까지 이어간다. 오른쪽에 왕가산 출입구가 있다.
행안면 진동리에서 부안읍 서외리로 넘어왔다. 뒤쪽에 보이는 마을은 부안읍 서외리 아제마을인 것 같다.
幾歲鳴風雨(기세명풍우) 몇 해 동안이나 비바람 소리를 내었던가/ 今來一短琴(금래일단금) 여지껏 지녀 온 작은 거문고/
莫彈孤鸞曲(막탄고난곡) 외로운 난새의 노랠랑 뜯지를 말자더니,/ 終作白頭吟(종작백두음) 끝내 백두음 가락을 스스로 지어서 타네. - 이매창(李梅窓)의 '彈琴(탄금, 거문고를 타면서)'
"매창 공원 자리는 원래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으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묘를 이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매창을 사랑하는 지역민들의 반대로 이매창의 묘와 부안 출신 명창 이중선의 묘만 남게 되었다. 1983년 8월 24일 이매창 묘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전라북도 부안군이 매창의 묘가 있는 곳에 시문학 공원을 조성하였다. 2011년 매창 공원을 확장하는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 조성 사업’ 기본 계획을 수립했고, 2013년 공원 조성 계획 수립을 완료하여 공사에 들어갔다. 이후 2019년 매창 사랑의 테마 공원, 매창 테마관과 부속 광장 등의 완공과 함께 공원 영역이 확대되며 부안의 중요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97년 부안군에서 이매창이 묻힌 공동묘지를 매입하여 묘소 일대를 매창 공원으로 조성하여 이매창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음력 4월 5일 이매창 묘에 모여 매창제(梅窓祭)를 지내고 있다. 부안군과 부안문화원에서는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인 이매창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17년 4월 이매창 영정을 제작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 공원은 유서깊은 문화예술의 고장인 부안을 상징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자는 군민의 오래 여망을 받들고 청소년에게 건전한 쉼터를 제공하고자 부지면적 5400평에 사업비 18억원을 투자하여 1999년 착공, 2001년 4월 완공하였습니다. 서로 아끼고깨끗이 이용하여 군민들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후세에 길이 물려줍시다. 2001년 4월 28일 부안군수 최규환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하신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열) 손길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요. -李梅窓의 '贈醉客(증취객, 취하신 님께)'
공동묘지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매창의 무덤 앞에서 나는 머리를 수그려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무덤 속의 매창의 백골은 이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움을 품고 죽어간 지 3백 60여년 후인 이 날에 60 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그대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나의 귀에는 그대의 아름다운 거문고 가락이 들려오는 것만 같고, 눈을 감고 명복을 비는 나의 망막에는 그대의 아리따운 자태가 아련히 떠올라 보이는 것만 같아서 애모의 정이 새삼스러이 솟아 오르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남는 법.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고 길어서 설어움 속에 맡겨 한 수씩 갈긴 그대의 넋풀이 시들이 오늘날에는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 정비석의 '매창묘를 찾아서'
"이매창(李梅窓)[1573~1610]은 조선 선조(宣祖) 때의 여류 시인이다. 이름은 계생(癸生, 桂生) 또는 향금(香今)이라 했으며, 자는 천향(天香)이고 호는 매창(梅窓)이다. 전라북도 부안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한테 글을 배워 시(詩)에 뛰어났으며, 가무에도 소질이 있었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탔다.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쌍벽을 이루는 조선의 명기(名妓)였고,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이귀(李貴) 등과 교우가 깊었다. 1610년(광해군 2)에 38세의 나이로 죽어서 매창뜸에 거문고와 함께 묻혔으며, 죽은 지 45년 만인 1655년(효종 6) 묘비를 세웠다. 1668년(현종 9)에는 개암사(開巖寺)에서 매창의 시 58편을 모아 『매창집(梅窓集)』을 펴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45년이 지난 1655년(효종 6) 묘소에 돌비석을 세웠으며, 시간이 흘러 돌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닳자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쓴 비석을 새로 세웠다. 이매창 묘는 1983년 8월 24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뿌릴 제 애가 끊겨라.
-劉希慶의 '매창을 생각하며'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여 인재 많은 우리 부안 희망찬새천년 세계화 시대를 맞아 우리 모두 대양의 푸른 꿈을 한껏 안고 웅비의 나래를 찬란히 펼쳐 나가리라.
扶士會는 중앙에 근무하는고위공직자 언론계 사업계 중진들로 1994년 6월 7일 향토를 사랑하는부안 출신 모임에서 발기됐습니다이 扶士의 탑은 우주의 별자리와 대자연의 생성 기운을 나타낸 작품으로 우리고장 사람들의 굳건한 기상이 온누리에 퍼져 나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모은 성금으로 건립되었습니다. 2001년 4월 28일 글 서기호 글씨 황방연 조각 김오성
미래의 동량 유치원 꼬마들이 선생님의 지도 아래 놀이를 즐기소 있다.
왼쪽의 부지는 무엇인지 궁금하다.오른쪽 개울은 향교천이라 이르는 것 같다.
매창공원 위쪽 넓은 공지의 용도가 궁금하다. 맞은편에 부안 서외주공아파트 단지와 그 앞에 부안문화원이 있다.
서해랑길은 앞쪽 예술회관삼거리에서 직진하여 부안예술회관 앞을 거쳐 왼쪽 뒤 서림공원 전망대로 올라간다.
"부안읍 서외리(西外里)는 중심 마을인 서외마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부안읍성의 서문 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서문밖, 섬바끄로도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동중리와 함께 부안현(扶安縣)의 치소였으며,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동도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동도면의 서상, 서하, 서외, 봉덕, 남정과 서도면의 아제, 역리, 교중, 교하, 남상면의 순제마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병합하고 부령면 서외리로 개설하였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부안읍 서외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서문밖[서외리], 서문안[서문내], 생깃골[향교촌], 아라지[아제리], 오리정, 짐대거리 등이 있었다. 북쪽에 상소산 줄기로 연결되는 서림 공원이 있고, 남쪽 교동천 주변에 교동천 인공 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예술회관 삼거리에서 왼쪽 예술회관길을 따라 부안예술회관 방향으로 올라간다.
"2001년 2월 10일 예술 회관을 준공하고, 10월 11일 ‘부안 예술 회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하였다. 2014년 8월 20일 부안 예술 회관 내에 부안 마실 영화관을 개관하였다. 부안 예술 회관은 대지 면적 1만 6372㎡에 연면적 6,778㎡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되어 있다. 지상 1층은 300명 수용의 다목적 강당과 전시실, 지상 2층은 499석의 공연장, 50명 수용의 회의실, 20명씩 사용 가능한 연습실 6실, 분장실 2실[남·여]로 되어 있다. 지상 3층은 조명실과 영사실, 지하 1층은 기계실과 전기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992년 부안 군민이 지역 사회 발전에 따른 문화 예술 활동 공간의 확보를 위해 ‘예술회관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93년 예술회관 건립을 위한 군민 모금을 시작했고, 1994년 예술회관 건립공사를 시작하였다. 1996년 예산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99년 문화관광부와 부안군이 예산을 확보하여 공사를 재개하였다. 2001년 2월 10일 예술회관을 준공하고, 10월 11일 ‘부안예술회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예술회관 앞을 거쳐 예술회관길을 따라 오른쪽에서 번영로로 나왔다.
"부안읍은 부안군의 행정, 교육, 교통, 금융 등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조선 시대에 북부의 부령현(扶寧縣)과 남부의 보안현(保安縣)을 통합하고 각각 한 자씩을 취하여 부안현(扶安縣)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부안읍 지역은 부안현의 치소가 있었던 곳[서외리, 동중리]이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령면으로 하였다. 1943년 10월 1일 부령면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부안읍으로 행정 구역명을 변경하였다. 부안읍은 부안군의 북동쪽에 있다. 동쪽은 백산면, 서쪽은 행안면, 남쪽은 주산면, 북쪽은 동진면과 접한다. 부안읍 시가지는 북서쪽에 자리하며, 동부는 평야, 남부는 구릉 지대의 야산 개발 지역이다. 서부 지역은 북부의 상소산에서부터 남쪽으로 왕가산, 승암산으로 연결되는 구릉 지대에 해당하고, 동부는 고부천으로 인해 형성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부안군에서는 인구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부안읍은 조선 제일의 여류 시인인 이매창(李梅窓)[1572~1619], 우리나라 전원시의 거목인 시인 신석정(辛夕汀)[1907~1974]과 시인 신근(辛槿)[1916~2003]이 태어난 곳이며, 창극 활동으로 서민의 애환을 노래한 이중선[?~1932], 설장고의 명인으로 1987년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7-1호 예능 보유자로 지정된 이동원(李東元)[1922~1990]이 활동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번영로를 따라 부안중삼거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부안중삼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부안중학교 앞에서 오른쪽 당산로를 따라간다.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공립 중학교. 1946년 11월 8일 부안공립초급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그해 12월 19일 부안중학교로 개교하였다. 1949년 5월 10일 4년제로 개편하여 부안농림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동년 9월 1일 다시 3년제로 개편하면서 ‘부안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51년 8월 31일 부안중학교로부터 부안농림고등학교[현 부안제일고등학교]가 분리 인가되었고, 1954년 4월 28일에는 부안여자중학교가 분리 인가되었다. 1976년 3월 1일 부안고등학교가 분리 인가되었다. 2008년 6월 12일 교사를 개축 준공하였다. 2020년 2월 7일 제74회 졸업식을 통해 86명이 졸업하여 총 1만 575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2020년 현재 총 8학급에 174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 중 1학년은 2학급에 54명, 2학년은 3학급에 65명, 3학년은 2학급에 55명이 재학하고 있으며, 특수 학급이 1학급 있다. 교직원은 교장 1명, 교감 1명, 교사 23명, 그리고 행정 담당 등 일반직 8명으로 총 33명이 근무하고 있다. 시청각실과 컴퓨터실, 보건실, 학생 식당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1. 교가(작사 신석정)변산이 황해로 뻗어 나가듯/ 배워서 새 나라에 바칠 우리들/ 빛내자 부안중학 우리들의 힘/ 조국은 부른다 젊은이 일꾼.// 배우고 닦아서 억세게 자라/ 이 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빛내자 부안중학 우리들의 힘/ 역사는 부른다 젊은이 일꾼.// 태양의 정열도 부럽지 않다/ 우리는 이 나라의 영원한 역군/ 빛내자 부안중학 우리들의 힘/ 민족은 찾는다 젊은이 일꾼.
2. 교목 : 호랑가시나무로 학업의 열정과 애향심을 상징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횡단보도를 건너 부안중학교 오른쪽 당산로를 따라간다.
당산로를 따라가다가 서외6구마을회관 갈림목에서 왼쪽으로 꺾어 소금샘길을 따라 올라간다. 산딸나무가 꽃을 피웠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소금샘길을 따라 서외6구마을회관으로 올라간다. 당산로 가로수 산딸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왼쪽에 서외6구마을회관이 있다. 정면 뒤쪽에 서림공원 전망대로 올라가야 한다.
오른쪽 뒤에 부안향교가 보인다. 소금샘길에서 버스 앞 서문길을 가로질러 향교2길로 진입하여 서림공원으로 올라간다.
소금샘길에서 서문길을 가로질러 향교2길로 올라왔다.
철쭉길을 따라 편백나무 숲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편백나무 숲을 통과하여 전망대로 오른다.
편백나무숲을 거쳐 오르면 상소산 아래전망대에 이른다.
상소산에는 정상에 윗전망대가 있고 이곳에 아래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 서해랑길 49코스 탐방길을 조망한다.
행안면 역리 일대와 멀리 동진강과 만경강 너머 김제평야를 어림한다. 바로 아래는 부안농공단지와 참프레 부안공장이다.
왼쪽에 행안면 역리 고성산, 오른쪽에 참프레 부안공장, 그 뒤에 부안경찰서, 그 앞쪽에 부안효요양병원이 있으며, 부안농공단지가 오른쪽 뒤에, 중앙 맨 뒤쪽은 부안군 계화면 일대일 것이라 가늠한다.
앞에 행안면 역리 고성산, 오른쪽에 부안효요양병원, 그 앞에 전기차충전소, 왼쪽 맨 뒤에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이 가늠된다.
"부안군 행안면 역리 고성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산성인 역리산성(驛里山城)은 해발 68.3m의 고성산(古城山) 정상부와 남쪽으로 두 갈래로 뻗어 내린 산줄기를 감싸고 있는 토성이다.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 부령현(扶寜縣)의 치소지(治所地)로 알려져 있다. 역리산성은 부안군과 김제시를 잇는 국도 제30호선을 따라 부안경찰서에 도착하면, 이곳으로부터 북서쪽 550여m 지점에 고성산이 있다. 부안경찰서 북서쪽에 인접한 서옥(西玉)마을로 들어가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외곽 길을 따라가면 고성산의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연못부터, 역리산성은 시작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뒤에 하서면 청호리 석불산, 중앙 맨 뒤에 내변산 산줄기, 그 앞에 상서면 용서봉과 명덕산, 중앙에 행안면 들녘, 그 뒤 주상천 뒤쪽은 상서면 들녘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내변산 산줄기 뒤 외변산 해안을 돌아 오른쪽 석불산 왼쪽으로 이어왔다.
시어산이 솟아 있고, 왼쪽 뒤 아파토 오른쪽에 매창공원, 중앙 왼쪽에 부안예술회관, 중앙 오른쪽 뒤에 행안초등학교, 맨 오른쪽에 행안면 대초리 대초마을과 대초리 들녘이 펼쳐져 있다. 시어산 뒤쪽에 부안 공설운동장과 스포츠타운이 있을 것이며 중앙 맨 뒤 내변산 산줄기 뒤에 곰소만 끝쪽 줄포와 그 오른쪽으로 변산반도 해안이 이어지고 있다고 어림한다.
"해발 102.9m 시어산(侍御山)은 부안읍 연곡리와 행안면 진동리의 경계에 있으며, 왕가산 또는 왕재산으로 불리는데, 과거 행안산으로 추정된다. 상소산과 시어산의 직선거리는 약 3㎞이며, 동쪽은 학당 고개[지방도 제707호선 통과]로 연곡리 구릉지와 연결되며, 남쪽은 승암산의 구릉지로 연결된다. 그리고 서쪽 지역은 주상천이 흐르는 평야 지역이며, 북쪽에는 고성산과 상소산이 위치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읍 중심시가지 풍경이다. 오른쪽은 서외리, 맨 오른쪽 뒤에 매창공원, 그 왼쪽은 봉덕리,그 왼쪽은 선은리라고 가늠한다.
서외리 부안향교가 아래에 있으며 왼쪽 뒤는 부안읍 중심가지 부안읍 동중리, 그 뒤쪽은 부안군 동진면 지역이고, 그 뒤 동진강과 전북 김제시를 어림한다.
"부안향교(扶安鄕校)는 부안군 부안읍 향교길 25[서외리 255번지]에 있다. 부안군청 앞에서 당산로를 따라 500m 정도 부안중학교 방향으로 내려가 우측 서문로로 들어서 400m 정도 올라가면, 향교골[校洞]의 뒷산 상소산 높은 언덕에 부안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건국 후 1414년(태종 14)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 전국에 향교가 설치되었으므로 부안향교도 조선 초에 설치된 것은 분명하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어 1600년(선조 33)에 부안향교 대성전(扶安鄕校大成殿)과 부안향교 명륜당(扶安鄕校明倫堂)을 중건하였다. 부안향교 만화루(扶安鄕校萬化樓)는 1607년(선조 40)에 신축하였고, 1749년(영조 25)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1848년(헌종 14)에 양사재(養士齋)를 신축하였다. 『홍재일기(鴻齋日記)』에 1881년(고종 18) 만화루를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고종 31)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건립하였다. 1999년에 전사각과 진덕재를 신축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상소산(上蘇山)은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와 행안면 역리의 경계에 있는 114.9m 높이의 산으로, 동쪽에는 망월산[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서쪽에는 고성산[68.3m, 부안군 행안면 역리]이 있다. 남쪽에는 왕가산[102.9m, 행안산 또는 왕재산]이 위치해 있다. 상소산에는 부안현의 고을 수호신을 모시던 성황당(城隍堂)이 있었기 때문에 성황산이라고도 불리며, 국가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상창산(上倉山)이라고도 부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성소산 아래전망대를 내려가면서 조망한 팔각정전망대를 뒤돌아보았다.
이팝나무 꽃이 흐드러지고 그 아래 부안향교가 있으며 뒤쪽에는 부안읍 동중리 시가지가 보인다.
여기 서면/ 태고의 숨결이 강심에 흐려/ 어머니, 당신의 젖줄인 양 정겹습니다
푸른 설화가 물 무늬로 천년을 누벼 오는데/ 기슭마다 아롱지는 옛님의 가락/ 달빛 안고 하얀 눈물로 가슴 벅차 옵니다
목숨이야 어디 놓인 들 끊으랴마는/ 긴 세월 부여안고 넋으로 밝혀온 말간 강심/ 어머니, 당신의 주름인 양 거룩하외다
길어 올리면/ 신화도 고여올 것 같은/ 잔물결마다 비늘 지는 옛 님의 고운 가락/ 구슬로 고여옵니다 (신근의 '강' 전문)
"백양촌(白楊村) 신근(辛槿)[1916~2003] 시인은 전라북도 부안 출생으로 일본에서 수학한 뒤 전주고등학교와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냈다. 시 「백합 앞에서」, 「연가」 등 20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신석정·김해강·이철균 시인과 함께 1950~1960년대 전라북도 지역 현대 문학을 개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31년 처음 시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해 1946년 『월간 예술지』에 시 「동방의 새아침」이 당선되면서 전라북도 문단의 1세대라 일컬어지는 신석정·서정주·이철균·김해강 시인 등과 전라북도 문단의 길을 닦았다. 1948년에는 그들과 더불어 봉선화동요회를 조직하여 동요와 동극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에 지병을 얻어 21년 동안 근무해 온 전주성심여고등학교에서 퇴직한 뒤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다. 성소산 서림 공원의 「강(江)」 시비는 신근 시인이 살아 있을 때 건립된 시비이기에 의미가 남다르기도 하지만, 이미 신근 시인의 문학적 역량과 족적에 존경을 담을 만하였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 옆에는 조선 시대 여류 시인인 이매창의 시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부안호 문학 동산은 ‘물, 자연, 사람, 문학의 공간’을 주제로 조경을 한 작은 동산이다. 이곳에는 부안을 대표하는 이매창·신석정·김민성 시인의 시비와 중요 무형 문화재 제41호인 정경태 시조 명인의 시조비가 놓여 있고, 여러 자생 식물과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산책로를 따라 부안의 풍광과 자연을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부안호 문학 동산에 다다르기 전 마주하게 되는 멋진 풍광도 그러하지만, 위쪽으로 10여 분 정도 올라가면 눈앞이 확 트인 부안 댐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步上白雲寺(보상백운사) 寺在白雲間(사재백운간) 僧莫白雲掃(승막백운소) 心與白雲閑(심여백운한)
백운사에 걸어 올라가니 절은 흰구름 사이에 있네 스님이여 흰구름을 쓸지말아요 마음 또한 흰구름과 함께 한가로운 것을.
梅窓은 1573년(선조6년)에 부안 현리(縣吏) 이탕종(李湯從)의 딸로 태어났다. 계생(桂生) 또는향금(香今)이라 하였고 梅窓은 그의 아호이다. 그는 1610년에 38세를 일기로 불우한 생애를 마쳤다. 거문고를 잘타는천재 시인으로 주옥 같은 詩를 이 고장에 담뿍 남겨놓고 지금도 역사의 물결을 넘어서 음악같이 내리는 梨花雨로 항상 扶安人의 가슴을 애틋하게 적셔주는 영원한 女仁像으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 마당을 만들면서 - 우리 고을이 낳은 세계적인 문인들의 고향을 사랑하는 정신이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마음을 추스리게 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부안을 사랑했고 어둠을 열고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과 들과 바다를 읊조렸던 문학세계를 통하여 향토문학을 더욱 꽃피우고 면면히 이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민선군정 출범 2주년을 맞이하여 이곳에 뜻깊은 문학마당을 만듭니다.
1997년 7월 1일 건립 부안군수 강수원, 글씨 전진희, 조각 김영택
매창시비가 있는 곳과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주변을 문학 마당이라 이르는 것 같다.
부성루와 윗전망대가 있는 상소산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목에 88올림픽 기념숲비와 상소산 설명안내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혜원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상소산 설명안내판의 글을 옮긴다.
상소산(上蘇山), 일명 성황산(城隍山)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 산에 올랐다 하여 상소산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하나 이는 명확하지 않으며 산 정상에 있는 성황사라는 절의 이름을 따서 성황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상소산은 해발 15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사방이 툭 트여 있어 멀리 변산과 서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또 산의 풍치가 빼어나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시와 풍류를 즐겼던 곳으로 지금도 서림공원이라 하여 부안 사람들의 훌륭한 휴식처 구실을 하고 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상소산의 동서남쪽에는 동문인 청원루, 서문인 개풍류, 남문이 취원루 등의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상소산 정상 갈림목에서 내려오면 혜원사가 있다. 혜원사 설명안내판의 글을 옮긴다.
혜원사(慧園寺)는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성황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다. 불기(佛紀) 2468년(서기 1924년)에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삼선암(三仙庵)에 계시던 지승(智勝) 스님이 부안읍 서외리에 인법당(人法堂)을 건립하고, 주석하면서 청일암(淸日庵)이라 명명하였다. 1954년 지승스님의 상좌인 헤경스님과 양 보현보살님이 성황산 북서쪽 성황사 위에 석조법당과 요사채를 지어 이주하였고, 비로소 가람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불가 2521년(ㅅ 1970년) 9월에 상황산 남쪽 중턱 서림공원 내 현 위치로 다시 이주하게 되었고, 불기 2521년(서기1999년) 2월 9일 사찰명을 혜원사로 바꾸고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24교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末寺)로 등록하였다.
석비군 끝에 서림정이 있으며 그 아래에 매창시비가 있다.
"서림(西林)공원은 부안읍 동중리와 서외리의 성황산(城隍山)[115m] 일대에 조성된 공원이다. 성황산은 부안의 주산(主山) 역할을 하며 부안읍의 북서쪽에서 시가지를 감싸주는 형국이다. 부안현(扶安縣)의 수호신을 모신 성황사(城隍寺)가 있었기 때문에 ‘성황산’이라 부르며, 삼국 통일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진을 치기 위해 오른 산이라는 뜻으로 ‘상소산(上蘇山)’이라고도 한다. 성황산의 남사면에는 현재 부안군청이 들어서 있고, 옛날에는 부안 관아가 있었다. ‘서림(西林)’은 부안 관아의 서쪽 숲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며, 부안 관아의 후원(後園)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1847년(헌종 13) 부안 현감 조연명(趙然明)[1847~1849]이 황폐한 산으로 방치된 관아 주변의 성황산을 보고, 동네 유지 33인으로 구성된 ‘33인수계(三十三人修契)’를 조직하여 봄가을로 직접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고 서림정(西林亭)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이필의(李弼儀)[1864~1869] 현감이 부임했을 때도 황폐해져 있어 이전의 ‘계’를 부활하여 다시 숲을 가꾸게 되면서 오늘의 서림 공원이 되었다고 한다. 생태·환경적 가치와 함께 관이 주도해 조성한 공원 숲이라는 임업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6년에 국가 산림 문화 자산으로 지정되었다. 서림공원 내에는 서림의 숲과 정자를 조성한 부안 현감 조연명과 이필의의 공적을 기린 비석(碑石), '임정 유애비(林亭遺愛碑)'가 있다. 성황산 기슭에는 성황사, 혜원사(慧圓寺) 등의 사찰이 있다. 성황사는 1314년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창건된 고찰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상소산도 복사본 뒤 바위에 ‘혜천(惠泉)’이라고 새긴 암각서가 있다. 이매창(李梅窓)이 물을 마셨던 우물이라고 한다. "상소산(성황산)은 1966년에 서림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상소산도 좌측에는 서림정, 중앙에 혜천, 우측 상단에 성황사, 우측 하단에 관, 산 너머에는 서해 바다가 그려져 있다.<출처 : 1875년(乙亥, 고종12) 西林亭續帖(부안 노휴재 소장)>"
매창 시비(梅窓詩碑) 뒤 왼쪽에 ‘금대(琴垈)’라고 새긴 암각서가 있다. 부안의 여류 시인이자 관기였던 이매창(李梅窓)이 올라 앉아 거문고를 타던 바위라고 한다.
부안군 부안읍 서림공원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은행나무는 부안군에서 가장 고령의 은행나무라고 한다.
위쪽 뾰족지붕 건물 성황경로당 뒤 슬래브집 오른쪽으로 신석정문학관으로 질러가는 숲길이 있다.
서해랑길은 부안중앙교회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부안군청 뒤에 서해랑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내려간다.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東中里)는 중심 마을인 동중마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부안읍성(扶安邑城)의 동문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고 하여 동문안이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부안현(扶安縣)의 중심지였으며, 1914년 이전에는 부안군 동도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부령면 동중리로 개설하였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부안읍 동중리가 되었다. 자연 마을로 동문안[동중리], 구영물[웃거테, 아랫거태], 웃장터[상장기], 아랫장터[하장기], 서답바우[숙후리, 휴석리], 남바끄[남문외], 매살메[매후리], 구장터[구장기], 성기태, 숙후리 등이 있었다. 북쪽은 상소산[114.9m]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쪽의 구영마을은 구릉 지대이고 서쪽과 남쪽은 평탄한 지역이다. 마을 안에 매산이 있다. 동중리의 동쪽과 서쪽, 남쪽은 각각 부안읍의 선은리·서외리·봉덕리, 북쪽은 행안면 역리와 접한다. 2020년 12월 31일 현재 동중1리·동중2리·동중3리·동중4리·동중5리·동중6리·성황리·구영리·부풍리·상원리의 10개 행정리에 997가구, 1,733명[남 879명/여 85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문화재로 부안 동문안 당산[국가 민속 문화재 제19호], 남문안 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이 있고 상소산에 성황사, 혜원사 등이 자리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군청 뒤 식재(植裁) 작업 때문에 서해랑길 코스 안내도가 제 자리에서 철거되어 있다.
거리 19.2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보통으로 적혀 있다.
부안군청 앞 가로등 기둥에 서해랑길 50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부안군 청사는 조선 시대 관아 터로 시작해 1969년 구 청사가 지어졌다. 그러나 30년 가까이 흐르면서 노후하게 되었고, 1998년부터 신청사 건립 계획이 추진되었지만 아이엠에프(IMF) 외환 위기로 지연되었다. 이후 2007년 건립 공사를 시작해 민선 5기 김호기 군수 때인 2010년 12월 3일에 신청사를 완공하면서 부안군청 및 부안군 의회 개청식이 이루어졌다. 총사업비는 군비 166억 원과 기채 166억 원 등 332억 원이 투입되었다. 신청사는 대지 1만 4472㎡, 연면적 1만 9784㎡의 지하 2층 지상 5층 규모이다. 청사 앞 새빛 광장에는 관내 8개 종중으로부터 소나무 31본을 헌수 받아 ‘솔바람 숲’을 조성해 놓고 열린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신청사인 현재의 부안군청이 있는 곳은 과거 객사(客舍)가 있었던 곳으로 ‘부풍관(扶風館)’이라고 불렀고 현판도 남아있다. ‘부풍(扶風)’은 부안(扶安)의 옛 별호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