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受(세 가지 受)에 대하여
‘전문가 분들’에게 갑자기 “경전에 설해지는 三受(세 가지 受)의 순서가
어떻게 설해진다고 알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면 <당황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樂受(sukha vedanā), 苦受(dukkha vedanā), 非苦非樂受(adukkhamasukha vedanā)의 순서로 설해지는데요, 절대로 이 <순서>가 뒤 바뀌는 경우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고→락→비고비락>의 순서로 외우시는 분들이 많으신데요, 그렇게 외우시면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십니다. ‘혼란과 몰이해’라는 대가입니다.
①<탐→진→치>의 ‘순서’와 三受(세 가지 受)의 ‘순서’는 같이 가기 때문입니다.
貪 ; 樂受(sukha vedanā)에서 ‘貪의 잠재(rāgānusayo)’
瞋 ; 苦受(dukkha vedanā)에서 ‘有對의 잠재(paṭighānusayo)’
癡 ; 非苦非樂受에서 ‘無明의 잠재(avijjānusayo)’[MN. vol.3. p.285]입니다.
②<계→정→혜>의 ‘순서’
③<무상→苦→무아>의 ‘순서’도
三受(세 가지 受)의 ‘순서’와 관련이 깊습니다.[☜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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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이란 ....... 어떤 의미에서 <잠재(anusaya)를 뿌리 뽑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三昧에서의 ‘앎(智)’>이 강조되는 것이고,
선가에서 <寤寐一如>가 이야기 되는 것입니다.
<불안, 공포, 우울, 불면, 공황, 우비고뇌와 절망> 등등은
놀랍게도 ‘안으로(아자땅)’라는 영역에 위치합니다.
<탐진치>와 같은 곳에 위치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잠재(anusaya)의 영역>에 위치한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안으로(아자땅)’라고 부르는 영역은 <理性의 영역>이 아닙니다.
<올바른 三昧의 영역>입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三受(세 가지 受)에 대하여
공부하고, ‘선사상’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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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受(세 가지 受)와 관련하여, <아자땅(안으로) ca 바히다(밖으로) ca>가 언급됩니다.
Sukhaṃ vā yadi vā dukkahaṃ, adukkhamasukhaṃ saha. Ajjhattañca bahiddhā ca. Yaṃ kiñci atthi veditaṃ.[SN. vol.4. p.205 ; Sutta-Nipāta 738번 게송]
<樂이나 또는 苦>인 것, <비고비락>인 것. <안으로와 밖으로>. 그 어떠한 것이든 감수되는 것.
‘vedita(느껴진, 감수된, 느껴진바, =vedayita, vedeti의 pp.)’란 <모든 受>를 통칭할 때의 표현인데요, 위 경문에서 樂과 苦는 vā(혹은, or)로 연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으로(아자땅)와 밖으로(바히다)는 ca(~과, 그리고, and)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동시적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동시성은 <안으로와 밖으로>가 동시적으로 ‘vedita’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漢譯 阿含에 의하면 <‘안으로(아자땅으로 추측)와 밖으로(바히다로 추측)’에 대한 무지>가 <無明>이라고 합니다.[☜원문은 ‘內와 外’임]
그런데 <‘아위자’의 주장>에 의하면 ‘안으로(아자땅)’는 <심의식과 法(dhamma)이 이루고 있는 영역>이고 ‘밖으로(바히다)’는 <심의식과 명색들이 이루고 있는 영역>이라고 주장하거든요,
그리고 <‘안으로(아자땅)’도 法(dhamma)에 대한 Sati>와 <‘밖으로(바히다)’도 法(dhamma)에 대한 Sati>라는 경문은 “당근! 당연하지!”라고 우기는 것입니다. ㅋ.
얼핏 들으면 앞뒤의 말이 맞지 않는 것인데도, <워낙 ‘개쌔끼로 소문난 놈’>이어서 대부분의 분들이 <입만 ‘삐쭉’ 거리고> 그냥 넘어가시는데요, ‘아위자’ 같으면 “야! 이 씨발 놈아! 앞뒤가 맞는 소리를 지껄여!”라고 하거나, “아이고~~오~ 형님! 이해가 잘 안되네요. 한 번 봐주시는 셈치고 자세히 좀 <아구통 놀려주소>! 이거 원 <무식한 놈>은 알아들을 수가 없네요!”라고 빈정거리거나 합니다.
어떤 분이 ‘아위자’에게 그렇게 <빈정거리다>가,[☜ㅋㅋ. 그렇게 <빈정거리는 분>에게는 앞뒤의 말을 잘라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三昧에 들어서의 경우입니다.”라고 <너 한 번 당해보아라>는 식의 설명을 들으시고는 <알아 들으시더라구요>! 미칩니다. 미쳐요. 이렇게 되면 ‘아위자’가 사람을 몰라 본 죄를 <사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되물어 보았는데’ 정확하게 <三昧에 들어서의 法(dhamma)을 그대로 ‘밖으로’에 적용하였다는 말 아니요>라고 하시더라구요. 처음에는 분명히 <이상하게>여기시어 빈정대셨던 것인데, <알아들으신 후>에는 “당신 말은 알아들었는데, 생각 좀 해 보아야겠소.”였습니다.
그래서 <짠~~~~~~~~~!> ... 남의 말을 알아들으신 공덕으로
이와 같은 <경문>이 제시된다는 ‘본보기’로 ..... <짠~~~~~~~~~!>
Sutta-Nipāta 1111번 게송은 受와 識을 관련지어 설하십니다.
ajjhattañ ca bahiddhā ca, vedanaṃ nābhinandato, evaṃ satassa cara to viññāṇaṃ
uparujjhatī ti.
<안으로와 밖으로>, 受에 환희하지 않는 자, 이와 같이 sati를 가지고 유행하면 識은 사라지는 것.
이 경문을 들으시더니, “잠깐, 잠깐. 아까 당신이 뭐라 했더라~~”하시기에.
<‘안으로(아자땅)’도 法(dhamma)에 대한 Sati>와 <‘밖으로(바히다)’도 法(dhamma)에 대한 Sati>라는 경문 말씀입니까? 했더니 ... “그 말 말고 그 ~~” ㅎㅎㅎㅎㅎ
‘안으로(아자땅)’는 <심의識과 法(dhamma)이 이루고 있는 영역>이고 ‘밖으로(바히다)’는 <심의識과 명색들이 이루고 있는 영역>이라는 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하였더니, ㅎ.
혼자서 ..... “그건 그렇지 <수상행식>이 名이기는 하지, <三昧에 들어서의 法(dhamma)을 그대로 ‘밖으로’[=명색, =오온]에 적용하였다>고라 ...... 허허허 ..... ”하시더니 ...... 한동안 ...ㅋㅋ.
서로 ‘편하게’ 커피를 마시며, “受隨觀에서 受에 대한 Sati의 확립이나, 다른 경우들이 <다 같은 경우들>이라고 생각은 해 보았지만, 막상 확인하고 나니 놀랍네요.” “부처님께서 <여기에서 이 말하시고 저기에서 저 말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보아야 하지요.” “<신수심법에 대한 Sati의 확립>이 ‘반야’로 이어지는 맥락이 그렇군요.”라는 등등의 대화를 하였습니다.
<에까야노 막고>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고, <안으로와 밖으로>가 <法(dhamma)>을 통하여 그렇게 <하나의 길>로 이어지기에 <위빠사나 막가가 ‘法(dhamma)’에 대한 이야기> ......... 등등의 이야기 .........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커피 맛이 어떠했겠습니까? ㅋ.
[3]
Kathaṃ vedanāya upaṭṭhānaṃ viditaṃ hoti? Aniccato manasikaroto khayatupaṭṭhānaṃ viditaṃ hoti, dukkhato manasikaroto bhayatupaṭṭhānaṃ viditaṃ hoti, anattato manasikaroto suññatupaṭṭhānaṃ viditaṃ hoti. Evaṃ vedanāya(․saññāya․vitakkānaṃ) upaṭṭhānaṃ viditaṃ hoti.[Paṭisambhidāmagga vol.1. pp.178~179]
‘受의 드러남(나타남)이 감지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無常으로 作意함으로서 사라짐의 드러남이 감지되고, 苦로 作意함으로서 두려움의 드러남이 감지되고, 無我로 作意함으로서 空의 드러남이 감지된다. 이와 같이 受(, 想, vitakka)의 드러남이 감지된다.
<빠띠삼비다막가>에는 위와 같은 말씀이 적혀 있거든요. .......... 우리가 ‘대상(攀緣)’을 <苦로 作意함으로서> 얻는 이익은 엄청난 것입니다. <불안, 공포, 우울, 불면, 공황, 우비고뇌와 절망> 등등의 ‘두려움의 드러남이 감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고집멸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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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위자’는 <운도 지독하게 없고, 머리도 나쁜 놈>입니다. 지금은 <악에 바쳐서> 후회하고 있지만, <운도 있으시고, 머리도 좋으신 분들>에게 ‘제 후회’를 소개해 드립니다. 三受(세 가지 受) ‘하나 만’ 들어도 <전체 불교교리>가 다 들리는 ‘체계’로 되어 있는 것이 <불교교리>입니다. <아니면 말고 입니다. ‘아위자’는 여러분에게 빚진 것 없고요. 기대하는 것>도 없거든요.
첫댓글 견증합니다 수행속에서 확인! 생활속에서도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