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집 이야기(6)
눈코 뜰 새 없는 시간 속으로/노인정
우리 잡 앞 20m 도로에서 인도로 올라와 경사면으로 내려오면 그곳이 차고였다. 집 안쪽에서 보면 보일러실 옆이었다. 집집마다 차를 갖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이 차고 자리에 약국을 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매입을 결정하게 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모래네 집에도 작은 가게가 있었다. 매번 점포 딸린 집을 찾았던 것을 보면 약국을 개업해야겠다는 미련을 내가 버리지 못했었던 것 같다. 나는 적십자 병원 약국에서 약사로서의 호된 경험이 있었고, 중소기업은행 의무실에서도 근무해 봤기 때문에 약국 경영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장은 아니더라도 기회를 봐서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무료하셨던 아버님은 밖에 나가서 하나 둘 친구를 사귀시며, 그분들과 관악산까지 걸어가시기도 하고, 보라매공원으로 놀러가기도 하셨다. 어울리시는 친구 분이 많아지자 어느 날 차고를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달리 쓸 일도 없는 빈 공간이니 그러시라고 말씀 드렸다.
어르신들은 다음 날부터 주섬주섬 의자며 탁자며 필요한 집기를 들여다 놓기 시작하셨다. 나중에 우리 집에 차가 생기면 집기들을 구석으로 밀어 놓겠다는 단서를 달아놓으셨다. 겨울에는 연탄난로까지 설치했다. 연탄불은 매일 아침 우리집 보일러에서 옮겨다 놓았다. 나도 옮겨 놓고 그분들이 하기도 했다. 어르신들의 숫자는 불어났고 모여 앉아 담소도 나누고, 화투도 치고 소주잔도 기울이셨다.
문제는 내가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었다. 매일은 아니어도 틈틈이 아버님의 요청으로 술안주를 장만해 내려 보내야 했다. 제사 때는 음식을 더 많이 장만해서 다음날 남은 음식을 다시 지지고 덥혀서 갖다 드렸다. 양 명절과 아버님 생신에는 노인정 어르신들이 돈을 걷어 닭 두 마리를 선물로 갖고 오셨다. 닭 두 마리를 받은 날은 다음 날 점심 때 집으로 올라오시게 해서 한상 차려 대접을 해야 했다. 우리 집 행사는 노인정 분들까지 대접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것이었다.
‘동산 노인정’이라고 명명했던 이 사설 경노당은 90년 대 들어 지자체에서 만든 정식 경노당이 생기면서 문을 닫았다.
이런 와중에서 나는 내가 약국을 열겠다는 생각도, 내가 약사였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약사 면허증을 어느 구석에 처박아 놓은 지도 몰랐고, 1년에 한번 해야 하는 면허 갱신도 하지 않은 채 살았다. 약대 동창회에도 거의 나가지 않다가 졸업 후 3,40년이 지난 어느 날 동창회장로부터 우편물이 와서 처음으로 동기 모임에 나가보았다. 그 날의 모임 내용은 1박2일의 여행 일정에 대한 보고와 신청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회비가 무료였는데 여행비용을 개업한 친구들의 찬조금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개업을 했으면 남편에게 받는 생활비를 쪼개 쓰느라 궁상을 떨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께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도움을 청하는 형제들에게 기분 좋게 보태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지 않아도 주변에서는 나를 향해 왜 그렇게 사느냐고 나무라듯 말들을 하곤 했다. 아까운 면허장 썩히지 말고 시간제 관리약사라도 나가라도 했다. 면허증을 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저런 생각이 몰려들어오자 새삼 소극적이고 주변머리 없는 나 자신을 나무랬다. 어려서 나는 부모형제로부터 바보, 맹추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 가지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겠느냐는 걱정 어린 표현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약국을 경영하며 살았더라면 경제적 여유는 있었겠지만 좁은 약국 안에 갇혀 생활의 자유가 더욱 없었을 것이고, 8,90년 대에 활활 불타오르던 내 신앙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 시절 하느님을 향했던 뜨거운 사랑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니 내가 한 선택에 후회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