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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1940년, 한 모더니스트의 서정 추일서정 김광균 |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시市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들어내인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여 간다.
출처 <와사등: 김광균 시전집》 (1977) 첫 발표 <인문평론>(1940.7)
김광균 金光均 (1914~1993)
대상을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 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시인으로, 1930년대 모더니즘 시문학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감각적인 시어로 도시와 현대문명을 형상화하는 한편, 비애와 소외의식을 그 기저에 두었다. 한국전쟁 무렵에는 사업가로 변모하였다. 주요 시집으로 《와사등》 (1939), 《기항지》(1947) 등이 있다.
| 현대의 서정
이 작품의 제목은 ‘가을날의 서정(抒情)’이다. 시에서 서정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통용되어 왔다. 우선 그 한자를 살펴보면 '서정'은 감정, 정서 등을 풀어놓는다는 뜻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시는 독백의 형식을 띠기 때문에 시에 표현된 정서는 시를 말하는 주체(자아)의 주관적인 내면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시에는 말하는 주체뿐 아니라 시적 대상도 있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서정적’이라는 것은 이 대상(세계)과 주체가 서로 조응하거나 합치되는 양상을 가리킨다. 예컨대 시적 대상인 ‘모란꽃’이 떨어지면 주체인 ‘나’의 세월도 모두 가 버리고 슬픔에 잠긴다는 식이다. 시론(詩論)에서 서정시를 설명할 때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간격이 없음을 거론하는 것(Staiger, 1946/1978: 96)도 이와 관련된다.
그러나 현대시에는 이러한 설명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사회는 도시화와 산업화, 공동체 붕괴를 겪었고, 그로 인해 개인의 소외감과 불안도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체와 세계가 조응. 합치되어 있다고 믿는 것은 다분히 순진한 발상이다. 세계는 더 이상 개인의 주관적인 내면과 동일시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한 상태가 되어 버렸고, 개인의 희망이나 신념과는 무관하게 굴러가기도 한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의 관계는 오히려 대립·갈등의 관계에 가까우며, 이를 인위적으로 극복하고 합일을 도모하는 것이 현대시의 서정이라고 보기도 한다(김준오, 2002: 39).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당시 우리 현대시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많은 문학사조들이 섭렵되고 있었다. ‘서정’에 있어 위와 같은 생각 정도는 문단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모더니스트 그룹에서 활동했던 김광균은 이 문제에 예민했다. 모더니즘 문학은 철저히 현대적인 사유와 정서를 담아내고자 하였는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주체와 세계가 쉽사리 합일된다고 믿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너무 순진하다. 곧 살펴보겠지만, 김광균의 시에서 빈번하게 형상화되는 도시 풍경에 시적 화자가 흡수·동화되지 못하고 비애나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전통적인 서정 관념에 입각한 시는 자연물을 시적 대상으로 삼아 주체의 내면을 투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 고전시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이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김광균이 보기에 현대의 시는 그 대상부터가 과거와 다르다. 옛날에야 종달새의 노래에 기대어 한가롭게 소박한 정서를 읊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 노래가 현대의 온갖 기계 소리와 소음에 묻혀 버렸고, 따라서 시인은 차라리 포화에 날아간 폴란드 도시로부터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김광균, 1940: 73-75).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현대적인 세계에 부합하는 사상과 정서를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모더니스트 김광균의 생각이었다. 이때 현대적인 언어란 그에게 있어서는 <외인촌>(1935)에서와 같은 이미지 중심의 언어이다. 이 점에서도 주관적 내면의 토로를 중시하는 과거의 서정시와는 다른 셈이다. 이러한 현대적인 서정, 혹은 모더니즘 식의 서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추일서정>에서 살펴보자.
ㅣ 스산한 현대 문명의 풍경,
ㅣ그리고 그와 융화될 수 없는 주체
좋은 시가 으레 그러하듯 이 시도 첫 행부터 모종의 충격을 몰고 온다. ‘낙엽’을 다른 것에 빗대는 비유는 시에서 흔하다. 그런데 빗대는 대상이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가 되는 순간 이 비유는 상당히 낯설어진다. 전통적인 서정시였다면 아마도 ‘낙엽’은 자아의 내면과 관련되는 무언가에 빗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그러면서도 어떤 역사적 함의를 품고 있는 사물이 등장했다. 비유의 양식부터가 낯선 것이다. 앞선 논의의 맥락에서 보면 이 낯섦은 현대적인 것을 시적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시 정신과 관련된다. ‘낙엽’이라는 자연물을 대하더라도 주관적인 내면을 소박하게 읊조리기보다는, 이내 그것을 현대 문명의 중대사를 담은 사물로 치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은 현대의 어떤 역사와 관련이 있을까? ‘낙엽’을 보고 연상되는 내용을 담은 3행까지가 하나의 의미 단위로 묶인다. ‘폴란드’, ‘도룬시’와 같은 구체적인 지명을 연달아 거론하고 있으니 그 지역에 대한 배경지식을 불러와도 좋겠다. 이 작품이 발표되기 직전 해인 1939년 가을,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는 항전하였으나 약 한 달 만에 독일과 소련에 점령되었고, 이후 망명정부가 국외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기약 없는 망명을 이어 가던 정부였으니 그곳에서 발행된 화폐가 얼마나 무가치할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도룬’은 폴란드 중부의 도시 이름인 ‘토룬(Toruń)’을 뜻하므로 같은 전쟁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이 구절들이 단순히 패전국에 대해 느껴지는 상실감이나 애잔함만을 상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6년간 세계 각지는 말 그대로 “포화에 이즈러”지게 된다. 당시로서는 미래의 역사였겠지만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의 타개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가속화된 일부 국가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는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여 가고 있었다. 이 작품이 나온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한 국제 정세가 신문과 잡지를 통해 연일 보도되었고, 심지어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은 그러한 맥락의 전쟁을 이미 1937년부터 중국에서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문인들의 눈에도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일 수 없었다.
유럽의 포화를 연상하던 화자는 다음 행에서 돌연 눈앞의 ‘길’, ‘급행차’로 시선을 돌린다. 이 갑작스런 장면 변화의 의미가 궁금한데, 이는 작품을 더 읽어야 해명될 것 같다. 먼저, 난데없이 등장한 ‘길’은 ‘구겨진 넥타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시원스럽게 뻗은 것도 아니고, 윤동주의 <새로운 길>(1938)에서처럼 희망이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길’이란 출발지와 목적지를 잇는 명확한 이동 경로여야 할 텐데, 그것이 넥타이가 구겨지듯 ‘풀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햇빛 아래로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길 위에 선 존재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이어서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급행열차가 등장한다. 만약 앞뒤 문맥이 없었더라면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에서 앙증맞음을, “새로 두시”에서 활력과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시행들이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어지는 시행들도 음산한 느낌을 준다. 이 이질성은 계획된 것이다. 마치 검은색 사각형들 사이에 있는 흰색 선들의 교차점이 다른 색으로 보이는 헤르만 격자(Hermann Grid) 착시처럼, 이 급행열차 장면은 앞뒤의 시행들 때문에 새로운 인상을 획득한다. 즉, ‘길’이 사라져 버리고 ‘공장’과 ‘철책’이 황량함을 빚어내는 풍경에서 홀로 연기를 뿜으며 들판을 질주하는 급행열차는 곱게 보이기 어렵다. 급행열차란 고도로 발달한 근대 문명의 산물이라는 점 정도를 일단 상기해도 좋겠다.
다음에는 ‘포플라나무’, ‘공장’, ‘철책’, ‘구름’이 차례로 보인다. ‘공장’은 각종 공산품들을 생산해 내는 곳인데, 그 지붕이 굳이 야수성을 머금은 ‘이빨’이라는 용어로 서늘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또한 공간을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금속성 사물인 ‘철책’은 일부가 망가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들이 문명의 스산한 풍경이라면 ‘포플라나무’와 ‘구름’은 모처럼 자연물을 초점화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아름다운 자연과 다르다. ‘포플라나무’는 풍성한 잎이라든가 우뚝 선 자태가 아니라, ‘근골(筋骨)’이라는 의학 언어로 싸늘하게 그려져 있다. ‘구름’은 좀 더 노골적으로 셀로판(cellophane)지라는 인공물로 묘사되어 자연조차 조잡한 문명으로 치환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까지의 장면들을 정리해 보자. 일견 뚜렷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하지만 몽타주(montage) 기법의 영화를 볼 때 그러하듯, 시의 이질적인 장면들 사이에도 유사성을 부여할 수 있다. 더구나 김광균은 앞서 본 것처럼 철저히 기획된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시인이 아니었던가. 먼저 4행 이후의 장면들에서 어떤 유사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공장의 지붕”, “꾸부러진 철책”,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 등이 황량하고 스산한 문명의 풍경을 함께 이루고 있다는 점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또한 이 때문에 문명의 산물인 ‘급행차’도 긍정적인 느낌을 주지 못한다. 이 급행열차는 바로 앞의 해체되고 소멸되는 ‘길’과 연관 지어 읽을 수 있겠다. 그 ‘길’ 위에 설 존재가 현대의 인간이라고 본다면, 그의 허무나 방황과는 관계없이 질주하는 급행열차의 냉혈(血)을 떠올릴 수 있다. 혹은 ‘길’ 위에 놓일 것이 문명의 각종 교통수단이라고 본다면, 급행열차의 선로 역시 ‘길’의 일종으로서 그것과 같은 운명을 맞고 말 것임을 읽을 수 있다. 결국 4행 이후의 풍경은 이 세계의 많은 부분이 인공적인 문명의 산물로 인식되고, 또 그것이 황량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주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행들과 3행 이전의 폴란드 이미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서구 주도의 현대문명을 하나의 유력한 답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도입부의 폴란드 침공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성격을 띠지 않는다. 서구 산업혁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전 지구를 뒤덮은 자본주의 문명의 성장은 원료 및 노동력 공급처와 해외시장을 확보하려는 제국주의 세력의 다툼으로 귀결되었다. 19세기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세계대공황 역시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서 발생하는 위기 현상이다. 결국 무력을 앞세운 폴란드 침공은 화려한 현대문명의 한 이면이라는 점에서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는 4행 이하의 풍경과 연결 고리를 가지는 셈이다. 김광균이 말한 시의 현대적인 소재와 자극이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킨다.
이제 “자욱한 풀버레 소리”로 시작하는 종결부로 가 보자. <외인>과는 달리 이번에는 시적 화자가 풍경 속으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이 화자, 즉 주체는 풍경의 세계에 좀처럼 융화되지 못한다. 이는 이미 앞에서 예견 가능했다. 누가 이 폭력적이고 스산한 문명의 풍경과 하나가 되고 싶겠는가. 화자가 조응. 합치라는 전통적인 서정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자의 곁에는 앞서의 풍경과는 결이 다른 ‘풀버레’ 소리가 자욱하지만 이미 전 세계를 덮은 현대문명 앞에서 그런 것들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화자는 그런 소리를 “발길로 차”고 '돌팔매'나 던져 볼 뿐이다. 분명하게 “기울어진 풍경”에 대한 반발, 그러나 뚜렷한 반향은 없다. 화자와 그 풍경 사이에는 엄연한 ‘장막’이 가로놓여 있고 화자의 돌은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 채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여” 갈 따름이다. 결국 이 시대에 합일의 서정이란 끝내 불가능하다는 느낌만이 이 모더니스트의 서정으로 덩그러니 남은 셈이다.
ㅣ 1940년의 좁은 선택지 위에서
김광균 시의 이미지즘은 서구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고도로 정제된 이미지를 주조로 하면서도 비애, 허무, 소외의 감정이 도처에서 표출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의 시론처럼 현대적인 대상을 이미지 중심의 현대적인 언어로 표현하되, 자아의 주관적인 내면 또한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격이다. 그런데 ‘서정’이 주관적인 내면 정서의 표출을 기본 의미로 가진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나온’ 내면이야말로 서정적인 것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합일의 서정과는 반대편에 있다. 그렇기에 비애, 허무, 소외라는 부정(否定)의 정서들이 그의 시에서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정서가 황량하면서도 공고한 현대문명과 관계가 있음을 보았다. 다만 김광균의 모든 시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가족과의 사별 등 다른 모티프들도 있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라는 선입견을 떼어 놓고 보더라도, 이 시기 김광균의 시에서는 유독 현대 도시문명과 함께 부정적인 정서가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다른 대표작 <와사등>(1938)의 다음 시구처럼 말이다.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채 / 사념(思念) 벙어리되어 입을 다물다.”
이러한 시 정신을 폄하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어째서 그의 화자들은 비애, 허무, 소외의식으로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난은 ‘서정’의 용어로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해 볼 수 있다. ‘주체와 세계의 불화를 당장은 타개하지 못하더라도, 윤리적인 방향의 변혁을 통해 둘의 합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물음이 1940년 파시즘 국가의 식민지라는 시의 창작 배경을 제쳐 놓은 채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부조리한 세계가 곧 주체의 유일한 삶의 터전이요, 변화를 도모할 언어조차 모조리 그 세계의 통제 아래 놓인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따라서 명확한 변혁의 태도 여부만이 평가 준거가 되기는 어렵다. 주어진 조건에서 그 시의 발화가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 좀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수록된 《인문평론》이라는 잡지 자체가 바로 ‘주어진 조건’의 축소판이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9년 창간되어 1년 반 동안 간행된 이 문예지는 파시즘 체제하에서 문인들에게 발표가 허용된 몇 안 되는 정기간행물 중 하나였다(1040년 8월 민간 신문들은 폐간된다). 머리말에서 일제의 체제에 협력하는 논초가 나타난 이 잡지에서 문인들의 작품이나 비평은 다소간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문인들은 현대문명의 방향을 군국주의로 몰고 가는 역사에 수긍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지면에 적극적인 비판의식을 표명할 수도 없었다. 당대 모더니스트들이 이 잡지에 수록한 시들도 그 묘한 입지를 보여 준다. 인생에 대한 회한을 담는 가운데 역사인식을 슬쩍 내비치거나(김기림, <공동묘지>), 문명의 풍경에 애수(哀愁)를 입히는(김광균의 <도심지대>, <추일서정>> 식의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강민규, 2021).
현대문명에 대한 예민한 인식에서 출발했던 모더니스트들이었기에, 그 문명이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이처럼 애도를 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추일서정)과 같은 호에 실린 이육사의 시(<교목>)가 현실 부정과 함께 자기 단련의 의지까지 보여 준 것과는 여전히 비교된다. 하지만 어쨌든 김광균이 직시한 문명의 파국은 그저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몸담아 살고 있던 현실 세계의 이야기였다. 풍경 속에 굳이 화자가 들어가서 ‘돌팔매’질을 해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사태 극복의 정도(正道)를 묘파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이지만 그 진정성은 인정할 수 있다. 세계를 진실하게 인식하는 언어 자체가 제약을 받고 있을 때, 이 시는 나름대로 세계의 진실을 보이려 한 것이다. 함축적인 이미지 중심의 언어는 이 점에서 오히려 강점을 가진다. 그리고 주체와 타협될 가망 없이 “기울어진 풍경”이 된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이를 ‘서정’이라 이름 붙인 것도 결국 그러한 진정성과 무관하지 않다. 기울어진 세계로부터 황량함과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주체가 그 세계는 언젠가는 바로잡혀야 한다고 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합일의 서정이 불가능하다는 표면적인 메시지는 그만큼 그것에 대한 갈망이 적지 않다는 것으로 다시 읽혀야 한다.
| 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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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강민규(2021), 「《<인문평론》의 시 수록 기획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64, 한국현대문학회.
김광균(1940), <서정시의 문제>, 《인문평론》, 인문사, 73-77.
김광균(1977), 《와사등: 김광균 시전집》, 근역서재.
김준오(2002), 『시론』(4판), 삼지원.
Staiger, E. (1978), 『시학의 근본개념』, 이유영. 오현일 역, 삼중당(원서출판 1946).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5. 2. 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