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7월 중순, 숙부의 집 2층 방에 앉아 있던 벤카타라만은 마침내 생애 최대의 큰 변화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그를 소년에서 성자로, 단 한 순간에, 재빨리, 그리고 영원토록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 절정은 아무런 탐구도, 아무런 노력도, 아무런 의식적 준비도 없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 날 그는 갑작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었다. 평소에 그는 거의 아프지 않았으며 그날도 그의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공포는, 전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렬하고 불가사의한 체험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무 도움도 청할 수 없었으며 다만 “이렇게 죽겠구나.”고 느끼고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나,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는 그때 오직 이 죽음의 문제를 그 스스로 그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죽음의 충격에서 오는 이 공포는 그의 마음을 내면으로 이끌고 갔다. 그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이 왔다. 죽음이 무엇인가? 육체의 죽음으로 오는 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몸은 죽는다.”
그래서 그는 즉시 죽음의 일어남을 드라마틱하게 하였다. 그는 죽음의 탐구를 생생하게 하기 위하여 눕고는 마치 시체가 된 것처럼 몸을 뻗어 뻣뻣하게 하였으며 소리가 입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깨물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말은 물론 ‘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몸은 죽었다. 이 몸은 뻣뻣한 채로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몸이 죽는다고 내가 죽는가? 몸이 나인가? 몸은 말이 없으며, 고요하다. 그러나 나는 내 존재의 완전한 힘을 느낀다. 내 몸과는 별개인, 나 속에 있는 ‘나’의 소리조차도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몸을 초월한 영(靈:나)이다. 비록 몸은 죽음에 이르나 몸을 초월하여 있는 영은 죽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죽음을 초월한 영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둔한 생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무런 사고 과정이 없이, 그에게 직접적인 자각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진리로서 생생하게 섬광처럼 일어났다. 그에게 ‘나’는 분명한 실재로서의 그 무엇이었으며 자기 존재의 유일한 그 무엇이었다. 그의 몸과 관련한 모든 의식적 활동들이 그 ‘나’의 중심에 잡혀졌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한 후에 나, 즉 나는 스스로 강력한 힘으로 그의 내면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죽음의 공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로 그에게는 ‘나’ 속으로의 몰입이 끊어짐이 없이 지속되었다. 다른 생각들은 악보의 여러 음표처럼 오가고 하였지만, 그러나 ‘나’는 모든 다른 음표들의 토대가 되어 뒤섞이기도 하는, 바탕으로 있는 스루티(sruti:말로 전달되어지며 내려온 경전) 음표였다. 몸이 말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그 무엇을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나’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 경험 이전에는 그는 그의 나를 선명하게 지각하지 못했으며 의식적으로 그것에 끌리지도 않았다.
이 새로운 경험은 그의 인생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더 이상 친구들이나 친척들과의 외적 관계나 운동경기를 즐기지 않고 한적한 곳을 좋아하였다. 이미 그 전부터도 별 흥미가 없었던 학업에는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보일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다. 새로운 성스러운 깨달음에 휩싸인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을 버린 그는 닻을 내릴 신성한 곳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근처에 있던 미나크쉬 사원으로 갔다. 깨달음의 경험이 있기 전에 간혹 친구들과 함께 들르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매일 저녁 그곳으로 갔으며, 쉬바신이나 미낙쉬, 나타라자, 혹은 63인의 성자 상 앞에서 꼼짝 않고 오랫동안 혼자 서 있곤 하였다. 그곳에 서 있으면 감동의 물결이 그를 압도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