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1월 하순 중
▶ 배내골종점 - 청수우골능선 - 신동대동굴 - 시살등/ 981m - 임도 - 자장암능선 - 자장암 - 통도사터미널
◐ 배내골종점 - 15분 "청수우골 능선 초입" - 30분 "첫봉우리" - 50분 "선바위" - 20분 "신동대동굴" -
- 10분 "시살등" - 20분 "통도사 임도 방향 이정표" - 40분 "계곡길 ~ 임도" 15분 "자장암 능선 초입" -
- 40분 "자장암" - 45분 "제1주차장" - 20분 "통도사 정문" - 10분 "통도사터미널" ◑
◈ 6시간 30분 ~ 7시간 정도
▶▶
▶▶▶
"부산역 / 07시 31분" 출발
"원동역 / 08시 02분" 도착
원동은 짙은 운무가 깔려있다.
1박 2일 원동역
오래 전에는
"은하철도999" 가 있었다.
"도시형 8번" 승차
"배내골 종점 / 파래소폭포" 도착
<30분 정도 소요>
올라갈 방향을 보고
우리를 태우고 달려온 버스
멀리 "능동산"
1분 후
♠ 우측에 있는
"배내천 트레킹 길"
♠ 이 곳에서
"고점교" 까지
<9.77km 이다>
2분 후
철 지난 단풍이지만
색상을 유지하고 있기에!!
9분 후
"파래소2교" 앞에서
우측으로 들어간다.
♠ 계속가면
"파래소폭포" 로 갈 수 있다.
♠ 정면에 보이는
"캠프포레"
♠ 여름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우측 들머리로 들어서서
10m 쯤 진행하여
우측 사면길로
매우 빡세게 올라간다.
3분 후
리본들이 매여있고
공사 흔적의 파이프가 있다.
살짝 돌아오르며
잠시후
★★★
좌측으로 꺽어 올라간다.
6분 후
바위를 돌아 오르고
▶ 7분 후
"경주 이공" 묘지 지나고
6분 후
첫 봉우리가 보인다.
2분 후
넙적바위와 넘어진 나무
2분 후
올라선 봉우리에는
특이한
"전화번호 리본"
(내림- 2, 오름- 4)
6분 후
두 번째 봉우리는
좌측으로 진행하고
10분 후
좌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좌측 초입에
많은 리본들이 보인다.
(내림-1, 오름- 2)
3분 후
눈 앞에 능선이 보이고
좌측으로 →
1분 후
키 큰 산죽길을 지나
완만하게 올라간다.
3분 후
능선에 올라서면
좌측으로 꺽어 오르고
곧 이어서
"원동장선마을 1.6km" 갈림길
계속 올라간다.
"영축산정상 5.7km"
"시살등 1.8km" →
1분 후
장터길 위치정보
"마마 3714 2462"
2분 후
장터길 위치정보
"마마 3722 2452"
2분 후
장터길 위치정보
"마마 3729 2446"
▶ 이제부터
등로가 좀 더 가파르게 변한다.
1분 후
가로막는 암벽을
우측으로 돌아 오르고
2분 후
장터길 위치정보
"마마 3734 2441"
2분 후
작은 산죽길 지나고
2분 후
만나는 암반릉을
우측으로 돌아 오르고
3분 후
우측에 보이는 거목
"향로산, 재약봉, 천황산"
"재약산" 은 쬐끔!!
잠시후
"통도사(금수암입구) 4.8km" →
2분 후
"선바위"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1분 후
또 다른 바위
1분 후
봉우리 아래
우측으로 →
작은 산죽길이다.
3분 후
지도상의 "헬기장" 일까??
억새 지대를 만나면
★★★
좌측으로 돌아
허리길을 따라간다.
3분 후
♠ 우측에 보이는 바위
잠시후
키 큰 산죽길을 지나고
2분 후
"시살등 0.4km" 갈림길에서
방향 표식은 없는
우측 4시 방향으로 올라
"신동대동굴" 을 다녀온다.
▶ 왕복 8분 정도 거리 ◀
1분 (오름) 후
작은 바위를 지나고
잠시후
우측에 있는
큰 암벽 아래를 내려간다.
잠시후
더 큰 암벽이 보이고
1분 후
한 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암벽
암벽 끝으로 내려오면
그 동안 궁금하기만 하고
직접 오지 못했던
"신동대동굴"
◐ 빌려온 ( 전해들은 말) 글 ◑
시살등 서쪽 8부 능선에는
신동대라는 자연 동굴(堀)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 400여년 전 신동대가 머물던 자연동굴 ▣
신동대굴은 성인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크다.
길이가 10여m, 폭은 5m 정도로 바위를 천장으로 하고 있고
옆으로 길게 패여 있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
굴(窟) 왼쪽 천장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누군가가 갖다놓은 항아리가 있어
식수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겨울철에는 비바람을 피하고자
온돌 형태의 구들장을 놓았던 흔적도 보인다.
이 곳은 지금으로 부터 약 400여년 전 신동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역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전국의 이름난 명산대천을 찾아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길지(吉地)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양산 원동에서 배내골을 따라 걸어오다가
동쪽 영축산 중턱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주저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에 이끌려 단숨에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멀리서 바라본 대로
그 곳은 길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곳에서 나의 뼈를 묻는 한이 있더리도 역학을 공부하여
도를 통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목욕을 재계하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린 뒤
하늘을 향하여 자신의 포부를 밝힌 뒤
밤낮 할 것 없이 공부에 매진하였다.
▣ 긴 수련 끝에 마침내 도(道)를 통하다 ▣
세월은 흐르고 흘러
신동대가 이곳에 온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서쪽 하늘에 보라빛 구름이 생기더니
그 속에서 수십마리의 백학(白鶴)이 나타나
신동대가 거처하는 곳으로 내려왔다.
백학들은 지상에 내려앉더니
수려한 용모를 지닌 7명의 젊은이로 변신했다.
"우리는 선계에서 내려온 신선들일세
이곳은 우리가 3년마다 한 번씩 놀러 오는 곳인데
자네가 이곳에서 불철주야 기도를 올리고 있으니..." 하며
입맛을 쭉쭉 다시더니 품속에 지닌 호부(護符)를 한 권 주었다.
"자네가 여기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우리와 같이 천계에 올라가는 것은 무리일세
하지만 지상의 주(主)는 될 수 있을거야
이 호부를 몸에 붙이면 어떤 귀신(鬼神)이라도 부를 수 있다네
귀신을 불러 병을 치료하고 , 재난을 막을 수가 있네
그러나 반드시 의(義)로운 곳에만 써야만 하는 걸세"
"감사합니다. 하신 말씀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들어보니
7명의 젊은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신동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축지법에 능해서
아침에 낙동강 잉어를 잡아 먹기도하고
하루에 한양을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는 자신의 능력만을 믿고 오만해져
그 술수를 이용하여 한양의 기생들과 놀기도 하였고
하물며 궁녀들을 탐하기도 하는 등
나쁜 일에 도술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나라에서는
궁녀들에게 몸에 명주 끈을 매어 두었다가
신동대를 보게 되면 명주실을 신동대 옷에 꿰놓으라고 명하였고
한양 장안에는 신동대의 방문(榜文)이 나붙었다.
결국 그의 행적이 탐지되어 신동대를 잡아오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그는 즉시 중국으로 도망쳐
새벽녘에 중국 안동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신동대가 어느 주막에 들러 눈을 붙이려 하자
어떤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기를
"야! 이 새 빠질 인간들아!
조선에 사는 신동대는 하루아침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 고 호통을 치고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잠이 확 달아나고 말았다.
노파가 자기보다 뛰어난 도술울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노파에게 다가가 자신이 신동대임을 알렸다.
신동대는 노파에게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자신을 제자로 삼아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노파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오" 하며
손사래를 치면서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겨갔지만
신동대는 끈질긴 마음으로 용서를 빌자
노파는 입을 열며
"한양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그 어떠한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 라 말한 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 의인 만난 후 개과천선 새사람으로 ▣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도와 농사에 전념하였고
낯선 사람 누구와도 만나지 않으며
자신의 기도처 부근에도 얼씬하지 않았고
그의 도술을 의롭게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하루는 식사 도중에
어머니가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자
수저를 내려놓고 곧바로 자반을 사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가까운 곳에서 사 온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100리 떨어진 마을까지 갔다 온 것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관군을 도와 왜군을 무찌르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왜군은 1592년 4월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
사흘 만에 언양읍성과 시루성을 무너뜨리고
단조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단조성의 비밀통로를 찾아낸 왜군은
배내골 방면의 청수골, 신불재를 통하여
물밀듯이 진격해 왔다.
이 때 신동대는 적진 깊숙이 숨어들어
적을 교란하는 역활을 하기도 하고
적의 동태를 낱낱이 살펴
조선군에게 알려주는 역활을 하였다고 한다.
▣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큰 공 ▣
임진왜란 당시
동래에서 한양으로 진격하는 왜군은
신불산 단조성에서 번번이 보급로가 차단되자
단조성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을 먼저 무찔러 함락시켜야만
보급로가 원활하게 이송되어
한양으로 진격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활과 창으로만 무장한 조선군은
바람 앞의 등불 격이었다.
수많은 전사자를 낸 조선군은
영축산 능선을 따라 퇴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조성의 본영이 함락되자
방어망을 구축한 최후의 보류지 시살등에서 배수진을 친 조선군은
밀려오는 왜군을 향해서
마지막으로 반격의 기회를 노리기로 하였다.
통도사에서 온 승려들과
밀양, 삼랑진 등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힘을 합하여
왜적을 향하여 수많은 화살을 퍼부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조선군과 의병군들의 시신은 계곡을 가득 메웠고
흐르는 계곡물은 핏빛으로 변하여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까지도 흘렀다고 한다.
하물며 이곳에서 자생하고 있는 개구리는
지금도 배가 붉은 색을 띠고 있다고 하니
당시 시살등에서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과히 짐작할 수 있다.
▣ 노파의 경고를 잊고 바람고개에서 최후 ▣
세월은 흘러
그는 자신을 깨우쳐 준 노파의 예언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어느 날 장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았다.
결국 그는 그날 밤 도라지고개(일명 : 바람고개) 를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신동대가 살았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 걸식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동굴 한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먹을 만큼의 쌀이 흘러 나왔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 구멍을 넓혔다.
그랬더니 더 이상 쌀은 나오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하며
할머니는 예전처럼
걸식하며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 굴을 신동대의 이름을 따 "신동대굴" 이라 부르는데
지금도 바위 천장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또한 신동대가 살았던 골짜기 통도골은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장소이었고
양산시 원동면에서 통도사로 넘어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산 아래 통도골과 합쳐지는 도태정(도를 통한 골짜기)골도
신동대와 관련하여 붙어진 지명 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난 자태를 드러내는데
휴대폰의 한계를 느낀다.
"신동대동굴" 을 둘러보고
☞ ☞ 갈림길로 뒤돌아 간다.
▶▶ 다시 돌아온 갈림길
우측으로 올라간다.
"영축산정상 4.3km"
"시살등 0.4km" →
3분 후
야릇한 나무를 지나고
♣ 나머지 사진은 2페이지로 ~ ~ ~
보고 걷고 | 배내골종점- 신동대동굴- ▲시살등- 자장암- 통도사터미널 2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