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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예의
공 지 영
데스크가 변덕을 부린 것이 이해가 갈 만큼 이민자는 확실히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가 한국에 오면 거처하곤 하는 경기도 남쪽의 어느 어름으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막 아침산책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키가 일 미터 오십오 센티쯤 될까, 생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고, 풀을 먹이지 않은 부드러운 아이보리색 광목바지에 가지색 순모스웨터를 풍성하게 걸친 그녀는 들꽃들이 싱싱하게 피어나는 마당에 서 있었다. 변덕이 심한 봄날씨가 이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며칠은 마치 초여름처럼 성급하게 더워서 그저 별생각 없이 재킷을 잡지사에 걸쳐놓고 블라우스 차림으로 취재에 나섰던 것인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섬뜩한 한기를 품은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 와서 그 집 울타리 한켠에 서 있던 라일락의 보랏빛조차 입술이 파랗게 질린 것 같게 느껴졌다. 집 뒤쪽 가까운 골짜기의 뽀얀 봄빛도, 생나무울타리 한켠에 선 수양벚나무의 환한 빛, 산목련나무의 눈부신 백색, 겹벚나무의 소박한 분홍빛조차도 아직 차가운 봄바람 앞에서 그저 가엾이 떨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나무들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그 나무들보다 키가 작은, 왜소한 몸집의 이민자는 마치 그 바람 속에서 혼자 피어난 들꽃같이 꿋꿋하고 맑아 보였다. 바람과 봄날의 변덕스런 한기와 그리고 마흔여덟의 나이조차도 어쩌면 그녀를 비켜가게 하는 재주를 가진 것처럼, 그녀의 첫인상은 뭐랄까, 독특하고 어쩌면 신비했다. 그건 그녀가 우리―사진기자와 나―를 맞아들였던, 마치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아주 독특한 통나무집이 주는 인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넓은 나무마루는 오래도록 들기름이라도 먹인 듯 은은하게 검정고동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지금은 불이 꺼진 벽난로
위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 이 놓여 있었다. 서너 살배기의 여자아이가 둥그렇고 푸른 지구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내가 엉거주춤 서서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이민자는 향기가 아주 독특한 차를 내왔다. 무슨 들풀을 짓이겨놓은 것같이 쌉쓰름한 맛이 느껴지는 차였다.
한 한 달 동안 이 차만 마시고 지낸 적이 있어요. 인도에서요…… 저의 명상 스승이셨던 마가호타 미르혼지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거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거친 직조의 결이 도톨도톨 느껴지는 무명 방석을 내어놓고 그녀 자신은 맨발로 마룻바닥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제야 나는 가방 속에서 취재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제야 수첩을 꺼낼 만큼 나는 그 집과 그녀의 독특한 분위기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승이라는 분의 성함이……
하고 말하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찾아온 건가, 하는 기자로서의 예의 없음에 대한 의아함 같은 게 그 눈빛 속에 담겨 있어서 나는 황급하게 덧붙였다.
저, 책을 읽었는데 스승 이름이 금세 떠오르지 않네요. 익숙한 이름이 아니 라서…… 죄송합니다.
마, 가, 호, 타…… 미, 르, 혼, 지.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스승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녀는 마치 석굴암의 불상에 새겨진 것처럼 엷고 환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그녀가 스승의 이름을 발음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취재수첩에 적으면서 내 스승도 아닌데 그 괴상한 이름을 내가 외울 게 뭐야,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괜한 생각이었을까. 취재수첩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나를 향해 아직도 짓고 있던 그 미소 속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힘 이 느껴져서 나는 좀 무안해졌다.
이미지도 없이 이름만 강요하는 것 같네요, 내가…… 어떻게 말이라는 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나의 무안함을 다시 꿰뚫어보듯이 말했다. 말소리는 따뜻했고 표정은 부드러웠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만일 표정이라는 것을 이렇게 분류해도 좋다면 뭐랄까, 식물성분의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파초잎에 파르르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고 그 위로 비가 내리는 것 같은 표정, 넓은 뜰 가운데 혼자 서 있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이미 충족된 모습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가 그녀의 이국생활에 대해 괜스레 거부감을 가지고 온 것을 후회했다. 작고 가느다란 눈매, 납작하지도 높지도 않은 코, 얇은 입술. 그녀도 나와 같이 그저 한국인이었다. 나는 쌉쓰름한 냄새가 풍기는 차를 얼른 마셨다. 스승이 인도 사람이든 미국 사람이든 그녀는 이제 고국에 돌아와 있는 것이다.
나는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다 말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내 빈 잔에 살포시 차를 따르는 것이었다. 두 손을 내밀어 공손하게 그녀가 내 잔에 차를 따르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앙상하게 마른 그녀의 품에 안기면, 저어 산다는 게 뭐지요,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러면 그녀는 그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러면 나는, 그래요 살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분명 어떤 힘이 있었다. 뭐랄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사람이 가지는 어떤 힘…… 데스크가 그녀의 개인전에서 그녀와 만나고 돌아온 후, 사무실은 마치 인도의 명상터처럼 변했다. 술자리에서는 그저 이제는 늙어버린 낭만적인 문학소년 같고, 사무실에서는 웬만큼 강심장이 아닌 기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만큼 카리스마적인 노련함을 가지고 있는 그는, 마치 무엇에 취한 듯 열띠게 그녀의 그림과 그녀의 명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취재와 마감과 월급봉투와 글쓰기에 지쳐 있던 기자들은 담배를 피우거나 필자에게 전화로 원고를 독촉하거나, 기사를 쓰고 있던 원고지를 구겨버리다가도 데스크가 전해주는 이민자의 삶의 방식에 은밀하게 귀들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스물하나의 나이로 대한민국 국전 대상, 대학 졸업 후 도미, 뉴욕에서 큰 성공, 이어 도불하여 전시회 연달아 성공, 소더비 경매장에서 그림을 거래시킬 수 있는 유일했던 한국화가…… 어느 날 성공과 성취의 허망함을 깨닫고 인도로 여행 떠남…… 스승 마가호타 미르혼지 밑에서 사사…… 삼 년간 인도 전역 맨발로 방랑…… 아프리카 스케치 여행, 어느 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 중 불현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와 고국에 정착.
꿈같은 이야기군.
빈정거리기 잘하는 기자가 그녀의 내력을 듣자마자 불쑥 내뱉었지만, 그 빈정거림의 의도에 대해 나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일까 하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어떤 용감무쌍한 자유인에 대한 동경 같은 것, 마감을 끝내고 동료기자들과 얼큰한 술자리에서 파해 집으로 돌아올 때, 문득 길거리에서 서서 바라보면 모든 거리는 어둡기만 하고 그럴 때, 내가 지금 대체 무엇을 하며 사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 때, 어떤 자유, 어떤 방랑, 어떤 초월, 어떤 꿈의 실현, 그런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는 말이었다.
그 달에 화제가 되는 책을 선정해서 그 작가를 인터뷰하고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6페이지짜리 기사를 맡고 있는 나에게 데스크가, 이번에는 권오규 선생을 한 달 뒤로 미루고 우선 이민자를 취재하라고 변덕을 부렸을 때, 나는 사실은 조금 망설이긴 했었다. 권오규라는 사람을 이미 취재해놓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의 이국생활이 왠지 내게 거부감을 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에도 불구하고, 밑져야 본전아라는 생각으로 내가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녀가 데스크에게 전해주어 이제 나에까지 엷게 묻어버린 그 희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희망이 오랜 독신생활과, 길지 않은 여성지 기자생활과, 나에게는 그토록 오래처럼 느껴졌던 쓸쓸함의 시간들을 다르게 채색해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진기자에게 건네받은 권오규 선생의 네가 필름과 이미 그를 취재해놓은 수첩과 그가 쓴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을 한꺼번에 누런 봉투 속에 집어넣고 매직펜으로 6월 호용이라는 글씨를 써놓은 후, 이민자를 취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독특한 그녀의 통나무집을 나서서 그 집 앞에 세워둔 취재차에 올라타고 멀리 바람 부는 산에 피어난 가지가지 파스텔 빛 산매를 배경으로 서 있는 그 통나무집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하여 나도 이런 집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문득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잠자던 슬픔 하나가, 마치 잡동사니로 범벅이 된 땅을 뚫고 머리를 내민 열무 싹처럼 고개를 디미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왜 열무 싹 같은 슬픔이냐 하면…… 그렇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을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열무 싹을 떠올린 것은 최근 옮긴 집 뒤뜰에 작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심한 어느 휴일 날에 나는 꽃삽을 가지고 땅을 한번 일구어보았는데, 그것은 땅이라기보다 거의 쓰레기장에 가까웠다. 잔돌 큰돌이 무수하게 섞여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닐이나 과자봉지, 나중에는 굳은 시멘트덩어리까지 나왔던 것이다. 잔돌이나 비닐봉지라면 몰라도 시멘트덩어리라면 꽃삽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그만 포기할까 하긴 했었다. 하지만 꽃삽을 들고 돌아서는데 잡동사니 땅과의 싸움에서 맥없이 밀려난다는 생각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고, 좋다, 그럼 이왕 시작한 일이니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을 하고 나서 나는 내 허리까지 오는 커다란 삽을 사 왔다. 일단 그 삽으로 시멘트를 들어내고 퇴비를 주긴 했지만 아직도 잔돌이 많고 모래가 많이 섞인 땅이라 씨앗을 뿌려도 자랄까 싶었다. 그래서 그저 손해 보는 기분으로, 정말 재미 삼아 시장 화원에서 열무 씨앗이라는 걸 사다가 뿌려두었더랬는데, 식목일이 지나자 날씨까지 차가워졌다. 며칠 동안 나는 뒤뜰에 가서 혹시라도 이제나저제나 싹이 나오려나 기다렸지만 퇴비를 머금어서 약간 거무스레해진 흙만 보일 뿐 싹이 돋을 기미는 그야말로 싹도 보이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은 있었지만 너무 이른 봄날에 씨앗을 뿌린 내 탓이겠지 생각하고 지내던 차였는데, 바로 며칠 전 그저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씨앗들이, 아직도 돌과 비닐이 남아있는 그 잡동사니 땅을 뚫고 녹두알만 한 새싹을 내밀었던 것이다.
나는 요즘 잡지사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싹들을 둘러보고 나올 만큼 열무 싹들에게 열중해 있었다. 그러니 가슴속에 생각지도 않게 불쑥 솟아오른 어떤 것에게, 열무 싹처럼 이란 비유를 스스럼없이 붙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 고개를 들었다는 것 같은 느낌은 왜였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것은 왜냐하면…… 하고 말꼬리를 흐리다가, 어쩌면 슬픔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나는 고개를 저어버렸을 것이었다.
그저 하필 차에 올라타고, 한 시간의 취재 끝이었지만 벌써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파초 같은 얼굴을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을 때, 그때 내 머릿속으로 지난번에 내가 취재를 했던, 하지만 지금은 책이 잘 팔리는 이민자를 위해 다음 달로 그 기사가 미루어질지도 모르는, 권오규 선생이 출소 후 거처한다는 그 삼양동 구불구ㅂㄹ한 골목길 끝, 어느 허름한 한옥의 문간방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한 서너 평 되는 마당엔 얇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고 그 한컨엔 촌스러운 철쭉과 꽃 피지 않은 군자란이 파란 플라스틱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마당에 가느다란 수도꼭지가 있고 재생고무로 만든 벽돌색 대야가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는, 검정 색깔의 수채화 물감에 물을 많이 타면 나타나는 듯한 검은 그늘이 엷게 드리워진, 그 한옥 문간방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러니까 그게 왜 슬픔이냐고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꼬치꼬치 물어본다면 나는 그만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자유는 나의 의상, 명상은 나의 끼니…… 이 우주도 나를 가둘 수는 없다.
돌아오는 길에 제목은 벌써 떠올라주었다. 괜찮은 제목 같았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제목이 이렇게 쉽게 떠오른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사실 권오규라는 사람을 취재하고 삼양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내려올 때 나는 막막했었다. 그저 막막했다고밖에는 할 수없는 것이, 스물여덟의 나이로 무기수가 되었던 그가 이제 출옥한 지 이 년 만에 그동안 감옥에서 쓴 편지들을 묶어 책을 펴냈다고 해서 그것을 대체 무슨 말로, 어떻게 기사를 쓰기 시작해야 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목은 물론 앞글도 본문도 도무지 캄캄이었다. 이민자를 취재하러 선뜻 나섰던 것은 잘한 일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달에도 또 ‘쫑순이’ 기자가 될 판이었다.
선배, 어쩔 거야. 이번 달에 이민자 씨 건으로 할 거야?
사진기자가 내게 물었을 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는 데스크가 이번 달에는 다른 여성지하고. 인터뷰하지 말라고 이민자를 단단히 구워삶아 놓은 모양이던데…… 요즘이야 그런 게 특종이지 뭐. 문민정부가 출범한 마당에 웬 장기수?…… 안 그래, 선배?
왜 그렇게 말을 길게 하지?
내가 물었다. 무언가, 그렇다, 이왕 변명을 해놓은 터이니 이번에도 열무 싹 같은 것이라고 하자, 불쑥 열무 싹 같은 의구심이, 아니다…… 의구심이란 것은 열무 싹같이 파릇파릇한 것은 아니다. 슬픔이라면 몰라도. 그러니 그저 단순하게 표기해보기로 하자. 그러니까 나는 그의 말이 왠지 비아냥처럼 들려서 그렇게 묻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냥 나도 이 판을 떠나야 할까 싶어서…… 그냥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야.
어디로 가려고……?
글쎄…… 어디로 갈까. 인도? 아프리카? 뉴욕? 그도 아니면 파리?…… 명상이나 하면서 생각해보지 뭐…… 나에게도 ‘그 무언가가’ 떠올라주겠지. 젠장할……
다 좋은데 젠장할이란 말은 왜 붙이니?
그 말이 이런 경우에 꼭 맞으니까, 젠장할……
꼭 그렇게 세상을 비뚜로 볼 거 뭐 있어? 이제 구원으로 가는 길은 우리에게 꼭 하나가 아니어도 좋잖아?
무언가 더 말을 이을 듯 잠시 망설이다가 사진기자는 무거운 가방을 뒷좌석으로 던져놓고 눈을 감아버렸고, 나도 더 말하지 않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사실은 사진기자가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구원이라든가 길이라든가에 대해 불쑥 말해버린 자신에 대해 몹시 난처해져서 내 쪽이 오히려 그를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와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진기자처럼 그저 그녀와의 만남을 그런 한마디로 치부해버리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그 마당에 서서 들꽃같이 맑게 서서 웃었을 때 나에게는 어떤 용기 같은 게 솟은 까닭이었다. 혼자라도, 앞으로 더 많이 혼자 있다 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 그러니 이제 밤에 집에 혼자 들어선다 해도 냉장고에서 싸구려 포도주병을 꺼내 홀짝거리며 마시거나, 아니면 밤도 늦은 시간, 너무 밤이 깊어서 라디오도 끝나고 창문 밖의 트럭소리도 사라졌을 때, 전화기 앞에서 이 밤에 누가 깨어 있지는 않을까, 깨어 있어서 나하고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궁리하다가, 그저 700으로 시작되는 오늘의 운수에 전화를 걸어놓고 우두커니 그것을 듣고 있는 대신, 아까 이민자가 가르쳐준 명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몸을 조이는 모든 것을 다 풀어버리고—될 수 있으면 알몸이면 더 좋다고 그녀는 말했다―반가부좌나 가부좌의 자세로 앉는다. 그런 다음 단전에 힘을 주고 호흡을 시작한다. 모든 우주의 기가 코를 통해 기도를 거쳐 뱃속으로 내려갔다가 단전에 고이는 들숨, 이번에는 단전으로 모여든 나쁜 기가 뱃속을 지나 기도를 거쳐 입으로 뱉어지는 날숨. 중요한 것은 숨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저 숨을 느끼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던 것이다. 아까 이민자 앞에서 서투르게 웃으며 흉내 내었던 그 호흡을 혼자서라면 정말 발가벗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 그런 게 들었던 것이다.
잡지사에 도착하니 모두들 식사를 하러 나가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사진기자에게 점심을 내겠다고 말했고 사진키자는 거기에 동의했다. 가방을 의자에 놓고 지갑을 찾아 들려고 했을 때 권오규 선생에 대한 취재가 담긴 누런 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집어두고 나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저 가방 속에서 지갑만 찾아 달랑 겨드랑이에 끼고는 사진기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사진기자가 일 층이라는 버튼
을 누르고 나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말야, 아까 왜 물어봤느냐면, 그때 우리 삼양동으로 찾아갔을 때 그 집 사진틀 속에 있던, 그 흑백사진 말야…… 한 사람은 처형당하고 한 사람은 옥사했다던가…… 그 사람들 사진을 찍을 걸 하는 생각을 했었거든. 이번 달에 기사가 나갈 거면 내가 오늘이라도 가서 그 사진들을 좀 찍고 싶어서…… 사진기자는 크게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지만 내내 생각에 잠겨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혹시 그가 내가 권오규의 자료들을 떨어뜨리고는 그것을 집지도 않고 나온 것을 보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갑자기 이런 말을 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다. 나는 왜 자꾸 요즘 들어 사람들의 말을, 이것이 혹시 비아냥은 아닐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밀어 넣고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변하는 것만 바라보았다.
하기는 그의 말대로 사진이 있었다. 몹시 화창한 봄날이었다. 삼양동 주택가로 들어섰을 때 어느 집 담장 너머로 서 있던 벚꽃이 꽃잎을 팔랑팔랑 떨어뜨리고 있는 바람에 사진기자가 내게 포즈를 취하라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던, 그런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 하지만 올라갈수록 골목은 좁아졌고 벚나무 같은 것은 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복덕방 문 앞에 내놓은 축 늘어진 게발선인장 따위가 눈에 띄었을 뿐, 삭막한 시멘트덩어리의 골목이 이어졌다. 그래서였는지 우리가 삼양동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 권오규라는 사람이 거처한다는 집에 들어갔을 때는 봄날이고 뭐고 그저 땀만 흘렀다. 사진기자는 연방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었다. 벨을 누르자 거의 이십 년 동안 권오규란 사람의 옥바라지를 했던, 그의 동생이 대신 나와 우리를 대청으로 안내했다. 기억이란 건 이상한 것이다. 그때는 사실 시멘트로 바른 그 집 마당에 놓여 있던, 파란 비닐화분에 담긴 철쭉이랑, 꽃이 없는 군자란을 나는 눈여겨보지 않았었다. 엷은 검은색의 그늘 따위도 그저 시원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민자 화백의 집을 나서서 차에 올라타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을 때 나는 왜 거기서, 땀을 흘리는 사진기자라든가 머리가 좀 벗어진 권오규의 동생이라든가, 부엌에서 우리에게 커피와 사과를 날라 오던 그의 계수는 빼고, 재생고무로 만든 낡은 대야와 가느다란 수도꼭지만을 떠올렸던 것일까. 어쨌든 우리들은 대청에 앉았다. 권오규란 사람의 동생은 자신의 형인 권오규 씨가 잠깐 병원에 갔다며 몹시 미안한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거기에는 ‘한국도기통상 대표이사 권오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도기통상이 뭐하는 뎁니까?
그저 지나치는 듯이 내가 묻자, 권오원이라는 사람은,
남대문에 있는 조그만 그릇가게예요…… 제 이름이 오원인데 거창한 기업체의 사장이겠습니까 뭐……
하고, 우리가 자신을 거창한 기업체의 사장이라고 생각할까 봐 조바심이라도 난다는 듯한 얼굴로 허허 웃으며 말했다.
명함은 집어넣으시지요 뭐……
그는 여전히 얼굴이 벌게서 말했다. 도기통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쓴 것이 부끄러운 건지, 사실은 그것이 조그만 그릇가게여서 부끄러운 건지, 그도 아니면 자신의 이름이 오억이 아니고 오원이라고 부끄러워하는 건지, 아무튼 그는 우리가 그 명함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거북하다는 듯 머리를 연신 만져가며 쑥스럽게 말했다.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하도 쑥스러워하는 그가 민망스러워서 우리도 얼른 명함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긴 했었다. 그러면서 그때 명함을 넣고 무심히 시선을 돌리다가 그 사진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낡은 한옥의 대청에는 늘 그렇듯이 낡은 사진틀이 걸리고 그 안에 작고 빛바랜 사진들이 들어 있었다. 나란히 앉아 찍은 사람은 아마도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고, 그 부모님의 커다란 사진 앞에 작은 사진이 두 장, 반명함판의 크기로 끼워져 있었다. 내 시선이 그곳에 머물자, 권오규의 동생이 말했다.
……저분은 그때 형님이랑 같이 재판을 받고 사형당하신 이문수 선생이시고 저분은 고문 때문에 옥사하신 황문철 선생님이십니다. ……형님이 감옥에서 간직하고 계셨다가 제게 저 사진을 부탁하셨더랬지요……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그래서 저희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지요.
나는 그가 말하는 사진들을 올려다보았다. 사형을 당했다는 이문수라는 사람은 검정 양복을 입고 있었다. 사각이 반듯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황문철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얼굴이 가름하고 눈매가 얇삽했다. 처형을 당하고, 그리고 내장이 터져나가도록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를 했다는 그들…… 만일 그런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그것이 그들의 숙부들쯤 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오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취재수첩에 적었다.
딴 이야기 같지만…… 사실 나는 죽은 이들의 사진에 익숙하지 못하다. 우리 집은 제사를 모실 때도 사진 같은 것은 쓰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서 사진으로 남은 친구들이 내게는 있었다. 가끔 앨범을 펼쳐놓고, 나는 나와 함께 사진을 찍어 그 앨범 속에 한 시절을 기록했으나, 지금은 이 지상에 없는 친구들의 수를 가만히 세어보기도 했다. 성당의 주일교사 일을 같이 하다가 대학 일 학년 엠티에서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고 스스로는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던 친구,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기, 어두운 심야극장에서 심장마비로 죽은 선배…… 한 친구는 자취방에서 목을 매었고 또 한 후배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 한 친구는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아파트 십 층에서 뛰어내렸고 또 한 선배는 새벽까지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달려오는 택시에 치여 그대로 죽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곱슬머리칼을 하고 있었고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 목소리가 너무나 턱 없이 커서, 술집에서 자주 우리를 쫓겨나게 했던……
살아 있었으면…… 그들은 모두 무엇을 할까.
어쩌면 지금쯤 넥타이를 매고 회사 지하다방에서 후배를 만나거나, 저녁 동창회모임에 프라이드를 끌고 나타날 것이겠지만, 만일 살아 있었다면 다른 많은 친구들처럼 나는 그들과 오래 떨어져서 서로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고 살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가끔 그들의 얼굴이 눈에 박혔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들의 이십 대가 고스란히 놓인 1980년대, 내가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하고 중얼거리며 죽지 못하고 빠져나온 1980년대의 한 길거리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다가 고꾸라졌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꾸라진 그들을 두고 나 혼자 달려 나와 그 긴 터널을 빠져나와 버렸다는 생각, 그래서 억두운 곳만 보면 혹시 여기에 그들의 주검이 파랗게 누워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권 선생님께서는 많이 불편하신가요?
한동안 괜찮으셨더랬는데 약한 감기에도 저렇게 힘들어하시는군요…… 아무래도 감기균도 감옥 속의 것이 좀 순한 모양입니다.
그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젊은 기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미안함을 어떻게든 덜어주려는 서투른 의도가 엿보여서 우리도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웃었다. 사실은 좀 멋쩍었고 지루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깎은 사과와 커피를 내왔다. 우리는 화창하다 못해 덥기까지 한 봄날에 그 집 대청에 앉아서 들쩍지근한 커피를 마셨다.
저 방이 형님이 쓰시는 방이에요.
인터뷰할 대상이 없어서 침묵하며 사과만 베어 먹고 있는 우리들에게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생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은 권오규가 거처하는 문간방이었다. 엷은 미색 한지가 훤히 비치는 그런 한옥식 미닫이 방이었다.
원래는 저 방이 여닫이문이 달린 방이었죠…… 형님이 출옥하신지 얼마 안 돼서예요. 원래 세를 주었던 방을 내보내고 나서, 그 방에 가구를 좀 들여놓고 형님을 저기 거처하시게 했었죠. 피곤하니까 쉬시라고 하고 우리는 방문을 닫고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형님이 일어나시지 않았는지 방에서 별 기척 이 없어요. 얼마나 피곤하실까 싶어서 형님을 깨우지 말기로 하고선 저는 가게로 나가고 애 엄마도 볼일이 있어서 밥상을 마루에 차려놓고 밖으로 나갔죠. 우리가 그때 가게를 한창 수리하고 있던 때라, 경황이 없어서 밥상 위에 쪽지를 써놓고 나갔더랬어요. 아침은 밥을 드시고 점심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드시라고, 중국집 전화번호를 적고 우리 집을 그곳에 알려주는 방법을 적어놓은 거지요…… 그런데 그날 오후 네 시 넘어서까지 집에 아무리 전화를 해도 전화를 안 받아요. 이상한 생각에 제가 집으로 뛰어왔지요…… 밥상도 그대로곤 형님도 보이지 않았어요…… 정말 별의별 생각이 다 득 건 말도 마세요…… 그때 형님 방 쪽에서 쾅, 쾅, 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요…… 깜짝 놀라서 방문을 열어보니까…… 형님이 땀이 범벅이 된 얼굴로 절 바라보시더라구요…… 아니 형님, 왜 이렇게 문을 두드리세요. 나오시지 않구, 하니까…… 그제서야 형님이 당황해하시면서 말씀을 못하세요…… 나중에 알아보니까 장기수들이 출옥하면 그런 일이 많다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이십 년 동안 갇혀 있다 보니까 스스로 안에서 방문을 열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신 거죠…… 아침도, 점심도 거르시고…… 형님은 안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셨던 거예요…… 나가는 기척이 들리는 것 같으니까……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문을 두드렸던 거죠…… 세상에·……
동생은 붉어진 눈시울을 얼른 내리깔며 담배를 집어 들었다. 듣고 있던 사진기자가 카메라 렌즈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기침을 해댔다.
인간의 몸뚱이를 가둬두는 게 사실은 그렇게 무서운가 봅니다. 일이 있기 전에 형님은 럭비선수시기도 했는데·…‥ 감옥에서 운동을 하시고 단전호흡도 하셨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약해지셨어요…… 길을 걷다가도 자꾸만 깜짝깜짝 놀라셔요. 감옥에서 혼자 일곱, 여덟 걸음 걷고는 뒤돌아서서 일곱 발짝 또 걷고 하던 버릇이 아직 남아 있던 거죠…… 처음엔 화들짝 놀라시면서 걸음을 멈추시길래 저희는 어디 몸이 아프신가 했어요. 형님은 조금 쉬었으면 하시더군요. 저희로서는 시내 구경을 시켜드리려던 거였는데…… 그것도 알고 보니까 그런 버릇 때문이었어요. 이십 년 동안 바라보았던 감옥의 벽이 눈앞으로 화악 달려드는 것 같은 환영을 보시는 거죠·…… 형님이 나오시긴 했지만 이미 몸속에 들어와 버린 그 벽을 허물려면 얼마나 세월이 더 필요할지……
사진기자는 마당 한켠에 있는 재생고무로 만든 붉은색 대야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사과를 베어 먹었다.
권오규는 우리가 찾아간 지 한 시간 남짓 후에 나타났다. 계수가 대문을 열어주자 그 대문에서부터 대청까지의 몇 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었다. 권오규는 얼른 대청으로 올라서며, 미안하군요, 젊은이들한테…… 오시라고 해놓곤.
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상우 선생이라고 빨치산이셨던 분이 얼마 전에 출옥을 하셨는데 고만 오래 못 넘기실 것 같아서 말이에요, 병원에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전화를 해보니까 역시 그러시더군요…… 그래, 큰 병원에 모셔다 놓고 오는 길입니다. 이거 너무나 미안하군요.
아주버님도…… 몸도 편찮으신데 그러다가 더 병나면 어떻게 하시려구 그러세요…… 그런 건 이제 좀 젊은 사람들한테 맡기세요…… 감기는…… 병원에 가셨어요?
권오규에게 인삼차를 내오며 그의 계수가 말을 거들었다.
아닙니다. 난 괜찮아요. 약이나 좀 지어 먹지요…… 감기쯤이야 뭐…… 그 이상우 선생이 남쪽에 무슨 가족이라구 있어야지 말예요…… 그렇잖아도 장기수 후원회 젊은이들이 왔습디다.
그는 우리들을 앉혀놓고 계수씨와 오래 말을 한 게 미안하다는 듯 겸연쩍 게 웃었다. 웃는데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깊게 몰려들었다. 이상했다. 감옥에서 이십 년을 보낸 사람이 대체 언제 웃을 시간이 있었기에 저 사람의 눈가에는 저토록 오랜 세월을 웃었던 흔적 이 팬 것일까. 나는 권오규의 눈가에서 시선을 떼어 두 사람을 마주 보았다. 나란히 앉은 형제의 얼굴, 동생 쪽이 오히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동생 쪽은 머리가 벗어지고 몸이 비대한 편인 데 비해 권오규는 얼굴이 죽 가름하고 마른 편이었지만, 만일 그 둘이 나란히 앉아 있지 않았다면 닮지 않은 형제라고 생각했을 사람들이겠지만 그들은 닮아 있었다. 뭐랄까, 그들의 얼굴에는 그들이 가만히 있을 때는 숨어 있던 어떤 아이들의 모습이 웃음을 띨 때마다 튀어나오는 것 같은 공통점…… 차를 몰고 가다가 막 수업을 파한 국민학교 앞 횡단보도에 멈추어 설 때 와아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세상에, 그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상상력인지. 오십이 다 된 두 노인네 형제의 모습에서 신발주머니를 덜렁 덜렁 흔들며 뛰어가는 아이들, 한 이 학년쯤 된 아이가 그래도 제가 형이라고 한 일 학년쯤 되어 보이는 동생의 손을 꼬옥 붙들고 뛰어가는 그런 얼굴을 느끼다니…… 나는 얼른 터무니 없는 상상에서 깨어나 기자로서의 일을 생각했고 권오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는 연한 하늘색 와이셔츠 윗주머니에서 작은 돋보기를 꺼내 쓰고 내 명함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때, 그가 『월간여성』 기자라는 내 명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상상에서 깨어나 이상한 기분에 다시 사로잡혔었다.
이십 년 동안 옥살이를 한 그에게, 방문을 안에서도 열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린 그에게 대체 『월간여성』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가 언제 한 번 그걸 읽어보기라도 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책을 읽기라도 할 것인가 말이다. 나는 이제는 다만 너무 늙어버린 그 두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집을 나섰다.
삼양동을 내려오는 내 취재수첩에는 그저 이문수와 황문철이라는 이름이 처형, 옥사라는 글씨 옆에 나란히 적혀 있을 뿐이었다. 보통 작가를 인터뷰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이것저것 문안들이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상하게 제목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저 사람 오십이 다 된 지금 장가는 어떻게 갈 것인지, 책이 그리 많이 팔리지도 않는다는데 생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몸도 안 좋다면서 다른 장기수들 뒷바라지나 하면서 평생을 살 것인지…… 그런 기사화되기 힘든 생각들만 떠올랐었다.
엘리베이터는 일 층에 도착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점심은 뭘 먹을까 하면서 빌딩의 현관문을 여는데, 바람이, 마치 오랜 시간을 고여 있다가 문을 여는 우리에게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는 듯이 불어왔다. 이상한 날씨였다.
날씨가 왜 이러지…… 가만, 봄에도 태풍이라는 게 부나?
사진기자와 나는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색깔에도 무게를 달 수 있다면 너무나 무거운 육중한 회색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이상하게 섬뜩한 느낌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꼭 금방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
나와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진기자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렀다. 늘 렌즈나 사진기나 필름 등을 넣고 다니던 그의 무거운 가방이 없어서인지 그는 휘청대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 강경대* 이 주기잖아.
그는 바람을 피해 가슴을 웅크리고 걸으며 빠르게 말했다.
오늘이……?
꼭 이십 년 전 일 같지……?
우리들은 설렁탕집에 들어가 수육을 시켜놓고 반주를 한잔씩 했다. 사진기자도 나도 별말을 하지 않고 소주를 한 병이나 비웠다. 다시 거리로 나왔을 때 사진기자가 발그레한 눈가를 찌푸리며 웃었다.
내가 만일 말야, 선배, 지금 이 바람 속에서 어떤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말이야, 구슬프고 억울하고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선배는 나보고 또, 미친놈 그러고 말겠지?
그는 말을 마치고 먼지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침을 뱉었다. 나는 나보다 키가 십오 센티미터나 큰 그의 어깨에 힘겹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니, 대신 이렇게 말할걸. 너 그렇게 살다간 오래 못 버틴다.
그래, 그것이 정답이야.
그가 대답했고, 우리는 1991년 사월의 대학 정문 앞에서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강경대가 죽은 지 이 년 되는 날에, 소주 한 병의 취기에 얼떨떨하게 젖어서, 바람이 부는 길거리에 서서 피들피들 웃었다.
발치에 떨어뜨렸던 권오규에 대한 자료들을 집어 올리다가, 나는 그 봉투 속에서 한 뭉치의 자료들을 발견했다. 도서관에서 20여 년 전의 그의 공소자료들을 찾아낸 복사물이었다. 나는 여기저기에 기사를 쓸 때 인용하기 위해서 붉은 줄을 쳐놓았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권오규의 ‘일당’들은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 이라든가 「민중의 길」이라는 유인물을 통해서 학생들의 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북쪽의 상투적 대남비방 구호인 ‘매판족벌’ ‘자본주의적 착취’ 등의 구호를 사용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이롭게 하고, 유신정권
을 군사독재정권이라고 규정하여, 노동자·농민을 박정희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혁명을 세울 수 있는 주요세력으로 설정하여 폭력혁명을 구상하고, 각목·화염병 등을 준비하여 데모를 유혈화하는 준비를 한, 구제받을 수 없는 공산혁명 의 찬동세력 들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무기징역을 살게 한 죄들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 당시 이미 학교를 졸업 한 사회인의 신분으로 평생을 ‘공산혁명’에 몸 바치기로 한 전업적 혁명가로서 후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학생 신분의 다른 사람들과도 구분되었다.
강경대가 죽은 91년에 비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유인물과 화염병이 무기징역 선고의 절대적인 증거가 되다니……
어떻게 할까, 정말 권오규라는 사람을 다음 달로 미루나, 이민자를 그대로 실어버리나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료들을 덮었다. 바람은 여전히 뿌옇게 창밖에서 불어젖히고 있었다. 마감 상황이 적힌 상황판에는 이미 완성된 기사들에 빨간 동그라미들이 쳐 있었다.
머리 좋은 아내가 펼치는 섹스 체위, 알뜰살림 총집합, 남편의 바람기 이렇게 잡는다, 간암 이겨낸 극적 투병기…… 그리고 이 달의 책 취재란에는 이민자의 이름이 적히고 그 옆에 독촉이라는 체크가 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부랴부랴 취재를 떠나기 전까지 분명 그 자리에는 권오규라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아직 이민자를 이번 달에 싣겠다고 정식으로 데스크와 의논한 일이 없었다. 아까 내가 권오규에 대한 자료를 누런 봉투에 넣고 6월 호용이라고 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좀 묘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걸 데스크에
게 따지자고 해도 권오규든 이민자든 내게 어떤 생각도 잘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어서 나는, 그저 취재수첩을 덮어놓고 담배만 연방 두 대를 피워댔다. 두 번째 담배를 막 끄려는데 급사아이가 전화가 왔다고 알려왔다. ˙
전화기 속에서 들리는 것은 뜻밖에도 강 선배의 목소리였다. 그는 좀 쑥스러운 듯한 말투로 지하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2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강 선배가 연락도 없이 왜 찾아왔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떠들썩한 이혼 소식을 먼발치에서 전해 들었을 뿐, 요 몇 년 동안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기다려도 엘리베이터는 올라오지 않았다. 1, 2, 5, 4·……·9라고 적힌 숫자판 옆에 FULL 이라는 불이 켜진 채였다. 엘리베이터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나는 여전히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가는 여의도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불쑥, 벌써 오 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 잡지사의 사장인 외삼촌의 주선으로 계약직 기자가 되었을 때, 나는 가계부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때는 아직 거리마다 건조한 햇볕이 쨍쨍한 가을날이었다. 일 년 동안 사용할 가계부 포맷을 만들고 가계부의 모서리마다 집어넣을 요리며 알뜰살림 힌트며, 그도 아니면 마이카 상식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때 어두운 자료실 한 켠에서 슬라이드 필름으로 보관되어 있는 요리들을 찾아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대체 이곳 사람들은 어쩌면 저렇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들은 조금의 죄의식 이라든가 조금의 미안한 얼굴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없는 것일까…… 어떻게 날마다 샐러드나 과일안주에 맥주를 마시고, 어떻게 저렇게 비싼 옷을 자랑삼아 입고 다닐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슬라이드 환등기를 켰다. 슬라이드는 찰칵, 찰칵 돌아갔고 찰칵, 찰칵 돌아가는 슬라이드가 환하게 불을 밝히며 스파게티 미트 소스며 사우샌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야채샐러드며 소시지 양상추 샐러드찜 같은 그림들을 보여줄 때마다 술라이드의 번호를 열심히 적어서는 가제본된 가계부 갈피에 끼워놓았었다……
나는 대체 어쩌자고 여기서 이런 낯선 이국 음식의 슬라이드들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내가 사랑한다고 외치던 그들이 대체 이런 음식을 먹어는 보았을 것이며, 아니면 지금이라도 혹여 먹고는 있을 것이며 그도 아니면 죽는 날까지 마이카를 타고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며 이 음식들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볼펜을 놀려 그런 요리들의 고유번호를 적으면서도, 마치 내가 그 가계부의 한켠에 죽고만 싶어, 죽고만 싶어…… 라고 쓰고 있는 착각을 느꼈었다. 강 선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도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도 강 선배는 건물 지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빠져나온 지 거의 삼 개월 만이었다. 그는 변장을 위해서였는지 파마를 하고 검은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가 나를 보자 얼굴을 펴며 조금 웃었다. 파마기가 아직도 서투르게 남아 있어서 제멋대로 뻗쳐 있는 머리. 하지만 그 무성하게 뻗대는 머리칼과는 달리 까칠한 잔주름이 잡히는 얼굴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잘 보였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 보고 보아왔던 잔주름이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그 까칠한 잔주름이 마음에 밟혀서 나는 마주 앉자마자 그의 앞에 놓여져 있던 물잔을 들어 얼른 마셨다.
그래, 괜찮니?
그는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왜 조심스럽게 나에게 묻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 단지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저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에요. 사실은 죽고만 싶어요…… 미안해요,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너무 상투적인 말 같아서 나는 그저 입을 다물고 시선을 여전히 내리깐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바로 찾아오려고 했는데 너한테 오히려 부담이 될 것만 같아서……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었니. 니 사정을 설명하고 그리고 모두를 안심시킨 다음에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가 그래, 괜찮니 하고 물었을 때부터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내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의 의미는 지금 생각해봐도 뭐라고 딱히 꼬집어낼 수 없는 것이긴 했다. 다만 나는 그때 울면서 생각했었다. 내가 도망쳐 나온 것은, 내가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간다고 말하고 도망쳐 나온 것은 당신들이 옳았기 때문이에요. 옳은 당신들에게 무슨 말로, 가령 예를 들어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시다거나, 집안이 기울어서 내가 지금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안돼요라거나,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아요, 라는 핑계두 없이 그곳을 나올 수가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했기 때문이에요…… 라는 생각……그들이 옳았기 때문에 운 것은 아니었지만……그랬다……
날마다 조마조마한 그 시간들이 싫었다. 수배자들과 함께 자고 먹고, 방 밖에서 경찰차라도 지나가는 소리라도 나면 온몸의 신경들이 쭈뼛쭈뼛 서는 그 느낌들. 등사물을 나르거나 책을 가방에 숨겨가지고 거리에 나설 때, 전경이라도 보이면 가슴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치던 그 순간들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지 그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싫음을 견디다 못해 그저 그곳을 도망쳐 나왔지만 내가 도망쳐 향했던 이곳은 그렇다고 ‘싫지 않은 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다른 종류의 싫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신문을 펴면 재빨리 주식값이 적혀져 있는 난만 보고 마는 사람들이 있고, 값이 뛰어오른 아파트를 팔고 값이 더 뛰어오를 아파트를 장만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동차를 바꾸고, 맥주를 마시며 어젯밤 그네들과 잠자리를 한 하룻밤 연인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대고……
바보 같은 자식은·……
그는 피식 웃으며 겨우 눈물을 그치는 나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주었었다. 그날 나는 급한 약속이 있다며 떠나가는 그에게 그날 받은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월급봉투를 들여다보고는 거기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이젠 됐지?…… 너무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그는 말했다. 그가 남기고 간, 아직도 만 원짜리 지폐가 많이 남아있는 월급봉투를 쥐고 나는 그가 사라지는 여의도의 빌딩가를 그를 따라 몇 발짝을 따라 걸었었다.
햇살이 환하게 부서지던 가을날이었다.
들어가 봐라……
네.
어서 들어가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따라가는 나를 안쓰러이 돌아보던 그의 얼굴. 바람도 불지 않던 날에 제멋대로 뻗치던 그의 머리카락……·그렇게 여의도의 빌딩가를 좀 걷다가 나를 돌아다보며 그는 담배를 물고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었다.
저기…… 어차피 알게 될 덴데 말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윤석이가…… 지금 병원에 있다. ……중태다……
……한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곱슬머리칼을 하고 있었고 웃으면 보조개가 들어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노래를 시작하면 그 목소리가 너무나 턱없이 커서, 술집에서 자주 우리를 쫓겨나게 했던……
나는 바쁘다며 떠나가는 강 선배를 붙잡고 아무 곳이나 보이는 데로, 수배 중인 그의 처지를 생각해서 될 수 있으면 어두운 곳으로 그를 끌고 들어갔었다. 양주·맥주라는 간판이 붙은, 조금만 더 밤이 이슥하면 아가씨들이 칸칸이 막힌 곳으로 남자손님들을 따라 들어가는 곳. 대낮부터 들어서는 그와 나를 보며 마담이 이상한 눈초리를 보냈다. 우리들은 일부러 칸막이 속에 들어가 나란히 자리를 하고 앉았다. 마치 대낮부터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는 연인들처럼…… 아니다. 그건 우리들만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담은 아마도 그렇게 어리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낮부터 칸막이가 쳐진 술집에 들어서는 청춘남녀들은 그렇게 굳은,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매라도 맞은 듯 망연한 그런 표정은 짓지 않을 테니까……:
맥주를 두어 병 시켜놓고, 그야말로 말라비틀어진 마른안주를 시켜놓고, 마담이 하품을 하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나는 그에게 물었었다. 그제야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는 맥주를 연방 두 컵을 마셨다.
임투 중에…… 사장이 영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마지막 교섭을 하려고 몸에 신나를 뿌리고 들어갔었나 봐. ……그래도 이 사장이 영 막무가내니까…… 그 사장이 그 지역에서 악덕업주로 유명한 놈이거든. 그래서 제 몸에 신나를 뿌리고 교섭하다가 사장에게 라이터불을 들이대려고 한 거지. 정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면 라이터를 내 몸에 들이대서 불을 붙이겠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나 보지. ……그런데 휘발된 신나가 그…… 사무실 속에 퍼져 있었고 라이터불을 켜자마자 몸으로 불이…… 사장도 중태야. ˙……오늘 석간에 기사가 났던데……
그는 윤석의 용태를 걱정하며 남은 맥주두 다 마시지 않고 자리를 떠났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마저 마시고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그러니까 스파게티 미트 소스며 사우샌드 아일랜드 드레싱을 얹은˙ 야채 샐러드며 소시지 양상추 샐러드찜 같은 요리들을 찾기 위해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신문을 샀다. 그의 기사는 사회면 맨 귀퉁이에 다섯 줄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낱 아침 그의 사망 소식을 나는 조간에서 읽었다.
나는 윤석과 함께 다섯 달쯤을 살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현장에 배치를 받기 전에 윤석과 다섯 명의 남학생들을 우리 집에 묵게 해주었던 것이었다. 한번은 술을 먹은 윤석이 내게 술잔을 던진 일도 있었다. 그를 안 지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는 내게 술잔을 던져놓고 내가 얼굴에서 소주를 다 닦아내기도 전에 제가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형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이 잘린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공장 직당에서 일을 하는, 저 애가 어떻게 대학엘 들어왔는가 놀라울 정도로 가난했던 후배였다. 그는 울면서 말했다.
누나가 뭘 알아…… 누나는 몰라……가난…… 이라는 거…… 다른 기억도 있다. 그가 나의 아파트에 처음 도착하던 날, 아마도 내가 보리차를 끓이려고 주전자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으려는 참이었을 것이다.
누나, 수도꼭지에서 이렇게 더운물이 나오는데 뭐하려고 물을 또 끓여요? 사람들이 와와 웃었다. 나는 솔직히 그때 충격을 받았었다. 더운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집에 한 번도 살아본 일이 없다니…… 보리차랑 온수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그의 말대로 나는 아는 게, 책에서 읽은 거 빼고, 최저임금 숫자 말고, 아는 게 없었다. 만일 첫날 그에게서 받은 충격이 없었다면 나는 술잔을 내게 끼얹은 그와 두 번 다시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끼얹어 내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주를 닦아내면서 사실은 나도 울고 싶었었다. 내가 부모님이 사주신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게 미안했고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게 미안했고 그의 형의 잘린 손이, 그의 어머니가 공장 식당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하시면서 그의 대학 등록금을 대는 게 가슴 아팠다. 하지만 미안해하고 가슴이 아픈 거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가 스스로 화를 풀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생각했었는데 다음 날 그가 먼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다섯 명의 후배들이 내 집에서 살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행동할 일은 거의 없었다. 대충 짐작을 할 뿐, 서로의 일들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
내가 문을 열자 그는 한여름에 일찍 나오는 새파란 인도사과를 한 알 들고 서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갑자기 어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더니 오래 연습을 한 신인배우처럼 말했다.
저기, 사과 드세요……
비죽이 내다보니 다른 네 명의 학생들이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빠듯한 계획 속에서 모처럼 사과를 사다 먹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과를 받아 들고 겨우 고마워, 하고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가, 먼저 사과를 하는 그가, 명색이 선배인 내게 사과를 하는 그가, 빠듯하고 배고픈 나날의 일상 속에서 제가 먹을 사과 한 알을 내게 건네준 그가 고마웠던 것이었다.
그 작은 싸움과 사과 한 알의 화해를 통해서 우리들은 친해졌다. 나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자주 했고 가끔은 삼겹살을 사다가 건네며 그들의 젊고 왕성한 식욕들을 안쓰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들이 우리 집에서 떠나던 날, 떠나서 노동현장으로 가는 날, 우리들은 마지막 만찬을 함께 했었다. 그는 또 턱없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저 깊은 곳에 영혼의 외침
더 험한 곳에 민중의 뼈아픈 고통
내 작은 이 한몸 역사에 바쳐
싸우리라 사랑하리… …
이번에는 쫓아낼 술집 아주머니도 없었지만 내가 아파트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이었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컸다.
누나, 나랑 악수 한 번만 해요.
수줍은 손이었다. 뺄 듯 뺄 듯하다가 그는 내 손을 꽉 움켜잡고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누나. 나는 사실은 이전에는 참 속 좁은 가난뱅이 고학생일 따름이었지만 이젠 아니에요. ……이젠 정 말로 그렇지 않아요. 누나, 믿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으며 천천히 내 손을 놓았다.
저어, 꼭 다시 뵙고 싶어요……우리……
그가 다시 말했을 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우리들이 다시 만날 가능성에 대해 거의 생각지 않았었다. 네가 끌려가든 내가 끌려가든 우리들은 기약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잖니, 그렇게 말할 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렇게 망연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나는 그저 그들이 노동현장으로 가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주기만을,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젊은 날을 보내기를 바랐었다.
강 선배는 그 뒤로 한 번 내게 전화를 걸었었다. 우리는 죽어버린 윤석의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다. 강 선배 역시 수배라는 상황 때문에, 나는 또 가계부를 만드느라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었던 것이었다. 다만 전화를 어서 끊으라는 듯 삐이삐이 공중전화의 경고음이 들릴 때, 그러고 나서 정말이라는 듯 전화가 끊겨버리는 그 사이, 아주 급박한 목소리로 강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오늘 혼자서…… 묘지에 갔었다……
강 선배와 나는 그 후로는 연락을 하지 못했었다. 그가 구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었고 그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었고 그가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식…… 강 선배는 아직도 모른다. 신입생이었던 시절, 삼 학년이었던 그를 내가 얼마나 사모했었는지를. 헤어지던 무렵 윤석이가 나를 몰래 사모했던 것처럼 나는 강 선배를 사모했었다. 어리숙하게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던 우리들을 모아놓고, 말이야, 별거 아니야.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작은 일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은 아주 큰 문제가 작게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바로 그것들을 향해 싸움을 시작하는 거란다. ˙……우리 주변 우리 내부, 사소하게 보이는 작은 일들부터 청소를 해나가는 거…… 알겠니?
라고, 선한 눈매를 어글거리며 웃던 그를, 그 작은 일을 가지고 싸우다가 감옥에 가고, 재판정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교도관에게 입이 틀어 막힌 채 질질 끌려 나와 우리 모두를 울게 만들던 그를, 윤석이 내게 소주를 끼얹었을 때, 윤석과 나를 번갈아가며 달래던 그를…… 노동자가 되고 역시, 중학교만 졸업한 노동자하고 결혼을 했던 그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오 년 후의 그를 만나러 간다. 사소한 일 가지고 목숨 걸 필요 뭐 있어, 라고 말한다는 그를, 아버지가 경영하는 버스회사의 사장이 되었다는 그를, 딸을 둘 낳고 살던 노동자하고 헤어진 그를, 그와 헤어진 후 정신병원에 갇힌, 중학교만 졸업한 노동자의 남편이었던 그를.
오 년 동안 변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카페도 변해 있었다. 그때 어둑어둑 달려 있던 카페의 늘어진 조명등은 천장에 매달린 작고 환한 조명으로 바뀌고 구석구석 칸막이 속에서 만지면 먼지가 묻어 나올 것 같던 의자들은 널찍한 소파로 변해 있었다. 이상했다. 늘 들락거리는 지하 카페의 변화를 나는 왜 그를 오 년 만에 만나는 지금에서야 깨닫는 것일까. 나는 실내를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가 앉아 있을 법한 구석자리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그였다. 그는 녹두색의 실크잠바를 입고 카페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안경은 날이 선 금테로 바뀌어 있고, 서투른 파마 때문에 엉성하던 머리는 가지런히 돌아와 있었고, 그는 살이 좀 붙어 있었다.
몰라보게 변했네……
내가 말했을 때 그는 그런가, 하고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까칠한 잔주름이 피어나지 않았다. 오 년 전의 그는 카페에 들어가면 언제나 구석진 자리를 찾곤 했었다. 수배를 받던 무렵부터 그의 습관이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그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왜 생각했을까.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고, 구석자리를 기웃거리던 내가 돌아보며 그를 발견했을 때, 나는 갑자기 그가 카페의 한가운데 자리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저주했었고, 그가 변혁하고 싶었던 세상의 한가운데 말이다.
사실은 결혼을 하게 됐다. 요 근처에 거래처가 있어서 지나가다가 네 생각이 나서 청첩장이라도 전해주려고……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금박이 박힌 청첩장을 내밀었다.
그런데 너 아직도 낮술 마시고 다니니?……나이가 몇인데…… 그가 웃었다.
아직……? 그래, 내가 아직도……하는 게 있네……
내가 신기해서 말하자, 그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었다. 오 년 전에 그와 함께 마셨던 맥주가 생각났다. 그때도 환한 대낮이었다. 맥주·양주라는 간판이 붙은 컴컴한 룸살롱 같은 데서 우리는 술을 마셨었다. 마치 연인처럼 보이게 하려고 나란히 앉아, 마담이 하품을 하며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죽은 윤석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윤석인 죽고 선배는 사장이 되고 우리는 이제 낮술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강 선배는 작게 기침을 하고 나서는 오 년 만에 만난 후배에게치곤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해나갔다. 나도 그에게 두런두런 답했다. 만일 오 년 전의 우리들이었다면, 설사 그때의 나는 날마다 이상하고 긴 이름의 서양요리들의 슬라이드를 찾으면서 죽고만 싶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아마도 오늘 같은 날 나는 7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였던 권오규란 사람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루겠다. 그가 무기징역을 받고 그의 동료들은 혹은 사형선고를 받고, 내장이 터져나갈 정도의 고문을 받고, 그중의 하나는 사형이 집행되고 그중의 하나는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를 하고, 그러고도 그는 살아남아서 스물몇 살의 청년이 오십이 다 되어 출옥한 이야기 말이다. 출옥을 한 후에도 감옥에 갇혀 있었던 이십몇 년간의 습관 때문에, 밖에서 누군가가 방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방문 안에서 제 스스로 문을 열 줄 모르고, 길을 걷다가도 마치 감옥의 벽이 그에게 달려드는 것만 같은 환각에 흠칫흠칫 놀라서는 바람에 같이 걷던 사람들이 함께 가슴이 내려앉는 슬픔을 맛보고, 그런 그의 이야기 말이다.
그러면 강 선배와 나는 애꿎은 은하수담배만 피워대면서 서로 붉어진 눈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코를 훌쩍여가면서,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긴다, 왜냐하면 우린 옳으니까, 진리를 한번 알아버린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 만,
아까 오전에 전화했더니 취재 갔다고 하더구나. 바쁘니?
강 선배는 나의 침묵이 조금 거북해졌는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으응…… 마감이니까요.
나는 물만 마시며 그를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이 어색함.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 년 전에 있었던 우리 사이의 반가움이 구석진 곳으로만 찾아드는 것 같은 어색함…… 그러니 꼭 죽음이 아니라 해도 사실 이런 만남이 이별은 아닐까.
급하게 취재 갔었어. 이민자라는 사람의 집에. 이번에 책을 냈는데……
아아, 이민자.
강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가 이민자를 알다니, 뜻밖이었다. 데스크가 그녀의 책이 그토록 베스트셀러라는 칭찬을 한 것이 조금 이해가 갔다.
이번에 아버지가 그 여자 그림을 한 점 샀어. 알고 보니 우리 집안하고 먼 일가야……
그래애……
그와 나는 이민자를 안다는 공통점을 겨우 발견하고 서로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취재 잘하고?……
그저.
내 마누라 될 사람이 그 여자 명상법 사다 놓고 요즘 연습한대. 좋다고 읽어보라고 나한테도 한 권 줬는데 아직 못 읽었다. ……바빠서 통 책을 읽을 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도 모처럼 나온,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켜주는 이민자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서둘러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만나보니까 어때?
……글쎄, 뭐랄까, 독특했어.
독특해? 어떤 점이?
그 집엔 강아지가 있었거든…… 그 강아지는 하루 종일 연못가에 놓인 돌에 코를 박고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강아지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이민자 화백이 대답하데. 강아지요? 아아…… 강아지는 명상을 하는 중이에요. ……재미있기에 내가 물었지. 무슨 명상이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어. ……글쎄요, 이런 거겠죠. 물속에 고기가 있네·……
그가 식어버린 커피잔을 들다 말고 푸우, 하고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는 감사했다. 오늘 만일 권오규의 집에 갔었더라면 삼양동에, 골목길이 구불구불한 그 허름한 한옥의 그 그늘진 문간방에, 시멘트로 발라진 서너 평짜리 마당이 있고 그 마당엔 파란 비닐화분에 담겨진 촌스러운 철쭉이 있고 재생고무로 만든 대야가 널브러진 그 집에 갔었더라면 강 선배와의 어색함을 풀 수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와 둘이 앉아서 이미 죽어버린 윤석 이라거나, 권오규의 투옥과 고문과 청춘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건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카페의 한가운데 자리에서 녹두색의 하늘거리는 실크잠바를 입은 그와 마주 앉아서, 이제 와서 나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일어서서 찻값을 지불했다. 언뜻 흘겨본 그의 지갑 속에는 몇 장의 파란 지폐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가 혹시라도 내 월급봉투를 내밀었던 그날을, 그것을 다 준다 해도 그들을 도망쳐 나왔던 내 죄책감을 다 씻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가을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윤석의 묘지에 홀로 다녀왔던 그리고 내게 전화를 걸어 울먹였던 그날들을 가끔은 생각하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곧 웃음을 띠고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약간 어색해하며 내 손을 잡았다.
주차장까지 그를 배웅하고 다시 칠 층에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나는 그의 결혼식을 상상해보았다. 케이크가 잘리고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곳, 그곳에 모일 우리의 옛 동료들을 말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었다. 컴퓨터회사의 사장이 된 선배, 전임 * 자리를 얻은 동기생들, 시집을 가서 애기를 둘씩이나 낳은 친구들…… 하지만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수배 중인 후배와 아직도 감옥에 있는 선배와 그리고 버얼써 죽어버린 친구들·……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그렇게 물었었다.
우리들은 말이야, 우리들은 저 팔십 년대를 결국에라도 말이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벗어나지 못하면 어쩔 거야. 이제사……
그러자 어떤 친구가,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대기업을 포기하고 지금은 작은 컴퓨터회사에 다니는 어떤 친구가 머리칼을 부비다가 말했다.
……나는 아냐, 니들 다 그래도 나는 아냐·…‥ 왜냐하면 나는 아니니까……
우리들은 몹시 취해서 그 자리를 파했었다. 그 친구들도 강 선배의 결혼식에 올까?
엘리베이터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바꾸어 계단 쪽을 택했다. 어둑어둑한 비상구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권오규 선생의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책과 사진기자가 건네준 그의 네가 필름과 처형당한 사람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사람의 이름만 달랑 적힌 취재메모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취재조차 할 수 없는, 바보같이 죽어버린 윤석과, 그런 사람들……
나는 왜 이민자에게 갔었나? 전혀 좋아하지 않는 데스크의 청탁을 왜 그렇게 쉽게 받아들였을까. 받아들여서 권오규란 사람의 책을 다음 달에 소개해도 좋다고 나는 왜 생각하나. ……그건 작은 일이니까. 내가 권오규 선생을 이번 호에 싣든 이민자를 이번 호에 싣든 세상은 어쨌든 그렇고 그렇게 돌아갈 테니까? ……·나는 벌써 팔십 년 대를, 내 이십 대가 고스란히 놓여 있는 그 팔십 년대를 벗어난 걸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풀려난 사람들이고…… 잡지를 읽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건 이젠 철 지난 유행가니까. 그래서?
나는 권오규란 사람의 이름을 선배들이 등사한 팸플릿에서 보았었다. 줄을 치고 필기를 하면서 그들의 운동의 허점과 오류와 그 아나키스트적 인 발상을 비판했었다. 대체 몇십 명의 비밀결사가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70년대적 순진함이여…… 그가 내게 미친 영향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투옥되고 죽어가고 하던 때에도 그저 감옥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문에 박 정권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전두환 씨가 백담사로 간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문민정부시대가 온 것도 아니었다. 그는 팔십 년대에 고스란히 이십 대를 보낸 우리들에게 대체 무슨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윤석은 신중하지 못했다. 그는 일당 칠백 원을 올리기 위해 제 몸에 불을 지르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신나가 휘발성이 있다는 걸 왜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러고도 그 회사의 일당은 오르지 않았었다. 사장은 살아났고 그는 죽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직도 공장의 식당에 나가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계부를 만들면서 잠시 손을 놓고 멍하게 앉아서 바보 같은 것, 바보 같은 것 중얼거렸다. 그가 끼친 영향은 고작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대망의 구십 년대에 이민자는 다를 수 있다. 그녀는 적어도 내게 명상하는 방법을 일러줄 수 있다. 모든 외로운 사람들, 잠 못 드는 사람들, 혼자라는 생각에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만 해도, 이 우주 속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고 당당하고 담담하게 말해줄 수 있다. 그래서 그녀와 희귀한 냄새가 나는 차를 마시노라면, 그래, 혼자서라도 잘살아 보는 거야 하는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용기를 얻으러, 정말 그 용기를 얻으러 나는 이민자에게 갔었나?
무언가 잡을 것이 없을까, 이렇게 허허로운 때에. 술자리에서조차 운동가요는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이때에, 요즘 인천하고 부평하고 울산에서는 말이야…… 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이때에, 누가 수배를 당했는지, 누가 아직 감옥에 남아서 이 차가운 봄날의 냉기를 견디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 이때에, 운동? 너 아직도 그런 거 이야기하니, 하고 말하면 웃음보가 터지는 이즈음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가 아니라 무엇이 좋고 무엇이 싫은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때에. ……·아내 있는 평론가가 출판사 여직원에게 임신을 시키고, 결혼식 청첩장을 돌리던 작가가 술집여자 스무 명과 번갈아 잠을 잔 걸 자랑하고…… 누가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입으며, 사실은 그건 동구권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어. 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대꾸하는 이때에 제발이지…… 라는 마음 하나 품고 나는 이민자에게 갔었던가. 그런가?……
너는 도망친 사람이니 입을 다물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도 입을 다물지도 모르지만, 무서워서 도망친 비겁자라고 욕한다면 진심으로 그들에게 나의 비겁함에 대해 사죄할 용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팔십 년대의 아들이며 딸이었다, 팔십 년대의 아들이며 딸 들은, 어떤 상황이라 하더라도 옳으면 승리한다는, 아아, 너무도 단순했지만 너무도 굳게, 결국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먹고 자란 사람들이었다. ……루카치를 교지에 실었다는 이유로 강제징집을 당하는 선배를 보면서, 학내시위 사실을 학교 신문에 실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된 친구를 보면서, 누군가 작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나면 뒤에 오는 이들은 좀 더 큰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신념, 우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을 배웠던 사람들이었다. 그랬던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동구권을 빼고 나면 정말 한숨과 체념과 방탕과 그런 것들만 남았던 것인가? 그런가……
감옥에서 이십 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의 모습도 보였다. 비밀결사를 다 결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권오규…… 그 무렵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민자.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인도를 맨발로 방랑하는 이민자. ……감옥에서 일곱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일곱 걸음 걷는 권오규. ……아프리카의 눈 덮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사파리에서 불현듯 ‘그 무엇
인가’ 깨닫는 이민자. ……그래도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지겹도록 이십 년 동안 앉아만 있는 권오규. ……무엇을 견디려고, 무엇을 기다리려고 그저 앉아 있는 권오규.……화염병을 들고 뛰던 강 선배, 휴지뭉치를 들고 코를 풀며 따라가던 나. ……일당 칠백 원을 올리려다 죽어버린 윤석이. ……그저 싫어서 도망치던 나. 카페의 한가운데 앉아 있던 강 선배, 흙이 된 윤석이와 낮술, 엉망진창인 나.……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분다. 사진기자는 강경대가 맞아 죽은 지 이 주년이 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오늘 강 선배는 나를 찾아와 청첩장을 내밀고 하필이면 오늘 바람이 분다. 나는 사진기자의 말대로 조그맣게 입술을 오므리고 혼자 중얼거려보았다.
젠장할…… 마감인데 어쩌란 말이야……
영화를 본 일이 있었다. 주말의 명화 시간에. 지금은 제목도, 출연했던 배우도 떠오르지 않는 영화. ……이차대전 중, 다섯 명의 특수요원들이 나치의 댐을 폭파하러 떠난다. 다이너마이트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어머니의 사진을 쥔 젊은이들. 그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었다. 적의 댐과 자신들의 운명을 같이 파괴하러…… 상사는 말한다. 우리의 임무를 생각하면 죽음이 무슨 두려움이랴. 사실은 그 상사를 뺀 나머지 젊은이들은 꼭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댐 속에 들어가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킨다. 그리고 쓰러진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애도를 보낼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서 댐이 무너지고 물줄기가 솟구쳐 내리고, 그들 역시 그 물줄기에 횝쓸리는 그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기만 한다면……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잠시 후, 그들 젊은이들은 댐 속에서 깨어난다. 그들은 기절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던 상사가 웃는다.
망할 자식들…… 이 거대한 댐이 다이너마이트 몇 개로 폭파될 줄 알았던 거냐? 이제 우리가 구멍 낸 자리에 물이 스며들고·…… 그리고 댐은 바로 그 구멍 난 틈으로 스며드는 이 강의 물줄기가 무너뜨리는 거야…… 자, 얼른 일어나! 여기를 빠져나가자.
아까 마신 소주의 취기가 그제야 뭉게뭉게 올라왔다.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계단이 아물아물거렸다. 나는 잠시 난간에 두 손을 짚고 너무 늙어버린 노인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러니 이제 마지막으로 열무싹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이민자의 통나무집을 나서면서 내가 느꼈다는 열무 싹 같은 슬픔이라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슬픈 거면 슬픈 거고 열무 싹이면 싹이지 열무 싹 같은 슬픔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이민차를 결코 권오규만큼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실은 더 매력 있고 더 재미있는 시간을 내게 내주었지만, 권오규의 동생은 지루했고, 권오규는 내가 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만 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나는, 미안하다, 나는 그들의 지나온 삶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팔십 년대에 이십 대를 고스란히 보냈듯 그들이 보냈던 이십 대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삼십 대가 다가오듯이 그들의 삼십 대와 그들의 사십 대를 시궁창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 우리의 정치사와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이제 정말 열무 싹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이견 정말인데, 나는 오늘 아침에 먹다 남은 차 찌꺼기 모은 것을 그 열무 싹이 뿌리 내린 흙에 뿌려주고 그것을 다른 흙으로 덮었다. 땅이 너무 척박해서 그것이라도 비료를 주어야겠기에…… 나는 빌었었다. ……날씨가 더 무더워져서 이 차 찌꺼기들이 빨리 썩기를, 썩어 문드러져서 거름이 되기를…… 나는 그걸 바라면서 아직 차가운 봄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그들이 썩지 않으면 그들은 열무 싹과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파릇파릇한 어떤 싹도 틔울 수 없을 테니까……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권오규의 기사 첫머리가 그제야 내 머리에 떠올랐다.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천천히, 낮술에 취하는 몸을 조심스럽게 가누며 칠 층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계단으로 올라섰다. 멀리 데스크가 하품하는 모습이 보였고, 나는 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실천문학』 30호(1993년 여름); 『인간에 대한 예의』 (창비 1994)
공지영(孔枝泳)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단편소설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이들이 변화된 환경 속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가부장적 남성들에 의해 억압받는 여성들의 삶을 그려왔다.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별들의 들판』,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고등어』 『봉순이 언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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