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윗 때 하나님께 성전 건축을 서원했는데
드디어 솔로몬이 완성했다.
성전 건축에 이의를 거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저 좋은 것으로 인식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그런 사안.
그런데 이것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은
다윗이 성전 건축을 하겠다고 했을 때
100% 만족하실 것 같았던 하나님께서
약간의 찜찜함을 보이셨었다는 점이다.
일단 성전을 건축한다는 점에서
가장 높이 평가될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점이다.
다윗과 솔로몬으로서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보일 수 있는 가시적인 정성 중에
가장 열심을 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비록 규모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규모보다는 작지만(교실 2~3개 정도)
7년 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쏟아부어 건축했다.
그렇게 건축한 성전을 통해
공동체 중심의 예배와 신앙의 구심점이 생긴다는 점에서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9장에서
그 성전을 인정하고 받아주셨다.
반면, 조금 세밀하게 바라보면
유의해야 하는 점이 있다.
아마도 매우 섬세한 부분이기에
하나님께서도 찜찜함 속에서도
추가적인 표현은 안 하신 것 같다.
성전 건축이
큰 부분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하나님을 성전 안으로 고정시키는 현상의 시작과
성전과 성전 안에서의 행위가
신앙의 중심인 것으로 여겨지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골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성전 안과 밖이 너무 달라지는 듯한 현상이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있다.
신앙생활은 주일 예배와 성전 안에서의 기도가
전부인 듯한 삶.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것이 아니고
내가 발걸음 옮기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는데
성전에서의 나와, 성전을 벗어난 나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이중적인 신앙생활.
언젠가 주차가 어려운 제주의 한 지역에서
평일에 차량 한 대도 주차되어 있지 않은 교회 주차장에
외부 차량 접근을 금지한 채
장애물과 표시물로 막아놓은 것을 보고 한숨을 쉰 적이 있다.
교회가 게토화되고 교회 안에서만의 천국이 될 때
좀 심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거기를 떠나신 건지도 모른다.
2.
9장 13~14절의 내용이 잠시 나를 멈추게 하고
생각하게 했다.
히람이 솔로몬의 답례품에 불만을 토로하는
전체 본문과 맥락이 다른 다소 뜬금없는 내용이다.
히람은 솔로몬의 부탁에 지극 정성을 다해 헌신했는데
솔로몬이 그 답례로 다소 쓸모없는 땅인
오지 마을 10개를 준 것이다.
이 부분을 굳이 좋은 일들로 넘쳐나는 본문 가운데
끼워 넣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복선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의 나중은 우리가 사실 잘 안다.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방향의 시초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완벽할 정도로 훌륭한 듯하지만
아주 작고 미세한 부분에서는 이미 낌새가 보이는 것이다.
다른 것은 정성스럽게 처리하는데
히람에게 대하는 것은 최선이 아니다.
남은 것, 자신들에게도 쓸모없는 것으로 떼운다.
이것이 솔로몬의 후기 모습을 예견하는 듯하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교회가 대형화될수록 관리상의 이슈들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한계를 드러나게 된다. 소홀하게 된다.
불가피하다. 그럴 때 오히려 더욱 살펴봐야 하는 것은
힘없고 평범하며 무관심의 대상에게 특별한 접근을 해야 한다.
그런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가 나의 순전함의 바로미터이다.
안된다고, 우선순위가 떨어진다고만 하는 것은 좀 생각해 봐야 한다.
오히려 드러나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 양해를 구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작고 돌봄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야 한다.
최근에 국가적 영향력을 주는 기도회를 주최하는 교회에서
한 부분의 일을 담당하는 부교역자가 과로로 숨졌다.
참으로 안타깝다.
All for one, One for all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보통 One for all에 집중하는 대신, All for one은 관심 밖인 것이
우리 모습이다.
아무튼 우리의 균열은 거기서 시작한다는 점만큼은
명심하고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