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꽃들은 본연의 색으로 아름다움을 뽐내고, 산천은 그 푸르름을 더해 눈부시게 싱그러운 봄이 돌아왔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어느새 저만큼 멀어진 요즘, 가벼워진 옷차림 만큼이나 가벼운 마음은 우리를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만든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타고 어디로 가볼까? 여기, 국내여행 마니아들이 우리의 고민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 나섰다. 이들의 조언을 이정표 삼아 올 봄에는 숨은 국내 여행지로 나들이 해보자.(편집자 주)
계절의 여왕 5월. 하늘과 맞닿은 고산의 능선길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드는 산불이 아니라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 철쭉이 연출하는 꽃불이다. 특히 지리산 서북릉의 바래봉 일대에 펼쳐진 철쭉 군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상화원 중 하나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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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뻘건 꽃불에 휩싸인 팔랑치 부근의 철쭉 군락. |
해발 1000m 이상의 산등성이 펼쳐진 산상화원
바래봉은 산세가 유순하다.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양을 닮았다. 그래서 ‘바리봉’이라 불리다가 바래봉이 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에 사는 운봉 사람들은 마치 삿갓처럼 생긴 봉우리라고 해서 ‘삿갓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바리때와 삿갓을 닮은 바래봉 정상의 높이는 해발 1165m에 이른다. 그런데도 정상까지 오르내리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산행 기점인 전북 남원시 운봉읍내의 평균 해발고도가 400m 이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등산로의 경사도 완만한 편이어서 온 가족과 함께 떠나는 봄꽃 트레킹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바래봉 철쭉 산행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철쭉공원 주차장과 바래봉 사이를 왕복하는 제1코스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왕복 5.5㎞ 길이의 이 코스를 섭렵하는 데에는 느긋하게 걸어도 네댓 시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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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어있는 바래봉의 산철쭉. |
바래봉 산행기점인 철쭉공원 주차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운지사 입구의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흔히 ‘우무실절’로 불리는 운지사에 당도한다. 바래봉 능선의 철쭉 군락을 찾아가려면 왼쪽의 옛 임도를 따라가야 한다. 약 1시간30분쯤 이 길을 걸으면 시야가 훤한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붉은 철쭉밭 너머로 운봉고원 일대의 들녘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래봉, 팔랑치(1036m), 부운치(1140m), 세걸산(1198m) 등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릉의 능선길을 붉게 물들인 철쭉이 일대장관이다. 특히 바래봉과 팔랑치 사이의 1.5km쯤 되는 능선길에 피어난 철쭉은 붉은빛이 지나쳐서 숫제 섬뜩한 핏빛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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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봉 능선길 주변에 핀 다양한 철쭉꽃. |
일반적으로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산철쭉은 다른 나무와 섞여 제멋대로 자란다. 키가 크고 꽃도 듬성듬성 달려있는 데다 꽃빛깔은 엷은 분홍색이다.
하지만 바래봉의 철쭉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편이다. 또 철쭉끼리만 둥그렇게 군락을 이루고, 꽃빛깔이 아주 붉다는 것이 일반적인 산철쭉과 다른 점이다.
더욱이 철쭉 군락지에는 푹신한 초원이 형성돼 있다. 붉은 철쭉과 초록빛 잔디가 절묘하게 조화된 풍경은 마치 정성스레 다듬어놓은 인공정원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석평전과 함께 지리산을 대표하는 철쭉명소인 바래봉은 우리나라의 어느 곳보다 오래도록 철쭉꽃을 감상할 수 있다. 해발고도에 따라서 철쭉의 개화기가 저마다 다른 덕택이다.
날씨에 따라서 해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해발 500m대는 4월25일~5월5일, 해발 700m대는 5월1일~5월 10일, 해발 900m대는 5월5일~5월15일, 그리고 해발 1000m 이상의 능선길 주변은 5월10일~5월 20일까지 철쭉이 피고 진다. 철쭉 개화기에는 ‘지리산 운봉 바래봉 철쭉제’도 열리는데, 올해는 4월 27일(토)부터 5월26일(일)까지 거의 한달 동안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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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꽃길을 걸어가는 등산객. |
바래봉까지 간 김에 찾아볼 만한 문화유적
바래봉 아래의 운봉고원 일대에는 옛 선인들의 공동체의식과 토속신앙을 엿보게 하는 돌벅수(석장승)가 여럿 있다. 철쭉공원 주차장에서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인 운봉읍 서천리 동구 밖의 느티나무 아래에도 돌벅수 한 쌍이 우두커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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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 서천리 당산의 방어대장군. |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이 돌벅수는 세모꼴의 벙거지를 쓴 머리에 왕방울만한 눈, 그리고 뭉뚝한 주먹코, 꼭 다문 합죽이 모양의 입에서 애써 위엄 있는 표정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름 없는 민중의 얼굴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 돌벅수는 현재 국가에서 중요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 밖에 운봉읍 북천리와 권포리, 그리고 운봉읍과 인접한 아영면 개암주마을과 인월면 유곡마을 등에도 볼수록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소박한 돌벅수가 서 있다.
철쭉공원 주차장에서 4km쯤 떨어진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에는 황산대첩비(사적 제104호)가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에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황산대첩비를 토막낸 뒤에 비문까지 긁어내어 글씨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참으로 옹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일제의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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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파괴된 황산대첩비. |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탯자리로도 유명하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1801~1863)과 여류 명창 박초월(1916~1983)이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특히 송흥록은 역대 판소리 명창들 중에서 가장 기량이 뛰어나 ‘독보건곤’(獨步乾坤), ‘가왕’(歌王) 등의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현재 비전마을의 송흥록, 박초월 생가터에는 ‘판소리공원’이 조성돼 있어 동편제 판소리의 원류를 찾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찾아온다.
●여행정보
바래봉 등산코스
제1코스/ 철쭉공원 주차장→바래봉→철쭉공원 주차장. 총 5.5km, 왕복 3시간 소요
제2코스/ 철쭉공원 주차장→바래봉→팔랑치→철쭉군락지→부운치→세동치→전북학생교육원. 총 11km, 6시간 소요
제3코스/ 철쭉공원 주차장→바래봉→팔랑치→철쭉군락지→산덕리(보리당). 총 8km, 4~5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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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화원을 이룬 부운치 부근의 철쭉 군락. |
숙식
운봉읍에는 숙박시설이 별로 없다. 괜찮은 숙박업소를 이용하려면 인접한 주천면이나 남원시내로 나가야 한다. 주천면의 스위트호텔(063-630-7100), 호텔마음(063-631-9999), 그린피아모텔(063-636-7200), J프리방스펜션(063-625-1555) 등이 추천할 만하다.
남원시내에는 호텔마음(063-631-9999), 켄싱턴리조트(063-636-7007), 중앙하이츠콘도(063-626-8080), 윈저호텔(063-625-1801), 퀸파크텔(063-625-2030) 등 숙박업소가 많다.
운봉읍내에 위치한 황산토종정육식당(063-634-7293)에서는 비계가 얇아서 담백하고 쫄깃한 지리산 흑돼지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운봉읍내에서 60번 국가지원지방도를 따라 6km쯤 가면 주천면 고기리 내기마을에 당도하는데, 이곳의 에덴식당(063-626-1633)은 산채비빔밥이 맛있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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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의 추어탕과 추어숙회, 에덴식당의 산채비빔밥. |
지리산에서 채취한 16가지의 나물 반찬과 된장찌개가 나오는데, 상차림이 정성스럽고 재료도 정직하다. 그리고 남원읍내 광한루 근처의 새집(063-625-2443), 부산집(063-632-7823) 등은 추어탕과 추어숙회의 본고장인 남원에서도 알아주는 추어탕집들이다.
글·사진/양영훈 여행작가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전 회장, 현재 대외협력이사. 월간 <샘이깊은물>기자를 그만둔 뒤로 20년 동안 국내 전문 여행작가의 외길을 걷고 있다. 총 6종의 교과서에 글과 사진이 수록되었으며, 총 10권의 개인저서와 20여권의 공저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