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카페 게시글
정보올리기 스크랩 교향곡의 기법과 빈시대의 걸작들 - 안톤 브루크너 下
remnant 추천 0 조회 42 06.09.20 17: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Anton Bruckner: SymphoniyNo.9, d minor

♣ 교향곡의 기법



그의 교향곡은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는 순수음악이며, 푸가기법과 같은 의미에서는 교향곡의 기법
(A. 마샤베)이라고 칭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확실하며, 어느 교향곡이나 제1교향곡에 관해서는
이미 보아온 바이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가령 확실한 표제가 없더라도 적어도 작곡가의 창작시의
상황이나 그때 음악가에게 닥쳐온 감정과의 직접적인 유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브루크너는 본질적으로 낭만파라는 것, 따라서 낭만파 시대의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역사적인 위치에서 말하자면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말러나 20세기 작곡가들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이러한 두 사실은 적어도 그의〈비시간적〉이라는 생각과는 상반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신비주의〉라 불렸던 것도 사실은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앞에 둔 그의 감탄과,
그가 인정한 미의 창조자에 대한 감사의 뜻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신비주의〉라는 말은 그의 전교향곡 중에서, 그리고 특히 그 아다지오에 있어서 항상 변치 않는
그의 사상의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다지오 중 적어도 마지막 5개는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영감이 풍부한 페이지로 꼽힐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격렬한 갈등은,
영국의 음악학자 로버트 심슨이 행한 뛰어난 연구에서처럼 화성적 긴장으로 나타나 있는데,


『Robert Simpson』

그것은 또한 구스타브 카르스「Gustave Kars」가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을 가진, 그리고 이처럼 복잡한 작품이 투쟁도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 행복한 인생의
결실일 수 있었던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 방향성에 관해서도 매우 다양했던 이들 교향곡은 어느 것이나 단절됨 없이 발전의 길을 걸었습니다.
즉, 개개의 교향곡은 선행한 곡에 뒷받침되면서 다음에 생겨날 곡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형식상의 구성은 두 가지 기본 원칙에 따르는데, 그 하나는 후기의 슈베르트에 의해서 이미 착수된
과정을 조직화하여 완성시킨〈내적 통일〉입니다. 단 하나의 중요한 구조에 의해서 악곡 전체를
쌓아 올리는 것이며, 그것이 전악장을 풍부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성공을 거두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세 주제〉의 소나타 형식이다. 이것은 템포의 연속과 마찬가지로 콘트라스트를 중시한다는
배려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격렬하거나 서사시적인 두 개의 소재가 서정적 특성을 갖춘〈가요 주제〉를
에워쌉니다. 너무나도 널리 보급된 사고방식과는 반대로 브루크너의 교향곡은 곡의 길이도
제5번과 제8번의 두 예외는 제외합니다만 오케스트라 편성의 크기도 그 이전의 음악가들의 많은 예
(베를리오즈 등)를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브루크너는 후기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에 사용되는
악기 이외의 악기를 사용하는 일은 결코 없었으나 보다 근대적인 테크닉, 그리고 특히 음색의 선택과
배분에 관한 확실한 직관 덕분에 보다 화려한 효과를 이 오케스트라에서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9. Symphonie in d Moll, Scherzo』

그러나 그것은 유니즌의 남용이 아니라 큰 블록(악기군)을 단위로 하여 발전해 가는 오케스트라의
각 그룹 상호간의 독립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이것이야말로 20세기에 처음으로 재발견되는 방법에
의하고 있는 것이지요. 브루크너의 표현에서 보이는, 종종 주요 악상의 발전을 준비하는
휴지(온쉼표)의 빈번한 출현 또한 오르간 연주와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침묵〉이 주는 역할은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세 낭만파 작곡가(슈베르트, 브루크너, 말러)에게
공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교향곡에 있어서 오히려〈허무에의 공포〉를 주장하는 저
독일 낭만파 작곡가(베토벤에서 레거에 이르는)와 그를 구별하는 근본적인 특색인 것입니다.



끝으로, 브루크너의 주요 전례작품은 1881년에 착수되어 1884년에 완성한 테 데움을 유일한
예외로 하고 빈에서는 전혀 작곡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광의 시대의 교향곡(제2번 부터 제9번까지)
이 종교적 표현과 세속적 표현을 동일한 장르 속에서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사를 통하여 거의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이원성과 서법의 획득 덕분에 브루크너는 J. S. 바흐와 베토벤이라는 두 위대한 인간성의 찬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역적, 민족적인 테두리를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이미지를 주목한다면 한스 폰 뷜로가 꼽은〈세 거장〉의 세 번째 사람은 브람스가 아니라
단연 브루크너입니다. 그에게 바쳐진 다종 다양한 연구는 우리 시대의 음악에 대해서 그의 메시지가
갖고 있는 가치와 중요성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를 날이 갈수록 더욱더 확실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Hans Von Bulow』


♣ 빈 시대의 많은 걸작들

빈 시대에 작곡된 교향곡 제2번은 브루크너가 아끼던 제자이며 스승의 가장 중요한 자서전을 쓴
아우구스트 괼레리히「August Gollerich」에 의해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교향곡>이라 불려졌습니다.
탄력적인 스케르쪼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민속무용은 그 후 적어도 제5번까지의
교향곡의 스케르쪼에 항상 나타나는 요소가 됩니다. 제3번은 베토벤풍의 서사시적 영감과
니벨룽겐의 반지의 세계를 잇기 위해 처음으로 야심을 불태운 것이며 이것은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브루크너는 빈의 전통주의적 비평가들로부터 20년 동안 배척되었습니다.



제4번은 작곡자 자신이〈낭만파〉라는 부제를 붙이고 있으며 각 악장에도 소박한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제4번은 전체적으로 자연에 대한 사랑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흔히 비교되는 전원에 비해서
명확하게 지시하는 의도의 횟수는 훨씬 적습니다. 그 대신 그 순환적인 구성법은 가장 완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5번(1875-77)은 이 작곡가의 특히 전형적인 창작이며, 일련의 교향곡 중에서
최초의 정점을 형성하는 작품입니다. 그는 이러한 말을 결코 듣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 중 푸가를 도입한 뛰어난 음의 구축물이며, 빈풍의 서정성에 종교적인 분위기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제6번은 이 음악가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서 만든 것도 아닌 수많은 목가 중의 하나인
에필로그가 아다지오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스케르쪼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7번은 작곡가에게 국제적으로 영광을 안겨준 교향곡으로 1884년 12월 30일 아르투르 니키슈에
의해서 라이프찌히에서 행해진 초연은 이튿날 그를 암흑에서 양지바른 곳으로 끌어내 주었습니다.
이 교향곡에는, 사용되고 있는 선율 자체의 품위도 그러하고 오케스크라의 화려한 장식, 그리고
폭넓은 청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브루크너가 처음으로 튜바를 사용한 아다지오는
바그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 최후를 장식하는 〈만가 Trauerode〉는
그 13년 후 작곡가 자신의 장례 때 그를 묘지로 인도하게 됩니다.



전교향곡 중 가장 장대하고 가장 복잡한 제8번(1884 ~ 1890)에는 표제적인 요소가 적어도 세 개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제2곡의 제1악장 최후에 울려퍼지는〈죽음의 시계 Totenuhr〉입니다.
제2의 요소는 스케르쪼에서의 다뉴브 강변의 농부의 그림이며, 제3의 요소는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 황제들의 만남을 묘사한, 피날레의 막을 여는 3회에 걸쳐서 밀려오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작품의 주제를 모조리 겹쳐 놓음으로써 장대하고 파란에 찬 끝맺음은 이러한 지엽말절(枝葉末節)을
초월한 점에서 교향곡이라는 형식 그 자체가 가진 잠재적인 가능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Ave Maria ( Anton Bruckner )』

상징적으로 〈선한 신〉에게 바쳐진 제9번에서 그는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었을까?
제1악장의 규모나 아다지오의 최고조의 부분에서 화성적 소재(온음계의 모든 겹침)에 의해서 실현되는
쾌거에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음악가가 최후의 날까지 쓰고 있던 최종 악장의
스케치에서는 조성의 기능이 종종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최후의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Abstract Paintings by Garry Pisarek』

코다의 첫머리에서 중단되고 있지요. 따라서 이 거장은 스케르쪼의 심연으로
향하는 무서운 흐름 뒤에 이어진 아다지오의 숭고한 정적 속에서 이 세상의 청중과 작별을 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서히 몸이 쇠약해져서 수종(水種)과 폐병(肺病)이 발병하여 그는 1896년 10월 11일
세상을 떠났는데, 그동안 또 다른 장르에서 적어도 두 개의 비올라를 사용하는 현악5중주곡
F장조(1879)와 헬골란트(1893)를 남겼습니다.


『Linz Old Cathedral -
Anton Bruckner was once organist here.』

헬골란트는 아우구스트 질버슈타인「August Siblerstein」의 시에
바탕을 둔 남성합창과 대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서 그가 끊임없이 만들어낸 약 40곡을 헤아리는
세속합창곡의 최후를 장식하는 작품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종교음악에서는 브루크너의 작품으로
앞에 든 테 데움 외에 반짝반짝 빛나는 시편 제150편(1892)과 가장 유명하고 새로운 표현을 가진
마지막 몇 곡의 모테트 4개의 그라두엘레, 금관악기를 수반한 이것이야말로 대제사이다(1886),
왕의 깃발은 펄럭인다(1892)가 있습니다.




♣ 사후(死後)의 청중


『Bruckner's easy chair』

안톤 브루크너의 장례식은 음악의 도시 빈의 전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1896년 10월 14일
성 칼 교회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는 몇 주 전에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증명서를
의사에게 요구했었습니다. 그는 또 자기의 관을 성 플로리안 수도원의,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는 오르간 밑 지하의 납골당에 매장하지 말고 안치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The Bruckner Organ in St. Florian Monastery』

이 소원을 들어주려고 사람들은 터키의 침공이 있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하 묘지를 발견하여
수천의 인골(人骨)을 발굴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브루크너는 그들 앞에서 영원히 연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A Stamp of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Bruckner』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