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관령 옛길
대관령 옛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이래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서, 대관령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10년에 명승 제74호로 지정되었다.
대관령 옛길은 고개 중간에 위치한 반정(半程)에서 내려가는 길과 대관령박물관이나 부동(釜洞, 가마골)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강릉단오제의 첫 제례는 대관령 옛길에 위치한 산신각과 국사성황당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나면서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쓰고, 강릉이 고향이었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어린 율곡(栗谷)을 데리고 함께 넘던 길이기도 하다. 또한 영동지방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을 가기위해 넘기도 하고, 영동지방의 물산을 보부상들이 지고 오르기도 하였던 고갯길이다.
반정은 ‘길의 절반’ 되는 위치라는 뜻이다. 강릉과 횡계 사람들은 ‘반쟁이’라고 부른다. 도중에는 원울이재[員泣峴, 원울현]가 있는데, 이곳은 신임 강릉부사가 부임할 때 고갯길이 험해서 울고, 임기가 끝나서 다시 고개를 넘어갈 때는 강릉의 인정에 감복해서 울었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대관령 옛길이 끝나는 곳에 대관령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제민원(濟民院)이 있던 터라고 한다.
▲ 대관령 옛길 계곡
▲ 대관령 옛길 주막
▲ 대관령 소나무숲
▲ 소나무숲에서 바라본 강릉시내
▶ 함께 한 분이 쓴 여행기는 아래에 가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san330/222022857393
▲ 외옹치해변 바다향기로
♣ 아바이 마을
속초시는 청초호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호수는 동해와 만나기 위해서 청호동 북쪽 끝자락에 작은 출입구를 터놓았다. 그 병목 지점으로 바닷물이 드나들고 고깃배들이 왕래한다. 속초시는 6·25 전쟁 당시 북한에 살던 피난민들이 많이 정착하면서 빠르게 성장한 항구도시이다. 속초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는 동해안의 이름없는 작은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속초에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가?
이유는 단 하나, 고향 땅과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급히 피난 나온 터라 빈 손이었던 그들에게 속초는 고향에 갈 날까지 입에 풀칠할 일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남자는 고깃배 타고 나가서 어부로 일하고, 아낙네들은 포구로 돌아온 고깃배 그물에서 생선들을 떼어내며 어려운 시절을 이겨냈다.이 같은 신산의 세월이 아직껏 남아있는 동네가 바로 청호동이다. 속초해수욕장 위쪽으로 난 길을 곧게 따라가면서 청호동 만나기는 시작된다. 길은 좁고 낮은 집들은 세월을 거슬러 간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침내 철교가 하나 나오고, 그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직진하면 길은 끝난다. 여기서 갯배를 타면 속초시내 중심가인 동명동으로 건너갈 수 있다.'아바이'를 따서 아바이마을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이름의 유래이다. 청호동 갯배의 운행구역은 청호동에서 중앙동까지이며, 갯배의 이름은 청호1호, 청호2호이다. 새벽 4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운행된다. 동명동에서 건너오는 갯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상국 시인이 쓴 '청호동 갯배'라는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우리는 뱃길 북쪽으로 돌릴 수 없어
우리 힘으로는 이 무거운 청호동 끌고 갈 수 없어
와이어로프에 복장 꿰인 채 더러운 청초호를 헤맬 뿐
가로막은 철조망 넘어 동해에서
청진 원산 물이 가자고
신포 단천 물이 들어가자고
날래 따라나서라고 날마다 아우성인데
우리는 동력도 키도 없어…"
청호동 갯배는 사공이 따로 없다. 배를 탄 승객들은 저마다 쇠갈쿠리를 들고 호수바닥에 가라앉은 쇠줄을 끌어당긴다. 배가 지나간 뒤로 쇠줄은 다시 바닷물 속에 가라앉는다. 속초항으로 드나드는 다른 배들의 통행에 방해가 될 리 없다. 청호동에서 속초관광호텔, 영금정, 동명항 등이 있는 중앙동이나 동명동 방면으로 가려면 차를 탔을 때 10리가 넘는 청초호를 한바퀴 돌아야 한다. 그러나 갯배를 타면 1, 2분만에 건너갈 수 있다. 청호동은 드라마 '가을동화' 촬영지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여행자들이 부쩍 늘어난 덕에 활기가 넘치는 마을로 변모했다. 한 수퍼마켓은 '은서네집' 이라는 현수막과 출연 탤런트들의 사진까지 내걸고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청호동 바닷가 백사장은 태석이 은서의 병을 고치게 해달라고 기원했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 설악산 울산바위 [ 명승 제100호 ]
남한에서 가장 멋진 암괴가 설악산 울산바위이다. 울산바위로 오르는 길은 설악동 소공원의 신흥사 옆으로 나있고 중간에 흔들바위가 있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고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도 보이고 외설악 전경도 눈에 들어온다. 소공원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 왕복하는데 서너 시간이 소요된다. 해발 873m의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km이며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 경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울산바위의 명칭은 3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울타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과 경남 울산의 지명을 딴 전설적인 이름, 또 하나는 우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등이 있다. 울산바위 허리에 구름이 휘감기면 흡사 구름 꽃송이가 피는 것 같다.
♣ 12선녀탕[탕수동계곡]
강원도 인제군 북면 인제고성 간 46번 국도 12㎞ 지점인 북면 남교리에 위치하고 있는 계곡이다. 폭포와 탕의 연속으로 구슬같은 푸른 물이 우뢰와 같은 괴성으로 갖은 변화와 기교를 부리면서 흐르고 있다. 옛말에 12탕 12폭을 흔히 십이선녀탕이라고 불러왔으며, 탕의 모양이 장구한 세월에 거친 하상작용에 의해 오목하거나 반석이 넓고 깊은 구멍을 형성하는 등 신기하고 기막힌 형상을 이룬다. 십이선녀탕을 찾아가는 계곡에는 단풍나무.전나무.박달나무.소나무 등 거목이 우거져 있어, 계곡의 모습이 황홀하기 그지없다. 십이선녀탕계곡은 물을 건너는 곳마다 많은 나무다리가 놓여 있으나, 전형적인 V자 협곡이므로 폭우가 내린 경우에는 상류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 계곡은 가을 단풍철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계곡 최상류에서 안내판을 따라 대승령까지 가는 경우, 길을 혼동하기 쉬운 지형이므로 주의해야 하며 특히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올 경우, 길을 잘못 드는 일이 많으므로 나침반과 지도를 준비하는 것도 좋다. 남교리에서 십이선녀탕 계곡으로 올라 대승령을 거쳐 장수대로 하산하는 데는 걷는 시간 만 7시간 30분~8시간이 걸린다. 장수대에서 출발하여 대승령을 거쳐 십이선녀탕계곡으로 내려오는 경우에도 비슷하다. 중간에 쉬는 시간과 식사시간을 고려하면 최소 10시간 정도는 걸린다고 보아야 한다. 중간에 산장이나 대피소가 없으므로, 대개는 아침 일찍 장수대에서 출발하여 남교리까지 하루 일정으로 산행을 마친다.
▲ 복숭아탕
▶ 함께 한 분이 쓴 여행기는 아래에 가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금강산 건봉사 [ 乾鳳寺 ]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여기에는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다. 782년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한다.
810년(헌덕왕 2) 승전(勝詮)이 당나라 현수(賢首)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845년(문성왕 7) 백화암(白華庵)을 창건하였다.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중수한 뒤 절의 서쪽에 봉형(鳳形)의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1358년(공민왕 7)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건봉사라 하였다. 1464년(세조 10)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願堂:소원을 빌기 위한 지정 사찰)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孝寧大君)·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조흥수(趙興洙) 등을 파견하여 노비와 소금을 하사하고 사방 10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1523년(중종 18) 보림(普琳)이 이 절과 보림암을 중수하였고, 1605년(선조 38) 유정(惟政)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오면서 불사리와 부처님 치아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으며, 혜능은 안양암(安養庵)과 적명암(寂明庵)을 중건하였다.
1673년(현종 14) 수흡(修洽)과 도율(道律)이 1,200근의 범종을 주조하여 봉안했고, 1683년(숙종 9)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시주한 1,000금으로 불상을 개금(改金)하였다. 이 때 명성왕후는 불장(佛帳)과 탁의(卓衣)도 시주하였다.
1708년 능파교(凌波橋)의 비(碑)를 세우고 동대암(東大庵)을 창건하였으며, 1724년(경종 4) 주지 채보(彩寶)가 구층탑을 건립하고 부처님의 치아를 봉안하자 명성왕후가 천금을 내렸다.
1726년(영조 2) 석가치상탑비(釋迦齒相塔碑)를 세웠으며, 육송정 홍교(六松亭 虹橋)를 중건하고 비를 세웠다. 1754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상궁 이씨와 안씨를 보내어 석가상을 만들게 하고 팔상전을 세워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8월에는 영조가 숙종의 어제절함도(御製折檻圖)와 어필서(御筆書)를 내려 어실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1799년 강원도 순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유정의 기적비(紀績碑)를 세웠고, 1802년(순조 2) 용허(聳虛)가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04년 왕비 김씨가 금 1,000금과 오동향로·오동화준(梧桐花樽)·양산 등을 내려 순조의 성수를 축하했다. 1805년 왕비 김씨는 나라를 위한 재(齋)를 올리고 병풍과 『화엄경』 1부를 하사하였으며, 1828년 유정의 영각(影閣)을 지었다.
1851년 유총(侑聰)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65년(고종 2) 화은(華隱)을 청하여 강원(講院)을 개설하였는데, 이 때부터 대표적인 강원의 하나로서 많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1878년 4월 3일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이 때 학림(鶴林)이 불 속에 뛰어들어 팔상전의 삼존불상과 오동향로·절감도 등을 꺼내었다. 1879년 개운사·중흥사(重興寺)·봉은사·봉선사(奉先寺)·용주사 등의 도움을 얻어 대웅전·어실각·사성전·명부전·범종각·향로전·보안원·낙서암·백화암·청련암을 중건하였다.
1881년 관준(寬俊)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하였고, 1885년 운파(雲坡)가 모연금으로 대웅전·관음전·명부전·사성전의 문을 개조하고 대웅전 후면을 돌로 쌓았으며, 1886년 명례궁(明禮宮)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1888년 청련암과 대원암이 불탔으며, 1889년 인파(仁坡)·관준 등이 팔상전·진영각·노전·극락전을 중건하였다.
1891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소상재를 올렸고, 범운(梵雲)이 부처님 치아를 천안 광덕사에서 받아 와 팔상전에 봉안하였으며, 1894년 관준이 선원(禪院)을 만들었다. 1906년 사적비를 세웠고, 어산청범음계(魚山廳梵音契)에서 석가영아탑봉안비(釋迦靈牙塔奉安碑)를 세웠으며, 봉명학교(鳳鳴學校)도 설립하였다. 1908년 제4회 만일염불회를 회향한 뒤 의중(宜重)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열었다.
1911년 조선사찰령에 따라 30본산의 하나가 되었으며, 9개 말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또한 상해에서 신간 대장경 일부를 구입하여 봉안했으며, 1914년 소신대(燒身臺)에 31명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간성군에 포교소를 세웠다.
1917년 팔상전과 낙서암을 중수하였고, 1918년능허(凌虛)와 경해(景海)가 극락전을 중수하였으며, 운파는 중종(中鐘) 5좌(坐)와 불기(佛器) 30좌를 비치하였다.
1919년 능허가 1,000원을 시주하여 불이문(不二門)과 영빈관·별실·문수교를 새로 세우고 산영교(山映橋)를 고쳤다. 1920년 인천 포교당과 봉림학교(鳳林學校)를 세웠으며, 한암(漢巖)을 청하여 무차선회(無遮禪會)를 베풀었다.
1924년 사무소를 중수하고 극락전과 만일회의 부속건물 등을 중건하였으며, 1926년 불교전문강원을 설치하고 공비생(公費生) 30명을 양성하였으며, 불상 7위(位)를 개금하고 장구사(葬具舍)를 세웠으며, 덕성(德性)의 주재로 제5회 만일염불회를 계승하였다.
6·25전쟁 때 이 절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독성각·산신각·단하각·진영각·범종각·봉청루·보제루·대지전·동지전·서지전·어실각·어향각·동고·낙서암·극락전·만일원·보안원·선원·원적암·사무소·불이문·여관·장의고·성황당·수침실(水砧室) 등 총 642칸에 이르렀다.
중요 문화재로는 도금원불(鍍金願佛)·오동향로·철장(鐵杖)·대종·절감도·차거다반(硨磲茶盤) 등과 불사리탑 등 탑 8기, 부도 48기, 비 31기, 고승 영정 44점 등이 있었다.
또 부속 암자로는 보림암·백화암·봉암암·극락암·백련암·반야암·청련암·대성암·적명암·보리암·보문암·대원암·일출암·안양암·동대암·망해암 등이 있었다.
현재 고성 건봉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 적멸보궁 [ 寂滅寶宮 ]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불교건축물.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불사리를 모신 곳이 많지만 그 중 대표적으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①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②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적멸보궁, ③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 있는 적멸보궁, ④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⑤ 강원도 정선군 동면 고한리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 등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시대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의 보궁에 봉안된 사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서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5대 적멸보궁 중 오대산의 것 외에는 사리를 안치한 위치가 분명하지만, 오대산의 보궁은 어느 곳에 불사리가 안치되어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아 그 신비성을 더하고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의 순례지로서, 또 기도처로서 가장 신봉되고 있는 성지이다. 이 밖에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도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사리를 분장(分藏)한 적멸보궁이 있다
▲ 1708년 건설한 능파교(凌波橋)
▲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 / 중간
▲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불이문[1919년 능허가 1,000원을 시주하여 만든 불이문(不二門)]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 건봉사입구 금강 소나무
▲ 건봉사 부도탑
▲ 영금정(靈琴亭)
속초시 동명동 속초등대 밑의 바닷가에 크고 넓은 바위들이 깔려있는 곳이 영금정이다. 지명의 유래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신묘한 율곡이 들려 이 소리를 신령한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여 영금정이라 불린다. 시내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경치가 빼어나 사시사철 속초시민이 피서와 낚시를 즐기는 곳이다. 현재는 속초시에서 영금정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남쪽 방파제 부근으로 실제 정자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 이 정자는 영금정 바위 위에 세워진 해상 정자로 50m 정도의 다리를 건너 들어갈 수 있다. 해상 정자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은 방파제와는 또 다른 시원한 느낌을 주지만, 정자 자체는 아주 촌스럽게 만들어진 콘크리트 정자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개 해돋이 정자라고 부르는데, 정자 현판에는 영금정(靈琴亭)이라는 글을 써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