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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 혹은 과거를 향한 길찾기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김명인 시집 {길의 침묵} ―이동순 시집 {가시연꽃} ―범대순 시집 {北窓書齋}
1.
인터넷을 매개로 한 정보통신 중심의 삶의 방식이 빠르게 사회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네트웍 세대라는 뜻의 N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새로운 세대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되던 X세대라는 말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한편에서는 가수 이정현의 [바꿔]라는 노래가 세상을 풍미하고 있다. 이에 기대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시간의 거죽만 보면 세상이 엄청나게 바뀌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빠르게 바뀌어 가는 것만이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바뀌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전히 무엇이 진실인가를 되묻고, 무엇이 기품 있는 삶인가를 곱씹고 있는 것이 시이다.
인터넷 세계의 영향력이 점증됨에 따라 인간 본연의 정서를 토대로 하는 시의 역할은 거의 그 의의를 상실한 듯하다. 그렇다. 오히려 시 본연의 이상인 주객 통합은 인터넷 세계에서 훨씬 의미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쌍방매체로서 인터넷 세계는 저 자신의 일방적 주장만으로는 결코 가동되지 않는 공간이다. 인터넷 중심의 삶이 증진된다고 해서 지나치게 불안해 할 까닭이 없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진리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인터넷 중심의 삶이 제대로 다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시야말로 인간의 실존과 존재 일반,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는 상호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함축하는 언어예술 양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한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세 시집의 경우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세계를 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2.
김명인의 이번 시집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는 이미지는 '길', '강' 등이다. 그리고 이들 이미지는 '사막', '모래' 등의 이미지와 연계되면서 그의 시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특히 '길', '강' 등의 이미지는 인생이라는 짧지 않은, 아니 길지 않은 시간의 과정을 상징하며, 그것이 함축하는 진리 일반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물론 이들 이미지가 다소간 익숙한 내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의 '길', '강' 등의 이미지가 실제로는 짙은 회한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독백적 어조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김명인의 시의 경우 독자들을 손쉽게 감동의 세계로 이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의식적으로 독자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그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로서는 자신의 시적 사색의 과정에 참여하는 독자들에게 구태여 과도한 예의를 갖추려 하지 않는 셈이다. 물론 감당하지 못하면 포기하라는 묵언의 자만심 따위를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쯤 인내심을 갖고 동참하다 보면 형용하기 어려운 정서와 독특한 지혜를 익히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그의 시이기 때문이다.
김명인의 시는 청자를 그 자신으로 한정하여 발화하는 언술들, 즉 혼자서 중얼거리는 듯한 독백적 언술들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포유하는 '길', '강' 등의 이미지는 그만의 독특한 회한의 정조로 수렴되고 있다. 물론 김명인 시의 이러한 가치들이 매우 특별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과욕하지 않는 가운데 자분자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는 언술들이 오히려 독자들과의 소통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꽃이 피면 마음 간격들 한층 촘촘해져
김제 봄들 건너는데 몸 건너기가 너무 힘겹다
피기도 전에 봉오리째 져내리는
그 꽃잎 부리러
이 배는 신포 어디쯤에 닿아 헤맨다
저 望海 다 쓸고 온 꽃샘바람 거기 부는 듯
몸 속에 곤두서는 봄 밖의 봄바람!
눈앞 해발이 양쪽 날개 펼친 구릉
사이로 스미려다
골짜기 비집고 빠져나오는 염소떼와 문득 마주친다
염소도 제 한 몸 한 척 배로 따로 띄우는지
萬頃 저쪽이 포구라는 듯
새기 염소 한 마리,
지평도 뿌우연 황삿길 타박거리며 간다
마음은 곁가지로 펄럭거리며 덜 핀 꽃나무
둘레에서 멈칫거리자 하지만
남몰래 출렁이는 상심은 아지랑이 너머
끝내 닿을 수 없는 항구 몇 개는 더 지워야 한다고
닻이 끊긴 배한 척,
―[봄길] 전문
이 시의 형상은 기본적으로 半추상적이다. 半추상적이라는 말은 半구상적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자 일반으로서는 이 시의 의미망을 내화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소라도 훈련이 된 사람이라면 그의 시 일반의 특징적 이미지가 도처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꽃', '배', '바다', '사막', '모래', '길' 등 그의 시 전반의 이미지가 총망라되어 있는 것이 이 작품인 것이다.
'바다'며 '사막'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험난하고 황폐한 현존의 삶, 곧 지금의 고통스러운 生을 가리킨다. 그리고 '배'의 이미지는 이 때의 삶, 즉 生이 일종의 여행이고, 방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시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거칠고 황막한 세상의 덧없는 유랑자인 화자가 어느 봄날 "피기도 전에 봉오리째 져내리는" "꽃잎"들을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회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인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에서 "꽃잎"의 이미지는 젊음, 활기 등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이들 꽃잎에 대해 화자가 갖는 감회의 실상은 무엇인가. 일종의 안타까움이라고 할 것인데, 아무래도 그가 이러한 감회를 갖는 것은 그의 몸이 지니는 한계, 다시 말해 육체가 지니는 한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이미 "마음 간격들 한층 촘촘해"진 것이 오늘의 그의 삶이고, 生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의 시는 삶이며 生이 갖는 정작의 진실을 반추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그의 또 다른 많은 시, 즉 [침묵] [아버지의 고기잡이] [종이배] [소태리 點景―현산에게] 등의 작품에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무엇보다 '길'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이들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 한때 길 끝 진리로 헤매면서 네게도 세상 끝까지
소금으로 흘러가라 했던가, 여기서 보면 소태리
햇빛들 구리판을 두들겨 펴는 듯 수평선
쪽이 더욱 두근대지만
하루치의 허락 너무 짧아 바다의 길도 이내 지워진다
消盡이 내 길이라면 나는 모든 길 끝이
어둠 속으로 놓여나려고 뿔뿔이 저를 거두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다시 태어난들
저 바다를 완성시키려고 일몰 속에
지금처럼 이 의자에 앉아 있을지 알 수 없다.
이 풍경이 너의 풍경이고 나는 다만 내 앞에
저무는 바다가 있어 그것을 마주하고 있다
―[소태리 點景―현산에게] 부분
이 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길 끝 진리로 헤매면서"라는 구절이다. 길의 끝이 곧 진리라면 그의 生은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친구인 현산에게도 生의 길과 관련하여 "소금으로 흘러가"야 한다고 말해온 것이 그이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바다의 길도 이내 지워"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의 시에서도 바다의 이미지는 험난하고 황폐한 인생의 길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의 생을 消盡이라고 파악하는 인식에 의해 뒷받침을 받는다. 따라서 "모든 길 끝", 즉 모든 진리가 "어둠 속으로 놓여나려고 뿔뿔이 저를 거두어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그가 깊은 회한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하다. 급기야 "다시 태어난들/저 바다를 완성시키려고 일몰 속에/지금처럼 이 의자에 앉아 있을지 알 수 없다"라는 자의식에 깊이 젖어들기까지 하는 것이 그이다.
길 혹은 바다의 이미지로 구체화되어 있는 생의 진리에 대한 성찰은 결국 그 자신의 현존에 대한 성찰과 연계되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점이 상대적으로 좀더 강화되어 있는 시로는 [문패] [밤도깨비]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도 성찰의 대상으로서 그 자신의 현존은 언제나 삶 일반의 진리에 대한 진지한 반문과 상호 맞물려 있다. (이 시집의 많은 작품들이 매번 의문형 문장을 포괄하고 있음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나날의 일상에서 그의 현존이 깨닫는 진리를 생의 전과정과 관련하여 진지하게 반문하고 있는 것이 이들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내면으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독자가 깨어 있는 반성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밤늦게 커튼을 치면서 보니
지나가던 밤도깨비 하나 유리창 이쪽을
힐끗 쳐다보며 섰다
어떻게 건너왔는가, 워낙 촘촘한
저 파사한 불빛들 속이고,
도깨비는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관찰된다
어둠을 대면할 때, 외로움 건너편
골목 저 끝의 창문이 가끔씩 환해진다
모래 시간 쏟아져내리기 전에는 어느 골목도
쉽게 잠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반쯤 죽은 네온 희미하게 껌벅거려
우리 모두 사막을 기울이는 늦은 저녁 한때!
어떤 浮遊의 생도
모래 무덤 밖으로 새로이 제 길을 낼 수가 없다
다만 안에서 움츠리는 희미한 불빛이
흔들리는 중년을 끌고 와서
유리창 저쪽에 세워놓는다. 불침번으로
너는 어떻게 사는가, 산다는 것의 물음 놀이에
너는, 가 닿을 필요가 없다
둘러보면 적잖은 퇴직금을 들고 나와 남은 생애가
남부럽지 않을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놀고 먹는
세월의 아뜩함!
어디론가 누군가와 함께 걷다가
다 놓치고 혼자 뒤처져버린 길이
부지런히 가고 있는 시간과 자꾸만 마주친다
―[밤도깨비] 부분
이 시의 서정적 주인공은 밤도깨비이다. "불빛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관찰"되는 이 밤도깨비가 시인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는 것은 익히 주지하는 바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밤늦게 커튼을 치면서" 유리창 저 쪽에 서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그와의 대면을 통해 저 자신이 처한 生의 현존을 진지하게 반추하고 있다. 이러한 生의 현존을 그는 "우리 모두 사막을 기울이는 늦은 저녁 한때"라고 인식하고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 "어떤 浮游의 생도/모래 무덤 밖으로 새로이 길을 낼 수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자아의 이러한 현존을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자포자기의 의지로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 "모래 무덤 밖으로 새로이 길을 낼 수가 없다"는 말이 일종의 역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시인의 말]에 드러나 있는 "저 바위꽃이 열어놓은 문을 통과하여/또 다른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라는 그의 의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위의 시에서 그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향해 "너는 어떻게 사는가, 산다는 것의 물음 놀이에/너는, 가 닿을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세속과의 타협을 부추기는 듯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겸사일 따름이다. "나는 다만 하릴없는 밤의 관찰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좀더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정직한 자기반성과 자기성찰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그의 이번 시집의 시세계가 전적으로 회한에 가득 찬 길 찾기, 진리 찾기로만 일관되어 있지 않은 것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인간 혹은 생명의 본능과 관련하여 문명의 진정한 의미를 반문하고 있는 시들, 예컨대 [밤의 주유소] [석탄 속 사슬] [예언] [충돌] 등에서도 이는 충분히 확인이 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화두의 하나인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시들, 그리고 그것과 대립하며 '생명'의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시들 역시 이러한 논리를 잘 증명해준다. 또한 이 시집에는 사람살이의 근원적 인연을 형성하는 가족간의 여러 체험을 담고 있는 작품들도 중요한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의미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이 시집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인의 이번 시집의 세계는 과도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에 침윤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의 내면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날카로운 철망을 둘러 독자들의 접근을 막는다면 얼마간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시인 이동순은 새 시집 {가시연꽃}의 [시인의 말]에서 "요즘 나의 삶은 시와 더불어 조용히 열려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때의 "열려 있다"는 말은 무엇보다 밖을 향해 열려 있다는 뜻을 지닌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시의 중심 대상은 세계의 '밖'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가 열려진 자세로 이것들을 형상화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일단은 그가 매사에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때의 평상심이 오랜 자기 수련의 결과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그가 시를 통해 포착하는 것들은 대부분 삶 일반의 지혜에 닿아 있다. 물론 이 때의 지혜는 다소간 교훈적인 의미를 띤다. 하지만 여기서 '교훈적'이라는 말은 일상의 삶에 필요한 정작의 덕목을 자각하는 것 이상의 내포를 갖지는 않는다. 교훈적인 것 일반의 따분한 금기나 제약, 상식적 도덕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그의 시에 포착되는 지혜가 일종의 발견과 깨달음의 과정에 획득되고, 그 과정에 적잖은 기쁨을 제공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는 잘 알 수 있다. 그는 일상의 삶이 부여하는 다양한 지혜를 발견하고 깨닫는 즐거움으로 자신의 시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깨닫는 지혜는 시인 자신의 내면보다는 외면에서 기인한다. 주관적 진실보다는 객관적 진리에서 지혜의 실재를 깨닫고 있는 것이 그이다. 이는 그것이 항상 자연의 실상과 연계되는 가운데 획득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그의 시에서 대상으로 포착되는 자연의 실상은 그 자신의 경험과 상호 침투하면서 좀더 현실감을 갖는다. 시를 통해 그는 자신이 처한 일상의 경험을 철저하게 타자화하는 가운데 지혜를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그가 시를 통해 깨닫는 지혜는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다양한 '관계'에서 출발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그의 시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바로 이로부터 크고 작은 지혜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 시인 이동순인 것이다.
까치 한 마리가
삽살개 옆에 죽어 있다
개밥 그릇의 사료를 훔쳐서 달아나다가
갑자가 달려든 개한테 물린 듯하다
평소 제 먹이를 물고 가도
남의 일처럼 아랑곳도 않던 삽살개란 놈이
오늘은 왜 마음이 변했는가
넘어진 까치 옆에서
삽살개란 놈은 눈만 끔뻑거리고 앉아 있다
배롱나무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까치를 묻으면서 보니
죽어서도 사료 알갱이 하나를
부리에 그대로 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까치]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일종의 관찰자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꼼꼼히 살펴본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관찰자로서의 화자는 살펴보는 사람, 즉 見者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見者로서의 시인이 작품을 통해 정작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가시적 현상 세계의 내부에 도사려 있는 본질이다. 이 때의 본질은 당연히 진리를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기본적으로 지혜와 상호 뒤얽혀 존재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삶에서는 항용 지혜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진리 아닌가. 본래 지혜라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 시에서 일단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삽살개와 까치의 관계를 파악하는 시인의 정신 자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의식 내부에서는 그가 삽살개와 까치를 공히 사람이 아닌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간의 본능에 쫓겨 삽살개가 까치를 죽인 것인데, 간과해서 안 될 것은 바로 이 대목에 함축되어 있는 시인의 인식이다.
이 작품에서 삽살개가 까치를 물어 죽인 것은 무엇보다 식욕의 본능 때문이다. 시인은 이를 죽은 까치의 부리에 "사료 알갱이 하나"가 물려 있는 것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이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시인이 삽살개와 관련하여 아무런 도덕적 가치 판단을 보여주지 않는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이는 특히 "삽살개란 놈은 눈만 끔뻑거리고 앉아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서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그는 여기서 자연의 세계에 대해 일종의 무위의 시각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무위의 시각에는 얼마간의 연민이 섞여 있어 끝내 그는 "배롱나무 밑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까치를 묻"는다. 그로서는 인간을 자연의 세계에 관한 일종의 조력자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자연의 실제를 대하는 시인의 이러한 시각과, 그에 따른 지혜는 [양말] [물 만난 고기] [비오는 밤] [풍뎅이] [풀잎] [검둥이] 등의 시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들 시에서도 화자로서 시인은 온갖 생명들이 처한 부자연한 현실을 자연한 현실로 치환하는 조력자로 역할하고 있다. 특히 위의 시 [까치]와 거의 유사한 발상을 보여주는 [검둥이]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검둥이란 놈에 의해 물려 죽은 수탉의 장례를 돕는다.
이처럼 그는 자연이 저 스스로 구축한 다양한 진리가 만드는 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번 시집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물론 그의 시에서 인간이 자연의 조력자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한 그의 희망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는 자연이 인간보다 우위를 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자연의 파괴자로 기능하고 있을 따름이다. "방금 지나간 두더지의 땅속 길을 무너뜨려/새끼 두더지로 하여금/방향을 잃어버리도록 만들"([내가 몰랐던 일])고, 고로쇠나무의 "허리에 구멍을" 뚫어 끊임없이 "눈물을 흘"([고로쇠])리게 하는 것이 거개의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그는 당연히 비판적이다. 언제나 자연과의 행복한 조화를 꿈꾸고 있는 것이 시인 이동순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인간의 일부로서 인간을 발견하고 깨닫게 하는 영원한 원천으로 존재한다. 두더지로부터 "일생을 오로지 어둠만 파내다 가신" "어머니와 아버지"([두더지})를 발견하는가 하면, "이마의 땀을 씻"으며 "문득 눈앞에 들어오는/할미꽃 수염"으로부터 "어머니"를 깨닫기도 하는 것이 그이다. "작은 벌레까지도 살뜰히 껴안고 있는"([벌레 한 마리]) 것이 그가 인식하는 자연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자신의 육체 위에 "우격다짐으로" "빈 농약병만 을씨년스럽게 굴러다니"([땅의 폭동])도록 하는 인간에 대해 자연이 다양한 형태의 보복을 꾀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래 묵은 산길에
키 큰 억새와 가시덤불이 잔뜩 우거져
인간의 흔적을 거의 지우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바람에 넘어진 고목이
도로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어서
그대로 꼼짝달싹 못하고 길게 늘어선 자동차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묶인 개를 풀어놓고
늑대처럼 등털을 바람에 나부끼며 온몸으로 질주하는
개의 감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즐거운 일]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보다 우위에 존재하는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흥을 자못 즐겁게 노래하고 있다. 오늘의 삶의 현실에서 이처럼 자연 우위의 시각을 지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근대의 개막 이후 그 동안 인간이 무엇보다 자연 우위의 세계관을 전복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는 것은 두루 잘 아는 바이다. 그리하여 급기야 이제는 자연이 철저하게 문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생태환경의 문제를 불러일으킨 근본 원인이거니와, 자연 우위의 세계관을 회복하는 일은 이러한 점에서도 매우 소중하다.
따라서 정작 주위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이 함축하고 있는 진리를 삶의 구체적인 지혜로 낱낱이 재구성해내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지혜는 결코 따분하지 않은 교훈의 하나로 삶의 내용을 채우는 원천이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항상 이처럼 깨어 있는 지혜를 매개로 조화와 일치를 이끌어낼 때 지구상에 더는 생태환경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작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질서를 바로 인식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 위해 주체로서의 자아가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자연 일반에 대한 외경의 마음, 나아가 神秘의 마음을 잃지 않는 일이다. 그럴 때 자연이 그 스스로 주체에게 다가와 의미 있는 깨달음을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억 만년을 입을 벌리고 있"([내 마음의 동굴])는 동굴 속에 첫발을 내딛는 감회를 담고 있는 그의 시, "마당의 가랑잎을 긁어모아" 피워 놓은 불길로부터 "우주의 황홀"([불티])을 발견하고 있는 그의 시 등에서 이러한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동순은 이번 시집에서 다름 아닌 이러한 점들에 주위를 기울이며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질서에 대한 다양한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不二의 지혜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인 [청둥오리], 인간과 안개, 안개와 햇살, 햇살과 인간이 이루는 조화와 부조화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작품인 [안개} 등이 그 예이다. 이들 작품이 이루는 성취와 관련하여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가 수직적으로 개별 존재의 진실을 탐구하기보다는 수평적으로 그것들이 이루는 관계의 지혜를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그는 자연과 자연,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따져 묻고 있다.
봄의 공세에
산골짜기의 얼음은
일제히 산정으로 떠밀려 올라간다
산정에 밤이 오면
얼음은 달빛 속에서 수정 같은 이를 드러내고
차디차게 웃는다
우거진 산죽의 뿌리를 껴안고
몸을 떤다
올 테면 와라 봄이여
너희들이 숲을 샅샅이 뒤져 나를 찾을 때
내 투명한 유리 구두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을 것이니
―[얼음] 전문
이 시는 대강 두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8행의 "몸을 떤다"까지가 전반부이고, 그 이하가 후반부이다. 전반부에는 객관적 전지자의 시점이 선택되어 있고, 후반부에는 주관적 얼음의 시점이 선택되어 있다. 전반부에는 봄의 공세에 산정으로 쫓겨가는 얼음의 현존이 묘사되어 있는 반면, 후반부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마는 얼음의 마음 자세가 묘사되어 있다.
언뜻 이 시는 봄과 얼음의 대립 관계를 표현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오히려 겨울의 얼음과 봄의 햇살이 이루는 자연의 순환질서를 깨닫고, 그것이 함유하는 지혜를 드러내려는 데 핵심 의도가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의 생명질서 또한 자연의 순환질서와 함께 한다는 것을 뜻한다. 겨울의 얼음이 봄의 햇살한테 자리를 내주는 것은 자연의 보편적인 원리 아닌가.
위의 시는 이러한 지혜가 충분히 완미한 예술작품으로 육화되고, 성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탄탄한 시의 구조가 만드는 심미성도 유의해야 마땅하지만 "투명한 유리구두" 등의 선명한 이미지며 독특한 시점의 선택도 주목해야 마땅하다. 일상의 상식적 관점을 뒤집어 얼음의 시점을 취하고 있는 이 시의 후반부가 보여주는 언술 구조는 가히 참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들이 별다른 무리 없이 어렵지 않게 읽혀지는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그의 시들은 거개가 특별한 지적 조작이 없이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만큼 독자들과 가깝게 자리해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를 한갓 가벼운 읽을거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듭해서 읽을수록 시의 맛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동순의 시에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읽혀지는 점도 없지 않다면 물론 그 자신의 탓도 아주 없지 않을 것이다. 리듬과 이미지에 대한 과도한 배려가 그러한 흠을 낳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
범대순의 이번 시집 {北向書齋}는 주로 기억에 의지하여 상상력을 펼치고 있다. 과거의 체험, 젊은 시절의 체험을 원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 현재와 미래의 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그의 새 시집이다. 그러니까 그는 여기서 과거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오늘의 세계와 내일의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의 과거의 세계는 옛것의 세계, 고향의 세계로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소외된 것들, 곧 버려진 것들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샛거리로 땡감에 된장을 찍어 먹"([대낮])는 세계, "강변에 나가면 물에 뛰어들 욕심으로" "아무 데나 함부로"([모래]) 옷을 벗어 던지는 세계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는 동시에 "살아 있음이 행복한 느낌을 일으키([흙 묻은 햇빛])"는 세계이기도 하고, "언제 보아도 흥겨운 성냥간 난장판 떠돌이들"([시골 장])의 세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세계는 누차 그가 강조해온 "아름다운 가난"([흙 묻은 햇빛], [냉수 말아먹는 밥], [歲暮 雜記帳])의 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여기서 그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단은 그곳이 유유자적한 여유와 너그러움이 공존하고 있는 평화의 세계임을 알 수 있다. "물에서 놀 때" 벗어놓은 "옷은 옷대로 모래를 만나 잘"([모래]) 노는 세계, "충장로가 곧 무등산"([광주 충장로])인 세계가 다름 아닌 그러한 세계인 것이다. 결국 그러한 세계는 각각의 존재들이 상호 분리, 분열되어 대립, 갈등하기 이전의 세계, 즉 모든 개체들이 상호 통합되어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시 [秋夜長]에서 그러한 세계의 하나로서 "벌거숭이로 바위가 내는 소리"의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옛날에는 산에 물소리가 없었다. 가을 밤 벌레우는 소리도 없었다. 소리 없이 물과 벌레는 같이 있었다. 옛날에는 바위에 소리가 있었다. 산 우레 같은 소리가 있었다. 소리는 가깝고 멀리가 없었다. 내가 꽃을 보기 시작하면서 산에 흐르는 물은 소리를 냈다. 가을 밤 귀뚜라미도 그것을 운다. 예쁜 정말로 예쁜 아이는 지금도 산의 물소리를 듣지 않는다. 다만 벌거숭이로 바위가 내는 소리를 듣는다.
이 시에서 그는 "내가 꽃을 보기 시작하면서 산에 흐르는 물은 소리를 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구분과 분류의 눈으로 사물을 대하면서 각각의 존재들이 제 소리를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리라. 결국 그는 모든 분별과 분열이 주체의 마음으로부터 기인한다는 一切惟心造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삶이 "예쁜 정말로 예쁜 아이"의 시절, 즉 유소년 시절에나 가능했다는 것을 그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 도달했다고 해서 곧바로 갈등과 대립이 무화된 통합적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도 이미 개별화된 수많은 존재들과 맞서 싸워가며 가족을 부양해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는 생존의 주체인 것이다. 그가 다른 시에서 "충장로 거리에는 시냇물이 흐르지 않는다. 충장로 거리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안에서 미움받는 아이 밖에서 더 서럽듯 거리에서 아픈 마음이 산에서 애린 듯하다."([광주 충장로])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삶의 현존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이미 문명과 자연이, 도시와 대지가, 그리고 이것들과 그 자신이 상호 어떻게 분열되어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또 다른 시에서 그가 "높고높고 실한 가시 달린 담장을 쌓아다오"([절망 유희])라고 소리쳐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기인한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그는 "산은 물과 하나같이 하늘은 땅과 너나없이 사람은 역사와 자연이 같이 있었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님은 정말 괴롭다."라고 목청을 높이기까지 한다. 따라서 그가 동일한 시에서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새와 봄은 또 따로 사람과 역사 말이나 글 주문 묵언 같은 것들 서로 따로" 떨어져 있음을 크게 통탄하며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분리되고 분열된 세계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결코 보장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와의 소통이 이처럼 차단되었을 때 주체로의 인간이 지향해야 할 곳은 아무래도 그 자신의 내면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미래나 세계로의 꿈은 포기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주체로서 개인의 꿈이며 이상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거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오히려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만큼이나 청춘의 꿈이며 이상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그이다.
범대순의 이번 시집은 유독 '푸른빛'의 이미지로 충만해 있다. 푸른빛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희망, 꿈, 이상 등의 의미망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푸른빛'의 이미지는 그의 시에서 '기차'나 '기적'의 이미지로 전이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아침 건널목에서 지나가는 기차를 만난다. 우연한 일로 나는 큰 사건같이 설레었다. 예쁘다 기차도 예쁘고 탄 사람들도 예쁘게 때맞추어 일어나는 햇빛 닮은 소리로 간다. 열살 때 처음으로 읍내 나들이를 따라 갔다. 건널목에 서넛 넋을 잃고 기차를 보았을 때 산너머 기적소리와 꿈으로 살아 있었던 것이 눈앞에 검고 길게 오래 맨발 앞을 지나갔었다. 있고 없음이 마음속에 있다고 배운 뒤에도 마음 밖에서 다만 거품을 구하고 사는 속에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기차를 잃어버렸다. 날마다 가까이 만나는 것 이 이미 거기 없다. 지금 나는 부처와 예수의 가르침을 지고 있다. 런던 하이 게이트 칼 마르크스의 묘지도 믿는다. 그들이 버리고 부린 욕심, 나라고 먼 산이랴만 아침 햇빛을 타고 가는 예쁜 기차 같이 않구나.
―[아침 햇빛을 타고 가는 기차]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칠순의 시인 범대순 자신이다. 어느 날 그는 "아침 건널목에서 지나가는 기차를 만"나 인간의 보편적 꿈 혹은 이상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는 "있고 없음이 마음속에 있다고 배운 뒤에도", "나이를 먹"어 "기차를 잃어버"린 뒤에도 기차의 아름다움만한 것, 즉 꿈과 이상의 아름다움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급기야 그는 여기서 "부처와 예수", "칼 마르크스" 등이 "버리고 부린 욕심"도 실제로는 "아침 햇빛을 타고 가는 예쁜 기차 같이 않"다는 인식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의 시에서 기차의 이미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푸른빛'의 이미지와 뒤얽히면서 저 나름의 의미망을 형성한다. 그가 '푸른빛'의 이미지를 가슴에 간직하게 된 것은 "태어나서 열 여덟 해를"([뱃놈이 되고 싶었다]) 산 고향 마을인 '강변'을 떠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 그는 "우연한 인연으로 처음 바다에 가"서 "바다 모래가 푸른 눈을 뜨는 "([바다 모래의 푸른 눈]) 것을 보고 문득 미래에 대한 꿈이며 이상을 갖게 된 것이다.
'푸른빛'의 이미지는 또한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목포라는 지역 공간을 통해 구체화되기도 한다. 목포, 그 중에도 특히 오거리는 '푸른빛'으로 상징되는 그의 꿈과 이상이 똬리를 틀던 일종의 원형 공간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젊음의 부두와 그리고 汽笛을 배"([木浦 오거리])우던 곳, "푸른 별이 있"([다시 오거리])던 곳, "큰 바다 같은 푸른 젊음을 크게 울"(또 다시 목포 오거리]던 곳, "눈물 같은 꿈이 있"([목포의 흑백사진])던 곳, "나를 만들고 또 허물"([나를 만들고 허물었다])던 곳이 목포 오거리인 것이다. 다름 아닌 이 목포 오거리에서 그의 문학과 생은 출발하여 광주로, 서울로, 세계로 향한다. 여기서의 세계는 인도의 뉴델리([1998년 范某 備忘錄]), 알프스의 백년설([청산의 경험]), 아프리카의 적도([목포 오거리 나의 터미널]), 독일의 하이네([하이네 독후감]) 등으로 드러나고 있거니와, 그렇다면 목포 오거리는 그의 시의 뿌리, 곧 시의 어머니인 셈이다.
이처럼 목포 오거리는 그의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며 생체험의 일부이다. 그러나 그곳이 그의 시에서 항상 살아 있는 사물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독서에 따른 교양과 지식이 그것들 위에 끊임없이 관념의 그늘을 덮어씌우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 지속적인 독서에 따른 교양과 지식이 관념의 형태로 내재되는 것은 짐짓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든 인문학적 사유가 그렇듯이 시적 사유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온갖 문화적 기초 위에서 싹이 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시 일반에 얼마간의 관념이 함축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 또한 사유의 산물이라면 사유에 지성이 개입될 때 그것이 관념의 형태로 자라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이러한 뜻에서의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 그는 '푸른빛'의 이미지 이외에 '北窓'의 이미지를 응용하기도 한다. '푸른빛'의 이미지와는 달리 '北窓'의 이미지는 공허, 무료, 무의미, 절제, 수련 등의 의미망을 갖는다. 이러한 의미망을 갖는 '北窓'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푸른빛'의 이미지를 바로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가 생각하기에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앉은 사람은" "밤이 되어야 비로소 시작하는 검붉게 잘 익은 젊음 그 북소리를" 잘 볼 수 있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푸른빛'의 세계를 꿈꾸고 기리면서도 '北窓'에 앉기를 고집하는 것이 시인 범대순 자신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앉은 사람은 눈을 떠도 봄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매화를 넘긴 뒤에까지도 모지게 내는 소리 없는 눈보라를 기다리는 것이다. 오월 진하게 푸른 모란이 피는 날에도 앞 뜰 은은한 것을 뒤로 느끼면서 멀리 눈이 내리는 그믐날 같은 생애를 가까이 정말 가까이 보고 있는 것이다.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가을이 있고 밤이 되어야 비로소 시작하는 검붉게 잘 익은 젊음 그 북소리를 본다. 북소리는 빛나는 어둠을 항해하고 있다.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북창을 향해 앉아 있다. 천년이 지고 천년이 일어서는 이 시각에 세상 있고 세상 없음을 白紙 안에 그렇게 있다.
―[北窓書齋]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앉아" "빛나는 어둠을 항해하고 있"는 "잘 익은 붉은 젊음 그 북소리를" 보고 있다. 여기서 "젊음 그 북소리"의 이미지는 앞에서 줄곧 언급해온 '푸른빛'의 이미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물론 푸른빛, 즉 "젊은 그 북소리"의 주체가 시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칠순이 넘는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그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젊은이들이 남창을 통하여 남산의 푸른빛을 보는 시각에" "북창을 통하여 북악의 무의미를 보고 있"([다시 北窓書齋])는 것도 이러한 그의 현존과 무관하지 않다. 이미 그는 "남으로 면한 창으로 들어오"는 "웃음소리 울음소리"로서의 "사람의 역사는 북을 향해야 더욱 잘 들린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충분히 푸른빛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맛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놓고 남을 향해도 남의 푸른빛에 더는 어지러움이 없"([다시 北窓書齋])는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북창을 향하여 눈을 감고 앉는" 행위는 진리와 함께 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반성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실 그렇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기 정직성과 자기 염결성을 닦아온 사람이다. 이는 "폐계가 되도록 너무 자신을 뽑아 먹어버린"([스냅사진]) 것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내 확인이 된다. 그는 "나의 안에 밤보다 더 어두운 것이"([왜 이런가]) 들어 있다는 것을 거듭해서 성찰하고 있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탁하고 욕되게 하는 일들 가운데 말하고 글쓰는 욕심이 들어 있고 책으로 이름을 얻는 일 그 으뜸이라"([아니다])며 자신을 닦아세우기까지 하는 것이 그이다. 이러한 그의 자기 반성은 인간의 욕심 자체를 채찍질하고 있는 [錯亂] [불면증] 등의 작품에서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자기 정직성과 자기 염결성은 좀더 성스러운 세계를 살고자 하는 그의 오랜 의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정작 성스러운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완벽하게 성스러운 세계에서는 어떠한 시도 발아하지 못한다. 항상 성스러운 세계를 꿈꾸지만 끝내 俗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시의 숙명인 셈이다. 그는 이미 "俗이 하늘임을 본 적"([세기말 아침 산책])도 있고, "시작과 끝"([마라도 기행])이, "소와 노인이 하나"([1998년 范某 備忘錄])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벌써 그는 시의 彊域 밖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5.
본고에서 검토해온 세 사람의 시인은 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랜 연륜 속에서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끈질기게 되묻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다. 우선 김명인의 최근 시집 {길의 침묵}은 착잡하고 황폐한 오늘의 현실에서 정작의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거듭해서 반문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상대적으로 내면적이고 독백적이라면, 이동순의 경우는 적잖이 그 지향을 달리한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훨씬 능동적인 자세로 외면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 이동순의 근작 시집 {가시연꽃}의 세계이다. 그에 비하면 범대순의 새 시집 {北窓書齋}는 지향하는 의식의 축을 얼마간 달리한다. 자아의 내면 혹은 외면을 향한 의지보다는 오늘의 그것을 있게 한 과거의 체험을 곱씹고 되새기는 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삶의 현실에 대하는 이들 세 시인의 정신자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진정하고 진실하다. 이들처럼 진지하고 정성스러운 서정의 마음을 지닌 시인들이 있어 우리 시의 미래, 나아가 인류의 미래는 여전히 밝고 희망차다고 할 것이다.(200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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