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해외여행을 해 봤지만 북한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까지 생각도 못해본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우리같은 50대는 오래동안 받아온 반공교육과 서로 적대시했던 남북관계 탓에 아직도 북한은 우리 인식 속에 주적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북한이라면 늘 이승복 소년의 입을 찢은 살인집단이라는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금강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나 나름대로는 소문난 산꾼이어서 금강산은 꼭 가봐야하는 필수코스라 좋은 기회라고 좋아하기도 했지만 사실 금강산은 두고라도 북한으로 들어가본다는 것만도 가슴 설레게하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금강산 관광은 초창기에 海路로 시작됐지만 2003년부터 육로가 열림으로 예전보다는 더 가기 쉬운 곳이 되었다. 강원도 고성의 남측에 위치한 금강산콘도에서 현대아산 직원들이 우리들에게 북측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육을 한다. 그들이 준비한 관광객신분증명서와 사증을 나누어 주고, 휴대폰과 밧데리, 카메라는 렌즈가 120㎜이상인 것, 망원경, 남한의 출판물 등은 휴대금지라는 간략한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난뒤 우리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 남측 출입국수속사무소에 도착하여 국경을 넘어간다는 출경 수속을 하고, 주차장에 현대아산버스를 타고 드디어 북으로 들어간다. 북으로 올라가는 중에 좌측으로 구선봉(9명의 신선이 와서 놀았다는 낮은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과 낙타봉이 보인다. 얼마 뒤 북측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측츨입사무소에 오니 다소 긴장이 되었다. 여행이란 일상에서 탈출하여 긴장을 풀고 평온한 마음으로 지내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데 북한 여행은 그런 조건이 안될 것 같았다. 북측출입사무소에서 우리들의 입경을 심사하던 북한군의 인상은 차가왔으며 서비스라는 개념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600 여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의 입경 심사는 순식간에 끝나고 본격적으로 북녁땅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민통선 지나 예전에 가본 적이 있던 남한의 북방 최첨단인 통일전망대를 넘어가면서 <갈 수 없는 나라>에 들어가는 느낌은 새롭기도 하지만 뭔지 어둡고 위험한 굴 속에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강통문을 지나자 차가운 들판에 말라서 쓰러진 갈대가 우거진 쓸쓸한 풍경의 비무장지대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로 난 금강산 가는 외길 도로로 600여명이나 되는 우리 일행을 태운 금강산 관광단의 버스는 한줄로 길게 늘어서서 북으로 달렸다. 왼편에는 철도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동해바다가 드러났지만 우리가 올라가는 도로는 도로 양측에 높은 철조망을 설치하여 도로 밖으로 이탈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북한의 주민들과는 격리시켜 놓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들어가는 구역들은 북한주민들과는 철저하게 격리된 이방지대로 남한에서온 종사자들 외에는 모두 현대에서 고용한 중국동포들이 금강산 관광지에서 자기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북으로 올라갈 수록 낮으막한 산들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서서히 금강산의 면모를 미리 보여주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과 전투의 상흔으로 모든 산들이 벌거숭이가 되었다는데 크고 작은 화강암 덩어리에 사람들의 탄성이 벌써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금강산 관광단지의 본부격인 온정각이 있는 온정리에 들어가기 전에 온정리 입구를 지나쳐 아름다운 항구 장전항으로 먼저 들어갔다. 금강산의 작은 하나의 바위 산줄기가 바다로 바로 떨어져 내리는 장전항은 조그만 灣으로 된 아름다운 항구였는데 항구에 정박해있는 대형선박은 그 내부를 호텔로 꾸며놓았는데 금강산 여행 초기에 방문자들의 숙박호텔로 쓰여졌다지만 이제는 보수를 하고 있었다. 금강산 여행 초창기에는 남측 방문자들을 선박 속에 가두어 놓고 관리하던 북측도 이제는 서서히 육지의 호텔과 펜션형태의 숙박시설을 지어서 남측 방문자들을 유치하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장전항에는 현대아산에서 관리하는 호텔, 직원숙소, 유락시설, 현대오일뱅크주유소, 고성항횟집, 발전소(3300v 자체전력생산)등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우리 일행 중 일부를 장전항 근처의 펜션에 숙박시키고 우리 팀은 온정리로 들어와 금강산 호텔에 숙박시켜준다. 가이드는 북한은 아직도 전력사정이 좋지 않아 가끔 전기가 단전된다고하는데 한밤중에 전기가 차단되면 얼어 죽으니 객실의 난방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했다.
새벽부터 경주에서 버스를 달려 이제 저녁 어둑어둑해서야 드디어 금강산호텔에 자리 잡으니 오는데에만 하루종일이 걸린 것이다. 이것도 과거보다는 그 수속이 간편해졌다고 하는데 앞으로는 더 간편해질 것으로 예상들했다. 호텔 객실에 들어가기 전 호텔 베란다에서 올려다 본 지척 거리의 금강산 능선은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설악은 설악동에서 저 멀리 주봉들이 보이는데 금강산은 주능선이 바로 지척 거리에 있는 것 같다. 금강이 설악보다 더 지명도 있었던 것은 그 접근성에도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금강산호텔에서 몇몇의 근무하는 북한인을 보았다. 그들은 상냥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밤새도록 근무하고도 아침에 웃는 걸 보니 근무태도는 남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하고 격무인 것 같았다. 온정리는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을 위해 전체를 임대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현대에서 공연장도 지어놓고 식당도 여러가지로 갖추고 그 외에 온천과 슈퍼, 사진관 등을 설치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다. 북한에 들어오면서 부터 우리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장소들은 모두 철조망으로 막혀져 있어 북한주민들과는 전혀 접촉할 수 없도록 제재하고 있었으며 철조망 밖으로 저 멀리 북한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 자전거 타고 가는 모습, 아이들이 동네 어구에서 노는 모습들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경치일 뿐이다. 북한의 일반 집들은 모두 같은 모양과 크기의 획일화된 가옥 구조를 보여주며 전체 풍광은 60년대의 남한의 농촌 모습이다. 마을길이나 농로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보이며 유달이 군인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우리가 지나가는 곳곳에 군인들이 부동자세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온정리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온정리에는 여러개의 호텔과 식당들, 온천, 슈퍼 등이 있었는데 이 속에서는 철조망이 쳐진 밖으로는 나갈 수 없으며 그 밖에는 역시 북한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온정리 속에서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올 때 타고온 현대아산버스들이 모두 셔틀버스로 바뀌어 수시로 호텔, 식당촌, 온천 등 이곳저곳을 무임으로 다녔는데 우리는 일단 온천으로 가서 온천욕을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식당으로 갔다. 첫날 저녁에는 북한 식당에는 갈 수가 없어 현대아산에서 경영하는 남한측 식당으로 들어가서 한식뷔페로 포식을 한다. 그리고는 우리 숙박소인 금강산호텔로 가서 잠시 쉬다가 밤 9시에 북한예술인들이 공연하는 음악공연을 보고난 뒤, 이 호텔에서는 술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인 호텔 2층에 있는 포장마차로 가서 술을 마셨다. 주점 <포장마차>에서는 이번 여행에 같이 참여한 여러 지인들이 함께 모였는데 내 동료 呂인로 선생을 위시하여 경주상고의 김성근, 정용길, 근화의 이재강(우리 세째의 담임이신....), 장문환, 최병준, 경주중 손진오, 경주여고의 어느 선생님 등 여러분이 모이셨다. 술을 마셔도 조바심이 나는 것은 아침에 음주로 인한 가벼운 설사라도 나면 산에서는 배변이 절대 안된다고 하고 침만 뱉어도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벌금형에 처해진다니 그저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주점의 종업원 아가씨들은 모두 중국동포였는데 여전히 북한은 북측주민들과 남측방문객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었다. 일종의 체제 단속인 것 같았다.
금강에서의 첫 밤을 자고 난 뒤에 이제 이른 아침, 오늘 드디어 그리운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오늘 관광은 외금강산에서 가장 유명한 계곡이라는 구룡연코스(신계동계곡-옥류동계곡-구룡동계곡)로 온정리-신계사-옥류동-비봉폭포-구룡폭포-상팔담-신계사로 약 4-5시간이 걸리는 등반코스였다. 모두들 시간에 맞추어 버스에 올라타고 온정리에 도착하여 다시 배차된 차로 갈아타고 숲속길을 따라 오르다 신계사를 지나 바로 구룡연 초입인 주차장에 도착한다. 모두들 화장실로 달려가는 것은 산행 중 배변하려면 돈을 내야하고 화장실도 잘 없는데다 변을 물론이고 코라도 풀다가 곳곳에 배치된 북측감시원들에게 걸리면 곤욕을 치른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인송들이 좌우로 빽빽이 들어선 외길의 산길을 따라 600여명이 한꺼번에 올라가자니 산길은 무척 붐비었다. 구룡연계곡으로 들어서자 마자 거대한 화강암의 바위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것이 보이고 그 밑으로는 암반과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이며 역시 생각한 바대로 설악산과 비슷한 산이 금강산이다. 혹자들은 이 금강에 들어와서 천하의 절경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설악에 제대로 가보지 않고 하는 소리이다. 남한에도 천하 절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그래도 안다. 화강암의 거대바위 곳곳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들이 여기저기 마구 파여져 있으며 곳곳의 명승지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다녀간 곳에는 교지가 내렸다는 신화같은 내용을 적은 표식비들이 있었다.
외금강 구룡연계곡으로 오르면서 처음 만나는 곳이 금강문이 있다. 이 금강문을 통과하면 막혔던 가슴이 활짝 열리는 옥류동(玉流洞)계곡이 나타난다.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구슬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 굽이는 못이요 또 한 굽이는 산이러니
오랜 바위 푸른 솔 대낮에도 한적해라.
골 안의 신선들은 약 달이려 떠나면서
부질없이 옥가루만 물에 띄워 보내누나. -한장석(韓章錫)- '옥류동'
길 오른쪽에 넓은 너럭바위가 하나 개울을 가로 질러 누워있는데 이른바 무대바위이다. 그 바로 앞에는 금강산에서 가장 크고 맑다는 옥류담이요, 그 위에는 온 계곡이 하나의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비스듬히 누워 쏟아지는 옥류폭포이다. 이 둘은 옥류동을 대표하는 절경들이다. 그리고 바라다 보이는 세존봉 천화대이고 그 뒤가 옥녀봉이다. 이어서 금강의 절경들이 계속 이어진다. 구슬 두 개를 꿰어놓은 듯하다는 연주담(連珠潭)과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 연주폭포이다. 조금 지나가면 봉황바위, 그 옆에는 세존봉의 중턱에서 엄청나게 크고 긴 바위 벽으로 흘러내리는 폭포의 물줄기가 절벽을 타고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딪쳐 물방울을 흩뿌리는 모습이 마치 봉황이 긴 꽁지 깃을 흔들며 날아오르는 것 같다고 하여 명명된 비봉폭포(飛鳳)가 있다.
비봉폭포의 왼쪽으로 한참을 더 오르면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긴 쇠줄다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긴 골짜기가 구룡동(九龍洞)계곡이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 쪽으로 가늘고 곱게 흘러내리는 실개천이 길게 이어지는데 은실 같이 곱다고 하여 은사류(銀絲流)이고, 더 올라가면 마치 구슬을 이어서 발을 드리운 것 같이 아름답다는 주렴폭포(珠簾)가 나오며 주렴폭포를 지나면 구룡연 전망대인 구룡각 관폭정이 보이고, 구룡동 골짜기를 내리붓는 물소리로 흔든다는 저 유명한 조선 제일의 폭포 구룡폭포가 나타난다. 설악산 대승폭포, 개성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의 하나요, 금강산의 제일, 최대의 폭포가 바로 이 구룡폭포(九龍瀑布)이다. 폭이 4m요, 길이가 82m나 되어 장마철 수량이 많을 때는 계곡 건너편의 관폭정까지 물보라가 날려서 옷이 다 젖을 정도이고, 말을 주고 받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요란하다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계절이 겨울인지라 모두 얼어붙어 빙벽일 수 밖에 없다. 떨어지는 폭포수는 절구통같이 둥그렇게 패인 돌확을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 놓았는데 이 돌확이 '구룡연’이다. 몇 천만년이나 세찬 물줄기가 방아를 찧었는지 돌확의 깊이가 13m나 패였다고 하니 놀랄 따름이다. 금강산 4대사찰 중에서도 가장 큰 절이었다는 고성군 서면의 유점사 자리에서 살다가 53불에게 쫓기어 이곳에 와 살았다는 아홉 마리 용의 전설에서 '구룡연'이란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구룡폭 옆 암벽에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이 썼다는 예서체의 彌勒佛(미륵불) 세 글자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세 글자의 길이가 19m나 되고, 글씨 폭이 3.6m, 마지막 佛자의 내리 그은 획의 길이만도 13m로서 구룡연의 깊이와 같은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의 암벽에 새겨진 이런저런 글자들은 최치원이나 송시열의 싯귀들이어서 누가 감히 금강산의 일부만 보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만은 금강산을 두루 살핀 선인들의 기록으로 보아도 구룡연의 경치는 단연 금강산 중에서도 백미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아름다운 풍광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이전에는 등산로가 없는 험준한 산속이어서 동경은 하면서도 와본 사람이 그리 많지 못했던 것 같다. 19세의 젊은 나이에 1년 동안을 금강산에 머물렀던 율곡선생도 그의 금강기행시(金剛紀行詩)인 ‘풍악행’(楓嶽行)에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구룡연 경치가 보고 싶으나 欲見九龍淵
그 길이 험하다고 중이 이르네 僧言路險惡
만약에 소낙비를 만나게 되면 若遇驟雨來
목숨을 잃는 건 잠간이라네 死生在頃刻
차라리 높은 봉우리에 올라 不如上高峯
신선의 자취를 밟으라기에 以섭飛仙종
그 말을 그대로 믿기로 하고 斯言定信乎
비로봉에 오르기로 결심을 했네 決意登毗盧
비로봉까지 올라왔으면서도 구룡연으로 넘어오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잘 닦여진 길로 편히 올 수 있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 좋은 길을 두고 접근성이 좋아 설악보다 먼저 개척되었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길이 전혀 없던 설악의 천불동은 옛사람들이 전혀 가보지도 못했을 것이 아닌가?
구룡연 구역의 마지막 다리 무용교를 건너 눈이 얼음으로 변해 매우 미끄러운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서 구룡대 정상에 서자 뒤에 두고온 아름다운 구룡연계곡과 줄줄이 늘어서 있는 거대 암봉들의 풍경들이 한꺼번에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 아래 굽이굽이 늘어선 외금강 능선들이 겹쳐지고 풀리며 아득해져 갔다. 구룡대 정상에서는 바로 금강산 최고봉 비로봉(1638m), 세존봉, 옥녀봉, 관음연봉 등이 늘어서서 바라다 보이고 또 그 바위능선들은 기묘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백두대간 능선으로 신비스러운 경관을 연출한다. 또 아래로는 유명한 상팔담이 펼쳐져 있는데 여덟 개의 담들이 활처럼 굽은 좁은 골짜기 밑에 늘어서 있는 절경지로 세 번째 담에는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었던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했던가? 이 팔담 물줄기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 바로 구룡폭포란다.
금강산에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총 3가지 코스로 구룡연 코스와 만물상 코스, 그리고 해금강 코스였다. 그 정해진 지역 외에는 더 들어가거나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니 구룡연 코스의 가장 깊은 곳이 구룡폭과 상팔담이라 우리는 다시 들어갔던 길로 돌아나와야 했다. 내금강산은 어차피 볼 수 없으니, 그와 닮은꼴 산인 설악산과의 단순비교는 힘들고 이제 외금강의 일부만을 봤으니 설악도 외설악의 일부와 비교를 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외금강 최고의 계곡이 이 구룡연의 옥류동계곡이라면 외설악의 최고의 계곡은 천불동계곡이다. 금강의 옥류동과 설악의 천불동을 비교해보면 우선 금강의 옥류동은 계곡의 폭이 넓고 그 접근성이 뛰어나다. 즉 손쉽게 산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설악의 천불동계곡은 옥류동에 비해 폭이 좁고 그 접근성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천불동은 말 그대로 계곡 좌우로 늘어선 거대암봉의 산군들이 오히려 금강의 옥류동보다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옥류동은 옛부터 길이 좋아 손쉽게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천불동은 길이 없는 계곡이라 그 뒤에 산악인들이 바위에 철구조물을 박아서 다리를 만들고 계단을 만들어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계곡이어서 아마 예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던 계곡이어서 덜 알려졌을 것이다. 상팔담의 여덟개의 담들도 그 모양이 아름답기 그지 없지만 천불동의 오련폭포도 그보다 더 큰 규모로 사람들을 감탄시킨다. 구룡폭도 설악의 대승폭과 비교는 되지만 우열을 가리기란 힘들뿐이다.
옥류동계곡을 탈출하여 구룡연코스 들머리에 있는 북한측 식당 목련관에서는 냉면이 전문이며 선식으로 북한음식과 만두, 녹두부침, 산채나물, 이면수튀김 등이 나온다던데 우리는 미리 티켓을 교환하지 못하여 북측 음식을 먹지 못하고, 대신에 남측식당에서 요리한 북한 음식 온반을 맛본다. 온반은 수년전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 김정일이 첫식사에서 대접한 음식으로 방송에서 본 이 후로 늘 궁금했는데 드디어 먹게 되었다. 일행중 몇몇은 온반을 먹고 난 뒤 별 맛이 없더라고들 말들했지만 나와 呂선생이 먹어보니 온반은 깔끔하고 맛깔스러운 고급음식이었다. 소위 맑은 국에 밥을 말은 국밥이었는데 맛깔스럽고 속은 편하기 그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모란봉교예공연 관람이 있는 오후 4시까지는 자유시간이라 우리는 다시 온천으로 가서 텅빈 온천에서 여유있게 온천욕을 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공연장으로 가서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모란봉교예공연을 관람한다. 북한사람들은 일단 남한사람들보다 그 친절함이 두드러진다. 여인들은 항상 웃으며 만나거나 헤어질 때는 항상 손을 높이 흔들어 인사를 한다. 우리가 북측사람들과 같은 장소에서 만나고 사진 찍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이 시간 뿐이었는데 그들의 공연은 과연 평가대로 최고의 수준이었다. 예전에 우리가 봤던 서커스에다가 체조와 같은 예술적인 퍼포먼스가 믹스된 형태의 공연이었다. 그네타기로 시작하여 자전거타기, 다리타기 등의 위험한 곡예 마술과 묘기 공연 등 많은 재미있고 감탄할만한 연기가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하고 마지막으로 "잘 가세요!, 통일이 되어서 다시 만나요!" 등의 인사와 통일 기원 음악등은 많은 관객의 박수를 끌어냈다. 모란봉교예공연단은 북한이 자랑하는 최고급 공연단으로 공연배우들은 공훈배우 등의 칭호를 가지고 그 대우는 장관급, 차관급 정도의 대단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우리는 남측식당의 한식 뷔페로 가서 배를 가득 채우고 다시 금강산호텔로 돌아온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른 분들은 고성항횟집에서 자연산 회를 먹었다느니 북한식당에서 흑돼지구이를 맛있게 먹었다느니 등 말들이 많았지만 나와 呂선생은 먹는데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지 그저 금강산호텔의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마셨다. 포장마차의 형태가 아니라 주점 이름이 포장마차였는데 그 주변의 벽화는 금강산을 사실 그대로 그려놓아 대단한 경치속에 술을 마시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북한의 제법 유명한 술은 대동강맥주였는데 병이 커서 금방 취기가 돌았다. 자신들을 아가씨라 그러지 말고 접대원동무라고 불러달라는 젊은 여성들이 주류와 안주류를 팔고 있었고 간간히 술도 따라주고 노래도 불러주고하는 재미가 있었다.
금강산에서 2박 후의 이른 아침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험준한 산 만물상 가는 날에 이렇게 눈발이 날리니 경치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하기야 금강산에 한번만 올 것도 아니니 언젠가 다시 기회가 있을테니 그저 날씨 그대로 즐길 생각이다. 경관이 다소 막히더라도 눈오는 금강도 운치가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오늘 오후에는 남측으로 돌아가 귀향하게 되어있다. 만물상 코스는 온정리로 내려가 모두가 집결해서 다시 버스로 산을 오르지만 그 길은 우리가 묵었던 금강산호텔 앞으로 지나간다. 심하게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고 올라 가파른 만물상 초입 주차장에 도착한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산길을 메운다. 어제와는 다르게 만물상 코스에는 화장실이 전혀 없다기에 모두가 화장실에 몰려 터져나간다. 맨 마지막으로 볼 일을 본 후에 빠르게 일행을 따라간다. 어제보다 훨씬 더 좁은 길을 남녀노소 구분이 없이 밀려 올라간다. 벌써 소주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도 있고 시작과 동시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서울에서 온 어느 일행은 당일로 금강산 여행을 왔다고 하니 세상 정말 좋아졌다. 제한적인 관광이지만 우리가 북으로 들어오고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에 들어오게 된 것도 다 그 동안의 우리 남측정부와 현대그룹을 위시한 여러 집단들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의 성과의 놀라움은 아무리 칭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 주변의 그 많은 비판을 들어가면서까지 줄기차게 북과의 관계에서 무리한 퍼주기를 하면서도 꾸준히 밀고 나왔던 것이 오늘날의 이 정도의 긴장완화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만물상 코스에는 큰 계곡은 없다. 초입에 보이는 계곡이 전부이고 우리는 바위 능선에 붙어 올라간다. 조금 가니 삼선암이 나온다. 3명의 신선이 바위로 변했다는 곳으로 유명한 금강산 귀면암, 즉 귀신의 얼굴을 하고있다는 바로 그곳이다. 가파른 바위 벽을 한참 오르면서 뒤 돌아보니 전방에 막혀있는 바위벽의 윗 능선은 각종 동물모습의 형상들이 나타났다. 맷돼지, 물개, 구렁이, 두꺼비 등 이었는데 절부암이라고 한다나? 이곳에서 부터 신선이 내려와서 놀았다는 천선대까지는 가파른 철계단이 이어져 있다. 땅문을 지나 천선대까지는 사람들이 밀려 많이 지체된다, 가다가 전체를 통솔하는 가이드들은 관광단을 두패로 갈라놓는 이른바 선택형 코스를 잡으라는데 갈림길에서 망양대 방면과 천선대 방면으로 사람들이 갈라지게 유도하고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짧고 위험한 코스라는 천선대 코스를 택하여 오르다 보니 드디어 그 유명한 만물상의 기암괴석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길 옆으로는 가파른 낭떠러지라 밑을 쳐다보면 아득하다. 잠시 중간에 우회하면 촛대봉이 있는데 이 주변의 경치는 대단한 장관이다. 주변에 둘러서있는 산들은 아름다운 동양화의 병풍 그 자체이다. 아슬아슬한 철계단으로 올라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해발 936m)에 오르자,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에 우뚝 선 널따란 세지봉은 눈발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병풍처럼 펼져친 그 풍경이 천선대를 감쌀 듯 하얗게 펼쳐져 있고, 거기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기암괴석이 또한 병풍처럼 늘어선 만물상이 있고, 뒤로 돌아서면 관음연봉, 상등봉, 옥녀봉, 세존봉 등 끝없이 이어진 외금강 능선들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란 이런 만물상의 기암괴석을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날씨가 흐려 완전한 만물상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금강의 묘미는 설악의 웅장함과는 다르게 기암괴석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가지각색의 바위 모양의 기묘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날씨는 춥고 여전히 눈은 뿌리지만 천선대에서 내려갈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이제 내려가면 다시 언제 올지 기약도 없어서 그런지 아쉬움이 가득 남는다. 하산은 근화여중의 이재강 선생과 같이 한다. 그도 등반 경험이 많은지 발이 빨랐다. 남들보다 대단히 빠르게 하산을 시도하지만 나의 동료 呂선생은 산행 초입부터 헤어져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빠르게 하산을 하여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바로 타고 내려 오면서 신계사에 들어 둘러보고 온정리로 내려온다. 우리는 그동안 느끼했던 입맛을 바꾸려고 남측식당에서 육계장으로 입맛을 깔끔하게 돌려놓는다.
오후 1시 30분 이제는 모든 관광 일정이 끝났다. 북측 CIQ 를 지나 남쪽 땅에 발을 밟으니 지난 2박3일이 꿈속의 날들만 같다. 경주까지는 매우 멀어서 고성에서도 거의 7시간이 걸릴 것이지만 내내 눈, 비가 섞여 내려 한층 악조건이 되었다. 졸면서 비몽사몽으로 정신없이 버스는 남으로 달려 밤 10시가 넘어서 경주에 도착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2박 3일 동안의 일정 속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생각이 난다. 금강산호텔 앞에서 본 플랫카드에 씌여져 있는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산다'...라든가, 북한의 열악한 전기 사정으로 호텔에서 수시로 정전이 되어 공연 중에도 전기가 나가고 한밤중에도 전기가 나가 난방이 멈춰서 새벽에 덜덜 떨던 생각도 났다. 또 목련관 앞에서 먹던 참새구이도 기억에 새롭고 금강산호텔 입구에 주야장창 근무하던 두명의 마음씨 좋은 아저씨같은 북한인 도어맨들의 인상과 재미있는 캐릭터가 생각이 난다.
금강은 남한의 설악과 아주 닮은 산이다. 같은 지역의 같은 백두대간 능선으로 연결된 산이라 그렇겠지만 닮아도 너무 닮았다. 금강에서 본 것이 외금강 일부 밖에 본 것이 없으니 설악의 외설악의 일부와 비교해야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설악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혹자는 내금강산의 만폭동을 봐야 한다지만 그렇다면 내설악의 가야동이나 백운동은 어떻하란 말이냐? 하지만 금강의 전체 면적은 설악의 몇배나 되어 골짜기 골짜기마다 볼 경치가 대단히 많고, 조선시대 한양에서 보면 그 접근성이 꽉 막혀있었던 설악보다 금강이 훨씬 좋으며 명산대찰도 설악은 신흥사 정도이지만 금강은 무수히 많다. 단순히 경치보다도 선인들이 무수히 그 땅을 밟으며 역사를 발로 그렸던 그 장소의 의미로 보면 설악은 비교가 되지 않을 성 싶다. 집에 돌아와 방에 누우니 그렇게 편할 수 없다. 북한에서 나름대로는 긴장을 하고 지냈다는 얘기인가? 내 나라 우리의 땅이지만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대단한 비극이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이 상황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고 우리 언젠가는 남북이 함께 모여 같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려니 별안간 기억 속에 옥류동계곡의 그 맑디 맑은 초록빛 물빛이 떠 오른다. 언젠가 다시 찾게될 풍악의 금강을 그리면서 펜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