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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65) 2024. 5. 8
다윗의 첫 삼대 용사
사무엘하 23:8-12
다윗은 자신의 임종의 때가 다가오자, 지금껏 자신을 도와 다윗 왕국을 세우는 데 큰 힘이 되어준 용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칭찬하고 있습니다. 첫 삼 인의 용사(8-12절), 둘째 삼 인의 용사(13-23절), 그리고 삼십 인의 용사들(24-39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첫 삼대 용사>
그 중 오늘 본문(삼하23:8-12)은 다윗이 첫 번째로 언급한 충성스러운 세 용사에 대한 소개입니다.
첫 번째 용사는 ‘요셉밧세벳’입니다.
8절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그는 단번에 적군 800명을 단번에 죽였을 정도로 무예가 출중한 인물이었습니다(삼국지의 관우나 장비에 비견). 요셉밧세벳은 이 세 용사의 두목이었습니다.
이러한 맹장이 있는 군대가 어찌 패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것은 요셉밧세벳과 같은 훌륭한 장군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10절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엘르아살은 블레셋과 싸우던 중 이스라엘이 패하고 도망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엘르아살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싸움을 돋웁니다. 그리고 세 용사가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엘르아살은 얼마나 열심히 칼을 휘둘렀는지 나중에는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싸웠습니다(비유적 표현 - ‘손에 쥐가 날 정도로’). 이런 엘르아살 같은 용사가 한 명만 있어도, 두려움에 뒤로 물러가던 사람들이 다시 용기를 얻고,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용사는 ‘삼마’입니다.
11~12절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블레셋이 침공을 한 목적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추수할 때, 곡식을 약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다 익은 녹두밭을 약탈하려고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삼마가 밭 한가운데 서서 그들이 그 밭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막아섰습니다. 홀로 그 밭을 지켜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
첫 삼 인의 용사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들은 모두 마지막 순간까지 다윗과 함께했던 용사들이었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라고 이들을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모두 ‘사사 시대의 삼손과 같이 괴력을 발휘했던 용사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용맹함에 비하면 다윗은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물론 다윗도 매우 재빠르고 용맹한 사람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들의 괴력에 비하면 다윗은 연약한 축에 속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다윗을 주군으로 모셨을까요?
믿음의 사람, 곧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의 모습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골리앗과 대결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맷돌 하나에 골리앗이 쓰러지고 만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소문은 전 이스라엘에 알려졌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전 국민이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인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떠나자 사울은 악령에 시달렸습니다(삼상16:14).
이때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이때 신하들은 사울 왕에게 조언합니다. 사울이 겪는 번뇌와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데려와 치료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궁으로 오게 된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악한 영으로 고통을 받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연주하여 사울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악신을 그에게서 떠나게 합니다(삼상16:14-23).
다윗이 사울의 악령을 쫓아냈다는 소문도 퍼졌을 것입니다.
훗날 사울의 눈을 피해, 광야로 몸을 피하였을 때, 그 시대 “환난 당한 사람, 빚진 사람,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삼상22:2)이 다 그에게로 모였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울 왕이 다스리는 시대는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았던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다윗에게로 모였습니다.
이 세 용사들 역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다윗이 함께하시는 것을 보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 왕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로 살려주었을 때입니다.
이처럼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알아보고, 그에게 충성을 다해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구원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딤후2:3~4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둘째, 이들은 모두 솔선수범하는 용사들이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싸우려고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뒤로 물러날 때도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며 싸움을 돋우던 용사들이었습니다.
진정한 리더는 뒤에 서서 지시하고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서 먼저 솔선수범하는 사람입니다. 뒤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하고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왕>
영화 ‘300’은 기원전 480년 8월에 있었던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을 그린 영화입니다(제2차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합니다. 갑작스러운 침공에 당황한 그리스는 전열을 가다듬을 동안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든 곳을 막을 수 없었던 그리스는 고심 끝에 테르모필레 고개를 방어막으로 삼아 최대한 시간을 끌기로 합니다. 이에 스파르타(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의 왕인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최고의 정예군을 선두로 7천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과 연합하여 협곡에 진지를 구축하고 침입자 페르시아군을 상대했습니다. 결국은 숫자의 열세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사흘간 페르시아군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들이 그 협곡에서 목숨을 담보로 시간을 벌어주는 바람에 그리스 함대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고 결국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스파르타'라는 용맹을 떨친 영웅들은 사라졌지만 '스파르타'라는 말은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서 우리의 가슴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왕의 언어 구사 면에서 확연하게 대별되는 리더십입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는 헌신적이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구사한 반면,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는 공포와 권위로 조직을 장악하며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극 중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크세르크세스가 “나는 승리를 위해 내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잔혹성과 능력을 자랑하자, 레오니다스 왕은 “나는 내 부하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라고 대응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차이가 드러나는 말입니다. “나는 승리를 위해 내 부하들을 죽일 수도 있다”라는 말을 듣고 맨정신으로 그를 따를 부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반대로 “나는 내 부하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르지 않을 부하는 없을 것입니다.
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의 부하들은 300명의 소수의 용사이었지만, ‘죽으면 죽으리라’고 그의 뒤를 따라갔을까 알게 됩니다. 아들의 희생으로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생각납니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불과 12척밖에 없었습니다. 이순신은 선조에게 “아직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이 살아 있는 한, 적들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자신이 먼저 적과 싸우겠다며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이는 병사들의 신뢰와 충성심을 끌어올렸습니다. “살고자 하면 필히 죽을 것이고, 또한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며 동기부여를 하며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은 단순한 명령과 지시를 넘어서,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이었습니다. 결국, 전략적 위치와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을 좁은 해협(울돌목)으로 끌어들여 대파하였습니다.
<아이젠하워의 솔선수범>
2차 세계 대전 중, 인류 역사상 최대 군사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미국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입니다. 어느 날 기자가 아이젠하워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아이젠하워는 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기자에게 실을 앞쪽에서 잡아당기라고 했습니다. 기자가 실을 당기자 실은 기자가 있는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제 실을 뒤에서 밀어 보라고 주문했습니다. 실은 구부러지고 접혀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이것이 리더십이다. 리더는 앞에서 끌면서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짐승은 뒤에서 몰아도 되지만 사람은 앞에서 인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솔선수범의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갈렙의 솔선수범>
여호수아 14장에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인 갈렙이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요구를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수14:12~14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85세의 노구를 마다하고 갈렙은 솔선수범하여 제일 험한 곳으로 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소란할 때에 갈렙은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갈렙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가장 험한 산지를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요. “용장 밑에 약졸 없다.” 앞에서 용감한 장수가 앞장서서 나갈 때, 따라가는 병사들도 본받아서 용감한 병사가 될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라고 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을 위해서 싸울 때는 두려움을 이기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무서워 뒤로 물러날 때에도 오히려 앞으로 나가며 싸웠던 하나님의 용사들이었습니다.
셋째, 한 사람의 헌신이 큰 믿음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1~12절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그들은 연합하여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 개별적으로 싸우기도 하였습니다.
때로 한 사람의 헌신이 큰 역사를 이루어내기도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 한 아이의 헌신에서 비롯됨(요 6:9~13).
또한,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홀로 그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선사해 주셨습니다.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마지막 넷째, 다윗의 용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0절(엘르아살)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2절(삼마)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그들은 동기는 분명했습니다. 자신이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자기의 무용을 자랑하는 졸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싸움을 좋아하거나, 남의 것을 약탈하거나, 피 흘리기를 즐겨하는 침략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침입에 고통받은 것을 지켜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싸움터에 나간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전쟁은 의로운 전쟁입니다. 이들은 오직 이스라엘을 지키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불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싸운 사람들입니다. 동기가 선합니다. 믿음으로 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그들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우리의 무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영적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동기가 선합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에서는 우리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런 자세로 싸울 때, 하나님이 배후에서 우리를 위해 싸워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결과가 나왔을 때,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여 주셨음을 인정하고 항상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첫 ‘세 용사’의 이름(‘요셉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과 그들의 용맹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입니다.
참된 주군을 알아보고 끝까지 충성한 용사들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라는 칭호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말로만 명령한 사람들이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앞장서서 싸운 용사들입니다.
우리도 말로만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앞장서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싸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한 사람이라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큰 역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나 한 사람이 먼저 주님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모두 개인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운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도 그들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들 배후에서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비록 약한 자, 미련한 자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울 때,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라기는 다윗의 세 용사처럼,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우리 하나님께 기억되시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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