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요범사훈 정본
] 현감은 양자징의 말을 듣고서 마음이 감동하여 화난 표정을 풀고서 더 이상 분노하지 않았다! 양자징은 집안은 매우 가난했지만 청렴하여 자신을 지키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주는 물건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죄수들에게 식량이 모자랄 때면 그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구해 와서 그들의 어려움을 급히 해결해 주었다.
하루는 새로 들어온 죄수 몇 사람은 몹시 굶주리고 있었는데 먹을 것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몹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에도 마침 쌀이 모자랐다. 죄수들에게 쌀을 주자니 자기 가족이 먹을 수 없고, 자기 가족을 돌보자니 죄수들이 굶주려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하였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죄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요?" 자징이 대답하였다. "항주에서 왔는데, 오는 길에 얼마나 굶주렸던지 얼굴색이 양 손에 든 노란 채소 같소.”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집에 남아 있는 쌀을 덜어서 죽을 끓여 죄수에게 굶주린 배를 채우게 하였다.
양자징은 나중에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은 이름이 수진이었고, 작은 아들은 이름이 수지였는데, 각각 남경과 북경의 이부시랑吏部侍郎이 되었다. 큰 손자는 형부시랑이 되었고 작은 손자는 사천성의 염헌관직명으로 원나라 때는 여러 관리를 감찰하는 숙정염방사司를 두었는데, 각 지방을 순찰하게 되면서 명나라 때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로 개명되었다. 그래서 안찰사는 염방廉訪 또는 염헌廉憲이라 불렀다.)이 되었는데, 모두 다 유명한 대신이 되었다. 지금의 초정楚亭과 덕정德政도 또한 그의 후대 사람이다.
[사도사의 흰 깃발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
이는 억울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은 과보를 밝힌다. 진심으로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자비심에서 지혜가 생기고, 곧 절묘한 방법이 생각난다.
] 옛날 명나라 영종정통 년간(1436~1449)에 등무칠이라는 도적무리의 수령이 복건성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곳의 선비나 일반 백성들 중에는 그를 따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매우 많았다. 조정에서는 도어사(御감찰관청 내 최고 관직)를 맡은 적이 있던 은현 사람인 장해를 기용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장해는 계책을 써서 등무칠을 붙잡은 후 복건성 포정사(布政司;성 전체의 재정 민정을 관리하는 성의 장) 소속의 사도사事를 파견하여 연해 일대에서 반란 도적 무리에 동조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붙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요범
그러나 사도사는 마음이 매우 인자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각처로부터 도적 무리에 참가한 사람의 명부를 입수하여 도적 무리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게 몰래 헝겊으로 만든 작은 흰 깃발을 나누어 주고서 관병이 성에 도달한날, 이 흰 깃발을 자신의 집 문 입구에 꽂아 두면이는 결백한 민가임을 알리는 표시로 관병이 함부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수많은 사람의 무고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으니, 대략 일만여명이나 되었다. 후에 사도사의 아들인 사천遷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재상이 되었고, 그의 손자인 사비謝丕도 과거에 탐화(花)로 급제하였다.
[해설] 중국 명청 시대에 향시에 합격한 거인擧人이 회시에 합격하면 진사가 되었고, 다시 황제의 전시에 참가하여 1등으로 합격하면 장원元, 2등은 방안, 3등은 탐화, 4등은 전려傳臚, 5등 이하는 모두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보전현의 할머니는 경단을 중단없이 보시하였다]
할머니의 지혜는 3년을 하루 같이 선한 일을 중단하지 않고, 싫증내는 마음 없이 해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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