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보물’은 지방공연 가느라 친구에게 맡겼다 잃어버린, 아들에게 주는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을 받을 아들이었다. 전무송씨의 아들 전진우씨가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다고 생각해 원망하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아들 ‘고비’ 역할을 맡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돼라. 너 자신을 믿어. 그리고 비워. 그리고 제대로 해”라고 마지막 가르침을 전한다. 실제 전무송씨가 아들에게 준 가르침처럼.
딸 전현아씨가 쓴 극본에는 평소 아버지가 하던 말투가 그대로 담겼다. 그러나 〈보물〉의 명성과 전무송은 꼭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가족에 대한 태도 부분. 가족을 팽개친 명성과 달리 전무송은 언제나 가족을 우선했다. 〈보물〉을 연출한 사위 김진만씨는 “아버님과 한집에서 살다 얼마 전 분가했는데, 자상하고 성실하고 정말 잘하세요. 설거지는 물론, 밥까지 차리시는 걸요. 〈보물〉을 관람하신 분들이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보물〉은 배우 전무송의 무대 인생 50년에 대한 오마주 성격의 공연이지만, 전무송의 일대기는 아니다. 한 배우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그린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면 아버지가 가신 길을 그대로 따르고,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한 무대를 합심해서 만들었을까. 다시 마주앉은 전무송씨에게 물었다.
“저는 애들이 시키는 대로 연기할 뿐, 극본이나 연출에서 한마디도 간섭하지 않았어요. 제 생각을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소신대로 하지 못할까 걱정해서죠. 애들이 이렇게 공연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참 인정받고 산다’고 생각하실 텐데 안 그래요. 집사람한테 만날 야단맞고 살아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큰 힘을 휘두르고 통솔하는 것보다 오순도순 마음 섞어가며 살면서 아버지와 남편 본연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까 생각해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대화를 많이 했는데, 아이들은 학교 갔다 온 후 할 말이 있어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아버지 들어오면 또 해야 하니 한꺼번에 하겠다’고.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엄마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서로 말 안 해도 알게 됐고, 생활이 좀 어려울 때는 아이들도 다 알았죠. 자신의 형편대로 사는 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인가, 우리 아이들이 ‘삐뚜루’ 산 것 같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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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물> |
지금은 대부분 사람들이 알아보는 스타가 되었지만, 1981년 영화 〈만다라〉로 대종상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으면서 영화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그는 오직 연극배우로 무대를 지켰다.
“그때쯤 누이동생 남편이 쓰던 중고 자동차 ‘브리사’를 선물로 받았는데, 아내가 자동차가 생겼다고 좋아하며 대학로 극장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거예요. 싫다 했죠. 동료들은 힘들게 무대를 지키는데, 영화하고 나더니 자가용 타고 다닌다는 소리가 듣기 싫었거든요. 죄스럽고 마음에 허락이 안 돼. 이런 이야기도 집에서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바보’라든가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을 했겠죠.”
그는 어떻게 배우가 됐을까.
“유치원 학예회 무대부터 섰으니 원래 무대체질이 아니었을까요? 소방관인 이모부가 주신 영화표로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많이 보고 다녔어요. 어릴 때는 아버지처럼 뱃사람이 될까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산업이 발전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끌려 공고에 진학했고, 인천기계공작창 견습으로 들어가 볼트와 너트 깎는 일도 했습니다. 그런데 깎인 쇠가 녹슬어가는 것을 보면서 내 모습이 그렇게 될까 두려워 1주일 만에 나와버렸죠. 그리고 한양대 연극영화과 시험을 쳤는데 덜컥 합격한 거야. 학비가 없어 진학은 못했고, 영화배우로 발탁될까 싶어 충무로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했죠. 그러다 처음 본 연극이 유치진 선생 연출의 〈햄릿〉이었어요. 그게 내 일생을 결정지었죠. 관객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연극은 영화와는 다른 현장감과 희열이 있습니다. 연극 팸플릿 뒤에 있는 ‘드라마센터에서 배우 지망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했어요. 동랑 유치진 선생이 ‘드라마센터를 연중무휴 공연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배우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아카데미였죠.”

판잣집에 살면서 연극에의 열정을 불태우던 유치진 선생은 그에게 ‘영원한 스승’이다.
“어느 날 배역을 뺏겼다고 술 마시고 깽판 치는 저를 선생님이 부르셨어요. ‘너에게는 다른 배우에게는 없는 게 있다. 관객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고 하셨죠. 그리고 ‘먼저 인간이 되어라. 그래야 훌륭한 배우가 될 것이다’고 꾸중을 하셨습니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말은 그의 일생을 이끌었다. “민들레 씨앗처럼 연극을 퍼뜨리라”는 말씀은 일생의 숙제가 되어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진출하고도 무대를 떠나지 않게 만들었다. 그는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가장 많이 한 배우다. 아버지의 비애를 누구보다 탁월하게 표현했던 그는 “아버지들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전쟁 통을 겪은 후 우리 사회를 재건한 아버지들, 산업사회의 역군이 된 아버지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버지들을 존경해야 해요.”

영화평론가상 남자연기상, 대한민국연극제 연기상, 이해랑연극상,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 그는 우리나라의 연기상 대부분을 섭렵한 명배우다. 그런데도 “뛰어난 능력도 없고, 머리도 좋지 않고, 창조력도 뛰어나지 못해요”라고 자평한다. 그는 ‘남들이 10시간 하는 것을 20시간, 30시간 해야 따라가니 난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안 되면 버릴 줄도 알아야지 미련하게 버티는 게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다.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자괴심에 채소장사라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를 붙든 것은 아내였다. 아내는 “나는 배우 전무송과 결혼했지, 장사꾼 전무송과 결혼하지 않았다”고 울었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란 자녀들은 연극 〈보물〉에서 주인공 명성이 “그녀가 나에게 날개를 달아줬지”라고 말하게 한다.
“배우가 제대로 말을 하려면 10년이 걸리고, 제대로 무대에 서려면 또 10년이 간다는 동랑 선생님의 말씀을 붙들고 무대를 지켰지요.”
연극에서 ‘보물’로 등장하는 그림은 전무송씨가 실제 아이들이 어릴 때 그려준 그림이다.
“연습이 없을 때는 거의 집에 있었는데, 현아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하얀 벽에 크레파스로 공룡・독수리와 숲 속 동물들을 그려놓았어요. 학교 다녀온 아이들이 그걸 보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현아가 학교에 가서 ‘우리 아빠는 만날 집에 계신다. 그림도 그려주고’라며 자랑했대요.”
연극 〈보물〉에서 관객은 배우 전무송과 아버지 전무송을 함께 만날 수 있다. 그것은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모습만은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의 갈등과 비애, 그리고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가족의 사랑을 그는 그리고 있다. 그가 이제껏 무대에서 아버지들을 대변해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