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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는 자들이여, 참지 말아라! | |||
특별기획취재 / 진주정신과 형평운동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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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기자 kubs2941@naver.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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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원래 지금과 같은 보수일변도의 도시가 아니었다. 예로부터 교육과 문화의 고장이었던 진주는 일찍부터 각성한 지식인들의 비판적 문제의식에 기반한 진보적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저항정신의 발원지였다. 사회적 소수자인 백정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 1923년 시작된 '형평운동'은, 세계 사학계의 주목을 받는 대표적 인권운동중의 하나이다. <진주신문>은 지역언론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형평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운동의 의의를 격주로 세 차례에 걸쳐 특별연재한다. 1923년 4월 24일, 진주시 대안동 진주청년회관에는 약7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아온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인간 대우를 실행하고자 하는 단체의 첫 모임이었다. 형평운동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형평사 기성회가 열린 진주청년회관은 지역사회운동의 요람이었다. 3·1운동 이후 진주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지였던 곳에서 형평사 기성회가 열렸다는 사실은, 이 운동이 진주 사회운동가들의 관심 속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야! 백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전 생에 걸쳐 심지어 죽은 뒤에까지 억압과 차별을 겪었다. 일반인들과 같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고, 함께 걸을 때도 몇 걸음 뒤따라 공손하게 가야했다. 백정들은 옷차림 때문에 겉모습만 보아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일반 사람들은 정장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는데 백정들은 두루마기를 입을 수 없었고 또 갓 대신에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했다. 패랭이는 일반 사람들이 부모상을 다하였을 때 죄인이라며 쓰고 다니는 관(모자)였으니 백정들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뜻이었던 것. 심지어 마을 사람들이 아무 때나 백정들을 끌어다가 집단적으로 매질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죽어서도 상여로 운구 될 수 없었고 일반 사람들 묘지와 격리된 곳에 묻혔다. 백정들에 대한 차별의식이 얼마나 뿌리깊었던가 보여주는 장면이다. 백정들, 형평사 기치 아래 모이다 진주의 사회운동가들과 백정 지도자들은 1923년 이른봄부터 백정 마을을 돌아다니며 신분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단체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형평사 결성을 추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백정 출신이 아닌 선각자 지식인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이 있었다. 전국의 백정들이 다 비슷한 차별 아래 놓여있었지만, 특별한 역사적 경험을 많이 한 진주의 백정들은 그중에서도 남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1862년 임술년의 농민항쟁을 겪었고, 1900년 관(갓) 착용의 허용을 요구하는 집단 탄원을 낸 경험이 있었으며 1909년 동석예배 거부를 통한 좌절, 1910년 도수조합 설립 시도와 실패의 기억도 남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진주 백정들에게 교훈이었고 앙금으로 남아 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분명 진주만의 역사였다. 형평사가 이룬 최초의 가시적인 성과는 민적(오늘날의 호적)에 남아 있는 신분 표시를 없앤 일이었다. 30년 전 갑오경장을 통해 법적으로 신분은 없어졌지만 관청의 민적에는 ‘도살’이나 ‘도수업(짐승을 잡는 직업)’이라고 직업을 적거나 빨간 동그라미나 점을 찍어 놓아 백정이었음을 표시해 놓고 있었다. 또 형평사는 사원과 그 자녀들의 교육에 치중하는 활동을 벌였다. 사원들에게는 자녀들의 학교 입학을 적극 권유하였으며, 학교에 가지 못한 사원들을 위해서는 야학을 개설하여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참을 이유도 없고 참지도 않겠다 형평사의 울타리 안에서 뭉친 백정들은, 일상적으로 당해 오던 업신여김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게 된다. 반말이나 모욕, 무시 같은 개인적으로 겪는 차별이나 학교 입학, 묏자리 문제 같은 사회적 차별 등, 예전에는 굴욕적으로 참던 것들에 대해 이제는 더 이상 굴복하고 복종만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것은 차별을 당할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저항하라고 사원들에게 끊임없이 교육한 결과이기도 하다. 충돌사건이 생겼을 때 형평사원들이 적극적으로 이웃 동료에게 알리고 상급기관에 보고하였다는 것도 의식 변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차별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연대하여 집단적으로 대응하였으며 개인적으로 겪는 차별을 전체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여 쟁점화 하였다. 한편 여성 대의원이 전국대회에 참석하거나 독자적인 형평 여성 단체가 생겨 난 것은 전통 사회의 관습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기본적인 인권의식을 일깨우며 또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형평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상 유례 없는 선구적인 인권운동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