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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69) /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빌라도!"
☞ 말 씀 : 요한복음 19장 1절 - 16절 (신약성경 p.180)
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아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재판하는 빌라도가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빌라도는 쉽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키지 않습니다. 그가 고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에게서 십자가 처형을 할 만한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행하고 있는 재판이 불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 18장 3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아멘! -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첫 판결은 무죄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발한 예수님에게서, 그 어떤 범죄 사실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2절, 23절,
말씀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아멘! -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여론 몰이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지금의 궁지에서 빼낼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습니다.
곧 빌라도는 고심 끝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대신에 약식 처형을 결정합니다.
그것이 채찍질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이 채찍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닙니다. 채찍 끝에 뾰족하게 날이 선 납덩이나 쇠붙이를,
붙인 것으로, 한 번 맞으면 옷이 헤지고, 살점이 찢어져 심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빌라도는 우선 채찍으로 예수님을 때려서 유대인들의 마음에 호소해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 중죄도 아닌데 십자가 처형은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강변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예수님 머리에 씌웁니다.
본문 2절의 상반절을 읽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면, 머리에서 피가 흘러 얼굴은 피 범벅이 됩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당시 왕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자색 옷을 입었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자색 옷을 입힌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아멘!
아마 예수님의 모습은 아주 처참하고 사나운 몰골로 변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고통을 주기보다, 그 정도 형벌로 예수님을 놔주려는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4절 말씀을 읽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의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18장 38절에서,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와 채찍질합니다. 그리고 군병들로,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며, 손바닥으로 때리게 했습니다.
이런 가혹행위로 말미암아, 아마 예수님의 모습은 매우 흉물스럽게 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다시 관정 밖으로 나와 예수님에게 아무 죄를 찾을 수 없다며,
다시 무죄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하속들은 빌라도의,
거듭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외쳐댑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 빌라도는 처참하게 변해버린 예수님의 모습을 유대인들에게,
보여주면서, 심문 과정에서 범죄 사실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증거로 보여줍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장면이 그려지면서 심지어 가쁜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군중들의 반응은 여전합니다. 6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댑니다. 빌라도는 의도대로 되지 않자,
자신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했으니,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재판하고 선언한 대로,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기에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도,
죄인이었다면, 자기 죄로 인해 죽어야 했고, 어느 누구의 죄도 용서하실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훌륭한 종교 창시자들과 유명한 성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이 인류의 구원자로,
될 수 없었던 까닭은 모두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은 죄인이 아니라야 합니다. 즉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죄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인간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똑 같은 미약한 존재입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된 우리의 구세주로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선언했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이유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군중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내면세계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진짜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의 본성을 어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진리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둠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정말로 고약한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두 번째 이유는,
잘못된 종교심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 군중들은 잘못된 종교와 율법의 희생자들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 그것이 옳은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이유도 그 일이 곧 정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임의로 규정하는 정의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규정하는 정의라야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정의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곧 자신이 편리한 대로 정의의 잣대를 갖다 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서로 싸우고, 전쟁을 도발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미국대로 정의가 있고, 아프간이나 이라크는 그들 나름대로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과 일본의 정의가 다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정의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세 번째 이유는,
사람이 피를 보면 흥분하는 것처럼, 대중은 옳고 그름을 떠나 군중 심리에 따라, 흥분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 충동적인 심리를,
가진 대중들, 종교적으로 잘못 세뇌 받은 군중들, 죄성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미 논리적,
사고를 잃어버린 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계속 소리를 지릅니다.
자기들의 종교법에 따르면, 예수님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를 괴롭히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젯밤에 자신의 아내가,
이 사람 - 예수님에 대해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꿈을 꾸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빌라도가 재판을 해보니, 지금까지 겪어 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
‘이 사람 - 예수님’ 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사람’ 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군중들의 외침이 마음에 큰 부담감으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8, 9절 말씀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여기서 빌라도의,
내면에서 갈등이 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군중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했다고 계속 외쳐 대자, 빌라도는 두려워하여 예수님에게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 자체는 빌라도의 내면에 갈등이 일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예수님께선 때로 말씀하시고 때로 침묵하신 분이십니다.
10절, 11절 말씀을 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도다 하시니라.” - 빌라도는 무시당하자, 화가 나서 권력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권세도 있다면서 겁을 줍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전혀 흔들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세상 나라는 권력에 의해 움직이고 총칼에 의해 흥망성쇠를 이루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원리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의 질문에 침묵을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빌라도의 전혀 다른 관점을 비교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네가 나를 살릴 권세와 죽일 권세가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나에게 해를 입힐 권세가 없는 줄 알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세상 권세에 대해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서로 관점이 다릅니다.
세상은 똑 같은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보는 관점은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살려 하니까,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오복’ 을 생각합니다. 출세하고 돈 벌며,
장수하고 유명해지며, 자식 잘되는 다섯 가지를 예수님 믿고 복 받았다는 세상적 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오복을 달라며 기도하고 응답해 주지 않는다며 갈등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복이란?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죄가 가려짐을 받았다는 것은 복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아멘! (시 1:1~2)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생각하는 축복의 관점이 다르고, 권력의 관점이 다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혼돈하게 되면, 끊임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갈등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천국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 속에 사는 사람이고, 그 나라에서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복이고 출세해야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그 자체가 복이고, 예수 믿어 구원 받은 것이 복이 됩니다. 12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이처럼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무척 애를 많이 썼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세 번이나 무죄라고 선언하고, 불쌍하게 만들어 놓으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정치적 이슈로 계속 빌라도를 몰아붙입니다. 군중이란? 필요에 따라서,
움직이는 매우 비겁한 존재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군중은 진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필요에 따라 변하고 거짓말하며 사기 치는,
것이 군중 심리입니다. 빌라도는 거듭 고심하지만 결국 권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
오늘 본문 13절, 14절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 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아멘!
이렇게 유대인들은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지 않고 죽으면, 이 세상이 행복질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리라고 외치자, 빌라도는 유대인의 왕을,
내가 어찌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죽이기 결단한,
대제사장들이 재빠르게 가이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응답합니다.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그렇게 예수님을 넘겨줍니다.
우리가 알게 된 첫째는, 세상에는 불법 재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재판이 항상 의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때로 억울한 일도,
겪을 수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럴 때 아무리 억울한 일에 대해서, 불법 재판에 대해서,
항변해 봐도 통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행해진 불법 재판을 보면서,
이 세상에 불법 재판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재판은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롭고 공정하지 않고, 불의하고 불공정이 판을 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전혀 죄가 없으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 죄도 없지만, 모함으로 인해 죄인으로 몰려 사형 당하거나 유배를,
떠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지만, 전혀 죄가 없으십니다. 이 사실을 빌라도는,
세 번이나 선언했습니다. 죄가 없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복음진리입니다.
셋째는, 대중은 대중심리에 의해 진리와 상관없이 움직일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여론은 옳지만,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항상 옳으시고,
예수님만이 항상 옮으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옳으신 주님만을 따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라도처럼 세상소리에 진리에서 떠난 사람도 되지 말며,
이 세상 사람들의 소리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잘못된 군중심리에도 휘둘리지 말며,
오직 하나님 말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죄 없으신 오직 예수님,
이 복음 진리를 따르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