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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프루스트가 사랑한 프티트 마들렌 과자 맛의 신비처럼, 저 얄상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휴대폰을 맛있는 커피 한잔과 함께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차에 적셔 흐물흐물해진 마들렌 과자 같은 휴대폰 한 조각을 입 속에 넣고 천천히 녹이면서 빨아 먹었으면 좋겠다. 혀와 입천장을 통째 사용해서 부드럽게 으깨어 먹었으면 좋겠다. 휴대폰에 대고 끊임없이 말을 생산하던 바로 그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아 사라지는 휴대폰 비스킷, 휴대폰 쿠키! 그러고 보니 휴대폰은 커피나 차에 찍어먹기에 딱 좋게 생겼다. 마지막 한 모금 커피로 입 속을 가시면서 아, 이렇게 퍽퍽하고 맛없는 기억들이라니! 탁탁 손을 털고는 어디선가 맛있게 익어가는 기억을 찾아 홀홀한 빈손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유쾌한 도발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프루스트에게 차에 담근 프티트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의 맛이 옛 추억의 콩브레 시절을 생생하게 불러내게 한 비밀의 문이 되었듯이, 오늘의 우리에게는 이 납작하고 얄상한 휴대폰 조각을 커피에 적셔 맛있게 먹어치우고 빈손으로 문 밖을 나서는 순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먼 길의 첫 번째 문이 될 지도 모른다. 밤새워 연애편지를 쓰거나 친구에게 선물할 멋진 시 구절을 찾아 도서관을 배회하면서 몸속에 가득했던 그윽한 떨림, 백목련 가득한 봄날의 골목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가슴 쿵쾅거리며 공연히 얼굴 붉어지던 설렘, 누군가의 집 담장 밑에서 우연히 창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서성거려 본 사람의 달큰하고 풋비린내 나는 미숙한 열기 같은 것, 풋것이지만 싱싱한 감각의 미로를 고스란히 아로새길 수 있었던 시간들은 사라졌다. 사라져 간다. 오늘날 우리의 감각은 명백히 퇴화하고 있는 중이거나 아니면 비약적인 돌연변이 진화를 경험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지우고 쓰기를 거듭하며 밤새운 연애편지 한 장의 떨림과 설렘을 발신 메시지 저장 기능을 갖춘 휴대폰 문자 메시지만으로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소통 도구의 진화 속도에 발맞추어 격렬한 돌연변이 진화를 해가고 있는 쪽일 것이다. 사랑해, 보고 싶어, 등속으로 요약되어 저장되었다가 언제든 간편하게 호출해 보낼 수 있는 짤막한 문장만으로도 관계의 싱싱한 떨림들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관계 맺기의 떨림과 설렘을 야금야금 먹어치워 온 휴대폰을 커피에 적셔 부드럽게 으깨어 먹는 상상을 하면서 나는 킬킬거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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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우리 생활 속에서 휴대폰이 먹어치워 온 감각의 세부들이 내 혓바닥 위에서 살금살금 다시 살아난다. 내 상상은 내친 김에 한 발짝 더 나간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고 믿어지는’ 휴대폰을 폭신폭신하거나 말랑말랑한 질감의 소재로 모조리 바꿨으면 좋겠다. 눈 뜨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휴대하는’ 이 전화기들이 죄다 이토록 금속성에 가까운 딱딱한 소재들인 것은 뭔가 좀 엽기적일 뿐만 아니라 쓸쓸한 일이다. 유선 전화기만으로는 도저히 현대의 속도를 쫓아갈 수가 없어 하루 종일 전화기를 휴대하며 만지작거려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운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말랑말랑하게 진화시켜보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요컨대 세상의 휴대폰들은 사람의 체온과 피부의 느낌에 좀더 가까워져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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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산책을 나온 남자가 터벅터벅 걸으면서 한편으로는 휴대폰에 대고 무어라 끊임없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쳐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이나, 영화관 앞좌석의 여자가 영화를 보면서 너무도 익숙한 포즈로 문자를 날리고 받는 것을 바라보는 일 등이 도무지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날들이 지속되고 있다. 여행이나 스포츠를 즐길 때, 심지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휴식을 취한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거의 모든 시간들에 빠지지 않고 휴대되는 이 특별한 소통 도구가 총처럼 차갑고 딱딱한 금속성 일색이어서야 우리의 감각이 오금을 펴겠는가. 촉각은 원초적인 감각이다. 휴대폰을 귓바퀴에 대거나 손에 잡을 때,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 대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손의 촉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이 조금쯤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각, 촉각, 청각이 한 손 안에 쏙 들어오게 구현되는 이 특별한 사물에 후각의 풍미를 더할 수 있어도 좋겠다. 이를테면 갓 지은 밥냄새, 갓 구운 빵냄새, 갓 볶은 커피냄새, 막 머리를 감은 연인의 신선한 머리카락 냄새 같은 것이 풍기는 휴대폰! 나는 상상을 통해 불러일으킨 후각에 이어 다시 미각을 발전시킨다. 오고 간 말들의 질감에 따라 달디달거나 소태같이 쓰거나 닝닝하거나 짜디짠 여러 가지 맛들이 순간 저장되는 휴대폰! 다시 나는 상상한다. 짜거나 쓰거나 닝닝한 맛의 휴대폰을 커피잔 속에 담가 흐물흐물하게 적셨다가 입 속에 넣는다. 때로 마른 과자 씹듯 와삭와삭 씹어 먹는다…. 내 상상의 종착지가 결국은 ‘먹어치우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아무래도 나는 휴대폰의 존재가 불편한 모양이다. 혹은, 전화기를 ‘휴대해야 할’ 지경이 되어버린 일상의 어느 결에서 들려오는 그 무엇인가의 작고 띄엄띄엄한 노크 소리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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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울의 전철을 타게 되었을 때다. 꽤 긴 나라 밖 여행에서 막 돌아온 참이어서 오랜 여행의 노독이 선물한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을 지니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이를테면 한국에 있을 때 내가 그토록 못 견뎌 하던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막막함조차 그런대로 견딜 만하게 느껴지는 이색적인 경험이었는데, 다양한 대륙을 거쳐 온 긴 여행의 체류지들을 내가 충분히 만끽하고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어나 자란 곳의 ‘고향의 느낌’을 대신할 수는 없었나 보다. 편안한 느낌의 이면에는 말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모국어를 쓰는 곳이 아닌 곳에서의 의사소통이란 어떻든 긴장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어서, 정확하게 듣고 말하기 위해 신경을 곧추세우지 않아도 되는 언어 환경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 것인지. 왜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곳에서 습득한 언어를 ‘모국어’라고 명명하는지, 그 말 자체가 얼마나 글썽글썽한 것인지 느꺼워하며 퍽 감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내가 탄 전철 차량의 승객 중 절반가량, 아니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무언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필 그 시간 그 차량에 유독 집중되어 그런 현상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뭔가 좀 비정상인 느낌으로 사방에서 휴대전화들이 울려대고 있었다. 끊임없이 벨이 울리고 사방에서 큰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거나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중인 사람들, 젊은이들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빠른 손놀림으로 어딘가로 문자를 송신하거나 게임에 몰두하거나 내가 모르는 어떤 일들을 끊임없이 휴대폰으로 해결하고 있는 듯했다. 휴대폰의 조그만 액정 속에 청년들을 저토록 무아지경에 빠뜨릴 수 있는 어떤 내용물이 있는 것인지 휴대폰의 세계에 무지한 나는 도무지 점치기 힘들었지만 그들은 몰두하고 있었고 몰두 자체로 외부에 강력한 방어막을 치고 있는 것이어서 저마다의 사람들이 하나씩의 섬처럼 전철 속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순간적인 착시 같은 것이었는데, 영화에서처럼 소리들이 일시에 소거되며 휴대폰에 대고 무어라 소리치거나 소곤대는 사람들의 입 모양, 귀 모양, 액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눈, 빠르게 무언가 꾹꾹 눌러가는 손가락들이 어안렌즈 속의 세계처럼 과잉 왜곡되어 클로즈업된 채 전철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모두 모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모국어로 문자를 송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이방인의 느낌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만이 아니라, 전철 안의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인 느낌 같은 것이었다. 그런 풍경은 내가 지나온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세계 소비자본주의가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물화된 첨단도시라는 뉴욕에 가보지 않았으니 그곳에서 휴대폰이 어떤 권능을 행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문명의 속도가 한국의 서울보다 느린 곳들에서야 말할 나위 없지만, 한국보다 여러 가지 지표들에서 선진국이라고 분류되는 유럽과 북미와 오세아니아의 여러 도시에서도 이런 풍경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이것이 초고속으로 성장한 IT산업 강국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면모인지 양철냄비처럼 달아오른 소비자본주의가 낳은 천박한 물신화 방식인지 헷갈리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휴대폰을 구입할 것이다. 그러나 불필요한 필요를 끊임없이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소비자본주의의 생리이기도 하다. 필요해서 산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외부로부터 조장된 필요’에 의한 것일 경우가 더 흔하게 발생하는 것이 우리가 속한 세계인 것이다. 모국어에 대한 향수를 단번에 걷어 가 버린 그 전철 안에서, 약간 기우뚱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두망찰 나는 중얼거렸을 것이다. 이 많은 말들은 다 어디로 가나…. 불과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화기를 휴대하고 다니는 세상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기 등속을 휴대하지 않고서도 사랑은 이루어지고 연애는 지속되었으며 오래 산 사람들은 지상을 떠났고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났다. 어쩌다가 우리는 사람 수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휴대전화를 가지게 된 것일까. 혹시 우리는 소비자는 왕이라는 달콤한 문구에 현혹된 채 시장과 새로운 상품의 소비를 위해 적극적으로 동원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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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산업의 진보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일까. 도대체 기술이 진보하면 무엇이 좋아지는 걸까. 강원도 깊은 산중에서도 휴대폰 통화를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에 얼마나 기여하는 것일까…. 불과 일이 년이면 이미 구모델이 되는 갖가지 통신 기기들이 매년 쏟아진다. 언제나 최신모델이 대기 중이고 철 지난 모델은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없게 만드는 판매 전략들이 횡행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소비자는 소수 거대 기업이 독점하다시피한 시스템 앞에서 거의 언제나 무력하다. 그날, 저마다 고독한 섬처럼 고개를 파묻고 강력한 소통 도구인 휴대폰을 자기 몸 가까이 바싹 끌어당긴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쩌면 슬픔을 느꼈는지 모른다. 이 아찔한 현대의 속도 속에서 우리가 정말 ‘통신’하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인 걸까. 누군가와 바싹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우리가 정말 연결되어야 할―소통할 수 있어야 하는 이는 바로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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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도 과하면 병이 되고 관계도 과하면 병이 된다. 그저 즐길 만한 수준이면 좋다. 즐길 수 있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와 침묵이 필요하다. ‘적당한’이란 어느 만큼일까. 어린 시절 종이컵 두 개를 실로 연결하여 만들었던 전화기 같은 것, 방문 이쪽과 저쪽에서 한쪽은 귀에 한쪽은 입에 대고 무어라 소곤소곤 말하고 듣던 그 거리 만큼이면 좋을 듯싶다. 무슨 말이 내게로 건너오는지를 듣기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던 그 설렘과 떨림의 거리. 그만큼이 전화기라는 사물이 구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거리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그 쫑긋거림, 저편의 숨결까지 감지하고자 온몸을 기울이는 극진함이 살아 있는 세계. 문 저편이 침묵 중이라면 침묵의 언어를 극진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람의 말뿐만 아니라 갖가지 사물과 동식물과 흙과 물의 말 앞에서도 좀더 극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몸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처럼 나무 둥치 속에서도 물이 순환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그것이 나무의 말이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갖가지 사물들이 실은 너무도 풍성한 말을 거느린 언어의 마법사들이라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깨달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극진하게 들을 수 있는 낮은 무릎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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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게도 휴대폰이 생겼다. 두 번째 시집 출간 직후 전셋집을 처분해 긴 여행을 다녀온 후라, 전화는커녕 집도 없던 내게 제일 먼저 생긴 게 휴대폰이었다. 예정보다 서너 달 귀국을 앞당기게 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였던 새로운 일에 착수하면서 휴대폰을 받게 되었다. 내 생애 휴대폰을 갖게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나 버린 것이다. 휴대폰을 마련하겠다는 제안을 사양하지 않은 것에는, 이메일밖에는 나와 연락이 안 되는 그쪽의 답답함을 이해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대체 휴대폰, 그게 뭔지 이참에 한번 써보자는 은밀한 욕구도 한몫 했을 것이다. 휴대폰이 없다는 이유로 소소하게 직면했던 불쾌한 경험들도 꽤 있던 터였으므로. 어느 틈엔가 개인적인 용무의 처리를 위해 연락처를 남겨야 할 때마다 휴대폰 번호를 ‘당연하게’ 물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휴대폰 안 쓰는데요, 라고 말하면, 십중팔구는 “네?” 라고 다시 물어오는 사태가 빈번해졌다. 그것은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은 당연히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발상이어서, 그런 경우에 직면할 때마다 기분이 떨떠름해지곤 한 것이다. 휴대폰이 생겼지만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로서는 휴대 전화가 생겼으니 당연히 집 전화를 따로 놓는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이번에는, 집 전화는 안 쓰는데요, 라고 말해줘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당연하게’ 치부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당연의 세계는 종종 폭력적이다. 몇 살이 지나면 당연히 결혼을 서둘러야 하고, 결혼했으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하고, 결혼은 당연히 여자와 남자가 해야 하며, 이제는 심지어 두 개 이상의 전화번호를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는 것이다! 개개인의 관점과 취향의 차이가 당연의 세계 속에서 간단히 평균화되는 사회는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비밀의 문은 당연의 세계 저 너머에서 징검다리를 놓기 시작할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휴대폰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나는 와삭! 휴대폰을 깨물어 먹으며 새로 놓은 징검다리를 랄랄라 건너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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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강원도의 자연과 동해를 벗하며 살았다. 1996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후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 『바리데기』를 펴냈다. 2004년도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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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일제당 사외보 생활속의 이야기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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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공기달 님이 이미 올리시긴 했는데 원본에 있는 사진이 좀 아까워서 답글로 올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