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접하고 있는 문경새재를 넘어서면 괴산군 남동쪽 끝에 연풍면이 나선다. 해발 1,017미터의 험준한 고갯길, 새재의 서쪽 기슭에 연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연풍은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곳으로 초대 교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돼 있던 뿌리 깊은 교우촌이다. 연풍 마을과 문경 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순교 역사가 어려 있다.
구름도 쉬어 넘는다지만 산이 높은 까닭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선인들이 새재로 불린 험한 길을 처음 내고 넘나들면서부터 고갯길 굽이굽이 서린 슬픈 내력들에 구름인들 차마 어찌 그냥 넘어설 수 있었으랴.
연풍은 전체가 소백산맥의 산릉에 속한 험지이고 문경시와 접경지대에 조령산과 백화산 등 소백산맥의 주봉들이 높이 솟아 있다. 그만큼 험난하기에 예로부터 경기,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를 피해 충청도와 경상도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나서는 순교자들의 피난의 요로로 일찍이 교우촌이 형성됐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로 보따리를 싸서 박해의 서슬을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험(天險)의 도주로를 이용해 여차하면 밤을 틈타 험준한 산 속으로 숨어들어 새재 제 1, 2, 3관문 성벽 밑에 있는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죄인 아닌 죄인, 도둑 아닌 도둑으로 한스럽게 살았던 교우들이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잠깐 눈을 붙인 틈을 타 숨죽여 가며 드나들던 그 수구문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최양업 신부이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 13년간의 각고 끝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다.
은신처로서 새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그는 김대건 신부가 1년 남짓 사목한 데 비해 오랫동안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했다는 최 신부는 생전에 쉴 새 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옮겨져 묻혔다.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1813-1866년) 성인의 발자취가 빛을 발한다.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나이 스물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온 그는 가족들로부터 모진 반대를 받았다. 화가 난 부친은 작두를 마당 한 가운데 놓고 아들의 목을 걸게 하였지만 태연히 목을 내밀자 눈물을 흘리며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2년 이상을 벙어리처럼 산 끝에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안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두고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신앙에 눈뜬 뒤 그는 정결을 지키는 생활을 해 페레올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하려 했으나 부인이 들어가 있을 정식 수녀원이 조선에 없다는 이유로 교황청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다블뤼 안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칼을 받아 순교한다.
연풍에는 또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화가 전해진다. 병인박해로 한국 교회는 9명의 성직자를 잃었다. 천신만고로 세 명의 선교사가 목숨을 건졌는데 그중 칼레 신부에 얽힌 이야기가 그것이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칼레 신부가 연풍을 지나다가 포졸들에게 발각돼 도망치다가 붙잡히려는 찰나에 그만 전대가 풀어져 돈이 떨어졌다. 그를 쫓던 포졸들은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틈에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 공소로 옛날 향청 건물(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을 사들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 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매입 후 논과 집터 정리 작업 중에 박해 때 죄인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이 1964년, 1972년, 1992년 각 1개씩 3개나 발견됐다. 그중 처음으로 발견된 형구돌은 1974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되었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남에 따라 성지 개발이 가시화됐다.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그 해 가을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산에 묻힌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확인한 후 다음 해 임시로 수안보 본당에 안치하였다가 1982년 8월 25일 연풍 성지로 천묘(遷墓)하여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연풍성지 조성과 관련하여 고 오기선(요셉) 신부의 공로와 미국 부모로부터 사재를 가져다가 형방 건물과 성지 부지를 매입해 오늘의 연풍 성지의 주초를 놓고 30년간의 수안보 주임에 이어 1992년 성지 초대 담임으로 부임하여 2004년 은퇴할 때까지 성지 조성에 평생을 바친 메리놀회 정안빈(Robert M. Lilly) 신부의 공로를 잊을 수 없다.
매년 3만여 명씩 순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연풍 성지에는 황석두 성인과 함께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등 5인의 성인상과 오성바위를 재현하여 1986년 축복식을 가졌다. 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대주교의 동상과 높이 8.5미터의 대형 십자가는 순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연풍 성지는 공소로 사용하던 향청 건물을 복원하고, 경당 및 사무실 등으로 사용할 기념관을 마련했으며, 2005년에는 중앙 제단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2013년 황석두 루카 성인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성당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새재와 연풍에 어린 복음의 발자취
새들도 쉬어 가며 넘는다는 문경 새재(鳥嶺).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 온천 지대를 지나 30여 리를 가면 만나는 곳이 충청도 연풍(延豊)이고, 이곳에서 다시 심하게 굽은 고개를 올라 조령, 조곡, 주흘 등 세 개의 관문을 지나면 경상도 문경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 터널이 개통되면서 어렵게 새재를 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연풍은 본래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조령 관문 아래의 수옥 폭포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풍수지리적으로는 최적의 거주지였던 셈이다. 그러나 연풍은 이제 지리적 위치보다는 천주교 성지로서 교우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 이 지역에 교우들이 거주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미 1790년대 후반, 교우들이 새재를 넘나들 무렵부터 한두 명의 교우들이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이내 교우촌을 일구고 포졸들에게 쫓기는 교우들을 받아들여다. 또 훗날 최양업 신부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경상도의 비밀 교우촌을 찾아보기 위해 연풍을 거쳐 새재를 넘었으며, 그것도 포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으레 성벽 아래의 수구문(水口門)을 이용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이 문경 새재와 연풍은 복음의 연결 통로였지만, 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새재를 넘나들었고, 그 아래의 연풍 주막에 묵으면서 신자들을 색출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실제로 1866년에 박해를 피해 다니던 칼래 신부는 연풍 주막을 지나가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제가 연풍 주막 앞을 막 지나치려고 할 때 포졸들이 의심을 품고 '당신은 누구요?'라고 하면서 뒤따라와 이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유 토마스가 심하게 시비를 걸자 포졸들이 모두 거기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저는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와중에서 저의 전대가 떨어져 돈이 튀어나오자 포졸들은 저를 잊어 버리고 돈을 줍는 데만 정신이 팔렸습니다(칼래 신부의 1866년 6월 10일자 서한 중에서).
연풍과 관련하여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곳이 바로 황석두(루가) 성인의 고향이요, 연풍 성지는 곧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부유한 평해 황씨 집안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노력해왔으나, 25세 무렵인 1837년경에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는 구름이 걷힌 하늘을 보는 듯한 기쁨에 넘쳐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더욱이 부친을 개종시키기 위하여 2년 동안 벙어리 노릇까지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 생활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부친이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면서 그는 투기 행위를 하였고, 이로써 10년 동안 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추방 같은 것이었다. 이 추방 기간 동안 그는 더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으며, 그 결과 1858년에는 회장으로 임명되고, 다블뤼 주교의 복사요 제자가 되어 번역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8년 뒤 대박해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을 때 황석두도 체포되어 다블뤼 주교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그는 끝까지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이미 순교할 원의가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서울로 압송된 뒤에도 신앙을 증언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학식과 교리를 바탕으로 박해자들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충효는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것이 제일이요, 임금과 부모께 대한 것은 그 다음일 뿐입니다. 세속 일에서도 친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을 고발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한 형제인 교우들을 고발하고 교회 일을 발설하겠습니까? 관장께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어찌된 도리입니까? 1866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널리 편 것은 어느 성인도 가르칠 수 없는 진리이니, 어찌 그 가르침을 배반하겠습니까?([우포도청등록], 병인 2월 3일, 황석두 공초)
물처럼 흐르는 그의 호교론에 관장은 말문이 막힐 정도였고,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결국 그에게는 군문효수형이 언도되었으며, 임금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포졸들은 선교사와 장주기와 함께 그를 옥에서 끌어내 닷새가 걸려서야 보령의 갈매못 형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음력 2월 14일). 그곳 백사장에서 형을 집행하였으니, 당시 황석두의 나이는 54세였다.
순교자들의 시체는 나흘 동안 형장에 버려진 채로 있었다. 그중에서 황석두의 시신은 가장 먼저 가족들에 의해 고향 선산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순교자들은 홍산으로 이장되었다가 1882년에 발굴되어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68년에 황석두가 복자품에 오르면서 연풍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79년에는 마침내 평해 황씨 선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성지로 이장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7월호]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1813-1866년)
성 황석두 혹은 황재건이라고도 하는 루카(Lucas, 또는 루가)는 충청도 연풍의 어느 양반 집안에서 삼대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가문을 화려하게 번영케 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글공부를 시켰고,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도 역시 아버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20세가 되던 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였는데, 그가 묵은 어느 주막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 성교회의 도리를 듣고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천주교 교리책을 여러 권 얻어 가지고 집을 떠난 지 3일 만에 부친에게로 되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이 되돌아 온 이유를 알자 분노가 치밀어 아들을 마구 때리고 급기야는 작두를 마당 가운데에 놓고 아들의 목을 작두에 걸게 하였다. 그러나 황 루카가 태연히 목을 내밀자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친의 책망과 모진 매질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그는 2년 이상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벙어리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루카는 아버지 앞에 나아가 천주교 교리책을 한번 읽어 보시라고 설득하니, 이때부터 온 집안이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시일이 지남에 따라 비신자들까지도 루카의 신심과 열성 그리고 이에 못지않은 그의 훌륭한 예의범절에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그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자 루카는 성교회를 위해서 자기 일생을 바칠 것을 주님께 서약하였고, 페레올 주교는 처와 별거한다는 조건 하에 루카를 사제품에 올리려고 계획을 세웠으나, 교황청에서 당시 조선 땅에는 여자 수도회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후 페롱(Feron, 權) 신부의 한문 선생 겸 전교회장 일을 맡아 수행하던 황 루카는 또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돕게 되었다. 그는 주교와 함께 “회죄직지”를 위해 원고를 썼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번역 출판과 그 교정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들이 다블뤼 주교를 잡으려고 몰려오자, 다블뤼 주교는 루카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루카는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까지 주교님을 모셔온 제가 피신하다니 될 말입니까? 그래, 주교님은 혼자 천당 가시려는 심사인가요?”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주교와 신부들과 함께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윽고 그는 1866년 3월 23일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신부들과 함께 보령 갈매못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받아 치명하였다. 이때가 1866년 3월 30일이요, 그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1821-1861년)
두 번째 한국인 신부. 세례명 토마스. 양업(良業)은 아명(兒名)이고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본관은 경주. 충청도 다락골[일명 대래골, 현 靑陽郡 化成面 禮岩里]에서 출생.
생애 최양업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었다. 본시 서울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洪州)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간).
다락골에서 점차 생활이 넉넉해지고 또 외교인 친척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자 최경환은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형제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같이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3년 만에 천주교 집안인 것이 탄로되어 서울을 떠나야 했는데 이 때 최경환은 과천(果川)의 수리산 뒤듬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산지를 개간하며 연명해 나아갔는데, 틀림없이 이 곳 수리산에서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을 것이다.
1836년초 입국에 성공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즉시 방인(邦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 선발에 착수했는데, 맨 먼저 최양업이 발탁되었고, 이어 최방제(崔方濟)와 김대건이 발탁되었다. 최양업 등 세 소년은 서울의 모방 신부 곁에서 라틴어를 배우며 출발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모방 신부는 그들을 국외로 내보내어 성직자로 양성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세 소년은 마침내 그해 12월 3일 마카오로 가기 위해 의주(義州)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이들은 출발에 앞서 그 전날 모방 신부 앞에서 소명(召命)에 충실하고 장상들에게 순종할 것을 선서하였다.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유지 교우들이 그들을 동행했는데 이들은 세 소년을 변문(邊門)까지 인도하고 거기서 새 선교사를 맞아들이게 되어 있었다. 일행이 12월 28일 변문에 도착한 후, 세 소년은 중국인 안내원을 따라 중국 대륙을 횡단, 이듬해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하에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처럼 선교사들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기회에 그들의 교육을 돕기도 하였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으로 인하여 두 번이나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死別)하는 등 그들의 유학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나 그래도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1842년 그들은 아직 수학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실(Cecille) 함장이 마카오의 경리부를 찾아와 조선원정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경리부장 리브와 신부는(그간 르그레즈와 신부는 파리본부로 전임되었다) 벌써 몇 년째 조선교회와 소식이 끊겨져 있었으므로 세실의 요청을 하느님의 섭리처럼 생각하고 쾌락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종말이 가까워지자 프랑스 정부는 중국에서 어떤 이득을 얻어 보려는 심산에서 군함 2척, 즉 에리곤호와 파보리트호를 파견했었는데 세실은 에리곤호의 함장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건강이 약한 김대건을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먼저 에리곤호에 태워 보냈다(2월 15일). 한편 최양업은 파보리트호로 떠나게 되어 있었는데 입항(入港)이 늦어져 7월 17일에야 요동(遼東)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와 같이 마카오를 출항하였다.
8월 23일 오송(吳淞)에 이르러 최양업은 먼저 떠난 김대건과 만났다. 그런데 세실은 남경조약이 체결되자(8월 29일) 더 이상 북상(北上)하기를 포기했으므로 두 신학생은 프랑스 군함에서 하선하고 다른 방법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행히 강남(江南)교구장의 주선으로 중국 배 한 척을 얻어 우선 요동을 떠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배로 10월 2일 상해(上海)를 떠나 10월 23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김대건은 그 곳에 남아 입국을 시도하였고, 최양업은 몽고땅 팔가자(八家子)로 가서 페레올(Ferreol, 高) 신부와 합류하였다.
최양업은 소팔자가(小八家子) 교우촌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한편 김대건은 입국에 실패했으나 그간의 조선교회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1839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를 위시하여 그의 부친 최양업의 부모 등이 순교한 소식에 접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최양업은 오히려 그들의 순교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페레올 신부가 제3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843년 12월 31일 개주(蓋州)에서 주교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성식에 참석한 후 최양업은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소팔가자로 돌아왔고, 얼마 뒤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도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간 김대건은 다시 한 번 훈춘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었다.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늦어도 12월 15일 이전)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으나 교회법이 요구하는(만 24세) 연령 미달로 사제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계속 소팔가자에 남아 있었다. 한편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같이 입국을 시도한 끝에 성공하지만 주교를 대동하지는 못하였다.
최양업은 1845년 한 해를 기다림 가운데 허송한 뒤 1846년 초에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두만강 쪽을 통해 처음으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최양업은 요동교구의 베르뇌 신부의 사목활동을 도우며 1846년을 보냈다. 1846년 말 변문을 통해 두 번째 입국을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이 때 그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최양업은 육로(陸路)로의 입국을 단념하고 해로(海路)로의 입국을 시도하고자 홍콩의 경리부로 갔다(그간 경리부는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1847년 초에 홍콩에 도착한 최양업은 입국의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페레올 주교가 보내온 한국순교자전기를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드디어 입국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 라피에르(Lapierre) 함장이 조선정부로부터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해안으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1년 전 세실은 조선 서해안에 나타나 1839년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서한을 조선정부에 보내면서 1년 후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왔었다.
라피에르 함장은 메스트르 신부, 최양업 등과 같이 군함 2척을 이끌고 1847년 7월 28일 마카오를 떠났다. 그러나 두 군함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완전히 난파하였다. 상해로부터 구조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최양업은 육지로 잠입하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부득이 구조선을 타고 상해로 돌아와야 하였다. 난파된 군함의 잔해(殘骸)를 거두러 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기다렸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국내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1848년도 지나가 버렸다.
1849년 최양업은 백령도를 통해 입국을 네 번째로 시도했으나 또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그는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로부터 숙원인 사제품을 받고 동료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신부가 되었다. 최 신부는 다시 육로 입국을 시도하고자 5월 요동으로 떠났다. 연말을 기다리며 7개월 동안 베르뇌 부주교를 도우며 사목경험을 쌓았다. 12월 변문으로 떠났고, 이번에는 입국에 성공했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같이 입국하지는 못했다. 실로 입국길에 오른 지 7년 6개월, 입국의 시도를 거듭하기 다섯 번만의 성공이었다.
사목활동 귀국하자 최양업 신부는 휴식을 취할 겨를도 없이 5개 도를 두루 다니며, 그것도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산간벽지만을 찾아다니며 교우들을 심방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 1년간 7천여 리를 찾아다니며 4,000여명의 고해를 들었다. 그는 건강한 편이었으나 워낙 그가 맡고 있던 지역이 넓고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어서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철종년간(1850∼1863)은 천주교가 묵인되던 때여서 정식 박해는 없었으나 소위 사군난(私窘難)은 그칠 날이 없었다. 사군난은 그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외교인들의 습격을 받으며 체포될 뻔도 했고, 추방되고, 관가에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최 신부는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궁핍 가운데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 앞에서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최 신부는 이같이 바쁜 전교활동 중에서도 신학생을 선발하여 페낭 신학교로 보냈고 또한 선교사들의 입국을 주선했으며 순교자들에 관한 증언과 자료까지 수집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을 보였다. 최 신부 혼자만도 1,000여명의 예비자를 기록함으로써 개종운동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 뜻밖에 1859년 말에 박해가 일어났다[庚申迫害]. 이 박해로 인해 최 신부는 경상도의 한 공소에서 여러 달 동안 외부와 완전히 소식이 두절된 채 갇혀 지내야 하였다.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선생신부들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순교까지 각오하였다.
그러나 박해는 다행히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최 신부는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중단되었던 전교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개종운동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최 신부는 박해 때문에 밀린 공소를 너무 무리하게 추진시켰다.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100리를 걸었고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났다. 그러면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성사집전을 끝낸 그는 주교에게 보고차 상경하던 중 1861년 6월 과로로 경상도 문경(聞慶)[충청도 鎭川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에서 쓰러져 장티푸스로 보름만에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 집안에 전해지는 구전에 의하면, 쇠고기에 체해 사망했다고 하는데 아마 처음의 식중독이 겹친 과로로 합병증을 일으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 같다. 최 신부는 이렇게 사목활동 12년 만에 기진맥진한 끝에 순직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신학교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최 신부의 사망은 조선교회를 위해 그가 유일한 한국인 신부였고, 열렬한 선교열에 학덕을 겸비한 모범적 사제였다는 점에서 당장은 그 무엇으로써도 보충하기 어려운 가장 큰 손실이었다. 교구장을 위시하여 선교사들이 한결같이 그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저술활동 최양업 신부는 19통의 라틴어 서한[그 중 1통은 遺失]을 남겼다. 그는 라틴어를 정확하게 말하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사여구를 구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라틴어 작문 2통을 남겼다. 최 신부의 서한들은 최 신부 자신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교회사 연구에 필요불가결의 기본자료이고 또한 한국 근세사 연구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최 신부는 그의 부모의 순교사적을 위시하여 한국 순교자에 관한 증언과 자료도 수집했는데 다블뤼(Daveluy, 安敦尹) 보좌주교는 그것을 그의 비망기(備忘記)에 수록했고, 달레(Dallet)는 그것을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수록하였다.
최 신부는 또한 ≪한국순교자전≫을 번역했는데 그 제목은 이러하다. “1839년과 1846년에 조선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
최 신부는 또한 보다 완전하고 보다 정확한 교리문답의 출판을 준비했는데, 이것이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된 ≪성교요리문답≫이었을 것이고, 주요 기도서도 번역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같은 해 간행된 ≪천주성교공과≫였을 것이다.
최 신부는 또한 사향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많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그 확실한 저자성(著者性)에 관해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서지학적(書誌學的)인 연구의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사상과 영성(靈性) 그의 성성(聖性)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보좌주교의 찬사에서처럼 굳건한 신심, 드문 덕행, 구령(救靈)을 위한 불같은 열심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덕행 중에서 첫째로 그의 겸덕(謙德)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 겸덕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순명을 기다리는 것이었고(이것은 그의 7여년에 걸친 입국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대인(對人)관계에서는 인간을 인간의 존엄성에서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의미하였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최 신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은 그의 12년간의 사목활동에서 여실히 입증되었다. 그의 동료 김대건 신부의 성성이 한마디로 피의 증거(순교)였다면 최신부의 일생은 땀의 증거(순교)였다.
최 신부의 선교정책은 세 가지 점에서 매우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회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양반제도의 폐지를 주장해 마지않았다. 양반제도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교회 내에서는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오고, 국가를 위해서는 인재등용에서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선교사에 관해 최 신부는 그들이 사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속을 익혀야 할 것을 주장했고, 셋째로 한국적인 선교대책으로서 조속한 종교자유의 획득과 이를 위한 프랑스 정부 측으로부터 조선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崔奭祐)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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