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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 왜 인류는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가?
이현재(서울시립대 HK 교수), pp. 265-295 .
- 호르크하이머(Marx Horkheimer, 1895-1973)
-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5-1969)
- 하버마스(Jurgen Harbermas, 1929-)
- 호네트(Axel Honneth, 1949-)
다시 쓰는 맑스주의 사상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월의 봄, 2013, P. 560.
이성을 인간의 것으로 여기는 사고는 인간중심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속좁은 이성이 거만, 오만, 그리고 상대를 배제하는 야만과 폭력을 낳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간의 탁월성(덕목)은 온후하고 관대하며 상대의 대한 배려와 자기 활동(작동, 자유의지)의 겸손이다. 이런 생각이 없이 이성의 활동을 주장하는 것은 지배를 위한 전쟁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 플라톤에서 심층에서 상층으로 사유과정을 변증법적이라고 하고, 상층에서 심층으로 데미우르고스를 통한 사고의 작용을 신화적이라 한다. 칸트이래로 계몽 근대의 이성이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와서 사유에 대해 총체적으로 반성되었다기보다, 이성이 행한 신화적 행태에 대해 비판에 머물렀다는 느낌이다. (49WMB)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그 아류들은 인간의 삶에서 이상(병리)현상으로 가는 것에 대해 본성의 회복 또는 해방에서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획득하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인격성의 자기 생성과 전개 그리고 그 정체성의 확보의 노력을 다루지 않는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체계가 있고 위계적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를 이성의 본성화로 보는 듯하다. 나아가 생성으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문제제기가 없다. 올바른 문제제기는 답을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행위와 새로운 작동을 하는 것이다. 사유는 인민이 새로운 세상의 창안하고, 그 공동체에서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노력은 드물지만 하거나 하고 있는 자가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하나는 숫적으로 소수라고 논리적으로 부정하였던 것을 다시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새로운 문제제기이며 삶의 방향이라는 점이다.
주지주의의 한계는 타자에 대한 동등한 취급이 아니다. 이미 타자(타인)를 하위로 다루며 조작과 명령을 하는 상위가 타자를 동등한 대우를 한다고 하는 것은 기만이자 허위이다. 생성의 차원에 주지주의자의 조작은 자기 이익에 빠진 논리일 뿐이다. 그 주체가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 속에 하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권력자도 먼저 한 인민이고 시간이 지나 권력의 범위에 벗어나 인민의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정치에서 박근혜, 경제에서 이재용, 검찰에서 김기춘 등이 먼저 스스로의 한계라는 것을 자각해야 하는데, 이들은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우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없다. 무한 적용의 오류는 기본적으로 팔루스 신앙자들의 착각이며 환타지이다. 상하의 끈이 떨어지면 좀비처럼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49WMF)
# 프랑크푸르트학파: 왜 인류는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가?
이현재(서울시립대 HK 교수), pp. 265-295 .
제1장 비판이론과 맑스주의 267
1)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 267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Institute für Sozialforschung)는 1923년 설립되었으며, 1931년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으로 취임한 이후 ‘비판이론’의 산실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이 연구소는 1933년 5월 독일 나치정권에 의해 폐쇄되고 만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비판적 사상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미국으로 망명.. (267)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1947),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1966)...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1941)과 일차원적 인간(1964) ...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과 호네트의 인정이론으로 계승된다. (268)
2) 비판이론과 맑스주의 268
우선 우리는 사회연구소가 맑스주의자 펠릭스 바일(Felix Weil)의 제안으로 설립되었으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들이 젊은 시절 맑스주의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수 있다. (268)
둘째로 우리는 초기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무엇보다도 후기 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와 맑스주의의 연관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 (269)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맑스주의의 명맥을 잇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위의 두 이유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사상을 보여주는 ‘비판이론’의 이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호르크하이머는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을 구분했다. (269)
비판이론의 이념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비판이론이 새로운 사회의 상황을 고려하는 가운데 비판이론이 전제하고 있는 이성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반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270)
제2장.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왜 인류는 야만의 상태로 돌아가는가? 271
근대 계몽적 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의 서두에서 제기하고 있는 물음, “왜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적인 상태에 진입하는 대신에 새로운 종류의 야만성에 빠져버렸는가?” (271) [논리적 이성(오성)과 도구적 이성(지성)이 사물을 대하듯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에서 온다. 주지주의의 한계는 물체를 대하듯이 사물과 인성을 지배와 폭력을 사용한다. / 이성은 물질에서 의식으로 과정이 연속이라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성을 좁게 잡은 칸트에서 문제발생이 있다. 스토아가 말하는 섭리가 이성이며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연의 자기생성이 이성이다 / 왜 전후 프랑스가 스피노자를 연구했겠는가? (49WMA)]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계몽의 약속은 오히려 신화에 내재된 운명적 필연성과 지배의 원리에 갇히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1) 폐쇄적 필연성에 갇힌 이성 272
[내가 속좁은 이성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계몽을 약속했던 이성이 신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던 학문적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 [논리] 실증주의, [통일] 과학주의, 실용주의[도구주의] 사상이 지배하는 미국에서 사유(thinking)는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 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의 철학에서 속좁은 이성은 자기 사고에 맞는 것만을 논리니 과학이니 실증이니 라고 한다. 인간중심주의에 젖은 주지주의 사고의 특성이며, 여기에는 백색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벩송의 비판을 찬양한 제임스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서양 철학을 라틴계 철학과 앵글로 색슨계로 나누어야 한다. (49WMB)]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양적 기준, “등가원칙”, 또는 형식논리로 환원되며, 여기서 질적차이, 목적, 인식자의 관심 등은 무시되거나 배제된다. (272) [이런 사고의 기원은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에서 기원한다. 플라톤이 이런 작업을 mythe(이야기)라고 했다. (49WMB)]
2) 지배원리로서 이성
물론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의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다. (273) [인간이 자연 밖에 있다고 사고하는 주지주의 이성은 지배와 조작을 근간으로 한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자연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자연에 대한 이해는 실로 얼마나 될까? 일반적으로 생물학의 경우에 인간이 지닌 지식은 무수히 많다고 하지만, 자연의 생성과 변화의 100분의 1도 모르고 있다고들 한다. 겸손하게 자연과 동화와 공감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49WMB)]
그림: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오디세우스와 사이렌」.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외적 자연[본성]뿐만이 아니라 내적 자연[본성]을 억압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연과 자신, 나아가 타인을 지배하는 주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74) [인간은 자연의 부분으로서 타자로서 타인이라는 자연의 부분을 지배한다는 것은 착각이다. 부분이 부분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은 주지주의의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49WMB)]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을 그만두고 사물로 추락하기 이전의 근원적 자연을 기억해야 한다. “근원으로서 자연이 기억될 때 계몽은 완성되고 스스로를 지양한다.” (274-275) [자연(본성)은 추억처럼 회상한다고 표상되는 것이 아니다. 주지주의의 착각은 기억을 추억처럼 한 장면으로 생각하는 경향 있다. 벩송은 기억은 이미 현재에 닿아있다. 기억의 총량에서 얼마를 쓰느냐 개체의 역량과 노력일 뿐이다. (49WMB) ]
3) 자연과 인간의 사물화와 도구적 이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폐쇄적, 지배적 이성에 갇힌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역시 사물화시킨다. (275) [앙글로색슨 철학의 사고 특성은 자연이든 타인이든 물체로써 간주하여 계산하고 조작 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칸트 이래로 물자체는 접근 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긴다. 자연은 물체와 같은 대상일까, 물 자체일까? (49WMB)]
이 계몽의 역사는 이성의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이성이 자기 지배적 또는 자기 억압적 이성으로 나타나는 위기로 나아간다.(276) [이성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철학이 주지주의이다. 인간 본성(의식)은 이데아처럼 동일성의 원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다. 동일성과 정체성은 다 같이 이당띠떼(l’identité)이다. 속좁은 이성의 철학은 정체성과 동일성의 차히를 다루지 않았다. / 변증법은 신화론이 아니다. 자연(본성)의 자기생성과 과정은 특이성을 띠고 있으며, 창발 또는 솟아남 자체가 변증법이다. 도구로써 다루고자하는 논리, 과학 등의 작업이 신화이다. (49WMB)]
제3장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 변증법의 진정한 물음은 끝없는 부정. 276
아도르노는 이성자체를 폐기하기보다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이성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76)
1) 관념/유물 변증법 비판과 부정의 변증법
아도르노는 폐쇄적인 주체의 형식논리학적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위해 대상의 변화와 형성과정을 서술하는 사유방식으로써 변증법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277) [논자는 구별하고 있는 갑다. 주지주의 사고, 자연내재주의 사유]
헤겔의 관념 변증법은 대상 또는 객체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이미 주체를 통해 개념화 된 것, 즉 정신적인 것이다. .. 반대로 맑스의 유물 변증법은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객체에 집중한다. 여기서 주체 또는 정신은 객체의 반영 또는 모사일 뿐이다. (277) [이원론의 약점은 둘 사이의 평행을 항상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벩송의 이중화와 이중의 열정은 적대적이지만 상보적 관계이며, 들뢰즈의 이중 분절은 자연의 밑층위에 네가지 지층방식처럼 분절관계라 한다. / 내가 보기에, 움직임에 방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벡타방식은 가속도 운동을 기준으로 했던 라이프니츠에서 일 것이다. 벩송에서, 운동의 방향의 차히에도 힘의 종합이 있는 것이 막대자석에서 견주어 볼 수 있고 전류의 흐름은 상반된 방식과 더불어 하나의 방향이 있는 경우가 아닐까 한다. 들뢰즈에서는 움직인다는 의미에서 유체역학의 4방향의 어우러짐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49WMB)]
따라서 아도르노는 정신이냐 존재냐, 주체냐 객체냐의 경쟁을 넘어서 끝없이 부정으로 나아갈 수 잇는 변증법을 세우는데 관심을 갖는다. (278) [무한 전개이든 무한정 소급이든 마지막 경계에서 단위설정을 주장하는 사고는 조작과 결론을 위한 폭력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이런 폭력의 최초 담론이 플라톤주의자이며, 이에 비판적 사유를 한 자들이 스토아철학자들이라 한다. (49WMB)]
2) 관념 변증법에 나타난 비동일성의 배제 비판
아도르노는 “외부에 어떠한 것도 남겨놓지 않는 총체성의 서술 형식인 체계”는 비동일자(das Nicht-Identische)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278) [들뢰즈가 말하는 아직 규정되지 않은 존재(non)-être와 같은 의미이며, 새로운 형이상학에서 토대로서 질료가 규정되지 않은 존재이다. 철학사에서 무시되었던 이 존재를 존재로서 제기한 것은 스토아이고, 이것을 운동이라 하여 다룬 것은 벩송이다. (49WMF)]
3) 부정 변증법과 비동일적 객체
객체를 “순수한 사실성(Faktizität)이상의 것”으로 본다. .. 우선 유물 변증법과 달리 부정 변증법에서 객체는 주체의 인식을 통해 매개된다. 그러나 부정 변증법은 또한 관념 변증법과 달리 주체의 동일성 체계에 동화되지 않는 비동일적 객체가 있음을 분명히 하며 이것이 변증법적 사고에서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279) [이 객체가 자기의 의한 자기 생성이라고 보면 들뢰즈를 만나게 된다. (49WMF) ]
동일성 사유[사고]의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변증법은 현실을 끝없이 부정하는 타자성을 볼 수 있게 하며 이를 통해 사유의 개방성을 보장한다. 이는 곧 교환가기가 없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교환될 수 없는 비동일자, 사물의 사용가치 등에 주목할 수 있게 하는 사유 방식인 것이다. (280)
제4장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이론: 국가영역에서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회복 280
제2세대 데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하버마스 역시 1세대와 마찬가지로 근대적 [속좁은]이성이 도구화되었음을 비판하고 나아가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이성을 모색하는데 집중한다. (281) [이성을 오성의 범위로 한정했다가 다시 확장하는 태도는 주지주의자들이 통일과학을 염원하는 것과 같다. 이성은 도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성은 영혼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끊임없이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그 끝은 아직 끝나지 않아서 아무도 모른다. (49WMF)]
1) 근대적 이성 비판
우선 하버마스의 이성 비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개념은 주체의 물화(Verdinglichung)이다. (281)
이와 더불어 하버마스는 근대의 합리성이 수단적 합리성(Verfarensrationalität)으로 축소되었음을 비판한다. (281-282) [신칸트학파와 공리주의에서 도구주의로 이행에 대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사의 진솔한 대면이 부족하다고 할까? (49WMF)]
2) 생활 세계의 식민화
하버마스가 사회를 물질적 차원과 상징적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전자를 체계로 후자를 생활세계로 이행한다. 그에 따르면 화폐나 권력 등과 같은 매체에 의해 조직화 되는 경제적 행정적 하위 체계를 의미한다. ... 이와 달리 생활세계의 질서는 오직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주체들의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재생산될 수 있다. (283) [상징적 차원을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소통이라 하는데 ... / 우리가 보기에 전자는 부자(filiation)이고 후자는 연합(alliance)이다. 체계는 이분법적으로 상하관계를 유지하는 측면이라면, 생활세계는 교환과 소통을 통한 그물망에 해당한다.]
‘체계명령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 ... 가령 하버마스는 가족, 학교, 문화 영역 등에 화폐나 권력과 같은 매체들이 침투하는 과정을 통해 생활세계의 식민화 현상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283)
하버마스에게 비판적 실천의 궁극적 지향점은 생활세계의 자율성[자치성] 회복인데 이것은 생산양식의 변화나 재분배를 통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통해 해소 가능하다. [체계와 위계의 붕괴는 모두가 인민이라는 연대에서 가능하다. 이를 민주주의라 하든 리좀의 흐름이라 하든 간에 체계의 붕괴가 있어야 한다. 권력이 체계의 붕괴를 가만히 둘 것인가. 박근혜의 주변집단은 40년을 유지할 것이라고 4년전에 장담했고 지금도 그런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다. 어제 박근혜 지지 시위에 태극기와 푸른색이 넘실대었고, 박근혜 탄핵 시위에는 촛불과 흰색바탕의 깃발이 주로 보인다. 전자가 또다시 빨갱이를 들고 나올 태세가 되었다. 통진당이 복귀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상황에서 친지지 세력은 점점 대오를 갖출 것이다. (49WMF)]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세 가지 행위 양식 ..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 ... 공동행위 계획에 대한 합의 ... 각자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 ... 세 가지 타당성을 요구를 제기할 수 있다. 객관세계에 대해서 행위자는 진리를, 상호주관적 세계에 대해서는 규범적 올바름을, 주관적 세계 대해서는 진실성을, (285) [자기 문화 안에서 타당성이 타 문화와 연계 속에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허구라 본다. 왜냐하면 타 문화라는 것이 진리문제라기보다 사실 문제이며, 규범의 정당성이 아니라 새로운 규범의 가능성이며, 진실성이라기보다 정확성이다. 인격의 합의에는 다수결이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49WMF)]
제5장 악셀 호네트의 인정이론: 무시의 현상학과 인정투쟁 286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와 같은 제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가들이 사회적 병리현상을 ‘도구적 이성화’로, 제2세대의 하버마스가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진단했다면, 제3세대 악셀 호네트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적 병리현상은 사회적 ‘무시(Mißachtung)’다. (286)
호네트는 해방적 실천이성이 실현되기 위한 도덕적 조건으로 ‘인정(Anerkennung)을 요구하고, 도덕적 인정이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성공적인 자아 실현이 이루질 수 있으며, 나아가 주체들 간의 규범적, 이성적 관계가 회복된다고 보는 것이다. (286)
1) 실천철학에서 인정 개념의 대두
스코틀랜드의 도덕철학은 미덕을 수행하는데 공적 인정이나 무시가 핵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칸트의 ‘존중(Achtung)’ 개념 역시 실천철학에서 타인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287) [
2) 도덕적 무시와 자기 관계의 훼손
호네트는 다양한 무시의 형태들을 ..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가장 기본적인 무시는 한 개인이 자신의 “신체적 불가침성”에 대해 갖고 있는 확신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288)
둘째 무시 형태는 “한 개인의 자기 존중을 훼손하는 굴욕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288)
마지막으로 셋째 유형의 도덕적 손상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부정”과 관계되어 있다. (289)
3) 상호인정과 세가지 인정의 형식
세가지 방식의 인정 형식을 제안한다. 첫째는 우리가 서로 유일무이한 욕구와 가치를 지닌 개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 둘째 우리가 서로를 도덕적 판단 능력을 갖는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가치 공동체 내에 개별자를 필수적 가치를 갖는 능력의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291) [인격체는 우선 어느 것과 달리 이것임이다. 그리고 특이성을 지닌 현존재이다. 그러면 자기 정체성을 추구 하는 인격이다. 인정하고 말고가 아니고, 이러한 권능은 누구나 지니고 있다. (49WMF)]
제6장 글을 나가며 291
물론 우리는 이러한 비판적 해방적 이성 개념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맑스 하부구조라고 불렀던 것의 문제, 혹은 물질적 배분의 문제를 점점 더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292) [어쩌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비판한 것은 정치경제학이라기보다 인식이론의 기능인 이성에 대한 비판을 한 것일 뿐인 정도이다. 정치경제학은 경제학을 정치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이다. 경제는 기본적으로 생산 소비 재생산의 과정이다. 상품 화폐 자본에서 재생산의 구조를 지닌 자본에 고민이 빠진 이론에도 맑스주의 계열에 포함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49WMF)
* 참고문헌 233
* 더 읽어볼 책들 233 (49WMF)
# *** 인명록 #
아도르노(Thodor Adorno, 1905-1969), 독일 철학자. 부정 변증법(Negative Dialektik, 1966)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Herbert James Draper, 1864-1920), 영국 화가 「오디세우스와 사이렌(Ulysses and the Sirens, 1909)」(oil painting, 69.25 x 84).
하버마스(Jurgen Harbermas, 1929-), 독일철학자. 의사소통행위이론: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 1(장춘익, 2006), 의사소통행위이론: 기능주의적 이성비판을 위하여 2(장춘익, 2006),
호네트(Axel Honneth, 1949-), 독일 철학자. 인정투쟁(문성훈, 이현재 옮김, 2011)
호르크하이머(Marx Horkheimer, 1895-1973), 독일 철학자.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아도르노와 함께)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 1947), 김유동, 문학과 지성사, 2001,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 독일 출신 미국 철학자. 이성과 혁명(1941)과 일차원적 인간(1964)
펠릭스 바일(Felix Weil, Félix José Weil, 1898–1975) 유대계 독일-아르헨티나 맑스주의자.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설립에 기여했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1947-) 미국 여성주의 철학자. Le féminisme en mouvements(trad. d'Estelle Ferrarese, La Découverte, 2012). Fortunes of feminism: from state-managed capitalism to neoliberal crisis. 2013
(49W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