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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냉전과 한반도
2차 세계대전을 종료하기 위해 베를린에 입성한 미국과 소련은 독일이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V3-로켓의 설계도와 실험체를 각각 챙겨들고 돌아갔다. V3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류 역사상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서 실전 배치를 눈앞에 두고 있던 상태로 발견되었다 한다. 이미 원자폭탄이 개발된 상태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존재는 미소 양국에 핵전쟁의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두 나라는 서로를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공교롭게도 ‘민주주의-자본주의 VS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대변되는 체제 경쟁의 양상까지 더 해져 두 거물 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다. 이른바 냉전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2차대전의 직접적인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던 대신에 추축국과의 무기 거래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바 있는 미국은 가공할 전리품까지 챙긴 상태여서 지구상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우뚝 설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라이벌 소련을 따돌리는 건 시간문제라고 여겼다. 그러나 1957년 소련이 역사상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 발사에 성공하고 또 한 달만에 강아지를 실은 위성을 쏘아올리는 데에도 성공하면서 미국은 크나큰 충격에 빠진다. 자만심에 빠져 있던 미국은 소위 ‘스푸트니크 쇼크’에 두들겨 맞은 다음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선다. 그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로켓 개발처들을 한 데 모아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하고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만한 예산을 쏟아 부어 소련을 추월하기 위한 비상체제에 돌입한다. 미국의 이 결정은 당연히 소련을 자극했고 두 나라는 치열한 군비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두 국가 간의 군비경쟁이 직접적인 체제 우위를 다투는 장이었다면 신생독립국 및 후진국들에 직접 투자해 우방국의 수를 늘리는 것 또한 체제 경쟁의 대리전 양상을 띠면서 과열되어 갔다. 이러한 체제 경쟁의 대리전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곳이 바로 한반도였다. 한국전쟁이 미소 양국의 대리전 양상을 띠기도 했고 승패가 판가름 나지 못한 채 휴전 중이었다는 점 등에서 한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던 남한이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에 성공한 북한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체제 경쟁의 대리전에서 남한이 열세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스푸트니크 쇼크와 더불어 미국의 체면을 구기는 2종 세트로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2. 지역통합 전략의 대두
미국은 1950년대 내내 남한에 대한 무상원조 정책을 고수했다. 한반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방국 확산을 위한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가 곧 무상원조였다. 이는 세계 곳곳에 달러가 대량 살포되었다는 뜻으로 이는 자연스럽게 달러 가치의 하락을 불러 왔고 미국은 대전 이후 처음으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50년대 후반 이후 로켓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던 미국 입장에서 가난한 친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은 점점 힘에 부치는 일이 되어 갔다. 급기야 무상원조 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게 되고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꾸준히 유지하던 이 정책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선택은 대전 이후 자신들의 강력한 통제권 아래에 놓였던 서독과 일본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요점만 말하자면 거대한 두 지역, 즉 유럽과 아시아의 우방국들 중 미국의 수혜를 입어 성장한 서독과 일본이 이제는 미국을 대신해 열등한 우방국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미국은 서독과 일본을 지역의 거점국가로 칭하면서 이들이 해당 지역의 발전적 통합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이른바 지역통합 전략의 출현 배경이다.
여기서 한반도는 또 다른 문젯거리였다. 50년대를 관통하면서 남한을 지배했던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터진 4.19 혁명은 미국을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혁명은 골칫덩이 독재자를 내모는 데 성공했지만 ‘친일파 숙청’을 주요 과제로 삼는 등 여전히 일본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50년대 중반부터 이승만 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백악관 직속의 동북아 정책 연구소에서 내놓은 57년의 자료에는 ‘강력한 군부에 의한 쿠데타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기도 했는데, 놀랍게도 정부에 불만을 품은 군부 내 세력의 유력자로서 박정희 소장이 거론되기도 했다. 미국의 진단이 너무나도 정확했던 것인지 미국이 개입한 결과였던 것인지 모르지만 결국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남한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만다. 쿠데타 주동자가 관동군 출신의 박정희 소장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앓던 이가 빠진 심경이었을 테다. 이로서 미국이 구상한 지역통합 전략은 구체적 실행 단계에 이르게 된다.
3. 박정희와 미국의 이해관계
체제 경쟁 승리를 위한 지역 통합 전략의 핵심은 우방국들의 경제 발전이었다. 그러나 미국이 친구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천사였을 리 만무하다. 우방국의 경제개발을 돕겠다는 것은 명분에 불과했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한 것은 우방국 경제에 개입해 자국 이익의 극대화하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우방국에 배치한 미군의 주둔 비용을 자국 예산으로 처리하기보다는 주둔지 국가의 경제에 개입해 이득을 취함으로써 충당하길 원했다. 또 2차 대전 이후 맞이한 경제적 호황은 자국 내의 임금 상승 등의 곤란한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미국은 보다 안전하고 저렴하게 상품을 생산할 만한 대규모 하청공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시대의 급변으로 부가가치가 떨어진데다가 환경 문제의 원흉이기도 했던 중화학공업 생산지를 절실히 원했다. 중화학공업은 국가의 기간산업을 담당하는 주요한 분야이기에 포기할 수 없었던 반면 여러 문제들로 자국 내에서 수용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미국이 우방국 경제개발에 개입하고자 한 것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러한 의도는 당연히 해당 국가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쉬웠다. 제 정신인 나라가 이처럼 부당한 거래를 반길 리 만무했다. 따라서 미국은 우방국 정부가 필연적으로 야기될 반발을 억제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통치력을 갖길 희망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 군사독재 정권만큼 적격인 경우가 있을까. 특히나 전면전을 치르며 예리하게 정비된 남한 군부는 미국이 원하는 강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게다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정권은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클 수밖에 없고, 이는 박정희 정권이 미국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도 미국은 훌륭한 파트너였다. 4.19의 성공을 집적 목격한 박정희 정권은 여론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확실한 ‘한방’을 원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한방을 보여주지 못하면 언제 제 2의 4.19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미국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전쟁의 상흔으로 신음하던 국가 경제를 일거에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을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4. 매판자본의 탄생과 성장
경제개발은 돈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무작정 화폐를 찍어낸다면 인플레이션만 유발할 뿐이다. 따라서 급속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해외 투자가 절실하다. 한국의 경우 해외 투자는 ‘차관’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1959년에서 1975년 사이의 17년 동안 한국에 유입된 해외 투자액의 90%가 차관이었다. 물론 대부분 미국과 일본이 빌려준 돈이었다.1)
이렇게 형성된 개발자금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국책사업에 투입되거나 미국으로부터 들여온 중화학공업 분야 생산을 담당할 대기업 육성에 쓰였다. 말이 좋아 대기업 육성이지 이는 곧 일부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어 기업 규모를 삽시간에 불리는 작업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즉 현대 대우 삼성 등의 대기업들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몸집을 키웠다.2) 특혜를 받은 기업들은 보은의 일환으로 정부와 권력자들에게 정치자금을 상납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가 형성된 배경이었다.
정경유착은 곧 권력이 특정 기업을 비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한국에서 독점 기업이 활개를 치게 된 계기였다. 1979년 종업원 수 500명 이상의 대기업 수는 전체의 2%에 불과했으나 이들 기업의 종업원 수는 전체의 43.5%에 달했고 이들 기업이 전체 부가가치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54.4%에 이를 정도였다. 1977년을 기점으로 3개 대기업이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이는 이들 대기업이 독점할 수 있는 상품의 비율이 90% 이상이었음을 뜻한다.
상품의 독점 생산은 곧 상품가격을 부당하게 설정해 폭리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들 대기업에 대적할 만한 존재가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독점가격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게다가 박정희 정권 기 내내 이들 대기업에게는 세금을 깎아주는 특혜까지 더해져 부당하게 취득한 이익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앞서 지적했듯 이들 대기업은 해외 차관을 기반으로 육성되었다. 관세도 별다른 세금도 부과되지 않는 자금을 원하는 대로 가져다 쓸 수 있었던 대기업들은 온갖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금 확보의 우위에 있었던 대기업들은 덤핑 경쟁 등의 온갖 불공정 거래를 일삼으며 풀뿌리로 성장 중이던 유망한 중소기업들을 싸그리 짓밟아버렸다. 이처럼 박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은 한국 경제의 견실한 기반을 뿌리부터 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대기업들은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었지만 차관을 되갚는 ‘정상적 경영’을 하는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차관 상환의 의무를 등한시한 채 사업 확장에만 열을 올리면서 더 많은 차관을 얻어낼 뿐이었다. 이처럼 비상식적 경영이 가능했던 것은 박 정권이 제공한 또 다른 특혜, 즉 ‘지급보증’ 때문이었다. 국내 기업에 투자한 해외자본은 차관 상환 기일이 되면 해당 기업을 찾는 대신 한국 정부를 찾았다. 정부가 해당 기업들의 빚보증을 선 탓이었다. 만약 해당 기업이 도산하거나 차관 상환능력을 상실할 경우 그들이 만들어낸 빚은 고스란히 국민 혈세로 갚아야 할 판국이었다. 이처럼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은 훗날 대우 사태를 통해 현실화되어 국민 경제를 파탄에 빠뜨린 주범이었다.
5. 중화학공업 육성의 폐해 : 구조적 모순
중화학공업은 석유를 원자재로 하기 때문에 국제 원유가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따라서 중화학공업은 가격 경쟁력에 민감한 수출 용도로는 부적합한 분야이다. 그러나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애초부터 수출산업으로서 육성되었다. 이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한국을 저렴하고 안전한 중화학공업 생산 기지로 낙점했고 박정희 정권이 이를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차관을 통해 공급한 중화학공업 설비 대부분은 자국 내에서는 임금상승에 의해 수지가 안 맞거나 신기술 개발로 사양화된 것이거나 환경오염 문제로 주민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는 업종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애초부터 한국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치 곤란인 애물단지를 빚으로 떠안겨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에 불과했다. 가만히 두면 고철덩어리로 전락할 설비들을 팔아먹을 수 있었으니 고스란히 남는 장사였다.
원래 중화학공업은 기간산업으로 육성되는 게 보통이다. 즉 중화학공업은 큰 이윤을 내기 위한 사업 분야가 아니라 기술개발이나 공업기계 자급률 향상 등 산업발전의 근간을 이루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분야다. 그러나 미국은 설비만 넘겼을 뿐 핵심 기술만은 결코 넘기지 않았다. 해당 설비들을 운용하려면 기술 습득이 필수적인데, 미국은 이것마저 팔아먹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은 고철 덩어리들을 비싼 값에 사 들여와 이를 운용하기 위한 신제품들을 또 다시 돈을 주고 수입해야 하는 신세였다. 제품을 완성해 수출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결국 수출산업으로서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만년 밑지는 장사일 수밖에 없었고 그 고유의 기능인 기술개발이나 기계 자급률 향상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3)
당시 박정희 정권의 지상 과제는 외화 벌이였다. 남의 전쟁에 용병으로 출전하거나 해외로 인력을 수출했던 것 역시 외화 벌이를 위한 수단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대량의 차관을 사용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를 상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달러가 필요하다. 또 중화학공업을 운용하려면 원자재인 석유를 수입해야 하므로 역시 외화가 필요하다. 결국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중화학공업 상품을 많이 수출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한국의 중화학공업 운용방식이 지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더 많이 수출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달러를 빌려 와야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박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나고,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기존의 빚을 갚을 방안이 없는 모순의 늪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다.
6. 중화학공업 육성의 폐해 : 도시 ․ 농촌 경제의 동반 몰락
수출산업은 가격 경쟁력에 민감하므로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것은 값싼 원자재를 쓰거나 인건비를 줄이는 것으로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한국이 수출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고 있던 중화학공업의 원자재는 석유였기 때문에 이를 싼 값에 사들일 방법은 없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비 절감책은 노동 임금 동결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내놓은 방안은 곡물가격 동결이었다. 임금 동결로 불만이 폭주한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먹거리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는 농촌 경제를 황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미 당시의 농촌은 대규모로 수입된 미국 농산물과의 힘겨운 싸움에 지칠대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박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새마을운동의 하위 사업들이 대체로 사업비용을 농가에 떠안기는 형태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농촌 경제는 고사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4) 설상가상으로 공업화의 가파른 성장세와 함께 전반적으로 물가는 치솟고 있었고 그 영향으로 인건비는 물론 농업 자재나 시설물 설비, 비료, 종자, 석유 등 농업생산에 필수적인 모든 품목들의 가격이 동반 상승하는 추세였다. 이런 마당에 단행된 곡물가격 동결은 농촌 경제가 만성 적자에 시달리면서 피폐해지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다.
농촌 경제를 위기로 내모는 조건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미국은 한국을 자국 내에 만연한 대규모 잉여 농업 생산물들의 소비처로 삼아 이득을 취하고자 했다. 값싼 미국 농산물의 대량 유입으로 인해 가격 경쟁에서 밀린 생산 농가들은 해당 농산물 재배를 포기하게 되었고, 국산 농산물의 빈자리는 빠르게 미국 농산물로 대체되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농업 생산 품목의 단순화를 불러 왔으며, 대체 작물을 찾는 농가들의 대세에 의해 툭하면 특정 작물이 과잉 생산되어 가격 폭락이 초래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농가들은 만성 적자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다. 농가들은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그들의 경제기반인 토지를 판매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선택을 강요당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농촌 경제의 몰락은 농촌의 비전을 앗아갔고 다음 세대의 농촌 경제를 짊어져야 할 젊은이들은 비전을 찾아 도시로 내몰리게 되었다. 이른바 이촌향도 현상이다. 농촌에는 최저 생계비를 밑도는 경제 여건 하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노인들만이 남게 된 것이다.
1962년에서 1977년까지 최소 700만 이상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같은 시기 공업 부문에서의 고용은 150만 명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최소 500만 이상의 인구가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삶의 터전에서 내쫓겨 도시로 몰려들었으나 도시에는 준비된 일자리가 태부족이었다는 얘기다. 이처럼 노동 공급의 과잉 현상은 필연적으로 노동 임금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결국 산업화가 가속될수록 물가가 치솟는 데 반해 도시 인구의 대다수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면서 빈민으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이는 도농(都農) 간의 빈부격차는 물론 도시 구성원 내에서의 빈부격차까지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 정권은 이같은 중화학공업 육성책의 부작용에 대해 ‘선건설 후분배’의 원칙론만 고수한 채 끓어오르는 반발을 억압하기에 급급했고 이 원칙은 이어지는 군사 정권들이 답습하는 과정에서 고착화되었으며 21세기에 이르러서까지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7. 식량 식민지화
미국은 해방 직후부터 한국에 대한 대규모 식량 원조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는 애초 자본주의 동맹국의 확장이라는 대외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다른 종류의 원조 물자가 급감한 60년대 이후에도 식량 부문의 원조 물량은 꾸준히 유지되었다.1) 바로 저곡가 정책을 통해 노동임금을 동결시키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1971년에 이르러 동맹국에 대한 식량 무상원조를 뒷받침하던 미공법 408호가 중단되면서 미국의 대규모 잉여 농산물의 한국 유입은 유상판매로 형태가 바뀐다. 본격적인 식량 식민지화를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물론 이것은 시장의 요구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었다. 미국 입장에선 수탈의 방편이었고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부정축재의 수단이었다. 미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폭로된 바에 의하면 미국은 식량 수입의 대가로 브로커 박동선을 통해 1969년부터 1976년까지 920만 달러의 뇌물을 박 정권에 전달했다. 또한 1970년 남한 정부가 더 좋은 조건으로 일본쌀을 수입하려 시도하자 미국은 이를 ‘한국군 무기 현대화’2)와 결부시켜 자국 쌀을 수입하도록 압박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이런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면서 1970년대에 걸쳐 미국 농산물의 수입은 해마다 증가해 1980년 이후 3년 간 미국 농산물 수입에 동원된 자금은 무려 6조 3천억 원3)에 달했다.
미국과 박 정권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농산물 대규모 유입은 한국 농촌 경제를 파멸 지경으로 몰아갔다. 잉여농산물의 유입은 곧 전반적인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고 적자를 면치 못한 농민들은 작물 재배를 포기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국내 생산이 사라진 품목의 빈자리는 미국 농산물이 빠르게 메워갔다. 그 결과 채소와 같이 수입이 곤란한 특정 작물을 재배하는 데 농가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과잉생산에 따른 가격 폭락을 해마다 반복하는 악순환으로 연결됐다. 특정 작물로의 쏠림 현상은 전체 농산물 자급률 하락으로 이어졌다. 1965년부터 1981년 사이의 식량 자급도는 전체로 볼 때 93.9%에서 43.2%로 떨어졌고, 쌀(100.7%→63%), 보리(106%→85.7%), 밀(27%→4.2%), 옥수수(36.1%→5.8%), 콩(100%→27.9%)4) 등 한국인들이 많이 섭취하는 거의 모든 작물에 걸쳐 현저하게 하락했다.
특정 작물에 대한 농가 쏠림 현상과 식량 자급도 하락은 농가 부채의 누적을 부채질했다. 산업화의 여파로 해마다 물가가 오르는 데 반해 정부의 곡물가 동결정책과 미국산 잉여 농산물의 대량 수입으로 인해 농가의 수익은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다수 농가들은 부채를 떠안게 되었고 이를 상환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산인 토지를 팔아야 하는 절망적인 지경에 이른다. 그 결과 1965년 70%에 달하던 자작농가 비율은 1980년에 58%, 1984년에는 44% 수준까지 떨어지고 만다.
결국 박 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식량주권의 침탈과 농촌 경제의 피폐화를 대가로 이루어낸 것이다.
8. 비리와 편법으로 점철된 수출기업 육성 정책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중화학 공업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60년대 초반까지 농업과 경공업에 치중돼 있던 한국의 경제 규모에서 이를 감당할 대기업이 존재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박 정권은 특정 기업에 불법적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생산량을 단기간 내에 불리는 편법을 자행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수출기업에 대한 관세와 세금 감면이다. 중화학 공업 제품을 수출하는 일은 그 자체로는 도저히 이윤을 낼 수 없다. 따라서 정부는 각종 세금을 감면해 이를 지원할 의무를 미국으로부터 떠안은 셈이었다. 물론 이러한 지원은 국민 혈세로 감당되어 해당 기업의 이윤 창출을 돕는 데 쓰였다. 자세히 살펴보면 수출소득세의 50%가 감면되었고 영업세, 수출용 원재료의 수입관세, 수출 생산용 자본설비의 수입 관세 등이 모두 면제되었다. 또한 수출시장 개발비와 수출 결손금에 대한 과세를 유예해 주거나 수출품 생산 설비의 감가상각비에 누진제를 적용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출기업의 편의와 이익을 제공했다.
수출기업이 받은 또 다른 특혜는 융자 우대 정책이었다.5) 60년대 이후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당시 한국 경제는 인플레가 만연한 상태로 자금 확보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은행 이외의 사채시장 규모도 무시할 수 없었다. 보통 사채시장의 금리는 연 40~60%에 달하는 수준이어서 은행권을 통하지 못한 일반 기업들의 자금 동원에는 여러 모로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정부의 특혜를 받은 수출기업에 적용되는 금리는 최저 3%에서 최고 10% 안팎이었다. 사채시장을 기준으로 할 때 일반 기업에 비해 최소 4~6 배의 이득을 볼 수 있었으며 이자율로만 따지면 최고 70%에 가까운 불로소득을 챙길 수 있는 구조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특정 기업에 대해 수출보조금을 지급하고 철도 운임 및 전기요금을 할인해 주었으며 특정 상품을 특정 지역으로 수출할 때 독점권을 부여하고 수출입 은행을 개설해 각종 융자의 편의를 제공하는가 하면 ‘종합상사 조성조치’와 같은 특별법을 마련해주는 등 수출기업이 규모를 확장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엄청난 혜택을 제공했다.
정부의 이같은 무차별적 지원은 물가를 폭등시키고 세금부담을 증가시키는 등 민중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기의 조세구성을 통해 여실하게 드러난다. 일반시민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간접세와 기업과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직접세의 비율은 1970년 ‘64.1% : 35.9%’이던 것이 1975년에는 ‘72.1% : 27.9%’로 나타났다.6) 민중의 세금부담이 증가한 반면 기업의 조세 의무는 이윤이 늘어날수록 가벼워졌던 셈이다.
이와 같은 특혜들을 받아먹은 기업들은 정권에 정치자금을 갖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성된 정치자금은 당시에 만연해 있던 금권선거에 살포되거나 반대세력 탄압에 악용되기도 했던 정보조직들의 운용 자금은 물론 박정희와 측근들의 사익을 채우는 데 사용되었다.
9. 지역통합 전략의 실체 : 일본에 의한 경제 수탈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박정희 정권기를 관통하면서 한국 경제 개발의 주요 자금 출처는 미국과 함께 일본이 담당했으며, 일본 자금이 본격 유입된 시발점은 1965년의 한일협정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이승만 정권과 일본 정부는 12 차례에 걸친 회담을 열어 이른바 ‘대일 청구권’으로 불리는 전쟁 피해 보상금에 관한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회담 초기부터 보상금으로 1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액수를 요구했고 일본은 자국 정부의 10년치 예산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불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협상은 60년대에 이르도록 조금의 진전도 없었다.
박정희는 일본과의 협조를 원하는 미국의 입장을 반영하는 한편 이를 경제개발 자금 조달책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처조카인 김종필을 특사로 파견해 20년 가까이 끌어오던 한일회담을 타결토록 한다. “일-한 간의 불미스러웠던 과거를 완전무결하게 종결짓는~”으로 시작되는 한입협정 조인서에 대한민국 대통령의 직인이 찍혔다. 이는 회담의 주제가 ‘대일 청구권’에서 ‘한-일 경제협약’으로 뒤바뀐 것으로, 한국 정부는 제국주의 침탈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경제적 보상을 요구했던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철회하고 일본의 경제 원조를 고맙게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애초의 회담 목적을 상실한 것은 차치해 두고서라도 이 회담의 결과는 경제적으로도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가 요구한 보상금 120억 달러가 비현실적인 수준이었다 하더라도 회담의 성과로 얻어낸 경제 원조금 총액이 7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점은 이 회담이 얼마나 졸속으로 처리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더욱 기가 찬 것은 경제 원조라는 굴욕적인 수사 뒤에 자리한 7억 달러의 실체였다. 이 액수에서 순수한 경제 원조금은 2억 달러에 불과했고 나머지 5억 달러는 ‘차관’이었기 때문이다. 36년간의 억압과 침탈의 대가로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하는 한편 적선하듯 던진 2억 달러를 넙죽 받아들고는 그보다 훨씬 큰 돈을 빚으로 떠안아 온 것이 한일회담의 성과였다.7)
일본으로부터 얻은 차관은 모두 현물 차관이었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중화학 공업 생산 기지로 삼으려 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의도였다. 즉 일본은 산업구조의 변화 상 어쩔 수 없이 폐기처분해야 하는 설비들을 한국으로 떠넘기면서 이를 나중에 돈으로 상환받기를 노렸던 것이다. 이런 설비들을 받아들여 사업을 시작한 기업을 ‘차관기업’이라 칭했는데 어이없게도 이 차관기업들은 도입 5년여 만인 1971년에 이르러 전체의 85%가 도산해버리고 말았다. 차관설비들은 국내 시장의 요구나 수출 시장의 상황에 따른 도입이 아니라 일본의 필요에 의해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형태였고, 정부는 설비의 종류나 규모, 도입 시기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같은 종목의 설비를 갖춘 기업들이 한꺼번에 난립하기에 이른 까닭이다. 박정희 정권이 해외의 직접 투자를 통해 대기업을 육성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차관기업들의 줄도산으로 입은 적자를 달러, 즉 또 다른 빚으로 해결하려는 발악에 다름 아니었다.
박정희는 일본의 직접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치들을 거리낌 없이 취한다. <수출자유지역 설치법>을 제정, 시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 정부의 애처로운 노력에 일본은 ‘한일 장기경제협력시안’(일명 ‘야쓰기 시안’)을 내세워 한국 경제 수탈의 본색을 드러낸다. 이 시안의 주요 내용 중 일본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난 몇 구절만 인용하도록 하겠다.
3. 일본은 토지 이용, 공해 등의 문제로 일본 국내에서 한계에 다다른 철강, 알루미늄, 석유, 석유화학, 조선, 전자, 플라스틱 등의 공업을 한국으로 옮겨 가기를 희망한다.
4. 일본경제계는 단순한 상업이윤 획득의 단계에서 ‘합작형태’에 의한 장기협력으로 전환한 것을 고려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① ‘한일합작 및 가공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한다. ② 한국 정부는 합작회사에 대하여 ‘노동쟁의를 금지한다’는 조치를 취해주길 기대한다.
5. 일본측은 노동력 부족 현상 때문에 노동집약적 산업을 한국으로 옮길 것을 고려한다. ‘한일합작 및 가공무역 진흥공사’는 일본측에서 100% 민간출자로 원재료, 플랜트를 제공하며 한국 측은 정부 출자 70%, 민간 출자 30%로 위탁 가공을 책임진다.
6. 한국은 보세지역 및 자유무역지역을 대폭 확대하고, 일본 기업의 제조가공을 담당하기 위하여 더 한층 탄력적인 조치를 강구해줄 것을 희망한다.8)
일본은 당시의 한국의 노동 임금이 자국의 7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과 정부의 강력한 노동탄압으로 노동자들의 단체행동권이 규제되고 있다는 점 등을 투자의 호재로 보고 있었다. 또한 서울의 공장부지 매입비용이 도쿄의 25%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절박함과 일본 기업의 이윤 추구가 맞아떨어진 결과 1969년에서 1975년 사이 700개에 달하는 일본인 합작회사가 들어섰다. 이로써 투자된 총 자본은 6억 3,400만 달러로 해외 직접 투자 총액의 66%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한국 경제 개발 자금의 유입이 기존의 미국에서 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으로 바뀌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수출자유지역에 들어선 일본 기업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공해방지 시설 등의 비용을 절감하는 등의 특혜를 받고 이윤을 늘려 갔다. 수출자유지역의 한국의 노동자들은 공해방지 시설이 전무한데다가 작업환경 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수당을 주지 않은 채 잔업을 시키는 등 온갖 전횡을 일삼는 일본인 합작회사에서 일하면서도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일본인 합작회사에 대한 이런 특혜는 당연히 해당 기업들이 박정희 정권에 뇌물을 제공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1965년 한일조약 체결 시에 일본이 제공하기로 약속한 민간상업 차관 3억 달러 중 공장설비를 위한 차관은 1억 8,000만 달러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헌데 차관을 통해 제공된 공장설비는 물론이고 이러한 설비로써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공업원료는 일본에서만 독점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다라서 차관을 통해 설립된 기업들이 자체 기술 축적이 없는 상태에서 생산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갱신에 필요한 설비와 원자재를 계속해서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와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차관기업은 차관을 제공해준 나라에 대해 지속적으로 상품고객의 구실을 하게 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배를 불려준 기업은 다음과 같은데, 괄호 안의 것은 기업체 명칭과 국내 시장 점유율을 가리킨다.
시멘트(쌍용, 49.1%), 요소비료(한국비료, 49.4%), 용성인비(풍농, 68.5%), 아크릴(한일, 84.4%), 아세테이트(선경, 100%), 폴리프로필렌(고려, 55.3%), 냉각박판(연합철강, 57.1%), 조선(대한, 65%), 기어(동양기계, 80%), 베어링(한국베어링. 80%), 판유리(한국유리, 100%)9)
이 외에도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일본 차관을 통해 성장했다. 삼성, 금성, 대우 등의 대기업도 여기에 예외일 수 없었다.
어쨌든 한국의 대기업들은 자체적인 기술 수준이 전무한 가운데 기술과 원자재는 물론 설비까지도 일본 기업으로부터 수입해다 써야 하는 처지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대기업들을 육성하기 위해 국민들로부터 피와 같은 세금을 뜯어 내 고스란히 외국 자본의 배를 불려주는 데 앞장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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