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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2000).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2장 기초개념의 재건
2.3. 증득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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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증득의 조건
2.3.1. 교육적 증득
개념이나 명제가 그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 결과적 산물만으로는 학문적인 지식을 여타의 인식체계인 교조, 상식, 이데올로기와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가치는 종국적으로 그것을 소지한 사람의 자발적인 점유에 의해서 타당성이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어떤 지식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우선 그것을 가진 사람이 가치로운 것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다시 그것은 그에게 가치있는 것으로 습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있어서는 그 가치가 입증된 것이 아니다. 누차 강조했지만 지식에 대한 판단은 진이냐 위이냐 선택이 아니라 더 나은 것에 대한 선택이며, 더욱 중요하게는 그런 선택을 해야만 하겠다는 사실의 인정이다. 교육적 인식론은 증명되어야 할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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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그것을 매개하는 과도적 절차를 중시한다. 즉 교육적 인식론은 지식의 형성과정을 진리검증의 불가피한 요건으로 본다.
객관을 강조하는 경험주의적 인식론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주관적 판단의 형성과정을 간과함으로써 생겼다. 우리들은 흔히 진리의 객관적인 검증절차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기대가 허망한 것임을 이미 누차에 걸쳐서 지적한 바 있다. 우선 그 객관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자의 주관일 수밖에 없다. 객관주의자들이 범하는 오류는 어떤 것의 진리를 타인에게 입증하려고 할 때, 그 타인이 거쳐오고 지금 그가 처한 지식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객관주의자들은 흔히 언제나 같은 결과를 반복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특정한 실험조건을 상정하고 관찰에 의해서 이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절차를 처방한다. 그러나 검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구나 동일한 인식의 수준을 가진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인식수준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지식을 평가함에 있어서 평가하는 사람이나 평가받는 사람의 학문적인 수준이 동일한 것이라면 그들 간의 품위차이를 입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검증하려는 이론에 대하여 수준이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상호이해가 선행되지 않고는 증거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달라진다. 우리는 관찰과 이론의 상관관계를 주목하였다. 관찰내용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아무리 많은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증거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에야 그것이 증거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증거를 제시하기 이전에 그것을 해석하는 이론에 대한 상호 간의 이해가 먼저 조율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판단기준의 합의라는 과제를 선결요건으로 하기 때문에 판단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그들의 평가기준 자체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생략할 수 없는 절차는 후진의 지식수준이 선진의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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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일치해 나가는 과정이다. 후진은 선진의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선진의 지식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인식론의 다른 하나의 주류를 이루는 합리론 역시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합리론은 경험론과는 달리 지식이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인식론은 객관적 세계와 지식의 대응 여부보다는 지식의 정합성에서 진리판정의 기준을 찾는다. 그러나 이런 절차가 내포한 문제는 어떤 수준의 것이든 지식은 그 나름의 정합성과 체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신념체계의 합리성을 검증할 때 적용하는 기준은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지식이다. 우리 각자는 모두 특정한 인식대상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지식체계를 가지고 그것에 상응하는 수준에서 그 대상을 인식하며 그것을 당분간 최선의 합리성의 기준으로 간주한다. 즉 지식의 합리성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각 지식체계 내에서 규정된다.
서로 우열을 놓고 경쟁하는 신념체계들은 합리성의 기준이 다르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다양한 수준에서의 합리성이 있는 그대로 각자의 동등함을 주장한다면 그 수준들 간에 온갖 갈등 · 모순 · 충돌 · 오해 · 대립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고 증명하는 집단의 구성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그런 불행한 충돌과 대립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우리가 서로 진리를 추구하지만 그 과정상의 수준에 있어 높낮이가 있다는 지식의 상대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품위의 차이가 있는 개체 간에는 후진의 합리성이 선진의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진의 눈에 후진은 경험상 낡은 표준에 의존하고 있어 보이지만, 후진은 경험의 부족으로 인하여 선진의 개선된 표준을 감식하지 못한다. 그들이 있는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의 갈등과 불화는 불가피하다. 불화상태에서 무조건 서로의 공감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화해를 이끄는 방법이 못 된다. 후진이 선진을 사랑으로 인식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적의가 없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해결방식은 후진의 품위를 좀더 높은 수준의 품위로 끌어올려 선진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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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는 합리성의 기준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것이다.
교육적 인식론은 인식주체와 무관하게 진리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진리와 오류는 한 관찰자에 의해서 확정된 지시영역 안에만 존재한다. 각 개인이 가진 진리의 준거는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체계이다. 사람들은 경험적으로나 실험적으로 확인되는 한계들 안에서 진실이거나 혹은 진실인 것처럼 보일 때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은 진리를 소유하기보다는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극복되어야만 할 믿음이다. 진리는 그 자신의 척도인 것과 마찬가지로 오류의 척도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선행하는 것을 판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 속에 나타나는 과거의 지식이 가진 타당성을 박탈한다. 그러나 그런 판단기준이 내일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이처럼 판단기준 자체의 변화를 체험한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의 체험은 그 기준을 좀더 세련되게 재구성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우리의 새로운 개념에는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의 추구라는 것이 중요하며, 그 추구는 바로 지식의 발전적 변화로 정의되었다.
역사적으로 새롭게 제안된 이론이 그것의 도전을 받은 선행 이론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증거를 쉽게 제시하거나 혹은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타인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론은 우선 이전의 이론이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이론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또한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개념화하여 그것에 대한 증거를 수집한다. 그러나 그 증거가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증거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인식론에서 남은 과제는 제시되는 증거를 새로운 증거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하는 절차를 필요요건으로 삽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론에서 진리의 체험은 이처럼 지식을 어떻게 형성시키느냐 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이제 진리규명에 있어서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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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느냐 하는 질문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플라톤이 <국가론(/1997)>에서 든 동굴의 비유는 이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동굴 속에서 그림자 이외의 뭔가 다른 것을 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제대로 분별되기 어렵다. 정지된 상태에서는 그가 보는 것만이 옳다고 믿는다.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사람이 그림자만 진실한 것이라고 믿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어둠에서 빛으로 그리고 빛에서 어둠으로 옮길 때 그는 이전의 생각이 틀렸음을 안다. 어두운 위치를 떠나서 빛을 따라가면서 태양을 본 사람은 그가 보는 것들이 이전에 보았던 그림자보다 더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전의 어두운 굴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느끼고 있는 동료들을 딱하게 느끼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동일한 체험을 권고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처럼 그 동굴을 떠나서 밖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의 생각이 그른 것임을 확인시킬 길이 달리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교육에 의한 사람의 변화가 진리의 입증에 있어서 불가결한 것임을 압축해서 시사한다.
교육적 인식론에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그 변화에 대한 조건이다. 진리의 내재적 가치가 누구에게나 실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창출하고 재생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확인할 수 있다. 지식의 절대성이 사라진 지금 그 가치는 비교에 의해서 감별될 수 있다. 어떤 이론의 가치는 그 이론 자체 안에 빠져 있을 때는 정확하게 감별될 수 없다. 그 가치는 대안적인 이론의 습득과 그것과의 대비에 의해서 비로소 드러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인식주체의 바람직한 변화이다. 우리는 현존의 지식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노력해서 더 나은 지식을 가짐으로써 자신에게 잠재된 지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지식은 타인과도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우월한 지식은 역시 그것을 몸 안에 체득함으로써만 자신의 것으로 점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타인들이 지금보다 더 우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과정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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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급화는 그것에 대한 감식능력의 향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낮은 단계의 인지수준에서 높은 수준의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를 강요에 의존할 경우 진리탐구의 기본취지가 손상되며,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 성장을 기다리는 경우 시간낭비가 심하다. 우리는 그 중간의 것을 보장하는 절차로서 上求와 下化의 과정, 즉 교육을 상정했다(장상호, 2000). 교육은 서로 품위가 다른 사람들끼리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을 교류하며 품위를 상승해 나가는 주기적인 과정이다. 서로 수준이 다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후진 편에서 선진 편으로의 개선을 위해서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교육적 관계는 교육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의미의 인간적인 연대성을 형성한다. 상구와 하화라는 이질적인 활동에 위계가 있을 수 없으며, 선진과 후진은 이를 통해서 서로의 수도계적인 위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교육적인 협동관계는 수도계 내의 선진과 후진 모두에게 교육이라는 놀이를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수도계의 입증과 진화를 촉진한다.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자신의 변신을 꾀하는 가운데, 다시 말하면 자신이 차별적인 상태가 되어 보는 가운데 선별적으로 찾아진다.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온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바람직하다는 보장은 없다. 이렇게도 되어 보고 저렇게도 되어 보는 가운데 진실로 자신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 나타난다. 이 과제는 어느 면에서 진리의 추구가 불확실한 시행착오를 내포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형태변화를 가져올 만한 시도를 해 보고 그 결과 바람직한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변화 자체가 이중의 지식체계를 비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그것을 대비하고 비교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진리가 체험된다. 절대적인 진리는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진리로 향하는 길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을 포함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실감할 수 있다. 교육의 한편인 상구계는 자신의 품위를 향상시키고 그 품위의 바람직함을 입증하는 절차적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절차적 활동에 참여하면 활동의 끝마무리에 바람직한 자신의 변화를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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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다. 그런 체험을 우리는 진리를 자증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상구자인 나는 상구에 의해서 나의 신념체계가 이전의 것보다는 진리성을 더 지니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 사실을 내면으로부터 수락한다.
그러나 자증은 수준의 차이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속한다. 그 진리체험은 나의 것이다. 새롭게 얻은 지식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의 주관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주관성의 약점은 바로 유아지론(solipsism)의 함정이다. 아무리 내가 진리를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 수락되지 않는 한 아직 자신의 한계 내에 갇혀 있는 한정되고 불안정한 진리체험에 불과하다. 나의 것이 타인의 것으로 옮겨가지 않는 한 그것이 확실한 것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의 진리체험의 보편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주장하는 내가 타인의 동의, 즉 이른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나와는 다른 인식주체, 즉 타인이 나의 주장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자를 통해서 그것이 입증될 때 그것은 우연 이상으로 확실한 것이 된다. 나만이 아는 것 혹은 나만이 체험한 진리에 대해서 나는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도 나와 동일한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우연 이상으로 더욱 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증을 통해서 내가 가진 지식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인을 통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타당성과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확인받고 싶어한다. 이것이 바로 타증에 해당한다. 그런 절차를 내장한 것이 교육의 다른 편인 하화이다. 하화는 타인을 나의 품위에 일치시키는 또 하나의 특별한 과정이다. 그러나 타증이 합의에 의한 진리규정이라는 객관주의의 발상에 동조하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탐구자 사이의 일치가 결코 진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불일치가 진리체험의 요건이다. 우리가 말하는 타증은 후진이 선진의 품위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방향의 사유의 운동이 보장되는 진리체험이다. 선진은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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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이 그들의 견해를 포기하고 나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장 그들을 구제불능의 사악한 존재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나의 상태에 공감할 수 있는 유사성을 상대에게 처음부터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만약 나의 지식이 타인의 것보다 수준이 높은 것이라면, 당연히 나는 나의 지식에 공감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상대편의 상구를 촉구하고 돕는 일을 해야만 한다.
학문은 혼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이 향유하는 학문적인 체험을 타인과 더불어 향유하려면 최소한 상대가 그것을 교육적으로 자기화하도록 촉진해야 한다. 나의 지식은 남들의 인정을 통해서 그 진리다움이 입증된다. 그러나 남들에게 자신의 지적 우위를 인정받고자 한다면 우선 그들이 내 지식을 옳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도와야 한다. 나에 의해 체험되는 진리가 타자에 의해서도 체험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의 보편성이 성립한다. 즉 우리는 타증으로서 우리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단 한 개인의 특수한 주관상태를 의미한다는 반론을 봉쇄할 수 있다. 또한 이로써 우리는 보다 확대된 상호주관성과 삶의 공동기반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안정성과 연대성을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교육은 그 결과보다는 과정의 내재율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있어야 된다. 그래야만 고유한 의미에서 교육에 의한 가치의 입증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이처럼 나 자신과 타인이 학문의 진리를 공유하고 체험하는 데 있어서 교육이 지켜내야 할 그 자체의 내재율이 무엇인지는 후속하는 제 3장의 논의에서 더 자세하게 밝혀질 것이다. 이 논의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 자체의 과정적 속성이다. 먼저 교육은 어떤 품위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동원되는 모든 수단을 총칭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행동수정, 조건화, 교조화, 사회화, 문화화, 개종, 선전, 강제, 세뇌, 협박, 회유 등 허다하다. 그 모든 것이 진리의 입증에 제멋대로 동원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 논의는 이미 수도계로서의 학문계나 교육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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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영역을 벗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상태나 목표점을 임의로 혹은 객관적으로 정하고 그 결과를 얻어내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앞에서 지적한 온갖 행동통제의 수단들이 바로 그런 과정에 속한다. 세속계의 운용은 상당한 정도로는 이런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서는 힘을 과시하거나 자신들에게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나 집단압력을 동원하거나, 외재적 보상에 의해서 조건화하거나,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이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수도계는 우리 스스로가 좋아서 추구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강제에 의해서 그의 일원이 되는 경우는 가정하기 어렵다. 이 세계의 참여자들이 만약 스스로의 선호에 의해서 이 길을 걷지 않고 어떤 자의적이고 조작적인 세력에 의해서 강요된다면 원래의 성격은 이미 변질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수도계적인 가치의 전수에 있어서 강요는 금물이다. 만약 특정한 지식에 대한 나의 자증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타인(들)으로부터 협력을 얻어내려고 하면서 나의 지식에 일치하도록 무조건 타인(들)을 강요한다면 바로 그 사실에 의해서 우리는 그(들)를 협력자로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바람직한 것을 강제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반교육적인 처사이다. 학문적인 지식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습득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치있는 것으로 입증되어야 한다. 명령, 처벌, 강요, 보상, 불안에 근거하여 진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에 복종하고 일치하는 사람의 인간성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위축시키고 억압한다. 지성과 자유의 계발은 어떤 행태이든 강요와 공포가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하다. 남을 강제로 복종시키는 권력관계로 변할 때 그것은 이미 교육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만약 교조화, 선전, 종교적인 개종, 조건화와 같은 강요적인 수단이나 혹은 최종적인 결과만을 내면화시키는 데 관심을 갖는 사회화나 문화화와 같은 전환과정을 거친다면 결과상의 효과는 클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에 가진 고정관념을 다른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대체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지식에 대한 자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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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얻어진 것을 기초로 독립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자유로이 사용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외부적인 위협에 따라 적응된 지식과 탐구과정을 통해서 마음으로부터 수락한 지식은 결과의 형태에 있어서는 동일할지 몰라도 우리 내면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지식을 획득하고 확인함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점은 외관만의 모방이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슬픔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최루의 물질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내적인 감흥이 없는 지식의 단순한 모방은 후자의 경우에 비유될 수 있다. 이처럼 외부로부터 요구사항에 호응하면서 비자발적으로 내면화된 지식과 유기체적인 성장을 위한 자발적인 선택과 발전의 기제를 통해서 얻어낸 지식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Deci & Ryan, 1985). 후자는 통합적으로 융통성 있게 항상 발전을 지향하는 하나의 잠정적 기능을 하는 반면, 전자는 고착성, 비융통성, 단편화로 특징지워진다. 후자는 내외적인 성장의 조건에 의해서 유지되는 반면, 전자는 그 내면화에 동원한 조건(예컨대, 외부적인 보상, 벌 등)의 존재 여부에 의해서 유지된다. 계속적인 부정을 통해서 발전을 해 나가야 할 학문의 세계에서 바람직한 지식의 형태는 후자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교육은 품위의 내재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타의 권위주의적인 행동변화의 방법과 구별된다. 가치의 형성과 관련하여 하나 분명한 사실은 외재적 보상을 가지고 내재적 가치를 형성시키거나 입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경험적 공감과는 동떨어진 신념체계를 단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타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혹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달성했을 때 그 품위의 가치는 더 이상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의 품위라고 하지 않는다. 품위는 외재적 보상보다는 내재적 가치에의 호소에 의해서 습득될 때 비로소 내재적 의미를 갖게 된다.
품위로서의 학문적 지식 역시 그 자체를 몸에 지니는 것만으로 보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학문계가 추구하는 진리가 내재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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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갖는다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남이 먹는 것을 관망해서는 배가 부르거나 음식의 맛을 알 수 없다. 그것을 먹어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식을 우리의 내부에서 재생산함으로써만 그것의 내재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가치있는 지식을 몸에서 생산하고 지니는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의 추구에 참여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추구와 관련하여 주어진 은총을 실현하고 증명하는 데 있다. 이 점에서 학문의 세계에서는 명제의 진위를 밝히는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보다는 그것을 획득하고 내부에서 증득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즉 학문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자신의 인간된 가치를 고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지식의 추구 자체가 보상의 의미를 갖는다. 교육이 학문계에서 진리를 그런 방식으로 실현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내장하고 있다.
오늘날 학문적인 지식을 도구화하려는 풍조가 팽배해 있다. 이는 교육이 제자리를 지킴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의 도구주의자들은 그것의 내재적 가치를 감식할 겨를도 없이 최후의 지적인 체계를 많은 사람들에게 기계적으로 내면화하여 활동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런 행동변화의 전략은 우리가 말하는 교육의 과정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기능적 인력양성의 효용을 도모하는 것과 도야와 수양을 토대로 하는 내재적 가치의 추구가 반드시 대립적인 선택일 수는 없다. 교육은 그 내재적 가치를 얻는 방식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은 다시 다양한 영역에서 기능적 효과를 창출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교육적인 접근이 행동통제의 어떤 방책보다 장기적으로 효과적인 것이라면 서로의 공조는 더없이 바람직한 전략이 될 수 있다.
2.3.2. 언어적 실천의 한계
교육의 과정에 의해서 지식의 존재와 위계를 입증한다고 할 때, 그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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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의 의미는 가능한 한 여타의 것과 구별되는 방식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그런 특성을 갖지 못하는 한 교육에 의한 인식론적인 문제의 타결이라는 우리의 과제는 과장되거나 모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앞서 교육적 인식론의 전조로서 헤겔의 변증법을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는 일련의 교화철학의 예를 들었다. 이 때 교화 혹은 도야라는 것은 단지 인간을 하나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우리의 교육의 개념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 때 교화가 주로 어떤 실천을 요구하고 동반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말하려는 교육적 실천과 다소의 거리가 있음을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그 구분은 더욱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도야함에 있어서 언어적 소통과 대화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느냐에 있다. 우리는 이 절에서 언어에 신뢰를 두는 일부 교화철학자들의 입장을 검토하고 그것이 갖는 한계를 논급하게 될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식논리를 극복하고 인식론에 인식주체 자신의 변화를 중요한 변수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형식논리에 의해서는 학문의 발전이 설명될 수 없다. 실상을 밝히려면 한 단계의 지식체계가 어떻게 해체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지식체계로 전환되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앞과 뒤의 두 체계는 하나의 논리체계로 통합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하나의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대안적인 해결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을 면하기 어렵다. 변증법은 그런 논리적 갈등과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지양’이라는 매개과정을 상정한다. 이로써 모순 이전의 정립과 모순이 지양된 정립에서 후자가 진화된 형태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용인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변증법은 인식의 추구라는 것이 갖는 탈한계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 과정에 개재하는 것, 즉 현존의 지식을 탈피하는 실천이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변증법의 내용은 매우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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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헤겔의 변증법은 단지 변화와 발전의 도식적인 형식을 보여줄 뿐이다. 헤겔의 발전을 정, 반, 합의 3단계로 나눈 것은 일단 발전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의 지양이라는 점에서 극히 올바른 길을 열어 놓았다. 그리고 발전이 일정한 과정의 반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본 것도 교육적 인식론의 맥락과 같은 궤도에 있다. 다만 우리가 논리적인 분석에 그치지 아니하고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실제적인 실천을 생각할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더 이상의 구체적인 해답을 구하기 어렵다.
헤겔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화론자들 가운데 일부는 진리에 대한 동의를 얻거나 혹은 인식의 불일치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대화나 논쟁에 큰 기대를 걸어 왔다. 이런 해결방식은 사실상 철학 자체의 기원과 역사까지 소급된다. 역사적으로 서양의 철학은 희랍적 기원에서부터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한층 높은 고차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통을 세워왔다.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대화를 핵심적인 교육의 방법론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의 제자 플라톤 역시 대화를 중시하였다. 이들은 대화가 승리를 지향하는 금력, 폭력, 혈통의 지배원리를 떠나서 진리를 세우고 확인하는 원리로 적용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그의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제안한 변증술(dialektike)은 이와 같은 논쟁규칙의 형식화 작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실천적인 의미의 변증법은 주로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언어사용을 권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는 대화의 참여자들이 도달하게 되는 입장이 최초에 각자가 갖고 있었던 입장에서 진일보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에 대한 일반적 해석은 이렇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각은 일정한 견해와 가정들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서로 대립되는 견해나 가정들과 부딪히면서 자신의 것들을 재검토하고 발전시키게 된다. 이런 방식에 의해 사실을 차츰차츰 해명해 가면서 사전에 분명하지 않았던 전제들을 분명하게 하고, 또한 그 때까지 애매하던 이해를 명백하게 함으로써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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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찬성 또는 반대가 되어 보기도 하고 보충하고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의 말미에 이르면, 모든 참여자들이 애초에 취했던 입장들은 자신들이 보더라도 그릇된 것이 되며, 보다 풍부하고 포괄적인 견해에 통합된다는 것이 대화를 강조하는 전통적 입장의 해석이다. 이처럼 실천으로서의 변증법은 대화가 상대의 입장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변증법을 따르는 교화론자 가운데에는 언어 자체가 갖는 한계를 너무도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면이 있기도 하다. 예컨대, 헤겔과는 일면 대립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논리를 그의 사상에 적용하려고 했던 키에르케고르는 당대에 정신보다는 문장을 숭상하고 체험의 산 내용을 희생시켜 문자공부만을 일삼는 것을 문제시했다. 그는 뜻도 모르는 문법규칙을 암송시키는 것은 시간의 낭비라고 보고 대신 변증법을 인간의 실존적인 운동에 적용하였다(엄태동, 1998;표재명, 1994). 참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을 승화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모순을 체험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세계를 그 깊이에 있어서 이해한다는 것은 오직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택한 그는 한 개인의 실존적인 운동을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그리고 종교적 단계로 나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들 단계 사이에 모순과 역설이 있음을 지적하고 각각의 단계 간에 있는 실존의 모순을 말로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고심하였다.
키에르케고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다루면서 직접적인 대화에 의해서 그런 모순이 지양될 수 있을 가능성에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대신 그는 객관적 지식의 직접적인 전달이 아닌 주체성 · 내면성과 같은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으로써 ‘가면쓰기’와 ‘간접전달’이라고 하는 주목할 만한 방법을 도입하였다. 그와 같은 방법은 일면 그가 생각하고 있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교육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달할 내용과 대상만을 의식해서 이루어지는 강의의 형태가 아니라, 전달하는 자가 전달받는 자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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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내부로부터 유도해 내는 과정과 결부되어 있다. 전달하는 자는 전달받는 자가 스스로 자신의 진리를 터득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전달자는 자신의 자연적인 의지를 거슬리면서까지 자신을 감추는 가면을 쓰는 아이러니를 감수한다. 이런 교육의 개념은 우리의 하화의 과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보인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는 언어적 전달의 맹점을 말하고 있지만, 간접전달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역시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 [각주 8: 이러한 점에서 그는 스스로 스승이 되지 못함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Kierkegaard, 1859).] 이런 기법은 그의 익명의 작품활동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는 실존의 이질적인 단계를 나타내는 삶의 양태를 갈등과 모순의 언어로 진술하고 독자를 그 삶의 양태 가운데 어떤 것으로 유도하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은 어떤 삶이 옳다는 식의 직접적인 방식보다는 독자가 그 저서의 주인공의 생활과의 공감이나 갈등을 통해서 좀더 자신을 반성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역시 인식주체의 변화를 꾀함에 있어서 주로 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독자가 그의 작품을 읽고 그가 예상했듯이 자신의 실존양태를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공감을 할 수 있지 않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헤겔의 사변을 비난했듯이 문학작품은 그야말로 책 속에 있는 가공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독자가 그것에 완전히 공감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갈등을 느끼고 실존의 양태를 선택하는 실제의 상황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다.
언어에 대한 의존의 양상은 하이데거에게서도 엿보인다. 하이데거가 그의 기초존재론의 맥락에서 다루는 언어는 특정한 언어, 가령 독일어나 한국어가 아니라 언어 자체이다. 그는 몸짓이나 침묵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의 천둥, 번개도 신들의 눈짓으로 해석되어야 할 언어에 포함시킴으로써 언어의 外延이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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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어가 존재하는 개시하는 수단으로 본다. 이 때문에 그에 따르면 우리가 언어를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에게 스스로 나타나서 우리를 통해서 말한다는 식의 결론을 얻는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 물려받은 세계는 선대 인류의 모든 상호주관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적 · 역사적 의미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우리의 개인적인 현존재를 공동체적으로 타자와 함께 하는 존재, 즉 역사와 전통으로 정의한다.
이런 그의 입장에는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신비주의적인 사유가 개재되어 있다(한국하이데거학회 편, 1998). 심지어 하이데거는 언어에 신성을 부여하려는 경향조차 보인다. 그의 유명한 말, 즉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그가 언어를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언어에 의해서 우리가 이해한 바를 함께 나눌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그는 철학의 전통 안에 있다. 하이데거(1972/1994)는 말함이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에 관해 말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말함의 과정에서 말하는 자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말하면서 대화의 상대자와 더불어 자기가 이해한 바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함께 나눔이란 한 주체에서 다른 주체에로 낱말이나, 더 나아가 표상들을 넘겨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치 상이한 주체들이 갖고 있는 심리적 사건들의 교환교류인 것처럼 말이다. 한 현존재가 자신을 밖으로 말하면서 다른 현존재와 자신을 함께 나눈다 함은, 이 현존재가 어떤 것을 발언하는 중에 그것을 제시하면서 다른 현존재와 발언되고 있는 존재자에 대한 동일한 이해하는 관계를 함께 나눈다는 말이다. 함께 나눔 속에서 그리고 함께 나눔을 통해 한 현존재는 다른 현존재, 말하자면 듣는 사람과 발언의 관련사항이자 말의 지시사항에 대한 동일한 존재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함께 나눔들은 풍부하게 집적된 문장들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동일한 방식으로 밝혀져 있는 존재자에 대한 동일한 근본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가능성들로 파악되어야 한다(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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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대화에 의한 이해의 교환은 언어 자체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그것이 나타내는 존재자에 대한 동일한 존재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 말은 존재자에 관한 발언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자가 이미 밝혀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발언은 현존재의 양태를 떠나 지식을 규정하려고 했던 이전의 형이상학을 부정하는 그의 기초존재론의 입장에 비추어 매우 중요한 시사를 담고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대화만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직접적으로 공유할 수는 없으며, 언어적 대화에 의해서 의미가 공유되기 위해서는 그 양자가 세계와의 존재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언어 자체가 역사적 전통과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언어적 대화를 진리규명의 주된 매개과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자를 현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존재자를 은폐하고 왜곡할 가능성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실존적 담론에서 본래적인 형식인 대화(Sagen)와 비본래적인 형식인 ‘잡담(Gerede)’을 구분한다. 그는 전자를 존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면서 진정으로 거기에 화동할 수 있기 위하여 침묵함으로써 우리의 언설을 책임지고자 하는 능력과 동일시한다. 예컨대, 詩는 존재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언어에 대한 존재의 세움이다. 다른 한편으로 잡담은 거기에 책임지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다른 현존재의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무의미한 수다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비본래적인 실존방식으로 본 세인들이 나누는 잡담은 존재상실의 가능성으로 퇴락한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신비주의적 언어관과 그것에 따르는 결론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상당부분 위험하기까지 하다. 언어는 하이데거가 시사한 것처럼 운명이 아니며, 그것은 우리에게 말해지고, 또 우리는 언제나 언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의 특이한 이론적 입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가 진리를 현시한다는 그의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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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하면 언어만능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스승으로 삼는 가다머 역시 철학적 해석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입장을 충실하게 전승하고 있다. 가다머가 인식의 변화를 시도할 때 그 논증의 방향은 주로 언어와 이해의 연관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지식과 진술의 대상이 이미 언어와 세계지평 안에 둘러 싸여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들이 걸어오는 말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지평의 융합’을 논급한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헤겔의 변증법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 헤겔이 상정한 절대지라는 정점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적 발전의 구체적인 방식을 희랍시대의 변증법적 대화로 회귀하여 고유한 인식론적 해법을 찾는다. 헤겔의 관점에 따라 이해가 곧 학습경험임을 인정하는 가다머는 그 학습경험이 주로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으로 논의한다. 여기서 그는 보다 더 나은 이해 혹은 지평의 융합을 이루는 데 있어서 대화가 갖추어야 할 구조나 조건들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그 특징은 대화의 참여자가 서로 오류가능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대화상대자가 서로 상대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개방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다머(1960/1982)의 말을 들어보자.
대화 속에서 하나의 이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대화의 쌍방이 그것에 대해서 준비가 되어 있고, 또 그들에게 낯선 것이나 자신들의 견해와 다른 것들도 타당성이 있으면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만약 이런 전제가 서로 간에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논점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반론을 저울질한다면, 종국적으로 서로 감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자의적이지 않는 상호 간의 입장의 번역을 통해서 하나의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판단을 성취할 수 있다(p.348).
가다머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지평이 확장되고 풍부해지도록 매개하는 것은 역시 언어이다. 그는 이처럼 언어를 통한 대화에 큰 기대를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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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에게 있어서 대화란 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든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갖는 특징은 각자가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고, 그의 견해를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진정으로 수락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까지 타인의 내면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대화의 주제에 대해서 서로 동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철학적 해석학은 전승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모색한다. 이 때 권위의 무게는 아무래도 전통에 주어진다. [각주 9: 비판적 해석학을 표방하는 아펠(1972)과 하버마스(1970)는 여기에 전통이라는 구속이 자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둔다. 하버마스는 언어가 지배라든가 사회적 권위의 매개자이기 때문에 그 점을 간과하면 비합리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합의를 나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 점에서 가다머는 의사소통상에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여러 가지 왜곡들을 폭로하거나 비판할만한 수단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가능성을 봉쇄하는 ‘이상적인 대화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철학적 해석학과 비판적 해석학은 서로 대립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그들은 언어를 중시하는 철학의 전통 속에 있다.]
교화철학자들은 인식에 있어서 교화의 요소를 인정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언어적 실천을 교화의 수단으로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철학에서의 인식론적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려고 하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역시 오래된 철학적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철학은 출범에서부터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왔고, 그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에 철학 자체를 부인하면서 자아의 재창조와 인식의 문제를 결부시킨 로티는 교화의 수단을 어디에서 찾는가? 놀라운 것은 그 역시 바로 언어적 실행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는 사실이다. 언어가 실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철학적 정초주의를 부인한다는 점에서 물론 그는 전통적인 인식론과 입장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묶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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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방식임을 인정한다.
로티(1989)는 인식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교화, 즉 자아의 재창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그는 교육적 인식론의 맥락 안에 있다. 그런데 그는 자아의 도야란 언어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에게 있어서 도야란 새롭게 창안해 낸 낯선 어휘로 우리 자신의 낯익은 환경들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언어의 개조와 창안이 바로 마음을 창안하는 방식이다. 사고를 반영하는 것이 언어이고 사고를 변화시킴으로써 언어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언어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메타포의 사용과 비통상적인 담론이라는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메타포는 낡은 용어를 낯선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런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 중인 다른 낡은 낱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낡은 메타포들을 끊임없이 죽여가면서 새로운 메타포를 창안해 낸다. 이처럼 우리가 말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는 방식을 바꾸고, 또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른바 비통상적인 담론을 통해 언어를 개조함으로써 통상적인 담론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접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까지 우리는 인식론의 문제를 교화에 의해서 해결하려고 하면서 교화의 수단을 언어적 실천에 두는 일련의 입장을 비교적 자세하게 점검하였다. 그러나 교육적 인식론은 교화 자체에는 그들과 입장을 같이 하면서도 주로 언어에 의존하는 그들의 방법에는 동조하기 어렵다. 교육적 상황에서 언어를 통해 품위를 전달하거나 동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너무도 안이한 해결인 듯하다. 언어를 통해서 품위를 변화시키는 방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새로운 품위를 얻고 그것에 합당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소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육의 입장에서 보면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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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없는 학문활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학문이 언어의 정신에서 생겨난 것은 결코 아니라도 하더라도 언어는 학문에 있어서 불가결한 도구이다. 어떻든 언어는 단순히 학문의 전달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학문의 기저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지식을 수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언어가 아닌 침묵으로 학문이 이루어질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지식 자체가 문자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우리와 옛날 사람의 만남은 그들이 문자로 남겨 놓은 흔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적 수단에 대한 과잉기대, 과잉사용은 그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적 수단이 무절제하게 소모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점을 흔히 정보의 시대 혹은 텍스트의 시대로 부른다. 이제 말과 기호는 온갖 전자매체를 타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컴퓨터를 통한 인터넷의 접속으로 세계 전체의 정보가 교환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누구나 스위치 하나만 켜면 모든 정보나 지식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상의 차이와 문제점들을 은폐하거나 외면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언어 자체의 속성상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은 근래에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서 적나라하게 지적되고 있다. 데리다(J. Derrida, 1967a, 1967b)의 견해에 따르면 언어는 흔적과 그 흔적의 운동으로서의 차연의 숙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어떤 단어의 의미는 차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그 의미가 끊임없이 연기된다. 그런데 우리가 개별적으로 언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마다의 간섭을 받으며 그 원전의 맥락적 의미공간을 떠난다. 이를 비유해서 데리다는 씨알이 없는 쭉정이의 씨가 무한대로 퍼져나가는 현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정자가 없는 정액의 무한정한 방출로도 비유했다. 그가 말하는 이른바 散種은 결국 언어가 탄생했을 언어 이전의 상황이 아니며 오히려 그 상황과 단절된다. 혹은 두 사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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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상호 간의 첨가와 보충에 의한 굴절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첨가와 보충은 미완결적인 것이고, 그것을 메우려는 임무는 충분히 수행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입하고 있는 정보시대의 과장된 허실이다.
말에 의해서 지식을 전달한다고 할 때 언어사용자는 은연중에 하나의 단어와 더불어 그가 연상하는 개념이나 지식이 다른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들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평행성의 가정은 통상 소통이라고 일컫는 것의 토대가 되고 있다. 흔히 철학자, 언어학자, 사회학자는 언어를 다룰 때 그런 가정을 향유해 왔다. 대개 그들은 언어를 개인의 의식과 독립된 실체로 보거나 혹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구사하는 사람들 간에 체험의 공유가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 또한 전통적인 소통이론은 오직 그 매체에 관심을 가지며 메시지를 발신하고 수신하는 사람은 일단 체험의 측면에서 공유된 기반이 있는 것으로 가정해 버린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공유된 체험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언어적 소통을 하며, 또한 그런 상태에서는 정확한 의미의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서 최근에 구성주의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는 글래서스펠트(1995)의 시각이 중요한 시사를 준다. 그는 우리가 흔히 ‘의미를 공유한다’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동일한 사물을 여러 사람이 공유한다는 말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이렇게 지적한다.
‘공유된 의미’라는 표현은 약간 오도될 가능성이 있다. ‘공유한다’는 단어의 모호성을 깨닫는 것이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혀 줄 것이다. 자동차를 공유한다는 것과 포도주를 공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의 경우,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개인들이 한 대의 차 그리고 같은 차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한 사람이 마신 포도주를 다른 사람이 마실 수는 없다. 하나의 의미를 공유한다는 말은 두 번째의 사례와 약간이나마 비슷하며 첫 번째의 사례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그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과 연합된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가 말하거나 글을 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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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그 특수한 단어의 청각 영상과 연합하게 인도하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것과 결코 같은 것일 수가 없다(p.48).
위의 글은 한 단어의 의미가 공유된다는 통념이 가진 허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글래서스펠트는 서로 다른 지식체계를 가진 사람들끼리는 공통된 의미의 공유가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한 단어가 연상시키는 경험은 개인에 따라 다를 수가 있고, 따라서 같은 단어를 소통한다고 할 때 그 단어에 대한 경험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해석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흔히 언어에 의한 의사소통이 마치 자동차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어가 실재하는 세계 내에 있는 사물들을 지칭하고 있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개별적인 경험을 초월해서 사물들을 기술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여기에는 엄청난 생략과 착각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구성주의적 소통이론에서는 수신자가 적극적인 의미의 산출자임을 강조한다(Schmidt, 1994). 소통은 항상 복수의 인지체계들을 전제한다. 수신자는 메시지를 그의 인지구조에 의해서 수신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가 말하는 소통이라는 과정은 애초의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한 과정이고, 그 조건을 고려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화자가 언어적 소통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두 체계가 ‘같이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런 전제가 보장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개인들의 개념이나 지식은 주어진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발언자는 그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의 맥락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선택하겠지만, 그런 사건은 다른 사람의 경험 안에서는 같은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소통은 고정된 의미의 직접적인 교환이 되기가 사실상 어렵다.
언어적 소통에서 우리는 각각의 언어 사용자가 의미를 구성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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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 그리고 이들이 상호 간에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적응해야만 하는 과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어와 연합된 체험이 다르거나 혹은 그 단어와 연합되어야 할 체험구조를 적절히 갖춘 사람과 그런 체험구조가 없거나 혹은 부족한 사람들이 언어에 의해서 공통된 의미를 교류하는 일을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것은 기존의 개념구조 가운데 어떤 것을 어떤 맥락에서 연관짓느냐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심각한 상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언어를 사용하는 어느 한편에서 처음부터 그런 개념적 레퍼토리가 없거나 혹은 미숙한 경우에 생긴다. 그 단어와 관련된 지식을 아직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갖추었다고 전제하는 소통은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유관한 체험의 결핍이나 차이를 언어적 소통에 의존해서 대신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문제의 해결을 거꾸로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의사소통 현상은 무엇이 전달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데 수도계적인 체험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의 대화의 경우 이 양자 간의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특정 영역에서 지식수준이 다른 두 사람, 즉 우리의 용어로 선진과 후진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선진이 자식의 지식을 아직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후진에게 전달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런 의미의 소통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결과가 예상된다. 하나는 의미상의 굴절이다. 선진과 후진은 같은 용어로 말을 교류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체제는 다르다. 선진의 삼차원적 말을 후진은 이차원적으로 이해한다. 이처럼 많은 말이 말로 이루어지지만 그 때마다 그것에 의해서 전달되는 의미내용은 전달에 참여하는 사람의 체험에 의해서 변질된다. 여기에는 오해를 동반하는 표면상의 소통만 있고 이해해야 될 과제는 그대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논쟁이다. 논쟁은 논거를 가지고 싸움하는 투쟁이다. 선진과 후진은 같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서로 다른 지식의 요소로 조직한다. 그들이 가령 ‘원자’, ‘문제’,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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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언어이고 어떤 통약가능성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가 자신의 것이 진리이고 선하고 옳다고 믿는다. 이처럼 논거들이 서로 형평을 유지하게 된다면, 논쟁은 엄청난 혼란으로 비화되거나 일종의 조리 있는 말놀이 차원에 머물 것이다. 쌍방이 서로의 변모를 확인함이 없이 자기의 주장을 삼단논법적인 논증형식으로 강요한다면, 우선 서로의 권리주장과 자존심이 걸린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일시적으로 한편이 다른 편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래가지 않아서 그 효력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선진과 후진이 서로 통약불가능한 현존의 상태 그대로 대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의미 있는 대화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 다른 쪽으로 공분모를 갖도록 조정되어야 한다. 후진이 선진의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의 체질화된 사유방식을 검토하고 그것을 새롭게 탈바꿈시켜야만 한다. 그런 과정을 새로운 지식을 검증하는 하나의 원리로 주목한 사람이 바로 쿤(1970)이다. 그는 하나의 정당화된 패러다임 속에서 생활하던 사람이 다른 패러다임을 수락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개종에 가까운 정신의 자기변모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학자 자신이 새로운 지식을 검증하는 경우나 혹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타인에게 검증받는 경우 모두에게 적용된다.
선진과 후진 간에는 체험이 보충되어야만, 다시 말하면 같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응하는 공통된 언어의 사용을 알게 되었을 때에만 언어에 의한 의미의 공유가 가능하다. 그런데 교육은 애초부터 체험의 공감대가 없는 선진과 후진의 상호작용이라는 특수성이 문제이다. 선진과 후진의 경우는 지식의 수준이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앞에서 말한 소통의 전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교육에서 언어적 상호작용은 일종의 패러독스의 상황에 봉착한다. 하나의 극단에서 서로 아무 장애도 없이 언어적 소통이 이루어진다면 지식의 수준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또한 다른 하나의 극단에서 선진과 후진이 각각 자기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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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언어를 쓴다면, 언어의 교육적 기능은 그만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교육의 경우 통상적인 의미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선진으로서의 스승과 제자로서의 후진은 소재계의 품위가 비대칭이기 때문에 있는 상태 그대로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상호 간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대화의 모형은 교육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 언어를 통한 그 내용의 직접적인 소통의 결과는 오해이다. 교육은 오히려 그런 오해를 이해로 이끄는 과정이고, 선진과 후진이 서로 오해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선행적 과제를 해결하는 공간이고 실천이다. 그들 간의 언어에 의한 정상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소통할 수 있고 공감을 가져올 수 있는 체험을 형성하는 긴 기간의 교육적 실천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언어적 소통은 교육의 수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이 말은 교육에서 언어적 소통이 전혀 무용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교화철학자들이 변신을 위해서 처방하는 언어적 실천이 가진 안이한 가정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수도계의 품차에서 비롯하는 언어의 불가공약성을 언어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다. 그것은 그 언어에 근거를 부여하는 체험의 단층에서 비롯한 것이며, 따라서 그 단층은 체험의 위계를 극복하는 별도의 실천에 의해서 메워져야 한다. 물론 교화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는 표현과 기술의 투명한 매개자로서 간주했던 전통적인 언어관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은 인정된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대화 자체가 내적인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은 부인할 수 없으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극미하다. 굳이 경미한 효과를 말한다면 그것은 선진이 선진의 말(제 1 언어)을 직접 쓰지 않고 후진의 언어(제 2 언어)에 잘 적응하여 그들의 품위수준에 약간 어긋나는 언어(제 3 언어)를 사용했을 경우이다. 제 3 언어는 후진의 수준에서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은 알듯 말듯 한 언어로서 서로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면서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의 변증법적 전환을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는 효력을 갖는 것으로 밝혀졌다(Inhelder, Sincla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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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vet, 1974). 앞에서 키에르케고르가 제안하는 아이러니와 간접전달, 그리고 가다머가 말하는 대화, 그리고 로티가 말하는 메타포나 비통상적 담론이 만약 효과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영역 내에 한정될 것이다. 그 밖에서 그 신통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선진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 후진에게 주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욕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흔히 교육을 앞세워 위압적으로 그런 욕심을 부린다. 그러나 그런 강요나 계속된 언어적 반복은 혼돈을 가져올 뿐이다. 문장으로 표현된 것은 물리적으로 한 개인에게 암송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어느 경우나 그것을 듣거나 읽는 사람의 것으로 수용된다. 만약 그 언어의 정확한 재생이 정답으로 강요될 경우 학생들은 마치 컴퓨터처럼 그것을 반복해서 재생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곧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남의 말을 습득한 경우에 해당한다. 따라서 말의 유창성을 가지고 그의 지식수준을 평가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그것은 아직 체득화의 단계에 들어서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의 습득으로 볼 수 없다. 우리는 그런 유의 지식을 지득된 지식으로 우리의 인식론적 논의에서 제외시켜 왔다.
교육의 경우 체험의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우는 작업이기 때문에 교화철학자들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언어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언어로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형성을 돕는 활동을 촉구하고 보존하는 특별한 언어의 활용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근래에 철학에서 다루는 언어관에서 도출될 수 있다. 언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는 이제 철학자들 자신에 의해서도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922)은 전기에 주장했던 언어의 그림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고 언어의 사용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언어사용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있어야 경험에 직접 주어진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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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놀이’룰 구별하는데, 이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예컨대, 벽돌공이 동료에게 ‘벽돌!’을 외치면 그것은 그냥 있는 대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벽돌을 자기에게 가져오라는 명령이다. 이처럼 언어의 의미는 어떤 맥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미 주어져 있을 수 없다. 말의 상징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나 그 사용을 통해서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런 결론에 이르는 데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학자가 오스틴(J. Austin, 1962)이다. 그는 언어가 무엇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라는 사실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심지어 우리가 흔히 드는 순수명제까지도 어떤 ‘담화의 상황 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순수명제로 우리는 ‘말로써 어떤 것을 하려고(do things with words)’ 하기 때문이다. 오스틴에 의해서 개진된 언어행위 이론(speech act theory)에서는 말함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되는 이른바 ‘비언표적인 힘(illocutionary force)’을 인정한다. 비언표적인 힘은 사상에 대한 단순한 기술을 넘어서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말하는 사람이 의도한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근래에 하버마스(1979)도 그의 보편적 화용론에서 오스튼의 입장을 수용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교육어’가 새로운 연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장상호, 1998). 교육어는 교육 자체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언어의 화용적 측면이다. 교육은 언어의 소통을 가로막는 체험상의 빈틈을 보충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 교육활동을 처방하고 촉진시키는 언어를 가정할 수 있다. 수도계적인 언어의 의미에 있어서는 선진과 후진이 불일치하지만, 각각 스승과 제자의 입장에서 교육적 활동에 대한 말의 의미에 있어서는 일치할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런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스승과 제자는 서로 의미 있는 교육적 활동을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고 있는 경우에 “좀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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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고 요청할 수도 있고, 자신이 설명한 것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좀더 주의해서 들어보시오”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이러한 교육어는 교육소재의 내용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소재의 내용을 이해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을 순조롭게 진행시키는 화행으로서의 효과를 기대한다.
이런 말들이 무엇인지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주로 소크라테스가 하고 있는 말들을 연상한다면 어느 정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앞에서 헤겔의 변증법이 그 실천면에서 여타의 교화철학자들에게 계승될 때 다분히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토대가 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소크라테스가 교육의 맥락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의 이해를 도출해 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가 타인과 벌이는 대화에는 세계에 대한 어떤 단정적인 결론도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적인 언어가 사용될 뿐이다. 이러한 언어사용의 관점은 그의 교육관을 피력하고 증명하는 <메논(/1996)> 편에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의 시종인 한 소년을 교육하는 과정을 메논에서 보여주면서 이런 장담을 늘어놓는다.
이 소년이 나와 함께 탐구함으로써, 나는 질문을 할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도, 무엇을 발견하게까지 되는지 유의해서 보게나. 혹시 내가 그에게 가르쳐 주거나 설명을 해 주는 게 눈에 뜨일지도 모르니 지켜 보게나. 내가 이 아이의 생각은 묻지 않고설랑 말일세(p.129).
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가 의미하는 ‘가르침’은 앞서 논의에서 우리가 문제시해 온 언어주의적 실천을 의미한다. 즉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말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그는 그런 언어주의를 피하는 방식으로 소년을 교육시키겠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교육의 상대로 삼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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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뿐만 아니라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메논과도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 주제는 주지하다시피 도형의 면적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대화에서 도형에 관한 어떤 결론도 내리는 것을 보류한다. 놀라운 것은 그 대화내용이 사실은 결론을 내려 나가는 데 필요한 절차적 행동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어떤 대상에 대한 진술이기보다는 교육활동을 처방하고 촉진시키는 언어들이다.
교육활동에서 스승과 제자는 언어 이상의 도제적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는 지식을 언술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개인의 내면적 구인으로 규정하였다. 그런 의미의 지식은 언어에 의해서 곧바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선후의 관계를 따질 때 체험이 선행하고 그 후에 그것을 배경으로 한 언어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런 선후의 관계는 실천의 인식론에서 도제적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쇤(D. Schon, 1988, 1988)의 글에서 매우 적절히 지적되고 있다. 그는 디자인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한다.
스승이 디자인에 관해서 아무리 훌륭하고, 분명하고, 설득적인 기술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이해의 체계를 가진 제자들에게 언어적 기술들은 혼란스럽고 신비하게 들릴 가능성이 많다. 이 단계에서 스승과 제자의 소통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고 그리고 빠르게는 수개월이 지난 후에 스승과 제자는 많은 것을 생략하면서 서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간결한 단어나 제스처를 이용하여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복잡하거나 모호하게 보이는 관념을 주고받는다(1988, p.100).
쇤은 디자인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의사소통이 도제적 관계를 일정기간 지낸 다음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처음에는 스승과 제자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가 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체험적 맥락과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난 후에 서로 이해할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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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있는 점은 그런 도제적 활동에는 그 활동을 촉구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른바 상호 간의 ‘행위 속의 반성(reflection-in-action)’을 하는 언어 외적 맥락(extralinguistic context)이 있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우리가 말하는 교육어가 적절히 개재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목하 제안하고 있는 교육어가 단순히 이론적 가정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제 본 절의 결론을 내려보자. 교육적 인식론은 선 · 후진을 가르는 과정으로서 교육적 증득을 한 조건으로 삼고 있다. 효과적인 교육은 언어와 행위의 부단한 통합과 밀접히 이어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언어를 통해 선진과 후진의 수도계적 지식을 직접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고, 다른 한편으로 교육활동 속에서 양자 간의 상호주관성을 확보하는 특별한 의미의 언어사용이 가능함을 시사했다. 교육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그들의 공동활동을 조직하고 운영하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서로 간에 갈등과 불일치가 일어날 때 양자가 다소의 책임을 나누면서 그 차이점을 해소시켜 나가는 데는 모종의 대화적 규칙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에서 말하는 말의 효능은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말을 통해서 서로를 교육의 세계로 안내하고, 더 나아가 교육적인 상호작용의 성립과 원만한 관계유지를 시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출발점에 있을 뿐이다.
2.3.3. 체험의 재구성
서양철학자들은 주로 언어로 나타난 인식의 상부구조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뿌리박고 있는 체험적 근거를 간과하였다. 그들은 지식이 성숙하는 언어 외적인 복잡한 과정을 무시한다. 그런 형성적 과정은 철학의 영역에서 다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영역구분을 하거나 혹은 그런 문제가 제기될 경우 단지 언어적 교류, 특히 대화에 의해서 해결될 것으로 가정한다. 그런데 동양문화권에서는 언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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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고 진리를 표현하는 데 불충분하고 부족하다는 점을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다. 동양과 서양의 상이한 입장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분야와 관심영역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의 입장에서는 언어적 실천의 제한된 의미를 지적한 동양의 지혜가 경청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추구하는 것을 말로 대신하려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발상이다. 삶의 크기와 체험을 떠난 말만의 인식은 형식에 불과하며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우리 동양의 선인들은 오래 전부터 넓게는 인간사 전체, 그리고 좁게는 교육에 있어서 언어의 피상적인 과용을 경계하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중시하였다. 언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를 드러내고 진리를 증득하는 데 불충분하고 부족하다는 점이 儒家, 道家, 佛家의 문헌에 널리 반영되어 있다. 우선 <논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언론이 篤實한 자가 선인이겠는가? 행실이 군자다운 이가 선인이겠는가? 안색과 어조가 점잖은 이가 선인이겠는가?” [각주 10: 論篤是與, 君子者乎? 色莊者乎(論語/先進).] 하고 문의한다. 공자의 이 질문에는 말과 외모만으로 선인이나 군자를 분간하기 어렵다는 뜻과 더불어, 더욱 중요하게는 제자들이 그것들을 구분해서 말과 외모보다는 행실에 중점을 두고 잘 처신하라는 당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삶에 있어서 언어의 피상성에 대한 경고는 老莊思想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노장사상에서 道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될 수는 있어도 언어나 문자표현으로 전달이 불가능하고, 체득할 수는 있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도계의 품위는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 그것은 오직 그것을 나의 것, 혹은 그의 것으로 체득함으로써만 존재가 확인된다. 그래서 노장사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道德經>은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道는 실재하는 도가 아니다” [각주 11: 道可道非常道(道德經/1章)]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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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말로서 시작한다. 그 정신은 <莊者>에서 다시 이렇게 그대로 이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책이 존재한다. (그런데) 책은 말에 지나지 않으며 말에는 소중한 것이 있다. 말이 소중한 것은 뜻 때문이다. 뜻에는 추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뜻이 추구하는 것은 말로는 전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책을 전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소중히 여긴다고 하더라도 나(장자)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뜻이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진짜 귀한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아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말과 소리이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형체 · 색깔 · 말 · 소리로 ‘道’의 참모습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런 것들로는 도의 참모습을 터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뜻을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각주 12: 世之所貴道者, 書也. 書不過言, 語有貴也. 語之所貴者, 意也. 意有所隨. 意之所隨者, 不可以言傳也, 而世因貴言傳書. 世雖貴之, 我猶不足貴也. 爲其貴非其貴也. 故視而可見者, 形與色也. 聽而可聞者, 名與聲也. 悲夫! 世人以形色名聲爲足以得彼之情! 夫形色名聲, 果不足以得彼之情. 則 ’知者不言, 言者不知’ 而世豈識之哉! (莊者/天道)]
佛家에서는 말없음으로써 말없는 데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禪’과, 말로써 말없는 데 이르는 ‘敎’를 구분한다. 그렇지만 ‘敎外別傳’이라는 말에 함축되어 있듯이 道의 전파에는 항상 禪의 요소가 가미되어야 할 것이 강조되어 왔다. 不立文字를 표방하는 동양의 禪家에서는 입으로만 외워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마음으로 행해야 할 내용을 지도함에도 불가하고 제자가 말로 그 대답을 요구할 때 스승은 이른바 ‘喝(할)’로서 대하였다. 할은 전달하려는 내용을 담은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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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역설적으로 벽력같은 고함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제자가 계발의 한계를 뛰어넘거나 앞으로 나아가게끔 그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 놓는 교육적 기능을 할 것으로 보았다. 말은 체험을 대신하지 못한다. 체험내용을 말로 전달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다. 그렇다면 체험을 형성하도록 돕는 것, 다시 말하면 상대의 내면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교육이 언어적 실천 이상의 것임은 서양의 교육사상에도 널리 강조되어 왔다. 비록 서양의 철학이 대부분 언술과 지성화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철학적 실천이 교육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은 여러 학자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경험이 없이 언어가 그 경험을 대표하리라는 가정은 매우 태만한 발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화된 지식을 단지 수동적으로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을 곧 이해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의 실행이 교육의 이름으로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의 교육사상가들은 이런 무반성적인 폐단을 ‘言語主義(verbalism)’라는 이름으로 경계하였다. 이에 주목하여 그것을 최초로 비판한 사람은 에라스무스(D. Erasmus: 1469~1536)였다. 그는 어린이들이 새로운 관념을 획득하는 것은 단순한 기계적 암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물과 그림이나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언어의 습득은 문법규칙의 기억과 전혀 다른 것임을 밝혔다. 이어서 코메니우스(J. Comenius: 1592~1670)도 그의 <세계도회>의 서문에서 “어린이들이 알지 못하고 사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사물을 알면서 그 이름을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루소(J.J. Rousseau: 1712~1778)도 언어주의에 강력하게 반발한 사람의 하나이다. 그는 좋은 것을 너무 빨리 말로 배우려는 당대의 세태를 <에밀(/1983)>에서 이렇게 풍자한다.
내게 가장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그린다면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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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현학도를 소재로 택할 것이다. 인간의 至高의 意識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 없는 신비를 어린이에게 가르쳐서 어쩌자는 건가? 어떤 말을 되풀이해서 이해가 가능하다면 왜 앵무새를 어린이와 함께 천국에 살지 않게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p.117).
루소는 언어만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교육적으로 가장 나태하고 무모한 방법으로 보면서 “말로만 하는 교육은 결국 말 많은 인간을 만들어 낼 뿐이다(p.85).”라고 경고한다. 그는 대신 사물의 인식은 언어가 없이도 가능하며 사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각주 13: 루소의 경우 자연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이런 교육관은 오늘날의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다소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교육이 우리의 체험범위를 벗어나는 실재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교육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발언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교육과 언어적 소통을 구분하는 이런 취지는 그 후 이름난 교육론자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오고 있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페스탈로치(J. Pestalozzi: 1746~1827)는 언어와 사물의 통일을 기하려고 노력했다. 언어생활은 인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교육은 언어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체험을 통해서 그 언어생활의 근거를 마련하는 과정이다. 이런 교육의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은 프뢰벨(F. Frobel: 1782~1852), 몬테소리(M. Montessory: 1870-1952), 듀이, 피아제 등에 의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철학자들이 가정하는 바와는 달리 우선 지식이 단순히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복잡한 실체임을 알고, 우리가 아는 것을 단순히 말로 하면 그것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전통은 다행히도 지식은 결국 인식주체의 구성활동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음을 표방하는 최근의 구성주의 운동에까지 연결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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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이렇게 인식된 교육의 특징이 오늘날 서양의 인식론이 봉착한 문제를 교육적 실천에 호소하여 해결할 수 있는 활로를 활짝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식에 대한 종전의 개념을 개선하였다. 지식은 흔히 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명제의 형식으로 언표될 수 있는 것 이상의 암묵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지식이 구조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지식은 경험주의자들이 가정하듯이 자극과 반응의 누적이나 습관체제가 아니라 상호 간에 구조적인 관련을 갖는 내면화된 행위의 체제이다. 이렇게 지식을 새롭게 정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날 정보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돌고 있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대한 방비가 필요함을 알 수 있게 된다. 정보의 바다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각종 정보에 접할 기회가 기술적으로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정보가 곧바로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낱낱의 정보는 그것들을 어떤 주제나 목적에 맞게 범주화하고 조직하지 않는 한 그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우려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수많은 정보를 선별하고 평가하면서 어떤 주제나 대상에 대한 인식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그것들은 인격적 지식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런 새로운 지식관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수용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인식대상의 의미를 구성할 때 그 대상의 개별적인 요소들을 독립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실체나 경험들의 완전한 의미는 그것을 부분으로 삼고 있는 구조 안으로 통합되어야만 인식할 수 있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아이디어, 신념, 그리고 정보를 양적으로 쌓아 올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들을 모종의 구조화된 형태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지식의 형성에 있어서는 컴퓨터가 그러하듯이 기억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기억내용을 어떻게 조직하느냐 하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하자면 지식의 형성은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정보의 수용이나 재현이 문제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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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경험을 동화하고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요소들을 찾고 그들을 하나의 체계로 구성하는 별도의 작업을 요구한다.
지식의 향상은 지식의 변화를 함축한다. 그렇다면 지식의 변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인지구조가 다른 인지구조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지식의 발전은 누적(accumulation)이 아니라 변형(transformation), 즉 이전의 인지구조가 와해되고 새로운 인지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 경우 전체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전의 요소는 이후의 요소로 편입될 때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는 마치 형태심리학자들이 검토한 바 있는 갑작스러운 통찰과 같은 것이다. 그 발생적 관계는 이전의 단계가 이후의 단계에 대해서 모종의 조건을 제공한다. 이 때 하위단계는 자신을 구성했던 요소들이 새로운 구조에 흡수되어 통합됨에 따라 해체된다. 그러나 이 경우 그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좀더 높은 수준의 포괄적인 단계에 흡수되어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것으로 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미를 주는 요소들과 그들의 조합형태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런 형태변화를 어떻게 유도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교육적 인식론에서 지식의 증득과 관련하여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흔히 말하는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분히 경험주의의 인식론에서 발단한 개념으로서 일단의 외재하는 지식이 한 개인의 머리 속에 들어간다는 식의 인상을 준다. 그렇게 넣어 주는 것이 교육이라는 생각조차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은 실제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이론적인 가상에 불과하다. 우선 외부에 어떤 객관적인 지식체계도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런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체험이며 그 체험은 내부로부터 형성된다. 그런 체험의 형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오늘날에는 ‘체득(interiorization)’ 혹은 ‘점유화(appropriation)’라는 특수한 개념이 도입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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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결국 인식주체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의 밖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환경은 불변의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의 체험구조의 상태나 변화에 의해서 그 의미와 존재양태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전체 세계를 자신의 체험구조에 의해서 만들어 내고, 그 세계는 다시 그들 자신을 변화시킨다. 예컨대, 우리가 무능할 때에는 장애물로 보였던 것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이후에는 더 이상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식주체가 변화되면 그에 따라 환경도 전에 예상하거나 예감하지 못했던 방식의 심오한 해석을 허용한다. 이 점에서 지식은 인식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속성, 구조 또는 사건이 아니고 또한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식자의 체계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축적된 경험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식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주관 혹은 객관의 어느 하나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그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상호작용이란 한편은 능동적인 것, 다른 편은 수동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지식의 형성과 발전을 인식주체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리 밖의 환경은 항상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포함한다. 환경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며 이전의 상호작용의 방식으로는 평형을 유지할 수 없는 난관과 문제사태에 봉착한다. 여기에 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보장된다. 여기서 강조하는 체험은 경험주의적 인식론자나 자연적 교육론자들이 가끔 강조하는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와의 상호작용과 접촉, 그에 따른 인지상의 불균형의 경험, 그리고 불균형을 수용하는 데 필요한 내부적인 적응의 과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인식주체와 환경은 끊임없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정상적인 경험은 그 양쪽 조건 간의 교섭이다. 그 상호작용을 합하여, 그들은 하나의 상황을 형성한다. 한 개인이 이미 그 환경과 원만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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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때 거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 문제상황이다. 모든 문제상황은 항상 새로움과 도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과거의 것으로 대처할 수는 없다. 새로운 인지요소의 추가, 즉 이전의 체계로 동화할 수 없는 요소와의 만남은 전체의 안정과 균형을 교란하고 그것과 관련된 전체의 수정을 요구한다. 지식의 발전은 이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제까지의 경험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얻어진 새로운 균형화가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될 수 있다면 그만큼 그것은 더 안정된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 분야에서의 선진과 후진을 새로운 경험에 대한 적응의 수준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 개인이 문제상황에 봉착하여 그것을 해결했을 때에 그것은 더 이상 문제상황이 될 수 없다. 개인 간의 품위의 차이란 바로 그런 문제상황에 대한 체험적 구조를 개선한 역사를 반영한다. 서로에게 특수한 환경으로서 선진과 후진의 만남은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서로 다른 체험구조들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대처해 나간다. 이들은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정보를 접해서도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뿐만 아니라 선진과 후진은 문제와 해결에 대한 규정 자체가 다르다. 대개 선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후진에게는 문제가 된다. 또한 선진이 해결한 것을 후진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이 때문에 선진과 후진은 서로가 현재의 상태로 동화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진 특수한 환경을 구성하고 있다.
우리가 스승과 제자 간의 교육적 상호작용이라고 할 때 그 상황은 선진과 후진의 이러한 교섭양상이다. 문제를 이렇게 규정한다면 그 교섭의 양상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선진과 후진 사이에는 서로 다른 체험의 역사가 있고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의 차이는 일시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못된다. 그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선진이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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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 체험의 역사를 후진 쪽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진으로서 스승은 후진인 제자의 어떤 내면상태가 문제를 일으키는지 주시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거나 촉진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또한 제자인 후진은 선진이 그에게 말한 것을 단순히 내면화할 것이 아니라 선진의 체험의 역사를 재창조하여 그것을 체득 혹은 점유화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일단의 활동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특수한 교육의 조건은 일찍이 관념론의 선험적 가정을 부정하고 교육적 실천을 도입하여 그것을 검증하려는 듀이에 의해서 주시되었다. 듀이(1916)는 우선 교육을 경험의 계속적인 재조직과 재구성의 과정으로 보았다. 이 때 재구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지식의 성질을 암묵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지식이 구조라는 점을 충분히 검토하였다. 어떤 하나의 정보내용의 의미는 그것 자체로서 얻어질 수 없으며, 다른 정보내용과의 관계에서만 나온다. 어떤 대상에 대한 경험은 그 대상이 갖는 전체적인 형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통합되어야 한다. 지식의 성장은 선진이 그의 수준에서 말하는, 소화할 수 없는 정보를 단순히 누적시킴으로써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한 단계의 정보가 다음 단계에서 다른 의미로 전환될 수 있을 정도로 형태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새롭고 이질적인 정보를 구조적으로 새롭게 수용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의 전반적인 재조정이 필요하며, 그 경우에 한해서 우리는 새롭게 지식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일찍이 듀이가 교육을 ‘경험의 재구성’으로 규정했던 것은 놀라운 통찰을 반영한 것으로 재평가될 수 있다. 이처럼 그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선진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이 단지 교과서의 읽기나 듣기로 대치될 수 있는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 학교의 실천을 문제시할 수 있었다. 지식은 인식대상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과 반성적 활동을 통해서 획득된다. 적극적인 활동보다 언어적 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받은 사람은 사회적 효과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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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의미의 지식을 증득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듀이(1933)는 교육에서 언어적 방법이 오용될 가능성에 대해서 특별히 우려하였다. 그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우선 상징은 의미가 실제로 유관한 어떤 사태의 경험을 그가 가졌을 때에만 의미를 대표한다. 단어는 그 의미가 우리 자신과 사물의 직접적인 접촉 안에 먼저 포함되어 있을 때에만 하나의 의미를 분리하고 보존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을 전혀 다룸이 없이 단어 하나만을 통해서 하나의 의미를 제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그 단어에서 지적인 의미화를 탈취하는 것이다(p.236).
그렇다면 단순한 언어적 소통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듀이의 해답은 ‘활동에 의한 학습(learning by doing)’이었다. 그가 활동을 주창하였을 때 그것은 근육운동을 의미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보지 않고 그것을 배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읽지 않고 읽기를 배울 수 없고,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기를 배울 수 없다. 듀이가 활동을 강조하게 된 취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듀이(1933)는 (1) 문제의 지각, (2) 문제의 정의, (3) 문제해결을 위한 가설설정, (4) 문제와 해결방식에 대한 논리적 추론, (5) 행위를 통해서 발전된 가설의 검증이라는 유명한 5단계의 문제해결 과정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런 해결방식은 인식자와 환경의 조우에 의해 새로운 체험을 형성한다는 우리의 인식론적인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듀이(1963)의 문제해결과정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가 제안한지 약 30년이 경과한 후에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문제들은 사고의 자극제이다. 그러나 어떤 주어진 경험이 이전과는 친숙하지 않은 분야 속으로 빠져 나오지 않는 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현재의 경험 안에서 발견되는 조건들이 문제의 원천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경험에 토대를 둔 교육과 전통적인 교육을 구별하는 하나의 특징이다. 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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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문제는 밖으로부터 설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지력의 행사에 의해서 극복될 현재의 곤란에 의존한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교육자는 두 가지를 똑같이 주시할 책임이 있다. 첫째, 문제는 현재에 진행되는 경험의 조건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의 능력범위 안에 있다. 둘째 문제는 학습자가 정보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동기를 부여해준다. 그로써 얻은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아이디어는 새로운 문제가 제시되는 한 단계 위의 경험을 위한 토대가 된다. 그 과정은 하나의 연속적인 나선형적 진행이다(p.79).
위의 주장에서 주목할 점은 듀이가 말하는 문제는 외부로부터 객관적인 형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학습자의 관점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전통적인 교육의 병폐는 문제를 밖에서 설정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주체를 떠난 객관적인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선진과 후진이 당면한 문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후진에게 문제인 것이 선진에게는 사실상 문제상황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현 상태에서 각자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선진의 문제를 후진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후진에게 해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강요와 다름없다. 따라서 듀이는 학교의 교사들이 학생이 처한 현재의 능력과 상황에 비추어 문제를 알맞게 규정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듀이에게 있어서 교육은 문제의 제거가 아니라 문제의 수준을 점차 격상시키는 데 있었다. 선진의 입장에서 후진은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응당 문제로 느껴야 할 것을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후진에게 문제를 유발시키고 그것을 점차적으로 풀어나가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 중요하다. 후진의 입장에서 규정된 문제가 옳은 것이라면, 후진은 스스로 그것을 풀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대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 해결 또한 완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제와 해결의 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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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위의 인용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나선형적 진행은 이처럼 교육을 통해서 문제와 해결의 수준이 점차 고급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학습자는 좀더 넓은 세계와의 부단한 접촉을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어냄으로써 좀더 발전된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놀랍게도 이런 듀이의 해법은 그와 아무 연관성이 없이 발전한 근래의 구성주의 운동에서도 발견된다. 구성주의는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유기체가 그 자체로서 구조임을 천명한다. 태아의 팔, 손가락, 머리, 허파, 눈은 처음에 하나의 구조화된 전체로부터 분화되면서 발달한다. 잘 구조화된 손, 다리, 허파, 눈은 그것을 서로 분리시켜 만들어서 하나로 조립할 수는 없다. 개인의 부분은 분화, 조정, 그리고 구성의 과정을 통해서 발달한다. 인간의 마음 역시 신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을 조직함으로써 세계를 조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관점은 접수되는 정보를 하나씩 쌓아올린다는 식의 고전적 행동주의와 대조되는 관점으로서 주로 피아제를 필두로 점차 하나의 학설로 등장하였다.
피아제는 지적인 발달을 환경과 우리 유기체 내부의 체험구조의 균형이 확장되어 나가는 적응과정으로 본다. 우리의 마음은 외부의 새로운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성되어 있는 구조로 받아들인다. 즉 새로운 자료를 이미 알려진 것의 한 사례로 취급한다. 이것을 피아제는 ‘동화(assimilation)’라고 한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우리는 쉽게 동화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한다. 이는 기존의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 경우 외부의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새로운 인지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를 피아제는 ’조절(accommodation)’이라고 한다. 피아제에 있어서 지적인 발달은 그런 동화와 조절의 과정이 상승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피아제(1947)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정신적 활동이 유기체와 환경의 직접적인 상호침투에 추가하여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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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주체와 인식대상이 간접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시작되며, 그것이 결국 시공의 거리를 끝없이 확장시키고 끝없이 복잡한 행로로 진행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지각과 습관에서 시작하여 상징적인 행동, 기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추리 및 형식적 사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신적 활동의 발달은 이처럼 상호작용의 거리를 점차 증가시키는 하나의 기능이며, 따라서 행위 자체에서 점차로 분리된 실재의 동화와 전자에서 후자에로의 조절 간의 평형화를 증진시키는 기능이다(pp.8-9).
피아제가 말하는 평형화(equilibration)는 우리 내부의 자연적인 과정으로서 우리가 말하는 교육보다는 더욱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의 평형화이론은 인지구조가 기존의 형태로 해소할 수 없는 모순들을 해소함으로써 좀더 수준 높고 포괄적이고 안정적인 형태를 산출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관점에서 종전의 인식론을 비판하면서 피아제는 자신의 것을 <발생적 인식론(/1971c)>이라고 명명하였다. 발생적 인식론은 지능을 생물학적인 적응의 기제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그런 과정은 모든 생물체의 보편적인 자연현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피아제의 인식론이 이전의 것과 다른 점은 지식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을 내면화시킴으로써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구성함으로써 획득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 구성은 태어나면서 시작해서 성인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과정이다. 이 점은 우리의 논의의 맥락과 일치한다. 교육은 어느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제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의 ‘발생적 인식론’을 우리가 제안하고자 하는 ‘교육적 인식론’의 명칭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 정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페트리(H. Petrie, 1981)는 지식의 습득에 있어서 피아제가 가정한 기제에 주목하고 그것에 ‘교육적 인식론’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러나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과 우리의 교육적 인식론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하나는 실천성이다. 지식의 구조는 비단 피아제가 가정했듯이 자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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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뿐만 아니라 의도적인 실천에 의해서 추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적응의 개념과 교육의 차이이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의 자율적인 체계로서 교육은 적응을 포함하는 여타의 모든 것들과 분명한 경계를 갖는다.
유기체로서 모든 인간이 지적으로 적응하는 기제와 선진과 후진이 화해적인 연결점을 모색하는 교육의 과정에는 차이가 있다. 교육은 전자의 과정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좀더 인위적으로 만족시켜 촉진하는 독특한 활동과 대인관계를 포함한다. 피아제가 말하는 조절의 경우 대부분 타인, 특히 선진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마련된다. 선진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자기의 인지체계와 맞지 않는 높은 수준과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그로써 낮은 수준의 것을 재구성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조절과정에 의해 잘 수용됨으로써 우리는 좀더 만족스러운 균형화로 복귀하는 것이다. 후자의 국면이 학문의 발전을 설명하는 데 더 직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신적 구조로서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개념들은 각자에 의해서 개별적으로 구성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이제 전달이라는 말이 무의미하게 된다. 스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구성적 과정과 작업을 교도하고 촉구하여 제자와 공감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체험구조를 산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마투라나와 바렐라(1987)의 용어를 빌리면 ‘구조접속(struckturelle Kopplung)’에 해당한다. 교육에서 중요한 과제는 선진과 후진이 구조적인 접속을 통해 그들의 특정 대상에 대한 지식이 차례차례로 조율되어 하나의 공감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마투라나(H. Maturana, 1987/1995)의 말을 들어보자.
구조적으로 유연한 두 개의 복합된 단위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그에 따라 그들의 구조적 변화와 그때그때의 경로에 대한 선별자의 역할을 한다면, 쌍방 사이에 구조적인 접속이 나타난다. 이는 한 체계의 상태변화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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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 체계의 상태변화를 야기하고, 그런 식으로 서로 간에 조용한 체계들 사이에 협동된 행동의 영역이 구성되게 한다. 만약 이 과정이 개체발생을 하는 두 생명체계 사이에 나타나면, 인간들 사이에 구축된 공감영역과 구분될 수 없는 조율된 행동의 영역이 형성된다. 그래서 나는 유기체들 사이에서 개체발생적인, 재귀적인 구조적 접속의 결과로서 생기는 조율된 행동의 영역을 공감영역(Kansensuelle Bereiche) 또는 일치영역으로 명명할 것이다(p.111).
교육에서 설명되어야 할 부분은 바로 위에서 말하는 공감영역의 조율이 어떤 경로와 활동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느냐이다. 교육의 이러한 비언어적 교류는 주로 도제적 활동(apprenticeship)이라는 주제로 널리 다루어져 왔다. 체험의 구조접속은 양자 간의 도제적 관계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은 폴라니, 오우크쇼트, 쇤 등 근대의 기술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하는 학자들에 의해서 줄기차게 주창되어 왔다. 이들은 지식 가운데에는 언어로 기술하기 어려운 국면이 있고, 장기간의 도제관계에 의해서 그것을 익혀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흔히 도제관계라고 하면 저급의 지식수준을 가진 대상에게만 해당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말하자면 한때 언어를 보강하는 방식으로 시청각 교육을 강조했듯이 도제적 관계는 당사자들의 언어적 표현과 전달의 미숙성을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도제성은 최첨단의 과학의 영역에서도 불가피함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 전단에 서 있는 사람이 폴라니(1958)이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명시적 지식에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형식적 기준의 수단에 의해서 평가될 수 없다. 예컨대, 대가들의 몸 안에 있는 지식의 세부적인 사항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대가로부터 배우는 도제는 그 대가가 보이는 모범과 대상을 취급하는 방식을 신뢰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모범을 보이고 있는 대가를 관찰하고, 또 그가 애써 행하고 있는 것을 따라 함으로써, 도제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대가 자신도 명시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까지를 포함하여 기예의 규칙들을 습득하게 된다(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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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니(1964)는 특히 과학적 판단력(scientific judgement)에 관한 부분만큼은 오직 도제적 관계에서만 형성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교육의 방법은 어떤 도식적인 ‘방법론’보다도 세련되고 미묘한 것으로서, 그 결과는 형식논리로서 정당화되는 것 이상으로 경험이 풍부한 연구자의 온당한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판단은 그런 것을 체득한 사람과의 접촉에 의해서 몸에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학문적인 말의 의미와 참됨은 그 언어의 뿌리인 삶의 체험에 근거한다. 실험실이나 연구실에서 도제로서의 제자는 스승의 일을 돕는 가운데 스승의 학문적인 의도가 무엇이며, 현재 어떤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그것을 풀어나가는 데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며, 연구물이 출판되고 난 후에 어떤 반응이 나오는지를 목격하고 실감한다. 말하자면 그는 하나의 지식체계를 그것이 생산되고 발표되고 선별되는 절차와 더불어 이해할 수 있다. 영어의 ‘discipline’이라는 말은 원래 이런 도제적 연마와 수습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학문의 삶 자체에 몰입하고 그 방법적 절차에 익숙함으로써 제자는 스승의 지식을 단순히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독립적으로 그를 능가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출 수도 있게 된다.
똑같은 논지가 오우크쇼트(1962)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 특별히 정치에 있어서의 근대적인 합리주의를 비판하는 가운데 그는 서로 분리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 두 가지의 상이한 종류의 지식, 즉 이른바 ‘기법적 지식(technical knowledge)’과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을 구분한 바 있다. 이것들은 모든 종류의 지식에 다소나마 공존하는 것으로서, 그 중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지식의 의미와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난다. 기법적 지식은 규칙의 형태로 명문화된다. 자동차 운전에 관한 기법적 지식은 교통법규에 나와 있으며, 요리의 기법은 요리책에 들어 있고, 자연과학이나 역사 분야에서의 발견과 기법은 그 분야에서의 연구, 관찰, 증명의 규칙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에 비해서 실천적 지식은 규칙의 형태로 명문화되지도 않고 이론적 성찰의 대상도 되지 않으며, 오직 사용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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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을 통하여 그 존재가 드러난다. 이것은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다만 그것은 명문화된 언어를 통해서 습득된다기보다는 구체적인 활동 자체를 통해서 숙련된다. 오우크쇼트는 지식의 이런 두 가지 측면 혹은 지식관을 지적하고,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 팽배하게 된 이후로부터 인간의 활동이 주로 기법적 지식만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이러한 지식만이 존재하며, 그것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자리 잡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지식에는 분명히 실천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오직 책이나 혹은 통신강좌 등 명문화된 언어적 처방만을 중요시한다. 그것조차도 말이나 글씨로 전달하거나 혹은 전달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암기하고 암송하고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한다. 그것을 흔히 교수와 학습이라는 말로 잘못 표현한다. 그러나 기법적 지식이 결코 실천적 지식의 측면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오직 실천을 통해서 그 존재가 드러나며, 그것을 획득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실습하는 것이다. 그 실천적인 측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오우크쇼트는 실천적 지식이 오직 ‘대가에 대한 도제생활(apprenticeship to a master)’을 통해서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1962, pp.10-11).
그런 측면은 근래에 ‘기술적 합리성(technical rationality)’을 비판하고 ‘실천의 인식론(epistemology of practice)’을 천명하고 있는 쇤(1998)에 의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그는 모든 실천의 이면에는 얼마만큼의 불확실한 영역(indeterminate zone)’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로부터 제기되는 문제는 오직 도제적 실습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실습(practicum)은 하나의 업무(practice)를 배우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설계된 장치이다. 업무에 접근하는 하나의 맥락 안에서 학생들은 통상 실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행위함에 의해서 배운다. 그들은 업무를 본받고 단순화시킨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배운다. 혹은 그들은 밀접한 감독을 받으면서 실무적인 프로젝트를 맡게 된다. 그 실습은 그것이 참조하는 실무가 가진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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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주의산만, 위험성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하나의 가상세계이다(p.37).
문제해결은 어떤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과정적 절차이다. 문제해결의 방법으로서의 도제활동의 내용은 분야마다 다를 것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도제관계는 미술, 의학, 법률 등과 같은 실천영역에서 장인 혹은 전문가(선진)와 도제 혹은 초보자(후진)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작업을 진행시키면서 점진적으로 공통된 의미에 접근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양자 간의 적극적인 참여를 전제한다. 우리가 말하는 학문계 안에서의 인지체험의 재구성은 보다 특수하게 이전의 인지상태에서 새로운 인지상태에로의 변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탐구하려는 대상세계가 갖는 전체의 맥락 속에서 그것의 전체와 부분, 전반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 사이를 왕래하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런 도제의 개념이 근래에 사회적 구성주의의 시각에서 도입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흥미있는 진전으로 보인다(Collins, Brown, $ Newman, 1988; Rogoff, 1990, 1993). 예컨대, 로고프(1993)는 이렇게 주장한다.
도제식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새로운 실천가로서의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초보자를 전문가로 변신하게 하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관습적인 수단으로는 쉽게 의사소통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배우는 방식이다. 도제식 교육은 암묵적인 지식들이 오랫동안의 관찰과 경험을 통해서 획득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개념이다(pp.xi-xii).
이들이 이처럼 새삼스럽게 도제를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교육에 있어서 오랜 병폐로 지적되어 온 언어주의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로고프(1990)는 인지발달에서 부모와 유아의 도제적 관계를 강조하면서 도제교육의 성격을 다음의 몇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도제교육은 특정 영역 내의 선진과 후진의 개인적인 접촉을 전제한다. 둘째, 선진에게 익숙하지만 후진에게는 새로운 과제에 익숙하도록 함에 있어서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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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의 발달단계에 부합한 수준에서 밀접하게 상호작용한다. 셋째, 모든 활동은 이미 구체적인 맥락적 단서가 보장된 상황에서 일어난다. 여기서 맥락은 각각의 요소를 합한 것 이상의 총체적인 의미를 유발시킬 주변의 유관한 단서가 이미 보장된 공간이라는 뜻이다. 넷째, 선진과 후진은 문제해결을 중심으로 상호작용하며 그것의 결정, 계획, 평가에 있어서 실제로 공동으로 참여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언어적 소통은 단순한 담론 이상의 실천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말을 하되 그것은 경험 자체를 대신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경험을 유도하는 말이 포함된다. 또한 여기에는 다양한 정서적 · 비언어적 소통의 단서가 포함된다.
도제적인 상황에는 언어나 기술공학적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세부요소와 그때그때의 상황전개에 즉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조정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체험에 있어서 세계유관적 맥락의 중요성을 지적해 왔다. 하나의 체험이 갖는 고유한 의미는 그 체험이 포함된 상황적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 장인과 도제가 만나는 곳은 그런 맥락의 직접성이 이미 확보된 곳이다. 반대로 여기에는 직접 관련이 없는 맥락이 암묵적으로 괄호 속에 묶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인으로서의 스승과 도제로서의 제자는 그들이 공유하려는 품위의 직접적인 표현에 의한 관계보다는 그것을 형성하게 하는 특정한 절차적 과정과 맥락 속에 관계하고 있다.
도제관계는 대량생산으로 특징을 환원시킬 수 없는 수공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암묵적인 지식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현장에서의 실습, 실험, 관찰, 시범과 같은 세심한 활동이 포함된다. 스승은 명령을 내려 억지로 시키거나 혹은 입으로 백 번을 설교하기보다는 한 번 실행해 보이고 제자가 그것을 따르게 하는 편이 훨씬 유력할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 스승은 제자에게 시범을 보이고, 질문하고, 지시하며, 과제를 부가하고, 질문을 초청한다. 다른 한편으로 제자는 스승에게 질문하고, 토론하고, 읽고, 실험에 참가하고, 시범을 관찰하고, 과제를 수행한다. 이런 활동들은 스승이 단지 언어의 형식으로 지식을 전달하고 제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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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식을 전달받는다는 식의 피상적인 도식의 안이함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다.
도제적 상황에서는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과 적응이 이루어진다. 여기서는 많은 말들이 생략될 수 있다. 도제관계에서는 언어뿐만 아니라 손짓, 표정, 행동표현, 생활양식 등의 다양한 전달매체가 동원된다. 눈과 미소의 접촉에 의한 피드백이 가능하다. 또한 이미 같이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 언어만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혹은 긴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한 특수한 맥락을 형성한다. 이를 이용하여 필요한 말만을 생략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외에도 상대방의 반응, 얼굴표정과 제스처를 볼 수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언어의 측면을 저평가하고 도제적 체험을 중시한다고 해서 교육활동과 언어활동이 서로 상반된다는 인상을 주었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언어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근거가 있는 언어를 찾자는 것이다. 혹은 언어를 체험의 근거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 때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것이 앞 절에서 시사한 ‘교육어’이다.
장인의 마음속에 있는 지식 모두가 언술가능한 것은 아니고, 또 언어로써 전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내적인 체험은 도제가 관찰, 접촉, 사고, 계산, 동화와 조절 등 다양한 활동과 절차를 통해서 스스로 내부로부터 성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장인과 도제로서의 스승과 제자 간에는 항상 언어적인 교류도 있었다. 언어란 항상 영적인 유산이 전수되어 내려오는 데 필요한 최상의 중재가 되어 왔다. 이 때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언어의 기능에 관한 것이다. 흔히 언어를 이해의 수단으로 삼는다고 할 때 한 가지 잘못된 편견과 폐단이 있다. 그것은 언어의 기술적인 측면만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측면, 즉 언어활동 그 자체와 그것이 가져올 화용적 효과의 측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활동은 반응이나 반응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자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내적으로 변형하고 발전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교육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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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은 개인이 교육이라는 세계의 한정된 맥락에서 작용하는 활동이다. 교육의 과정에서 언어는 그런 교육의 활동을 촉구하는 특별한 기능을 할 수 있다.
2.3.4. 단계별 진전
우리는 체험구조로서의 지식의 해체와 재구성에는 도제적 실천이 필요함을 내내 살폈다. 만약 지식이 체계이고 구조라는 관점을 택한다면 지식의 발전은 곧 체계의 변화이다. 말하자면 지식의 요소가 추가되거나 제거되면 전체의 구조가 재조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식주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반응체계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반응을 새로운 방식으로 수행한다. 그러나 이 설명에서 빠진 또 하나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그런 해체와 재조직이 기본적으로 지식이 발전하는 하나의 단계를 가정하고 그것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망각하면 우리는 다시 전통적인 인식론이 범한 오류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 아니다.
학문을 통해서 이해하려는 연구대상을 현전 그것 자체라고 보고, 곧바로 그 곳에 이르는 것은 중심으로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하려는 이분법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철학에는 정답과 항진이라는 개념 혹은 궁극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에 의해서 상대주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고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혹은 정답을 가진 사람과 오답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척도를 택하고 항상 자신들을 전자의 부류에 넣는 논의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현전 자체에 직접 접촉할 길이 없다는 점이 이 저서에서 누차에 걸쳐 지적되었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인식활동은 언제나 그것에 접근해 나가는 정도에 그친다. 우리의 생각들은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단을 올라가듯이 조금씩 올라가 복잡한 인식에 이른다. 이 때문에 지식을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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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비진리 혹은 정답과 오답으로 양분하는 것은 오류이고, 자신이 진리와 정답의 편에 있다거나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지식의 발전은 바로 구조의 계속적인 변형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전의 지식의 연장이라기보다는 구조의 수정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수정은 결코 일회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단계의 개념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한 개체의 지식의 발전은 자기 조직을 잃지 않은 채 이렇게 혹은 저렇게 겪는 구조변화의 역사이다. 이를 우리는 지식의 종적 상대성이라는 주제로 논의하였다. 우리는 한 시점에서 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개체발생을 거치는 특정한 순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개체로서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지식에서 출발하며 점차 다음 단계를 거치면서 여러 수준의 지식을 차례로 경험한다. 이로써 구조변화의 역사도 이루어진다. 그 구조변화는 그에 앞선 상태의 영향을 받는다. 즉 한 단계에서 얻어진 내적 구조가 더 높은 다음 단계에서의 지식을 구성하는 외적 자료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단계의 발생적 연속성이 보장된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그러한 지식의 위계 속에서 서로 다른 수준에 있는 선진과 후진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층적인 지식들을 우리는 품위라는 더 일반적인 말로 규정하고, 교육을 매 단계에서 그것을 향상시키는 독특한 활동구조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교육은 적어도 수도계의 측면에서 볼 때 고정된 시작과 끝이 없다. 우리의 개념에 의하면 교육은 품위의 매 단계에서 시작하여 다음의 단계에서 종료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한 단계의 상구의 끝은 다음 단계의 상구로 열리는 새로운 시작이다. 하화는 바로 그런 상구활동을 돕는 과정이다. 이처럼 교육은 지식발달의 각 단계에서 다시 반복되기 때문에 고정된 정착지를 추구하거나 소망하는 일과는 거리가 있다. 교육의 핵심은 우리의 신념을 최종적으로 확정짓는 토대를 찾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것을 어떤 완벽한 지식의 체계를 미리 예정하고 사람들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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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에 부합시키는 과정도 아니다. 오히려 교육의 주된 관심은 그것들을 찾아가는 과정적 절차나 방법의 성실성을 교육이 요구하는 제반 내재율에 맞게 유지하는 데에 있다.
품위의 종적인 위계는 일시에 파악할 수 없고, 단지 교육을 진행시키면서 점차적으로 확인될 수 있을 뿐 어느 누구도 그것을 확정시킬 수 없다. 이 때문에 교육은 그 진전과정에서 각 능력의 수준을 하나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취급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품위의 최종적인 형태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의 내재율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다. 각 단계에서 반복되는 과정으로서 교육은 하나의 품위수준이 아니라 여러 수준의 품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교육의 소재가 되는 수도계의 품위를 그 발생적 계열을 따라 성실하게 재생해 나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때마다 올라야 할 계단이 우리 앞에 당면의 과제로 등장하고 있고 그 해법에 있어서 규칙적인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각 단계마다 그것에 합당한 표적을 공약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모든 수준의 사람들이 각각의 단계에서 그들의 리듬을 만족시키면서 발전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선진과 후진의 불일치나 주객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은 오직 품위 간의 단순한 이분법이 해소될 경우에만, 즉 품위의 대립이 상대화되고 구조변화의 역사를 반복하여 후진의 것이 선진의 것으로 향상될 수 있을 때에만 성취된다. 이런 교육의 논리에 따른다면 선진과 후진의 인식차이는 유식과 무식보다는 다소간의 상대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서로 다른 품위구조들의 만남으로 보아야 한다. 선진과 후진의 위치는 그 구조발생의 단계가 서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항상 대립과 몰이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처럼 두 개의 대립되는 인식체계 혹은 이론 간에 그 상대적 위치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 사이의 불평등한 주관성과 지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제거하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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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절대적 궁극성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절대적 지식을 기대하는 인식론자들에게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를 배태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교육의 세계는 완전무결이라는 것이 인간생활과는 거리가 있음을 애초부터 전제한다는 점에서 품위의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개선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에는 절대성이 없지만 상대적인 위계가 존재한다. 교육은 우열의 상대성을 인정하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경험의 흐름을 보장하는 활동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의미의 상대적 품위에 대한 기대가 바로 교육의 유희를 허용한다. 유희는 진지함 혹은 심각함에 대한 반대어가 아니다. 교육은 ‘진지한 유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희는 최종적인 수준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여유를 가진 활동을 말한다.
교육적 인식론에서는 어떤 형식적 예측보다는 서로의 능력을 토대로 해서 나온 사실적 기원을 존중한다.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교육적 인식론이 갖는 특별한 특징과 장점은 바로 교육 안에 내장된 이런 점진적인 원리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교육이 진행되는 발전의 계열은 논리적 계열이 아니라 발생적 계열이다. 사실상 우리가 상정하는 상이한 단계에는 형식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 우리는 그 계열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논리적 형식이나 공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을 두고 흔히 과학철학에서 ‘불가공약성’이라거나 혹은 ‘혁명’이라는 거창한 말로 단계 간에 서로 상응할 수 없는 불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주장자가 논리성이라는 범주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결과상의 형식적인 형태를 떠나 발생적 연속성과 진화과정에 주목한다면, 그리고 그 주장자 자신도 그 연속선상의 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근본적인 인식론의 난점이 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과 미래의 경험은 경험의 재구성에 의해서 사실상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경험이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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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발생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즉 경험내용으로는 불연속적이지만 형성과정으로는 연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은 그런 품위의 다수준성을 고려하고 형성과정과 시간적 순서를 존중한다. 교육은 주체가 자신의 과오 혹은 부족함을 거부하기보다는 인정하고, 또 그것을 맹목적으로 건너뛰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단계별로 통과하면서 자신의 길을 다져간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이 점을 우리는 상구의 경우 순차, 그리고 하화의 경우는 역차의 요소로 포섭한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순차:x1→x2→x3→x4
역차:x4→x3→x2→x1
교육의 한편에서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후진은 스스로 여러 단계의 상구를 통해서 자신을 완성하면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알게 된다. 위의 표에서 x1의 단계에 있는 사람이 곧바로 x4의 단계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훨씬 앞선 것에 대한 자신의 조급함에도 불구하고 x2와 x3라는 중간단계를 거치는 발생적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 교육의 다른 한편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선진은 후진이 곧바로 자신의 품위를 획득하거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소박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지식의 상대적인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는 낮은 단계에 얽매여 있는 상대에게 자신이 이미 거친 도야의 도정을 반복하도록 도울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가 가진 x4를 x1의 단계에 있는 후진들에게 입증하려면 x2와 x3라는 사다리의 계단을 그들에게 내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낮은 단계로 하강하여 상대가 각 단계를 출발점으로 자신의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 때문에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 알맞은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구자가 현재 처한 지식수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 조금은 도전적이고, 그러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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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어렵지 않다고 생각되는 과제가 항상 목표로 작용해야 한다. ‘먼 산 보다는 앞 산’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더없이 중요한 교훈이다. 먼 산은 지금으로서 알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앞산을 공략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 도달해야 할 등산가의 현실적인 목표는 지금 그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를 기준으로 그 앞산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효과적인 상구는 현존수준의 능력을 훨씬 넘은 것과 대비해서 바로 다음 단계의 수준을 겨냥할 때 이루어진다.
상구의 내재적 동기화는 이전의 성취와 지금의 요구 간의 ‘적절한 정도의 불균형(optimal level of mismatch)’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Deci & Ryan, 1985; Hunt; 1961). 이미 상구자가 처해 있는 단계는 진부하다. 다른 한편으로 아주 먼 단계의 인간은 우리의 실현가능성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목표로 삼기에는 비현실적이다. 대신 지금의 수준보다 한 단계 위의 것, 즉 次上品에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느낀다. 다음 단계의 지식만이 상구자에게 관련 있고,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상구자에게 어중간함, 해명되어야 할 수수께끼, 비일상성의 매혹, 당혹함을 주기 때문에 표적의 수준을 그에 맞게 조정할 때 그만큼 탐구에 대한 내재적 동기가 강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에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상구의 목표는 어떤 경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흥미나 호기심이 갖는 현저한 특징은 그것이 일단 해명되었을 때 곧바로 해소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 단계의 표적이 성취되고 난 다음에는 다음 단계의 것을 설정해야 하는 끊임없는 목표의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이처럼 다음 단계의 공략이 회귀적으로 반복될 수 있도록 그 수준을 순차적으로 계열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공적인 교육의 조건이 된다.
이런 상구의 조건은 하화자의 편에서 볼 때 자신의 권위와 제자의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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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사이에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미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선진으로서 하화자는 이미 후진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의 지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스승의 개입이나 처치는 제자의 현 상태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추구하는 상구자의 현존하는 상태와 무관하게 정의된 절대적인 진리의 요구는 논리적인 정당성과는 어긋나게 필연적으로 상대에게 탄압의 형태로 변질된다. 또한 상구자의 지적 발달의 단계와 동떨어진 고차원의 지식을 내면화하도록 강요하면 상구자는 그것에 흥미를 잃을 뿐만 아니라, 기껏 언어 상의 표현태나 결과를 암기하는 방식으로 그 사태를 모면하려고 할 것이다. 이 때문에 교육에서 하화자는 자신의 수준 높은 현품이 갖는 권위를 잠시 유보하고 그 활동의 방향을 상구자의 표적에 적응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하화의 목표는 상구를 촉진하는 것이지, 결코 하화자 자신의 품위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하화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보여주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구자가 그들의 수준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도록 돕는 사람이며, 그 지위를 지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전자에 대한 후자의 매력과 관련되어 있다. 상구자의 하화자에 대한 매력은 후자가 전자의 차상품으로 출현했을 때이다. 상구자들은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에 비유할 수 있다. 하화자가 그들에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제공하면 안다고 불평하고, 전혀 모르는 것을 제공하면 알 수 없다고 불평한다. 그 절충은 그들에게 ‘알쏭달쏭한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화자에게 끊임없는 변신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화자가 다만 자신과 상구자의 창조적 불균형을 유지하기 위함일 뿐 결코 상구자의 품위에 아부하거나 그를 즐겁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상 인류의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역사적 인물들은 예외 없이 이런 원칙을 충실하게 따랐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상대의 무지를 촉구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도록 유도하는 이른바 ‘산파술’을 즐겨 활용하였다. 예수는 그의 신적인 권위를 일단 보류하고 인간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 인류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편 불경에서는 흔히 인생에는 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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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고통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해탈한 석가에게는 이미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는 중생을 상대로 할 때에 그 말을 자주 그리고 거침없이 구사하는 방편을 썼다. 이것이 이른바 석가모니의 ‘對機說法’이다. 그는 제자의 根機에 따라 서로 다른 내용의 가르침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공자는 ‘隨人異敎’라 하여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제자에 따라 다른 해답을 준 사례들을 남겼다. [각주 14: 그 구체적인 사례들은 제 4장(4.1.2.와 4.1.3.)에서 제시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 절에서 인식론에서 써 왔던 진리라는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재정의하였다. 그것을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더 이상 현실성이 없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추구의 개념으로 바꾸었다. 우리가 만약 최종적인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그것에 접근하는 과정적 경험을 중시한다면, 그리고 그런 활동에서 진리를 찾는 보람을 얻는다면 학문은 유한한 역사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언제나 그리고 어느 수준에서나 보람을 줄 수 있는 세계이다. 각 단계는 그것이 아무리 낮은 수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수준보다 더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소의 진리체험을 허용한다. 문제는 그 단계를 어떻게 다음 단계에로의 진입을 위한 연속적인 경험의 일부로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교육은 자체의 논리를 적용하여 모든 사람이 그들의 수준에서 진리를 체험하도록 도울 수 있는 내부의 장치를 가지고 있다.
교육적 증득의 이러한 원리는 헤겔에서 시작되어 듀이에 이르는 일련의 교화론자들의 주장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이 전통적인 철학에서 이례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경험이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잘 반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경험은 한 단계가 종결됨으로써 다소의 안정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거나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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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것을 마치 최후의 것인 양 지나치게 집착하여, 그것이 영원하고 절대의 세계인 것으로 단정하고 싶은 유혹에 흔히 빠져 왔다. 그러나 헤겔은 그것을 역사의 운동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시간적으로 매우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것임을 시사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최종적인 것은 이전의 많은 단계를 거쳐서만 도달하는 곳이다. 그가 말하는 무한자로서 절대자는 역사 속에 있는 구체적인 유한자의 변화를 통해서 자기동일성을 보유하면서 점차 스스로를 전개해 나간다. 이 때문에 우리가 절대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아무리 저차원의 것일지라도 발전의 각 단계는 누구나 거쳐가야 할 생략할 수 없는 과정이 된다. 헤겔이 말하는 각 단계는 우리의 품위처럼 그들 나름으로 하나의 형태 혹은 총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모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단계는 이전의 단계를 토대로 비가역적인 방식으로 형성된다.
새로운 진리관을 논하면서 우리는 헤겔의 체계에서는 한 단계의 지식에 진리와 오류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살폈다. 그것을 단순히 논리의 형식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신비스러운 모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떤 신비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없다. 각 단계는 모두 진리나 오류의 어느 것을 주장할 수 있다. 한 단계의 지식을 이전의 것과 비교하면 진리처럼 보이고, 그 이후의 단계에 비교하면 허위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을 모순으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각 단계의 안쪽에 자리 잡고 고정된 상태에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가 한 단계에서 빠져 나와 다른 단계에로 진입하는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바람직한 변화의 모색’이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진리체험은 우리가 각각의 단계를 내부에서 체험하기보다는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전환하면서 진리와 오류가 교차하는 상황을 느끼는 방식이다.
이런 변증법적 원리는 키에르케고르에 의해서 전승된다. 그는 유한자로서의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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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헤겔과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발전의 각 단계는 그것이 아무리 저차원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가결한 요인으로 보았다. 이처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운동하는 활동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위치를 상대화시킴으로써 한 단계의 폐쇄된 틀 안에서 진위를 판단하는 독단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그 바꾸어진 위치에서만 한 단계와 다른 단계의 진리의 상대성을 자연스럽게 대비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그가 말하는 교화과정에서 수준에 큰 차이가 나는 선진과 후진의 직접적인 만남보다는 ‘간접전달’의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거기에는 선진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후진의 상황을 염탐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다행하게도 이런 단계적 경험의 논리는 듀이가 철학의 당면한 문제들을 지적하고, 해법을 교육에서 찾겠다고 했을 때 그의 새로운 교육의 개념 속에 확실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듀이는 우리의 경험에는 재조직, 재구성, 그리고 갱신에 의한 연속성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교육을 바로 그 경험을 반복해서 재구성하는 나선형적 과정으로 보았다. 그의 학설을 ‘진보적(progressive)’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특성에서 연유한다. 그가 말하는 성장과정으로서의 교육적 활동이 갖는 교묘하고 매력있는 통찰의 하나는 경험의 활동은 연속선상에서 스스로의 목표임과 더불어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도출된 새로운 입장을 그는 초기작품이라고 할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수단은 우리가 달성하지 않은 잠정적인 목표이다. 모든 목적은 그것이 달성되는 순간, 그 활동을 더 진행시키는 수단이 된다. 우리가 하고 있는 활동이 진행할 앞으로의 방향을 나타내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목적이라고 부르며, 현재의 방향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것을 수단이라고 부른다(p.116).
그의 이런 견해는 <사고와 방법(1933)>에서도 일관성 있게 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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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도달된 결과는 이전에 행해졌던 가치평가를 검증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결과를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달성된 결과는 차후의 실존적인 사건들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잠재적인 걸림돌인 동시에 잠재적인 디딤돌로 평가되어야 한다(p.229).
경험은 결코 하나의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항상 이전의 경험이 다음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토대가 된다. 여기에서의 결론은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목표는 결코 절대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볼 때 우리가 설정할 목표는 지금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이다. 달성된 목표는 다시 다음 단계에로의 진입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매 단계는 그 자체로서 내재적 만족과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목표와 수단의 연속적인 과정을 무시하고 단지 그 활동을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활동의 과정적 절차가 갖는 의의는 그만큼 감소될 수밖에 없으며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런데 듀이 이전의 교육관에는 단계별 진전에 대한 배려가 빠져 있다. 이 때문에 그는 그의 관점을 아동의 발달단계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교육의 목표와 과제를 부여하는 당시의 학교의 관행과 대비하였다. 학교에서는 권위주의적으로 어른들이 성장하는 아동의 절대적인 교육목표를 설정하고, 아동들의 호기심과 욕구에 무관하게 고정된 지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경험의 논리에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에 그런 실천을 도저히 교육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교육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식을 전달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런 방향으로의 지식이 점차 아동 편에서 형성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로 다른 단계 속에 있는 아동들은 그들 나름대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차례로 풀어나가는 것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런 교육의 내재율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신조어인 ‘가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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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능력과 가능한 여건을 모두 고려하여 규정되기 때문에 주체에게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일으킨다. 지금의 상태로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너무 쉽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과제는 상구자의 자발적인 탐구의욕이나 흥미를 유발시킬 수 없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의 편에서 눈에 보이는 목표는 당장 접근이 가능하며 이 때에야 비로소 어린 아동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며, 그 과정 자체에서 성장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경험의 교육적 가치는 그것이 배우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정될 때에 한해서 실현된다. 이런 논지는 듀이가 이른바 전통적인 교육과 자신의 진보적 교육을 비교할 때 충분히 논의되었다. 흔히 전통적인 학교에서는 교과내용을 문화적 전통에 두며, 교과목 자체의 가치가 곧 교육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듀이는 이런 무지막지한 그러한 흔히 학교에서 용인되는 교육관을 승인할 수 없었다.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것이 반드시 교육적으로 가치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 때문에 그는 교과의 가치와 교육적 가치를 분리시키는 비범한 통찰을 보여준다. 아무리 문화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판명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구자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의 교육적 가치는 인정받을 수 없다. 여기에 적절한 비유가 있다.
객관적인 조건을 선택하는 책임은 주어진 시간에 배우고 있는 개인의 필요와 능력을 이해하는 책임을 동반한다. 어떤 자료와 방법이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이 특수한 시간에 특수한 개인들에게, 교육의 특성이 갖는 경험을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비프스테이크를 유아들에게 먹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갖는 영양상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1학년이나 5학년에 삼각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비위에 거슬린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다. 교육적인 것 혹은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교과 그 자체가 아니다. 학습자가 달성한 성장의 단계와 무관하게 저절로 그리고 그 자체로서 내재적인 가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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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할 수 있는 교과란 있을 수 없다(Dewey, 1963, pp.45-46).
경험의 재구성을 성장으로 규정하는 듀이는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경험과 그렇지 못한 경험을 구분하고 오직 전자에 한해서 교육적 가치를 부여한다. 비프스테이크의 영양가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높다. 마찬가지로 삼각법의 가치를 부인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정 신체적 혹은 정신적 성장의 가치를 갖느냐 하는 문제는 별도의 조건을 고려함으로써 평가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에 대한 해답은 오직 그것들의 이질성을 자신의 것으로 동화해 낼 수 있는 내적 조직이나 상태와 관련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만약 제대로 동화하기에는 너무도 이질적인 체험조직을 가진 미숙한 아동들에게 오직 성인의 기준에 따라 무조건 부과할 경우 그것들은 오히려 성장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왜곡시키거나 해독을 준다. 교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모든 경험의 교육적 가치는 상구자가 현재 처한 단계를 고려하여 규정되어야 한다.
이 말은 교육에서 일반적이고 궁극적인 목적 혹은 외래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목표의 설정을 경계해야 함을 의미한다. 성인의 지식은 십중팔구 미숙한 아동들의 경험을 위해서는 직접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후자는 언제나 전자가 거친 과거의 상태에 놓여 있다. 만약 우리가 아동의 성장을 목표로 삼는다면 당연히 그 목표는 성장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정되어야만 한다. 그 성장을 촉진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활동목표를 그런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교육의 목표가 유동적인 것이어야 함을 요구한다. 성장하는 아동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전진한다. 그 진행에 따라서 교육의 목표는 그때그때 재조정되어야 한다.
교육자의 과제는 현존하는 경험의 범위 안에 있는 것을 선택하되 그것은 새로운 방식의 관찰과 판단을 자극하여 한층 더 깊은 경험의 영역을 확장할 새로운 문제를 제시할 기약과 가능성을 갖는 것이라야 한다. 그는 이미 성취된 것을 고정된 소유로 보지 않고 현존하는 관찰력과 기억의 지적인 활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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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여 새로운 요구를 창출하는 새로운 영역의 개시를 위한 중개소나 도구로 계속해서 취급해야 한다. 성장에서의 연속성은 교육자의 끊임없는 표어가 되어야 한다(Dewey, 1963, p.75).
듀이의 이와 같은 입장은 근래에 인식의 발달에 관한 구성주의의 입장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오늘날 인지이론들은 발달을 양적인 증가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혁명적’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한다. 이런 관점은 흔히 과학사가들이 지식의 발전과 관련하여 논의한 이른바 ‘불가공약성’의 문제를 개체발생적 측면에서 해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들은 한 개인에 있어서 지식이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해서 각 단계가 비록 구조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각 단계는 발생적 연속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도입한 발생의 개념이 갖는 특징은 그 성장의 단계를 차례로 따라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인과 유아의 교육적 관계에서 성인이 유아의 동기, 주의, 능력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주의 이론에서도 성인이 지적인 발달에 개입할 수 있는 범위와 관련하여 미묘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그것은 피아제의 발달이론과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이다. 발달심리학자들이 발견한 분명한 사실은 아동과 어른의 사고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아동은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고 주장한 루소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확인하고 있다. 피아제(1923)는 정교한 임상적 방법을 통해서 아동의 사고가 복잡한 구조적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들이 진화적으로 변형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아동이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발적으로 개념을 발전시켜 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강조하였다. 아동기에 새로운 정보가 외부로부터 들어올 때 두 개의 상반된 사고형태 간에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새로운 것을 동화하는 방식의 새로운 개념이 출현하면서 긴 기간의 단계를 거쳐 점차 어른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거의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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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준의 동료들 간의 인지적 갈등을 탐색하는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아동과 성인의 토론은 서로의 수준차이와 또한 권력관계의 불평등 때문에 인지의 재구조화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피아제의 이러한 관점은 정상적인 발달단계를 강조한 나머지 교육에서의 스승의 역할을 축소시킨 감이 없지 않다. 이와는 달리 비고츠키(/1985)는 발달과 교육을 분리시키고 좀더 적극적으로 발달을 외부의 조력에 의해서 촉진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좋은 교육은 발달에 앞서 나아가서 그 발달을 유도하는 교육이다; 교육의 목적은 성숙된 기능이 아니라 성숙하고 있는 기능에 두어야 한다(p.106).”고 말한다. 비고츠키의 입장이 갖는 특징은 교육을 발달의 선단에서 그것을 주도해 나가는 모종의 ‘사회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의 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의 개체발생적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였고 그것을 개인 간 심리기능, 즉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고등 정신기능은 처음에는 개인 간, 즉 사회적 수준에서 나타나며, 나중에는 개인 내, 즉 개인적 수준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비고츠키가 성인의 사고양식을 그대로 아동에게 양도할 방법이 있다고 본 것은 아니다. 우선 그것은 자발적 개념의 형성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어떤 개념이건 그것은 외부에서 입력하는 방식의 기계적인 과정으로 형성될 수 없다. 성인의 단어를 기억하여 사물과 연계시키는 것만으로는 결코 아동의 개념형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 개념형성은 인식주체의 창조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개념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제기되고 그것의 해결을 위한 복잡한 조작을 통해서 출현하고 형태를 갖춘다. 그런데 만약 피아제의 말대로 성인인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과제를 부여하지도 않고, 새로운 목표들을 제공하지도 않아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한다면, 사고가 최고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거나 혹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지체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은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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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츠키는 심리적 기능의 본질은 그것의 발달에 있으며, 그것은 현재의 수준을 부정하고 계속 더 높은 수준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발달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아동의 현실적 발달수준(actual development level)이 아니라 잠재적 발달수준(potential development level)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교수작용에 관심을 두었다. 이 곳에서 아동은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점차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가르침을 아동의 개별적인 발달수준과 관련된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은 우리가 본 절에서 논의한 교육의 조건과 겨의 일치하는 면이다. 이를 위해서 비고츠키(1978)가 도입한 개념이 이른바 ‘근접발달 영역(zone of proximal development: ZPD)’이다. 이는 “독립된 문제해결의 결과 이미 결정된 것인 현실적인 발달수준과 성인의 지도 아래 혹은 좀더 능력 있는 또래와의 협동으로 문제해결을 통해 앞으로 결정될 잠재적 발달수준과의 거리(p.86)”로 정의된다.
근접발달 영역은 발달수준의 두 가지 측면, 즉 이미 완성된 발달의 결과로 자리 잡은 현실적 발달수준과 다른 사람들(성인이나 보다 능력 있는 또래)의 적절한 도움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잠재적 발달수준의 폭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앞선 사람의 능력이 아동의 능력으로 전이될 수 있는 가장 민감하면서도 역동적인 공간이다. 교육의 성패는 곧 이 지대를 얼마나 개별적으로 예측하고 아동으로 하여금 이 영역에 계속 머물게 하느냐에 있다. 아동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 계속해서 제시하거나 그가 독자적으로 숙달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경험들을 계속 제공할 때, 발달을 구체화하고 촉진시키는 교수를 지향하는 데 실패한다. 아동들은 그들의 잠재적 발달수준에 맞게 선택된 과제를 중심으로 성인과 협동하여 과제를 수행한다. 성인은 처음에 그들이 아직 획득하지 못한 기능들을 제공하면서 그들이 일시적으로 잠재적 발달수준에 머물게 한다. 이 때 성인이 제공하는 기능들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못한 지점에서 성인의 조력이 철회되면 아동은 다시 현실적 수준으로 하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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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 발달수준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듀이의 관점에서 드러났듯이 정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영역을 상향적으로 확장하여 간다는 동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그런 진행의 의미는 최근에 비고츠키의 이론을 확장하려 적용하려는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서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것을 포착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등장된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가 ‘飛階 세우기(scaffolding)’이다(Wood, Bruner & Ross, 1976; Wood, 1980; Rogoff & Wertch, 1984; Berk & Winsler, 1995). 이 개념은 애초에 3~5세의 어린 아동들에게 성인들이 모종의 기술을 습득시키는 과정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로서, 그 용어를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우드(D. Wood, 1980)의 말을 인용해 보자.
성인과 아동은 함께 하나의 과제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인 공헌의 내용은 아동의 능력수준에 따라 달랐다. 아동이 아무리 낮은 수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모종의 과제에 유관한 활동에 꾀어들게 되면, 스승은 그의 주변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자리를 지탱할 수 있는 지지의 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다. 그 지원하는 활동은 전반적인 건축 안으로 아동의 활동을 연결시키고 아동의 행위가 그가 예상할 수 없었던 보다 일반적인 어떤 것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틀을 마련해 주는 일을 하였다. 아동이 과제의 요소들을 숙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유롭게 그가 할 수 있었던 좀더 넓은 맥락을 고려하면서 좀더 보완적인 활동을 인계받을 수 있었다. 성인은 아동들이 굳건히 자신의 힘으로 발을 딛을 수 있는 그런 부분을 해제(de-scaffold)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스승은 아동이 제 힘으로 할 수 없었던 국면에 성공하도록 도움으로써 점차 그 과제를 숙달하는 과업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pp.281-282).
비계는 원래 고층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이 올라설 수 있도록 받치는 발판으로 우드 등은 어린이들이 성인들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높은 단계에로 진입해 나가는 과정을 일종의 건물을 지어 올라가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다. 건물을 지어갈 때 임시로 가설된 계단은 항상 현재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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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에서 한 단계 위에 설정된다. 그리고 건물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서 그 계단 역시 새롭게 조절하여 가설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성인이 아동의 현재의 발달수준을 기준으로 점차 한 단계씩 높은 목표를 설정하여 단계별로 교육을 진행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비계설정의 목표는 아동들을 근접발달 영역에 잠시 머물게 함으로써 잠재적인 발달수준을 끊임없이 실제적 발달수준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성인은 아동의 관심과 흥미,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를 계속적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이 때 성인의 개입의 정도와 빈도를 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나친 개입은 아동의 역할을 무력화시킬 우려가 있으며, 단순한 관망은 그 반대로 아동을 곤란에 빠뜨림으로써 그의 관심과 흥미를 잃게 할 우려가 있다. 잠재적 발달수준을 결정하는 주체는 결국 아동이기 때문에 그 영역 안에서의 주도권을 아동이 갖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며, 아동이 독립적인 자기조절을 할 수 있을 때 성인의 개입은 중지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적 근거를 토대로 우리의 논의를 좀더 일반적인 주제로 확장해 보기로 하자. 이제까지 검토했듯이 발달의 단계에 맞는 교육은 모든 통찰력 있는 교육학적 문헌에서 늘 강조되어 왔다. 우리는 각자가 처한 발달수준에서 그에 알맞은 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공식적인 학교기관에서는 이 원칙이 거의 무시되고 있다. 학교는 학문공동체에서 공인하는 높은 수준의 지식을 곧바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을 취해 왔다. 그러나 이런 관례는 욕심이 앞선 것으로서 그 의도와는 달리 다분히 무리한 강요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일급의 학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사상적 발전은 몇 년간의 간격을 두고 단계별로 이루어졌다. 또한 어느 학문이건 수세기의 발전을 거친 것이다. 그것을 초보자인 학생들이 일시에 몇 단계를 뛰어넘어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 자체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런 학문중심의 견해는 교육의 내재율에 어긋난다. 교육에서는 여유있는 시간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 동시대에 사는 두 사람 간에도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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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해당하는 특수한 분과학문과 관련하여 원시인과 현대인의 차이만큼 품위의 면에서 시간상의 긴 거리가 있을 수 있다. 이 점을 유의하고 고려하는 것이 대개 공시적인 문제해결에 치우쳤던 이제까지의 철학적 인식론과 교육적 인식론이 대조되는 부분이다. 교육적 인식론이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인식이 성장하는 긴 시간을 내부의 논리에 정식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활동은 언제나 그것을 충실하게 하는 절차와 시간을 요구한다. 이 교육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과는 달리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 각 단계마다 일련의 교육활동을 반복하면서 특이한 교육적 체험이 부하된 나선형적 시간이다.
“시간은 진리의 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확히 그것은 교육적 인식론을 대변하고 있다. 어떤 수준의 지식을 잠정적인 목표로 삼을 때 그 출발점이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은 수십 년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는 필요한 단계만큼의 나선형적인 접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유형으로서의 지식을 변화시키는 일은 느리고, 고통스럽고, 개인적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특정한 인식대상과 관련하여 하나의 인식구조가 충분히 구성되기까지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소요될 수도 있다. 그러한 인식구조가 여러 단계를 이루고 있다면, 그것을 재구성하는 시간은 그보다는 더 길 것이다. 그런 장시간을 배제하고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시도도 겉으로는 단기적인 해결을 한 듯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時熟보다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교육적 인식론은 지식을 검증하는 시기와 단계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간주한다. 품위의 차이에 따라 어떤 지식의 검증은 수년간의 기간을 성숙의 단계로 기획한다. 서로 다른 품위의 지식은 서로 논리적인 정합성을 가질 수 없다. 그 점에서 논리적으로 비연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누차 강조했듯이 발생적으로 볼 때 이전의 것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진 산물이고 다음 단계의 것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다. 오늘날의 첨단의 학문적 개념을 그것이 발원한 기초적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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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개념을 토대로 하지 않고 초보자에게 전수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우리는 교과의 가치와 교육의 가치를 분리시킨 듀이의 입장을 높이 평가하였다. 교과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교과를 다루는 학자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를 평가하는 기준은 최근의 정상과학이다. 그러나 초보자들에게는 그것들이 교육적 경험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좀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이런 곡절을 아는 과학자는 과학교육에서 다음과 같은 과학사의 반복을 요구하는 학습계열을 소망하기도 한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학의 가르침은 표준화된 자료가 역사적인 유물이 되어버린 그런 역사의 부분들을 재창조함으로써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수단에 의해서 학생들은 모든 위대한 업적들에 수반하는 발견과 갈등의 흥분을 공유할 수 있고, 겉으로 잘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자료의 조직도 하나의 도구로서 그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든 수단에 불과한 것임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은 많은 부분이 소실된) 좋은 역사적 연구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발견의 맥락과 논쟁을 재구성하는 일은 상당부분 이제 시대에 뒤진 그리고 오류가 포함된 기술적 자료를 가르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Ravetz, 1971, pp.207-208).
위의 발언은 최첨단의 지식만을 중시하는 과학공동체의 관례에 비추어서 참으로 파격적인 타협점을 모색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우선 미래의 어떤 시점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아직 그 관점의 실현이 당장 학교에서 수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베츠는 사실상 우리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놀라운 선진적 통찰을 보이고 있다. 그는 이미 학문공동체에서 그 시효를 인정할 수 없는 과거의 자료가 교육에서 재활용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틀린 것으로 판명된 것이지만 역사의 한 단계에서 그 나름의 치열한 진리탐구의 결과였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만약 그런 단계 이전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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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에 있는 학생이 있다면 그 지식은 그에게 있어서 그 나름의 진리체험의 경험을 재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은 오늘의 기준에 비추어 진리로서의 상대적 지위는 낮다고 하지만 초보자에게 활성적으로 진리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이 부분은 ‘발견의 맥락과 논쟁을 재구성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의 수준에서 가치의 상대성을 인정하면서도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진리탐구에 대한 체험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은 교육이 최근의 지식, 혹은 최고의 선진이 가진 지식에 대한 입증을 포기하는 것인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지식은 타인에 의해서 공유되고 공감을 받지 못하는 한 그것의 존재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식은 모종의 합의가 있을 때 적어도 합의된 사람들 사이에 그 소재와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점에서 특정한 선진의 지식에 대한 교육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적 인식론은 그 품위의 차이가 바로 장기간에 걸친 체험의 보충에 의해서만 좁혀질 수 있는 틈이라는 점을 유의한다. 교육은 품위의 시차화를 꾀한다. 그들 간의 간극이 클수록 발생적 계열을 매우는 시간의 간격은 더욱 먼 것으로 산정해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품위의 수준의 차이가 날수록 그만큼 순차적인 여러 단계의 교육이 필요하다.
선진과 후진은 사물을 바라보고 경험하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치하는 시점은 그들 사이에 순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동일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때이다. 그런데 이는 이들 간에 더 이상의 교육적 상호작용이 필요하지 않은 단계인 것이다. 교육은 그런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스승과 제자는 교육이 진행되는 한 서로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교육은 그 오해의 정도를 점차 단계적으로 경감시키는 것이다. 정상적인 교육이 진행된다면 초기단계에서 선진과 후진 간에 경험했던 혼동, 신비, 불일치가 나중의 단계에서는 점차 하나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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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수렴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론은 미완성적인 형태로나마 과학철학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 과학철학에서 ‘비합리적인 방법’이 하나의 인식론적 대안으로서 분류되고 있다(Feyerabend, 1975; Kuhn, 1970). 이것은 주로 과학의 발달사를 다루어 온 과학사학자들에 의해서 제안되고 있다. 여기서 ‘비합리성’이라는 말은 철학자들이 철학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강조해 온 ‘합리성’이라는 것과 모순되기 때문에 얼른 보기에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합리성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합리성의 기준을 변혁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지식체계와 그보다 더 혁신적이고 발전적인 지식체계 간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의 합리성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상대가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합리성을 기준으로 선진과 후진의 지식을 가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비합리론자들’은 해결의 방향을 거기에 참여하는 인식주체의 변화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합리성’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합리적인 것 이상의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 말 자체가 모종의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거나 혹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히 철학적 합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이며, 우리는 바로 그 점을 여기서 문제시하고자 한다. 합리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입장은 분명 비합리적인 범주에 든다. 그러나 이런 설명도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론의 맥락에서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앞에서 검토한 교육의 내재율에 의하면 선진과 후진의 품위는 어차피 서로에게 불합리한 것이며, 교육은 후진의 합리성이 선진의 것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더욱 정교한 논리에 의해서 진행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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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심열성복
학문을 포함하는 모든 수도계적인 가치는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된다. 발전하는 이 세계는 추구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전에 쓰였던 가치기준이 날로 새로운 것으로 대치되는 것이 바로 수도계의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종 수도계는 오랫동안 누적된 경험을 통해서 문제사태의 수준을 격상시키고, 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알맞은 해답을 얻어 왔다. 그 해답이 곧 그 수준을 터득한 사람으로서 수도계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형성된 가치의 위계는 구성원의 개인적인 집착이나 변덕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그 보편성을 공증받게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세계에서 후진의 기준이 선진의 기준에 승복하고 수렴되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목적과 가치의 공유는 명령을 주고받는 행위와 다르다. 가치의 습득은 강제적인 것일 수 없다. 가치는 주체적인 선택사항이다. 어떤 것의 바람직함을 남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역설적인 것은 없다. 외적인 힘, 권위, 혹은 압력에 의해 강제된 가치는 어법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품위로서의 지식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것이며, 따라서 그렇게 그 자체가 바람직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도록 습득되어야 한다. 교육적 인식론은 인식의 우열을 판정함에 있어서 이처럼 강제, 강요, 억압, 착취, 폭정, 군림에 의한 행동의 일치를 거부하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한 주체적 결정을 중시할 때 비로소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나는 수도계적인 가치의 탐구와 관련하여 우리가 타인들을 개선하거나 혹은 그 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고 할 때 지켜야 할 조건의 하나로서 孟子의 ‘心悅誠服’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장상호, 1991). 이 말은 원래 당대의 이상적인 정치개념과 관련하여 생긴 것이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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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정치에서 마음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王道와 무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覇道를 구분하였다. 덕으로써 仁政하기를 원한 맹자는 정치계에서 지켜야 할 지배와 복종의 원칙을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에게는 진심으로 기꺼이 복종한다” [각주 15: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孟子>―公孫丑上.] 라는 말로써 정의하였다. 이 말은 오늘날 정치와 같은 세속계의 운영원칙으로는 비현실적인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의 가치승복의 경우에는 너무도 잘 부합하는 원칙으로 보인다.
권력을 가진 자의 힘과 강요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복종과 가치의 습득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전자는 삶의 질곡에서 마지못한 굴복의 의미가 있고 후자는 향유의 의미가 있다. 심열성복은 타율적인 일치나 동조와 구분된다. 타율적인 동조는 외적인 요구나 타인의 희망에 순응하거나 복종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일치와 동조는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을 바라는 마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처벌과 보상이 주어질 경우에만 외면적으로 유지된다. 반면에 심열성복은 일종의 복종이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기에 타당하고 현명한 요구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기꺼이 거기에 동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부의 보상이나 강요가 없는 경우조차도 그것은 마음 속 깊숙하게 가치있는 것으로서 보존된다.
수도계적인 가치는 세속계적인 가치와 범주적으로 차이가 있다. 학문계에서 지력이 발달된 사람은 능히 자신을 통제하기 때문에 외부의 제한에서 해방된다. 학문에서는 서로가 속이지 않으려는 혹은 속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진리를 추구한다. 따라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학자가 남의 힘이나 은폐에 의존한다는 말을 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을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또한 도덕계에서 선함을 터득한 사람은 마음이 흡족한 보람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상을 받거나 벌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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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눈치를 보면서 혹은 사회적인 인정을 바라면서 마지못해서 하는 행동은 단지 겉치레에 불과하며 선행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이처럼 수도계적 가치는 애초부터 그 자체의 것에 의해서 보존되며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보상이나 규칙에 의해서 유지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는 수도계에서 열등한 품위와 우등한 품위, 더 나아가 선진과 후진의 판별은 외부로부터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방식으로 입증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지 부과된 권위에 따르는 저급한 일치와 복종과 혼동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참된 지식의 가치는 처벌이 두려워서 복종하거나 혹은 말로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실행하는 가운데 내심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체득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신, 군주, 부모, 선배, 사회적 관습이라는 수도계 외부적 요인들은 개재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세속계적인 지위와 권력의 관계에서 열세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가진 지식이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옳다고 공감하면 그것에 의존하고 그것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수도계의 내재적 가치는 아직 충분하게 입증된 것이 아니다.
학문적 지식이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말은 다른 것과의 관련성을 따질 필요가 없이 그것이 그 자체로서 헌신할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 춤을 사랑하고 춤에 사로잡힌 사람은 건강을 위해 춤을 춘다기보다는 춤추기 위해 건강을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학문을 하고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의 용도를 떠나서 그렇게 하는 일이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만약 그 가치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느껴지거나 혹은 그 바람직성을 마음으로부터 수락할 수 없는 것으로 경험하였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학문의 내재적 가치는 아직 실현되었다고 볼 수 없다.
가치있는 것은 우선 우리 자신의 자발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적 반응과 무관하게 정의될 수 없다. 마음으로부터 참으로 애호되고 향유되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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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고귀한 것으로 간직하려는 감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가치의 검증은 그것을 외부에서 막연하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할 상태 속으로 진입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학문적 가치를 입증함에 있어서 자칫 외적 강요나 보상의 방법을 쓰는 것은 그 내재성을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내적 만족이 손상을 입고 외재적 보상에 큰 비중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유쾌한 감정상태가 항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수도계적인 가치에 부대하는 감정은 항상 우리 자신의 더 나은 가능성의 실현과 개선에 따른 결과로서 얻어지기 때문에 단지 우연적으로 무턱대고 좋아하고 향락하는 것과 확연히 구분된다. 우리가 아무 노력도 없이 주어진 상태 자체에 의존할 때 일어나는 감정은 수도계에서의 가치추구라는 조건에 맞지 않는다. 수도계적인 가치의 체험은 우리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부단한 시험의 소산이다. 수도계적 가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련에 의한 품위수준의 변화와 선택에 의해서 체험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이전의 지식이 더 나은 지식으로 대치될 때, 즉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지식이 부적절한 것임을 발견할 때 우리는 진리를 체험한다. 지금의 상태와 발견할 것 간의 차이를 가늠하는 전방대비와 지금 발견한 것과 이전의 것을 비교하는 후방대비에 따라 응분의 감정상의 변화가 동반된다. 전방대비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그리고 후방대비는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감정을 동반한다. 이처럼 지식의 발전은 인식주체에게 상승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그는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르게 인식되며 의미화하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이는 기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각각의 지식은 그 지식 안에서 합리성을 갖는다. 이제 지식이 바뀐 이상 지식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뀐다. 이는 비유컨대, 산의 높은 곳에 오를수록 그 곳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지는 이치와 같다. 우리가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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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실재를 더 확실하게 파악하려고 우리 자신의 변형을 꾀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것이 새롭게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 때 그 실재는 이전의 것과는 다른 양상이며, 이 때 우리는 ‘최고의 행복감’ [각주 16: 이 발견의 기쁨은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 287?~212)가 목욕탕에서 외쳤다고 하는 ‘유레카(Eureka)’의 감격과도 유사하다.] 에 도취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위대성을 추구하는 도야에 의한 발전에 부대되어 고급스러운 감정적 선호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가치라는 승화되고 세련된 정서인 것이다.
가치의 공공성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공감에 의해서 확인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오직 인간에 의해서 확인되고 검증되어야 한다. 일찍이 니체는 “두 사람과 더불어 진리가 시작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진리체험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체험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점에서 진리체험도 상호주관적 타당성(intersubjective validity)을 요구한다. 만약 내가 체험한 진리가 남에게도 체험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일시적인 변덕과는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점에서 너와 나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서로가 주체적으로 타인의 진리를 검증해 줄 권리와 의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목소리의 동의조차 얻을 수 없는 지식을 단지 외부적인 권고나 혹은 강요에 의해서 무감각하게 혹은 불편한 상태에서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가치문제와 관련하여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숭고하고 엄격한 공동체적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가치에 대한 검증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인 것이며, 또한 더 나아가 상호주관적인 것이다. 서양 근세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아주 명석하게 그리고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모두 참되다고 하는 일반적인 규칙을 세운다. 데카르트가 모든 인식의 최종적인 근원으로서 자신의 초월적 주관을 상정한 것은 우리가 말하는 주관적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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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검증원리와 일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주관에서 그친다면 자칫 ‘유아지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타인들의 초월적 주관과의 합일에 의한 보편성의 확보이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도 후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그 자신이 편협한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점을 스스로 경계하였다. 즉 그는 그가 참되고 확실하다고 본 것 가운데 나중에 거짓이라고 판단된 것이 많았음을 상기하면서, 자신의 진리체험이 타인을 통해서 상호주관적으로 검토될 수 있음을 <성찰>에서 이렇게 시사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이 여러 성찰에서 나로 하여금 진리의 확실하고 명증적인 인식에 도달케 했다고 여겨지는 여러 고찰을 전개하고, 나를 설득시킨 여러 근거로써 다른 사람들도 설득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려 한다(최명관 역, /1983, p.72).
위의 글에서 데카르트는 진리검증의 공공성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탐구를 하면서 그 전후에 같은 대상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그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대개 이전의 지식과 그에 따른 평가를 포기하고 탐구의 경험이 포함된 새로운 것을 택하게 된다. 이것은 인식주체의 권리이자 가치향유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체험이 인간들에게 줄 수 있는 특혜가 한정되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더 나아가 그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함으로써 특혜의 영역을 넓히고 서로가 다른 사람의 지지자로서의 연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내가 그런 감정을 느끼니까 너도 느껴야 된다는 식으로 진리체험은 전이될 수 없다. 여기에는 상대를 설득시키고 설득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진리체험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남에게 높은 지식이 있으면 내가 그것을 취하여 공유하고, 자기에게 높은 지식이 있으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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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하여금 그것을 취하게 하여 높은 지식을 갖도록 하면 된다. 이처럼 진리를 타인에게 입증하는 방법은 내가 점유하고 느꼈던 것을 그 역시 점유하고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그 경험적 통로를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삶의 풍요로운 의미를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내세우려는 새로운 의미의 교육이다. 자신의 영혼을 전달할 대상을 만나기 위한 정열적인 충동, 그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하여 느끼는 심층적인 유대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자신이 체험한 바람직한 것을 타인에게 검증받으면서 서로가 의거처가 되어 기쁨과 보람을 나누며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자발적인 공감대의 형성은 각자의 주체적 선택을 존중하는 내규를 지켜내는 범위 안에서만 성립한다. 교육에는 어떤 외적인 권위나 강제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교육의 세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적당한 조건에서 그들에게 부족한 것과 더 나은 것의 선택지가 주어진다고 할 때 그 중 후자의 것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흔히 선진은 후진의 가치판단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허무주의적 태도이며, 인간적 가치로서의 진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이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서는 어떤 가치논의도 가능하지 않다. 물론 교육에서도 그 판단기준에 수준상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후진이 선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들은 가치판단에 있어서 별도의 특권이 주어질 수 없다. 교육은 상대편에게 더 나은 가치선택의 기준을 갖도록 협력하면서 서로가 그 판단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서 지원을 받는 경로이다.
또한 교육적 인식론은 인식에 있어서 감정과 정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철학에서 합리성은 흔히 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감정적인 것을 비합리의 범주에 넣는다. 그러나 지식의 생산, 수용, 가공에 있어서 그 전략과 조절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감정은 인지적 활동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진전을 감식하는 나침반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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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을 한다. 이를테면 흥미는 그 자체의 만족만으로 가치가 있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맞는 인지적 과제의 선택에 중요한 징후가 된다. 따라서 이런 감정의 성분들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철학적 입장은 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인식활동에서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그것을 인정하는 인식론적인 입장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인식활동은 감정과 정서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다. 유기체 내부의 한 요소로서 지식은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것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감정 자체가 지식의 요소는 아니지만 그 생명성은 감정과의 동반관계에서 보장된다. 인지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감정이나 느낌은 있을 수 없다. 한 개인이 감정과 느낌의 방식으로 경험한 것은 일부 그의 인지내용에 의존한다. 다른 한편으로 감정이 인지활동을 교도하고 유지하고 그것의 유의미성을 확인하는 데 주도적인 기능을 한다. 따라서 우리 내부의 지식의 발달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는 여타의 과정과의 관계를 포함해야 할 것이다.
어떤 지식이건 간에 그것의 점유과정에는 특이한 정서적인 요소가 수반되어 있다. 모든 지적인 행위는 다소간 흥미, 쾌감, 지속적인 노력 등과 같은 유쾌한 감정을 동반한다. 인간은 원래부터 자신의 가능성을 능동적으로 실험하고 향상시키려는 기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신기하고 복잡한 것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며, 문제에 봉착하면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관심과 흥미는 지식이 충분히 제 기능을 하도록 하고, 또한 지적 성장을 위한 에너지를 제공하며 지식에 역동성과 방향성을 준다. 문제가 풀리면 그것을 해결한 사람에게 엄청난 기쁨과 환희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해답이 영구적으로 제자리를 지키는 경우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더 어렵고 높은 수준의 문제에 봉착하며, 이제 그것의 해결에 더 많은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지적 탐구에는 이처럼 유쾌한 감정의 상승적인 연속만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평형상태의 위기에서 새로운 수준의 평형상태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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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되는 것을 지식의 습득과정으로 볼 때 거기에는 양극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이제까지 존재기반으로 여겨왔던 지식들이 틀린 것으로 드러날 때 회의와 불안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새로운 것은 항상 경탄, 경이, 경악, 심지어는 공포와 결부되어 있다. 탐구의 작업에는 항상 잘못된 출발점, 오리무중의 시행착오, 열정, 희망, 좌절, 실망, 그리고 발견에 따른 흥분의 요소가 있다. 상이하고 서로 모순되는 인식체계의 조우에 따른 불안과 갈등, 현실을 초월하여 성장하려는 원망과 의지, 자기실험과 탈출에서 경험하는 곤란과 좌절, 새로운 자기의 발견에 따르는 흥분과 환희가 있다. 그 과정에는 쉬움과 어려움, 명백함과 혼동, 질서와 혼란, 조화와 갈등, 안전과 모험에 대한 두려움, 포기와 노력, 확신과 의심, 흥미와 지루함, 인내와 패배, 불신과 신뢰, 실패와 성공 등의 감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감정의 교차와 단련이라는 배경 속에서 진리에 대한 갈망과 같은 세련되고 복잡한 감정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흔히 동기를 말할 때 열거하는 기아, 갈증, 성, 고통으로부터의 회피 등과 같은 생물적인 식욕이나 남으로부터 사회적 인정을 받는 것과는 종류에 있어서 전혀 다른 범주의 것이다(Maslow, 1966, 1970). 나에게 물질적인 풍요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기아상태를 면하거나 불쾌감을 회피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높은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에 인지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수단의 의미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 동기가 만족되는 순간 그 활동은 정지될 것이다. 이 점에서 이러한 동기와 그에 따른 정조들은 학문 내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비해서 진리에 대한 애정은 그런 결핍동기와는 별개의 과정에서 발전되기 때문에 학문 내재적인 것이다. 이것은 그것을 보장하는 조건이 만족되면 될수록 학문활동을 더욱 지속하게 한다는 점에서 학문 외재적인 동기나 정조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의 보편성을 확인하는 절차로서의 교육적 인식론은 이 점에서 방법적 내재율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 내가 선진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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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 혹은 후진의 편이냐 하는 것이 판가름나야 한다. 타자가 나보다 더 옳고 내가 더 틀릴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더 옳고 타인이 더 오류가능성이 많을 수도 있다. 그 모두의 가능성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다. 그 때 선진과 후진을 결정하는 것은 어느 편에서 어느 편으로 일치하느냐 하는 방향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에서는 그 일치 자체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 엄격한 내재율을 지킨다. 타인의 협조를 통해서 가치를 검증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의 하나는 타인을 자율적인 상구자로 간주하고 그의 자율적인 판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타인은 하나의 더 견고한 경험적 실재를 구성함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 대체해 버릴 수 없는 독립된 존재로 취급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의 원칙은 학문에 대한 내재적인 동기와 정조에 호소하는 것이다. 즉 그들 내부에서 진리에 대한 애정이 우러나오고 자신의 성장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그 기준을 향상시켜 나가게 해야 한다.
이런 방법은 행동적 조건화, 사회화, 교조화, 세뇌와 선전 등 온갖 형태의 행동통제의 방식과 대조된다. 여기서는 일치되어야 할 행동항목이 미리 주어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를 그 기준에 일치시키는 측면에만 관심을 갖는다. 상대는 자율적인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그런 능력을 갖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통상 이런 가정 아래 이들은 각종의 외재적인 보상체계와 미끼를 동원하거나 혹은 힘에 의한 강요 혹은 매수에 의해서 자신들이 미리 설정한 행동에 일치하도록 유도한다. 더 큰 보상에 대한 기대, 의존심, 불안의 조성, 절대에 대한 외경 등의 감정을 동반하는 이런 방법은 일치행동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일정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체의 자율적인 반성과 책임 있는 판단이 없이 받아들이는 합의는 제도적 강요와 체계적 왜곡에 의한 기만적인 합의에 불과하다. 이런 방법은 진리체험이나 지식의 우열을 상호주관적으로 검증하려는 우리의 애초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구성주의자인 글래서스펠트(1995)는 이 점을 이렇게 적확하게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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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것에 일치하도록 강요한다면, 우리는 그 사실에 의해서 그들을 협력자로서 인정할 수 없게 된다(p.127).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상대를 독립된 협조자로서가 아니라 이미 나의 의도에 따르는 무력한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교육계에서의 스승과 제자는 품위의 차이가 있는 사람들끼리의 특이한 협력관계를 의미한다(장상호, 1996). 한마디로 교육적 관계는 품위상의 이질성과 갈등을 소재로 호혜적 관계를 유지한다. 품위의 차이는 내용상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선진과 후진은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충돌하거나 갈등할 소지가 많다. 선진과 후진은 각각 그들의 세계관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평가한다. 따라서 그들의 진리기준 역시 다르다. 그러나 교육은 바로 이런 품차를 전제로 상구와 하화라는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 낸다. 교육은 선진이 후진에 대해 강압적인 세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스승은 자율성과 협동성이 보장되는 분위기에서 제자가 좀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형성하고 시험해 보도록 돕고 이를 통해서 그들이 좀더 높은 수준의 가치기준을 갖게 한다. 이것은 단순한 복종이나 맹신과 엄격히 구별된다. 스승은 제자에게 자율성을 고양시키고 특별히 독립적으로 자아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한다. 이런 교육적인 협동성에 근거해서 우리는 가치를 상호주관적으로 매개하고 검증하는 자발적인 연대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
제자는 스승을 통해서 더 높은 품위의 실재를 자증할 수 있다. 자증은 아무리 객관적인 진리라도 그것이 주체 밖에 존재하는 한 그의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스승이 아는 것에 대해서 스승 자신도 의심한다. 만약 내가 공부를 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의심은 적어도 나에게서 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스승의 지도를 청하고 받는다. 그러나 어떤 것이 좋은 것인가 혹은 나쁜 것인가를 아는 데 있어서 스승의 권위에 전적으로 맹종하거나 그의 판단에 의존하는 것은 잘못이다. 스승의 도움은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활동을 지도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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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한된다. 자증은 각자가 주체적으로 상구에 임하고 이를 통해서 기존의 인식을 해체하고 좀더 개선된 인식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할 때, 비로소 진리가 체험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상구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품위와 상구를 통해서 새롭게 얻은 품위라는 두 개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항상 모순된 감정적인 요소가 주기적으로 일어난다. 확신을 가졌던 기존의 품위에 대한 의문과 상실감은 고통을 수반한다. 이런 상실의 고통은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가능성의 전개에 정서적으로 수반되는 긍정적인 지적 깨달음에 의해서 상쇄된다.
다른 한편으로 스승은 제자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품위가 제자의 것보다는 더 높은 것임을 타증할 수 있다. 타증은 내가 경험한 품위가 나에게는 아무리 확실한 것이라도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만 아는 것에 대해서 나는 의심한다. 타자도 알 수 있는 것이 비로소 확실한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제자가 자신이 가진 새로운 품위를 얻도록 돕고 그에게서 자율적인 동의를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스승은 억압적인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화에서는 가능한 한 외부적 압력이나 강제, 외재적 보상의 수단을 제거해야 한다. 만약에 제자가 스승의 주장을 강요에 의해서 수락한다면 혹은 스승의 권위에 의해 맹목적으로 설득된다면 그것은 결코 타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마치 허수아비에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하화는 항상 제자 편의 발견적 흥분과 그에 따른 심열성복으로 종료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제자가 이처럼 스승이 경험한 진리체험을 동일하게 공유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스승뿐만 아니라 제자에게도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이 절에서 지적해 온 심열성복이라는 교육적 증득의 조건은 앞의 절에서 다룬 여타의 조건들, 그 중에서도 체험의 재구성, 단계별 진전이라는 조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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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성이라는 조건은 언어적인 모방을 경계했다. 이런 취지는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내린 다음과 같은 짧은 말에 잘 반영되어 있다.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뜻은 깨달음이고 깨달았다는 뜻은 만족함이다(불교성전편찬회, 1985, p.463).
품위로서의 지식은 언술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 관계는 마치 떡과 그것에 대한 그림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림을 아무리 많이 수집하여 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서 배가 부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한 말을 멋모르고 따르고 외운다고 해서 지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남이 말한 결과를 그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 거쳤던 체험의 기반 없이 단순히 모방하는 것으로 진리를 체험할 수는 없다. 상구의 체험이 있어야만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적절한 감동과 찬탄, 보람, 가치향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
심열성복의 조건은 단계별 진전의 조건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 조건은 교육의 목표가 상구자의 차상품을 중심으로 유동적으로 이동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그 자체의 목적으로 추구하는 조건은 그 과제가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렵지 않은 중간 정도의 것으로 개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쉬우면 배우는 것이 없다. 또한 너무 어려우면 배울 수가 없다. 그것이 아무리 가치있는 품위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도달하는 점진적 단계를 무시한다면 그 진전은 오히려 강요나 억압의 의미를 갖는다. 흔히 후진의 흥미를 존중하는 것이 그들의 현존하는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진정 흥미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아동은 결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아리송한 것’에 흥미를 보인다. 따라서 흥미는 상구를 위한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적 인식론은 교육이 지켜야 할 내재율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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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그 가운데 핵심을 차지하는 심열성복의 조건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논의하였다. 그렇다면 이 조건은 별다른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런 개념이 우리가 앞에서 교육적 인식론의 전조로 소개한 교화의 철학에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이 분야에서 이 조건을 따로 떼내어 우리처럼 자세하게 다룬 논의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논의에서 심열성복의 조건은 항상 하나의 전제사항으로 거의 예외 없이 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모든 것을 자세하게 검토할 여유는 없지만 대충이나마 변증법적 전통, 해석학적 전통, 프래그머티즘의 전통,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과학철학의 전통에서 나타난 측면을 간략하게 점검해 보기로 한다.
먼저 변증법의 전통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이 철학의 주지주의를 벗어나서 인식에 있어서 감정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철학의 주제가 되면서 인식에서 감정 혹은 우리의 삶에 포함되어 있는 비이성적 측면이 제외되었다. 인식론은 대개 합리성을 강조하며 정서, 의지, 낭만주의 등을 비합리성의 범주에 넣고 극복될 대상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헤겔이나 키에르케고르의 단계에서는 그 한계가 극복된다. 헤겔(1808/1988)은 이성과 열정을 구분한 근대철학에 도전한다. 그에 따르면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적인 것이다. 이처럼 헤겔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인식과 감정의 관계를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유한자로서 우리가 자신의 단계에 적합한 내재적 목표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진리는 반드시 그것을 추구하는 열정과 관계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를 ‘박커스 祝祭에서의 도취경(p.106)’에 비유한 바 있다.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인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의 실존의 변증법에서 진리탐구의 길과 주체의 정열 간에 더욱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참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을 승화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모순의 체험은 불가피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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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 속에서 주체적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무한에 대한 열정이 이성보다 선행해야 한다. 진리를 찾는 일은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고독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에르케고르(1859/1980)는 “우리는 모두가, 그대나 나나 이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p.136)”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고독 속에서 각각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처신해야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이 부분만이 인간인 우리가 서로의 유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석학에서는 권위와 전통이 진리탐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목하 지금의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가다머는 우리가 과거의 전통을 죽어버린 것으로 기형화시키지 않으려면 그 전통에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우리가 전통에서 배우려면 그것의 권위를 일단 믿어보자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권위라는 것이 맹목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가다머(1960/1982)의 말을 빌리면 “권위의 인정은 언제나 권위를 말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자의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참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교사, 윗사람, 전문가에 의해 주장되는 권위의 본질이다(p.249).” 강요하는 권위는 이미 그 본질에서 이탈한 것이다.
우리가 누구에게서 배운다고 할 때 그 전제는 그의 판단이나 통찰력이 자기 자신의 것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인은 우리보다 더 나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그 경우 그 선입견에 권위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식의 태도는 우리가 상구를 통해서 이해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불가결한 태도이다. 이것은 모든 전통에는 배울만한 것이 있다는 단정과는 달리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강요적인 거짓합의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을 중시한 하버마스(1977)는 가다머의 해석학에 내포된 위험성을 지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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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방책을 더욱 강화한다. 가치의 공증에는 어떤 특권적 권위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한 사람의 주장이 타인의 동의를 얻어내는 ‘합의적 타당화(consensual validation)’가 합리적인 담론의 형식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에 큰 기대를 한다. 그 조건에는 강제와 자기기만에서 자유로울 것, 담론에 참여하는 기회가 동등할 것 등등의 조건들이 포함된다. 하버마스와 우리의 인식론은 몇 가지 점에서 다소의 차이 [각주 17: 그 차이는 다음(4.4.2.)에 더 논의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언어적 소통에 의한 일치가능성의 문제, 그리고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등성 등이 우리의 교육적 인식론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가 있다고 하더라도 심열성복에 관한 한 서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심열성복의 측면은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가? 우리는 듀이의 교육관을 논의하는 가운데 그가 감정의 요소를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지적했다. 그는 주체가 새로운 난관에 부딪힌 실존적 상황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과정에 개재하는 감정적 요소를 잘 드러내 준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아직 미숙한 어린이들을 사회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적 통제로서 교육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사실 그의 초기 입장이 잘 표명된 <민주주의와 교육<1916)>에서 드러내려는 주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관한 그의 말을 들어보자.
통제의 기본은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상황의 성격에 깃들어 있다. 사회적 상황에서 어린이들은 자신의 행위방식을 타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보고 그것에 맞추어 나가야만 한다. 이런 과정이 그 행위를 공동의 결과로 지향하도록 하여 참여자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이해를 마련한다. 비록 다른 행위를 수행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의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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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이런 공통된 이해가 사회적 통제의 요체이다. 이것은 직접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정서적이며, 지적인 것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외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개인의 성향에 내재하는 것이다. 관심과 이해의 공감대를 통한 이와 같은 내적 통제를 이룩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사업이다(pp.47-48).
이 말의 의미는 수단과 목표의 교차를 성장의 과정으로 보는 듀이의 특이한 관점을 상기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성장은 각 개체에게 알맞은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이 실현되면 그것을 다시 수단으로 삼아 더 높은 수준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성장에 대한 신념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미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들 간에 강제가 아닌 사회적인 통제를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교육은 바로 그런 일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 자체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그는 애써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교육 자체의 논리 속에 포함될 개념은 아니다. 발전하는 수도계적인 가치를 확인함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정치적 과정은 하나의 요건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인류의 수도계적인 가치를 향유할 자격은 있지만 선진과 후진 사이에는 엄연한 개인차이가 있다. 후진이 선진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도야가 요청된다. 그것은 발전을 체험시키고 상대의 자발적인 판단을 유도해 내는 설득적 활동의 소산이다. 다만 그 설득적 활동 자체가 강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일련의 노력은 그 자체의 내재적 자율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런 정도의 정교화된 논의는 신실용주의를 주창하는 로티에게서 비로소 더욱 뚜렷해진다. 로티는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 사적인 영역과 다른 인간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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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공적 영역을 구분하고, 애초부터 그들을 결합시킬 어떤 방도도 없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가 보기에 한편으로 자신을 재정의하고 재창조하려는 아이러니스트와, 다른 한편으로 잔인성을 가장 나쁜 행위라고 믿는 정치적 자유주의 간에는 개념적 필연성이 없다. 그렇다면 그가 부르짖는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가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가?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의 아이러니스트 이론이 어떻게 정치적 자유주의의 위협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로티가 모종의 조화(통합이 아닌)를 모색한 것이 ‘연대성(solidarity)’이라는 개념이다.
로티는 그의 <우연성, 아이러니, 그리고 연대성(1989)>에서 인식에 있어서 강제되지 않은 합의를 시종 강조하였다. 전통적인 정초주의자들은 공동체적인 연대성의 문제를 사람들이 어떤 동일한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한다. 이들은 사람들이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연대성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객관주의가 취해 왔던 입장이다. 그러나 로티는 그런 ‘보편 타당성’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의심한다. 그에 의하면, 단순히 인간이 된다는 것에 의해 공통의 유대를 갖게 되지는 않는다. 인간성이 우연의 산물임을 주장하는 그는 사람들이 우선 다른 입장과 관점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전제 아래 대화를 통해서 서로 간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과거에 타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도 우리 중의 일부라는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제시하는 관점은 도덕적 진보라는 것이 있으며, 이 진보는 그야말로 더 큰 인간의 연대성을 향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대성은 모든 인간에게서 핵심적인 자아, 인간적인 본질 같은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과 굴욕에 관한 유사성을 비교해 볼 때 전통적인 (종족, 종교, 인종, 관습 등의) 차이를 점점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영역에 포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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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수 있는 능력이다(p.129).
로티가 진일보한 점은 인간성에 보편성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인간들 서로 간의 유대를 말하는 것은 인간성의 차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인간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종족과 같은 범주와는 다른 인간적인 성숙과 관계가 있다. 이들과의 인간적인 유대는 서로 더 나은 우리들 자신을 개발하는 데 공동을 참여함으로써 창조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간성에 대한 동의나 합의는 결코 한편이 다른 편을 지배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방된 만남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로티는 자유주의적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생활세계가 그것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공적인 영역과 조화할 수 있는 하나의 방도를 찾았다. 인식론적으로 볼 때 로티는 이런 방식으로 실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진리라는 개념 혹은 우리에게 이미 객관적으로 검증된 진리가 따로 있다는 진리의 개념이 자유롭고 개방된 만남의 과정에서 믿게 된 진리의 개념으로 점차로 대체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로티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우리의 개념에서 수도계적인 것과 세속계적인 것의 차이에 상당 부분 상응한다. 그는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계적인 논리와 사회적 과정의 유지와 발전에 목적을 두는 세속계적인 논리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에서의 교육과 후자에서의 사회화를 엄격히 구분한다. 우리의 관심은 그 양대 세계의 조화나 통합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수도계적인 세계 내에서의 인간들의 유대이다. 그것이 바로 교육적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수도계적인 품위는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선진과 후진 간에는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품위의 발생적 계열을 고려한다면 그들 간에는 불가분의 연속성이 있다. 교육은 바로 그 발생적 연속성을 존중하고 선진과 후진이 교육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서로 간의 품위차이를 심열성복적으로 입증하는 장치라는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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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교화의 철학 가운데 신과학철학에 교육의 심열성복적 조건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신과학철학에서 가장 급진적인 측면은 지식의 우위를 증명함에 있어서 설득, 선전, 개종이 필요하다는 쿤이나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발언은 항상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용어의 의미상 기만의 요소가 포함되는 통제 혹은 강제의 형태로도 해석될 수 있는 개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종전의 철학자들에게는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인 입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말을 쓸 때 회유, 협박, 공갈 같은 강요와 눈에 보이지 않은 기만 등이 포함된 의미라면 그것들을 진리판정의 기준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쿤과 파이어아벤트가 이런 과격한 발언을 하게 된 것은 과학자 자신들의 형태적 변화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뿐, 그것에 있어서 절차상의 제약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설득이 반드시 이미지를 조작하여 타인을 조종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평등한 사람들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논쟁을 포함하며, 거기서 그들은 서로 의견을 해명하고 검토하고 순화시킬 수도 있다. 쿤(1970)은 그가 말하는 개종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풀기 위해서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충성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경험(conversion experience)이다(p.151)”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패러다임 혹은 지식에 대한 충성은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되 그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말썽의 소지는 쿤이 ‘강제될 수 없는 개종경험’에 대하여 구체적인 제안을 명시하지 않은 데서 일어난다. 개종이라는 말은 강제라는 말을 다소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인용문은 서로 모순된 말을 병립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조차 준다. 이 때문에 과학철학에서 강요되지 않는 입장의 전환에 관한 취지는 쿤의 관점에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든 라우든(1984)과 툴민(1970)에 의해서 더욱 분명하게 시사되었다. 전자는 앞서는 지식과 뒤진 지식 간의 선호된 가치의 점진적인 전환을, 그리고 후자는 ‘이유 있는 설득과 설복’을 지적했다. 그것이 바로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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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말하는 교육적 증득에 속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람직한 경험의 공유로서의 교육에는 개념상 강요의 요소가 포함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과학철학자인 폴라니는 지식의 정당화가 발견과 설득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더욱 우리가 말하는 교육의 맥락에 접근한다. 그가 말하는 발견적 열정과 설득적 열정은 우리가 말하는 순수한 내재적 감정을 의미한다. 그는 이런 열정을 수반하지 않는 지식을 그가 말하는 인격적 지식에서 제외하고, 지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내재적 감정을 동반하며 그것을 공유함으로써 서로가 높은 수준의 인간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암묵적 지식(1958)>에서 이를 공환성(conviviality)이라는 특수한 개념으로 포착한다. 개개인이 서로 가치있는 것을 상구하고 하화하는 시간이 바로 공환의 순간이며,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하고 지지하는 제도를 포함하고 있는 사회가 곧 공환하는 공동체이다.
지적 열정을 조장하고 만족시키는 절도있는 체계들(articulate systems)은 그런 열정에 의해서 확인된 가치를 존중하는 사회의 지지와 함께 할 때에만 존속할 수 있다. 한 사회는 그것이 이런 열정의 개발을 지지하는 의무를 인지하고 수행하는 정도로만 문화적 생활을 갖는다. 과학이나 혹은 기술과 수학의 추구에 의한 지식의 진보와 보급이 문화적 생활의 한 부분을 형성하기 때문에, 이런 절도있는 체계들이 이해되며 품질을 인정받으며 더 나아가 사실적 진리의 형성과 확인에 보편적으로 지지하는 암묵적 계수들이 역시 한 공동체에서 공유되는 문화적 삶의 계수들이다(p.203).
여기서 폴라니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진정 그가 말하는 발견적 열정과 설득적 열정을 가질 만한 암묵적 지식이 있고 그것이 교육에 의해서 널리 공유될 수 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암묵적 지식은 그것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보람차고 가치있는 것이다. 진리란 바로 그런 가치를 대변하는 내재적 가치의 하나이다. 그런 가치들이 바로 교육에 의해 발견되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소통되고 공유되는 것이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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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있어서 문화적인 삶이다. 이런 공동체는 이처럼 서로의 개선을 통해서 그 가치의 보편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암묵적 계수들에 의해서 그 질이 결정된다. 그 계수들이 높을수록 구성원들은 공환성, 즉 서로의 유쾌한 감정과 안녕으로 결속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과학, 예술, 도덕의 가치가 가지고 있는 타당성은 바로 이런 공환성을 전제로 검증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개념으로 볼 때 바로 교육이 수도계적 가치를 공유하는 방식과 전적으로 상응한다. 후진이 선진의 품위에 일치할 때 그 일치는 단지 권위에의 맹목적 복종, 전체주의적 전제, 강요나 강제, 혹은 객관성의 횡포가 아니라 이런 열정의 화합과 화답의 결정체이어야만 한다.